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鼎足山城)내에 있는 사찰. 경기도 강화
군 화도면에는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니산이 있고 이 산의 한 줄기는 서쪽으
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
이다. 전등사는 바로 이 정족산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1977년에 복원된 삼랑
성의 남문이 현재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傳燈本末寺誌}에 전등사창건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제 1편 1장의 전등사지에 의하면 이절이 본래 고구려 소수림왕11년(38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진종사라 이름붙였다하고, 그뒤 고려 원종7년(1266)에 사승(寺僧)이 이절을 다시 창건하였다한다. 그러나 강화도가 고구려영토가 되는것은 소수림왕11년보다 거의 1백년이 지난뒤인 장수왕63년(475)의 일이다.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오지도 않았는데(384년에 전해옴) 백제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졌다는것은 아마 후세인이 잘못 윤색해놓은 허구일것이다. 다만 원종7년(1266)의 중창기사는 믿을만하다고 보아지며 {동국여지승람}권12, 강화 전등사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19년, 즉 충렬왕8년(1282)에 충렬왕 원비(元妃) 정화궁주(貞和宮主) 왕(王)씨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바다를 건너 송(宋)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이절에 보관하게했다는것이다. 그리고 {江華府志}에서는 부처님앞에 불을 밝히는 옥등잔도 역시 정화궁주가 보시(布施)한것이라고 했는데 {전등본말사지}에서는 옥등잔을 헌납함으로써 절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사액(賜額)하였다고 일컫고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년)과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광해군 6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년)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으며, 1719년 이 절의 최고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년) 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정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5칸에 불과하였으나, 1828년(순조 28년)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 - 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년)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展)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년) 규영(奎榮)등
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
(고종 8년)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
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
였으며, 1876년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 영
담(映潭)이 관음암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撑)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으며,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
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이 이
절에 전래되어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쳤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서 강화, 개성 등 6개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
다. 초대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
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뭉당 30여칸을 수리하고, 식당 26탄의 기와를 바꾸
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
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 강설당, 대조루, 명부전, 극락암 등
을 중건하였으며, 8대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傳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
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이 절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이 산지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출입문을 들어
서면 바로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서있고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오르면 북쪽으
로 대조루에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
웅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 명부전, 삼성각, 향로각, 적묵당, 강설당, 범
종각 등이 있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으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살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
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고, 1884년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다. 이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脩僧)이 거처하는 곳으로
현재는 주지실로 대용되고 있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범종과 법화경판이 있다. 범종은 우리나라 종과
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종으로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에
빼앗겼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
다. 또한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 였으나, 1매는 6.25사변
때 파주의 모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
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1호인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瑄源譜閣), 장사각(藏史閣),
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년 이래로 은행이 한톨도 열
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 전등사대웅전(大雄殿)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 경내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물. 정
면 3칸, 측면 3칸의 겹쳐마 팔작기와 지붕건물. 보물 제178호.
1916년 12월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 윤2월 7일 서까래를 놓았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중기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 건물의 기단은 지형에
따라 전면과 동측이 높고 후면과 서측은 낮은 자연석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높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원기둥을 세웠으며, 창방으로 기둥 윗몸을 결구
하여 그 위에 평방을 놓았다.
