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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옥전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전병태
가덕도 유적답사와 등대체험
전 병 태
7월 17일. 강서문화원에서 만난 강서문학회 회원들은 세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강동에서 신항만으로 가는 자동차전용도로를 달리니 금방 웅장한 신항만에 닿았고, 큰 덕을 더 보탠다는 섬 가덕도(加德島)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넜다.
1989년 부산광역시 강서구로 편입된 가덕도는 부산시에서 가장 큰 섬으로 본섬과 연안의 11개 무인도로 이뤄져 면적은 20.78㎢, 해안선길이 36㎞이다. 영도의 1.5배 쯤 된다고 하는데 제일 높은 곳 연대봉(烟臺峰:459.4m)이 푸른 치마를 펼친 것처럼 아름다운 소박한 섬으로 행정구역은 강서구 천가동으로 유인도인 가덕도와 눌차도는 방조제로 서로연결이 되어 있어. 지금은 신항만건설사업과 거가대교건설로 예전에 배로만 건너다니던 조용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여기저기 중장비가 분주하게 작업 중인 곳이 눈에 띄었다.
가덕도의 기록은 고려 의종 때 언급되었고,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을 시작으로 왜구침략의 역사 현장으로 등장하였다는데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에 가덕도 근해에서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 통제사 원균이 왜군의 해로(海路)를 끊기 위하여 전선(戰船) 90여 척을 이끌고 가덕도에 이르렀다가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기습을 받고 패하였다 한다. 김해의 보배산이 바다가운데 침몰 되었다가 다시 솟아서 이루어졌다는 전설이 있고, 더덕이 많이 나와 가덕도라고 부른다는 설도 전한다.
가덕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 좌회전하여 가덕진성으로 갔다. 고려 중종 16년(1544년) 사량진에 왜구가 노략질을 하자 이곳에 가덕진을 설치하고 수군절제사가 주둔하여 섬을 지키고 백성을 보살피던 곳으로 천가동사무소와 천가초등학교, 덕문중학교와 민가 쪽으로 이어진 석성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졌다는데 학교 울타리와 밭둑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흔적이 없어진 부분도 많아서 문화재 보호의 안타까움을 새삼 느꼈다.
특히 덕문중학교의 운동장에는 조선시대 칼과 창, 화촉 등을 만들던 병기공장과 병기창고로 조선 말기까지 50여 평의 곳집 2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우리는 조상들의 무지를 탓하며 성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두었다.
천가초등학교 안에 있는 유적들도 돌아보았다. 가덕도 척화비(부산기념물 35)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신미년(1871년)에 세워진 것으로 가덕포구(지금의 선창)에 있던 것을 옳긴 것이라 한다. 크기는 1.28⨯1.45⨯0.16m 인데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我戒萬年子孫(양이침범 비전