처마 곡선이 잘 처리되어 매우 소박하고 아담하다. 초석은 부근의 산석을 사용
하여 주좌부분만 평탄하도록 다듬었다. 기둥은 고식의 배흘림이며 건물의 정면에
는 모두 삼분합의 궁창판 있는 빗살문을 달았는데 두 짝을 열어 겹쳐 들어 올려
부연 평고대에 내린 들쇠에 걸리도록 되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고,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우선 부처님법을 펴는 법당의 한자락이라도 거들고 싶다는 발원에서 추녀를 받치고 있다는 설화가 있고, 다음으로 광해군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두었는데 공사가 끝날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고 이에 도편수가 화가나서 그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있게 하였으니, 불경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고 전해지는 설화도 있다. 또 비슷한 이야기로, 도편수의 순수한 애정을 배반한 여인의 벌받는 모양이라고도하나 이 전설은 {고려사} [열전]의 제2의 충렬왕 제국대장공주전에 의하면 충렬왕과 원나라공주인 제국공주가 정화궁주와 태자를 쫓아내고 투기,탐음을 벌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고려민심이 저주하여 이런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1916년 해체수리시 묵서명(墨書銘)이 나왔는데, 이에 따르면 1605년에 일부 불타고 1614년에 다시 불이나 전소되었다. 1621년에 재건하는 공사가 완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 179호. 대웅전과 거의 비슷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이다. 언제 지었는지는 알수 없고 대웅전과 함께 중수되었을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형태는 방형이고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된 작은 불전이다. 막돌허튼층쌓기를 한 석축위에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는데, 이 기단은 전면이 모두 계단형식으로 되어있다. 기단위에는 막돌초석을 놓고 약하게 배흘림을 준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기둥위에는 물론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놓은 다포식이나, 다포식건축물에서는 일반적으로 창방(昌枋)위에 평방(平枋)을 놓고 그 위에 공포를 놓는데, 여기서는 평방이 없이 창방위에 공포를 얹은 것이 주심포양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기둥과 기둥사이에 있는 공간포(空間包)도 정면의 주간(柱間)에만 하나씩 놓여 다포식을 이루고 있을뿐, 양측면과 뒷면에는 공간포가 없는 주심포를 따르고 있어 절충적인 공포양식을 보여준다. 다포양식이면서 다포같지 않은 주심포계의 양식으로 절충한 형태라고 할수 있는데 이때문에 학문적 논란도 있다.
건물안에는 고려말기의 것으로 보이는 석조약사여래상이 있다. 1932년에 대웅전과 함께 중수되고, 1939년 10월에는 학문적인 조명을 받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68년에 또 한차례 중수공사가 시행되었다.
* 전등사 범종(梵鐘)
보물 제 393호. 전체적인 형태에서 중국종의 특징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는 철종이다. 종의 정상에는 좌우에 쌍용(雙龍)이 한몸으로 등을 지고 웅크려서 꼭지를 이룰뿐 우리나라 동종에서 보이는 몸통은 없다. 이 철종은 형태가 장중하고 조각이 웅경하며 소리도 청아하다. 전체적인 형태에서 개성 연복사종(演福寺鐘)을 연상하게 하는 중국종의 특징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종에는 시주인·동역인(董役人)·장인(匠人)등의 성명이 양주되어 있는데, 그중 하단의 곽안에 '大宋懷州修武縣 百巖山崇明寺 紹聖丁丑歲 丙戌念三日鑄 鐘一顆'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 명문에 의하면 중국 하남성 회경부 수무현 소재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점과 주종연대가 북송의 철종소성 4년, 즉 고려 숙종2년(1097)임을 알수 있다. 원래 이종이 어떠한 경위로 전등사에 전하게 되었는지 알수 없으나 일제 말기 금속류의 강제수탈시 빼앗겼다가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어느 불교신도에 의해 다시 전등사에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되어 온것이라 한다.
(2) 정족산성(鼎足山城,三郞城)
정족산성은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있는 둘레 약1000m의 성이다. 축성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며, 다만 단군의 세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고하며, 일명 '정족산성'이라고 도 한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성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축하여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과 같이 삼국시대의 석성구조를 보이고있다. 1259년(고종46)5월에 고려 고종은 中郞將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假闕)을 지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606년(선조39)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조선왕조시록을 보존해오다가 1660(현종1)년 삼랑성내이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이 같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삼랑성은 고려시대때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739년(영조15)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1764년 다시 성을 중수하였고,조선말기에도 계속적인 보수가 있었다. 이 산성은 1866년(고종3)의 병인양요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하려던 160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당시 프랑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梁憲洙)의 승전비가 있고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문루를 세워서 예전대로 종해루하는 현판을 달았다. 특히 삼랑성은 마니산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다.
(3) 초지진(草芝鎭)
1716년(숙종42) 강화해안을 지키기위하여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설치된 진(鎭)으로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때 이들과 맞서 싸운 전적지이다.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이 돈의 축조는 1679년에 함경도·강원도·황해도의 승군(僧軍) 8000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을 동원하여 40일간에 50개돈을 축성할때 이루어진것이다.
1871년(고종8) 6월10일 함포지원아래 미국해병 450명이 초지진에 상륙,침략해오자 초지진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결국 미군에 점령당하였다. 이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火藥庫)·진사(鎭舍)등 군사시설물은 미군에 의하여 모조리 파괴되었으며,포대에 남아있던 40여문의 대포 역시 파괴되거나 그들에 의해 강화해협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875년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위하여 파견한 雲揚號에 의해 또 한번 곤욕을 치렀다. 같은 해 8월21일 운양호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부근에 정박하고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포대에 접근하여왔다. 이에 미군의 침략으로 쓰라린 경험을 하였던 초지진수비군이 일본함정을 향하여 포격을 개시하자 운양호는 110mm와 40mm함포로 포격을 해와 초지진포대는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m의 2인치정도의 대완구가 있었을뿐이다. 그뒤 초지진은 폐진(廢鎭)되었고, 시설은 모두 허물어져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개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대포1문이 포각(砲閣)속에 전시되어 있으며 지금도 성체와 돈옆의 소나무에는 전투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남아있어 당시 미국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주고있다.
(4) 광성보(廣城堡)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으며 강화12진보(鎭堡)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자연지형이 염하어귀를 지키는 천험한 요새로 되어있기때문에 일찌기 고려외성의 중요한 요새구실을 했다. 광성보는 강화에 여러진이 설치되기 시작한 효종7(1656)년에 설치되었는데,1679년에 축조된 오두(鰲頭)·화조(花鳥)·광성등 3돈대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광해군때인 1618년에 강화외성을 수축했고 18세기에는 석성으로 개축했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슬러올라오는것을 광성·초지·덕진·덕포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23일에 450명의 미국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군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이하 전장병은 열세한 부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조선군의 전사자는 성내에서 100명,성외에서 100명이었고, 포로된자가 20여명이었다. 반면 미군은 전사자 3명·부상자10여명이었으니 무기의 열세가 어떠했을지 알수있다.
광성보에는 안해루(按海樓)라는 문루가 있었는데 신미양요때 전화를 입어 없어진것을 광성돈과 함께 1976년에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정비하였다.
(5) 고려궁지(高麗宮址)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궁궐터로 사적 133호로 지정되어있다. 이곳은 고려가 몽고군의 침략에 대항하기위하여 도읍을 송도(松都)에서 강화로 옮기는 1232년(고종19)부터 다시 환도하는 1270년(원종11)까지 39년긴 사용되던 고려궁궐터이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는 1232년 6월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한다. 이 궁궐은 고종21년(1234)에 완성되었고, 본궁인 연경궁을 비롯하여 정궁(正宮)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등 14개의 작은 많은 궁궐건물들이 만들어졌었는데 원종11년(1270) 5월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에는 궁궐과 성의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불타없어졌다.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도 국난시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하여 1631년(인조9) 고려 옛궁터내 행궁을 건립하였다. 전각과 강화유수부·규장외각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고 현재 관아건문인 명위헌(明威軒)·이방청(吏房廳)등이 남아있다. 1976년 출입문으로 삼문을 세우고 석담을 돌렸다.
고려때 궁의 건물로는 연경궁을 본궁으로 동북쪽 언덕위에 강안전이 있었고, 경영궁이 소동문안 성마루터 북쪽에, 건덕전이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그 동쪽에 장령전이, 뒤쪽에 만령전이 있었으며 태묘전답으로 북창문밖 대묘동에 대관전과 신격전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는 모두 없어져 그 위치가 어딘지 알 길이 없다. 이궁으로는 제포궁과 사신 영접을 위한 풍포관이 있고 흥왕이궁을 고종 46년(1259)에 세웠으며 그해 전등사 뒤에 삼랑성가궐을 세웠고, 원종 1년(1260)에 신니동가궐을 세웠으며 정족산가궐과 고려가궐도 금월리에 세웠다 한다.
고려시대의 흔적은 당시의 기와쪽이 축대에 묻혀있을뿐 찾아볼수가 없고 게다가 담밖 원래의 고려궁터 일부로 추정되는 대지에 강화군이 군립도서관을 신축하고 있는 중이다.
* 강화동종
1711년 조선 숙종때 만들어진 종으로서 높이는 186.5cm,밑지름 141cm,두께가 15cm안 커다란 종이다. 강화서문을 열고 닫는데 사용한 종으로 강화서남문 문루에 걸려있었는데 프랑스군이 쳐들어왔을때 이 종을 실어가려다가 너무 무거워서 포기하고 버리고 갔다고 한다. 가운데에 두껍게 가로띠를 두르고 있고 조선시대에 종들처럼 간결하다. 원래 김상용 비각 자리옆에 있던것을 현재는 고려궁지에 보관하고 있다.
* 강화유수부동헌(江華留守府東軒)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건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7호. 건물이 있는 터는 고려 고종 때에 임시수도로 궁궐이 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 유수부의 동헌을 지었다. 당초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현재의 건물은 1638년(인조 16)에 개수한 것이며 그뒤 퇴락한 것을 1977년 복원수리하였다. 관호는 "현윤관(顯允館)"이라 하였으며 일면 명위헌(明威軒)이라고도 하였다. 명위헌 현판은 윤순(尹淳)이 쓴 것인데 지금도 걸려 있다. 정면 8칸,측면 3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 기와지붕의 익공집으로 2중 장대석으로 조성된 기단 위에 네모꼴로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화반없이 간단한 형태의 초익공으로 되어있으며 내부 가구(架構)는 2고주 7량으로 되었다.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있고,동쪽 한칸에는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정면은 모두 사분합의 세살문을 달았다. 동헌 서쪽에는 높은 석축으로 단을 조성한 고려 궁궐터로 전하는 건물터가 있고, 그 앞 낮은 곳에 이방청 건물이 있다.
* 강화유수부이방청(江華留守府吏房廳)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건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48호. 한식 목조 단층 기와집으로 ㄷ자형인데 온돌방이 8칸이고 우물마루로 된 청마루가 12칸이며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이다. 팔작지붕에 민도리 홀처마로 건평은 220m2쯤 된다. 원래 강화유수부 안에 있던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등 육방 중의 하나인 이방청으로 지금의 건물은 1654년(효종 5년)에 유수 정세규(鄭世規)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하던 것을 1783(정조 7년) 유수 김노진(金魯鎭)이 중수하였으며, 한때 주홀당(柱笏堂)이라 하였다. 그뒤에도 여러차례 개수를 거듭, 지금은 옛날 관아의 원형을 찾아볼 수 없으나,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이방청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곳 이방청에서는 법전(法典)·군무를 제외한 모든 크고 작은 사무를 전관하였다. 일제시대부터 강화등기소로 사용하다가 1975년 수리 복원했다.
(6) 용흥궁(龍興宮)
철종이 19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이다. 강화읍 관청리 441번
지 내수골에 있다. 원래는 민가였던 모양이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철종 4
년(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기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
이라 했다. 고종 광무 7년(1903년)에 청안군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 구기 기념비각 1동
등이다. 이들 건물들은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1974년에 일대 보수
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전은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제곱 미
터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미터, 넓이는 약 6제곱 미터
이다. 좁은 고샅 안에 행랑체를 둔 이중의 건물은 서울 창덕궁의 연경당이나 낙
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영되어 소박한 기풍을 느끼게 한다.
(7) 성공회 강화 성당
강화읍 관청리 250번지에 있다. 1890년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전
파된 뒤 영국인 왕남도 신부가 갑곶에서 회당 겸 사택을 매입하고 전도를 시작하
였다. 그 뒤 왕 신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1896년 조마가 신부가 부임하여 강화
읍에서 김마가(희준)를 전도했다. 1897년에는 영화원이라는 보육원을 개설하고
서양 의술로 많은 환자를 돌보았으며 1900년에 현재의 한식 중층 건물을 완공했
다.
영국 성공회는 처음 포교 단계부터 교리나 예배 의식, 신앙의 상징물 등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를 되도록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노력은 강화성당을
지을 때에도 크게 반영되어 이 성당은 전통적인 한식 건축의 재료나 구조 기법을
유지하면서 성당의 기능을 잘 살린 한식과 양식이 절충된 대표적인 건물로 꼽힌
다. 관청리 용흥궁 뒷길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정문으로 재래식 솟을 대문인 삼
문이 있고 바로 그 뒤에 한식으로 된 전면 4칸, 측면 15칸의 장방형 중층 기와지
붕의 본당 건물이 있다. 2층은 정면 2칸, 측면 13칸으로 지형 조건과 잘 어울리
는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바로 아래에 있는 철종의 생가인 용흥궁과도 잘 어
우러져 다른 서양종교건물과는 달리 전래의 관습과 마찰하지 않고 적응하려고 한
흔적이 돋보인다.
(8) 연무당(鍊武堂)터
진무영의 열무당(閱武堂)이 좁아 고종7년(1870)에 세운것으로 신열무당이라고도 한다. 그뒤 동소문밖으로 옮겼는데 속칭 동교장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강화중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서문안으로 옮긴뒤에는 이 연무당에서 1876년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1977년에 역사를 반성해 볼수있는 현장으로 만든다는 취지하에 옛연무당터를 정비하여 잘 다듬어진 잔디밭안에 자주의식을 드높여야한다는 경고비를 세웠다.
(9) 강화 고인돌 무덤[江華支石墓]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사적 137호.
송해면과 하점면의 경계지점에서 왼쪽으로 가면 삼거리,신삼리 쪽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계속 가면 강화-외포리간 지방도가 나오는데 이 지방도를 따라 500m 정도 더 가면 고려산 북쪽 봉우리인 시루메봉의 능선이 뻗어내리고 지방도가 이 능선의 끝자락부분을 가로지른다. 바로 이 끝자락 부분의 능선에 '강화 고인돌 무덤'이 있다. 능선의 자락에 마련된 대지는 해발 약 20m에서 30m정도의 높이에 위치한다.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운 철책은 사방 12m에 불과하지만 원래 대지는 아마 지금보다 더 넓은 면적으로 그곳을 황토흙으로 수십층 다진 뒤 고인돌 무덤을 세웠을 것이라 추측된다. 지금은 2개만 남아 있는 굄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굄돌의 긴 축을 동북 방향(60도)으로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렸다. 지금까지 발견된 탁상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하는 것으로 덮개돌의 크기가 긴 축(서쪽)의 길이 6.50m,너비 5.20m,두께 1.2m,전체 높이는 2.6m이다. (『강화 고인돌 무덤[지석묘]조사 연구』,1992)
그러나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사적편'(上,24쪽,1975) 설명문에는 덮개돌 긴축의 길이는 7.10m,너비 5.5m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실제와는 각각 60cm와 30cm의 큰 차이가 나는 셈이다. 굄돌을 좌우에 세우고 한쪽 끝에는 마감하기 위한 판석을 세워 묘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뒤 다른 한쪽을 마저 마감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양끝의 마감돌은 없어지고 좌우의 굄돌만 남아있어 석실 내부가 마치 긴 통로를 연상케 한다.
굄돌이나 덮개돌의 석재는 강화에서 흔히 보이는 흑운모편마암이고 방향은 동북60°방향이다. 동서 굄돌이 세워진 각도는 각각 약 70°인데 이 기울기가 원래 공법이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기울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 보아 70°기울기를 갖춘 돌기둥에 약 50톤으로 추정되는 대형 판석을 얹은 역학구조가 불가사의하다.
사적 137호 고인돌 무덤을 중심으로 서남쪽 150m 지점의 은행나무 묘표 안에는 대형 고인돌 무덤의 굄돌 하나가 은행나무 숲에 가려져 있다. 이 돌의 크기는 사적 137호 무덤에 버금간다. 돌이 놓인 방향과 동쪽으로 기운 각도 및 돌의 질(화강편마암)도 사적 137호와 일치한다. 이로보아 이곳에도 137호 탁상식 고인돌 무덤과 비슷한 크기의 고인돌 무덤이 하나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표면조사가 이루어졌을 뿐 학술적인 발굴조사는 행해지지 않은 유적이고 이 고인돌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파괴된 고인돌이 있는데, 굄돌은 없어지고 판석의 뚜껑만 수직으로 엎어진 채 남아있다. 이밖에도 강화도에는 삼거리·하도리 등지에 10기정도가 남아있어서 부근리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사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10) 강화하점면석조여래입상(江華河岾面石造如來立像)
경기도 강화군 장정리 봉천산 아래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 높이 2.82m. 보물 제 615호. 두꺼운 화강암의 판석에 조각된 여래입상으로, 현재는 전각(殿閣)을 만들어 그 안에 봉안하고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둥근 육계(肉계)와 함께 중간에 중앙계주(中央계珠)가 표현되어 있는데, 둥글넙적하고 살이 오른 얼굴에 바로 뜬 눈, 두꺼운 입술, 짧은 인중의 표현, 턱의 군살 등이 둔감하게 느껴진다. 또, 비사실적인 큰 귀라든가 목이 짧아 가슴에 형식적으로 묘사된 삼도(三道)의 표현 등이 좁고 위축된 듯한 둥근 어깨와 함께 신체를 더욱 평판적이고 움츠려 보이게 한다. 두꺼운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깊게 선각(線刻)된 옷주름이 가슴부근에서 반전(反轉)되어 U자형으로 흘러내려 발까지 덮고 있어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해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의 형태를 취한 것처럼 보인다. 배[舟] 모양의 거신광배(擧身光背)에는 전체적으로 도안화된 장식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안에는 따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아래위로 표현되어 있는데, 테두리는 두 줄의 철선(凸線)으로 구획하고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주위에는 불꽃무늬를 둘렀다. 판석에 조각된만큼 평판적이고 선각화된 경향을 나타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모든 면에서 단순화,생략화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 즉, 머리에 표현된 중앙계주라든가,비만한 얼굴,목이 밭아서 어깨가 올라붙어 결과적으로 움츠린 듯한 자세,형식적이며 간략하게 처리된 옷주름선 등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신체에 비해 머리와 손이 커졌을 뿐 아니라 목이나 두 귀,어깨 등의 세부표현에서도 불균형한 면이 보이고 있으나, 당시의 시대적인 조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불상으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11)강화하점면오층석탑(江華河岾面五層石塔)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에 있는 고려시대 후기의 석탑. 높이 3.5m. 보물 제10호. 강화에 현존하는 석탑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일찍이 쓰러져 파손되었던 것을 1960년에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보수 재건하였는데, 파손이 심하고 없어진 부재도 적지 않아 현재는 3층 이상의 옥신(屋身)과 5층 옥개석, 그리고 상륜부재가 모두 없다. 이 석탑은 구릉위에 세워졌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원래 이 탑이 자리하고 있던 봉은사 절터는 그 둔덕 아래 솔밭이 아닌가 추측된다. 봉은사는 고종 21년(1234)에 왕이 연등행사를 할 만큼 대단한 절이었다.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방형중층(方形重層)의 일반형 석탑으로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면석은 4매석으로 구성되었는데 2면은 우주가 있는 판석이고 다른 2면은 면석만으로 되었고, 탱주(撑柱)는 모각되지 않았다. 갑석(甲石)은 두꺼운 1장의 판석을 덮고 있는데 아랫면에는 부연(副椽)도 없다. 윗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고 중앙에는 1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초층육신이 두개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초층 옥개석 이상은 옥신과 옥개석이 모두 1장씩으로 되었다. 초층 옥신은 크기가 다른 2매석에 큼직한 우주형(隅柱形)이 모각되었다. 2층 옥신은 초층에 비해 높이와 넓이가 급격히 감축되었고, 우주형은 형식적으로 표시되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평박한 편으로,아랫면의 받침은 초층이 4단이고 2층부터 4층까지는 3단으로 줄어들었다. 추녀 밑은 직선이나 네 귀퉁이에 이르러 가볍게 반곡(反曲)을 보였고, 낙수면은 반곡 없이 흘렀으며,전각(轉角)의 반전은 매우 적은 편이다. 2층 이상의 옥개석도 양식은 같으나 크기에 있어서는 체감되었으며, 각 층에 파손이 심하여 전각부는 거의 대부분 깨어져 있다. 상륜부의 부재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석재의 질이 약하고 조각수법도 우수하지는 않다. 탑의 모든 부분이 지나치게 간소한 수법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균형이 안 잡히고 둔중한 감을 준다. 전반적인 축조 방법으로 보아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말로 생각된다.
(12) 갑곶 돈대(甲串墩臺)
조선시대에 축조되었고 성곽길이 140여미터이고 총면적은 1315평이다.
이곳은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그 위치가 바로 육지와 강화를 오가는 길목이 되어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 돈대에 오르면 동쪽으로 바다 건너 김포땅이 가까이 보이고 강화읍이 눈 밑에 들어온다. 바로 밑에는 예전에 강화와 육지를 연결하는 나루터가 있어 요충지로서의 방어시설이 익찍 마련되었다. 이 갑곳 돈대 맞은 편에는 김포의 문수산성이 마주하고 있어 이 두 방어 시설이 강화 해협을 지켰다.
갑곶돈은 숙종5(1679)에 쌓았지만 원래는 1656년 인천에 있던 진을 이곳 갑곶으로 옮기고 제물진이라 했다. 이 진에는 염주돈·제승돈·망해돈이 소속되었고 대포8문이 설치된 갑곶돈대도 있었다. 돈대와 포대역시 1679년에 설치한것이며 어영청과 금위영등이 있었다.
병자호란중에 이 천연의 요새가 함락 당했는데 그 이유는 {택리지}에 의하면
당시 수성 책임자였던 김경징이 "되놈이 감히 이 요새를 건너 올 수 있는가" 하
면서 방비는 하지 않고 술 마시고 놀며 지내었다는 것이다. 당시 청의 장수였던
용골대는 문수산성 위에서 무방비한 강화도 갑곶을 보고 김포와 통진 일대의
민가를 헐어 얻은 목재로 뗏목을 만들어 염하를 건너 공격했다 한다.
그 후 병자호란이 끝나고 효종때 국방력을 강화하기 의하여 이곳에 서울의 외
곽방어 지역으로서 진을 설치하고 돈대를 마련하였다. 돈대는 진보다는 작은 규
모의 보루로서 이 곳에 대포 8문을 배치하고 숙종대에는 작은 성채 모양의 돈대
를 지어 포를 장치한 포대를 축조하였다. 군병 100여명에 포군 24명이 소속되고
군량미 157석에 배 8척까지 마련하여 만전을 기하였다.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
대신 구로다가 6척의 함선을 끌고와서 이곳으로 상륙한 다음 연무당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과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지금의 갑곶돈은 1977년 강화전적지 보수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된곳으로 갑곶진의 일부이다. 이 돈대 남쪽에 갑곶수문이 있었고 강화외성과 연결된다. 1977년 돈대에는 조선시대 대포가 포각속에 전시되어있고, 소포2문도 새로 만들어 설치하였다.
이 갑곶은 병인양요때 프랑스군과의 싸움이 전개되었던곳이었고 지금은 이곳에 '강화역사관'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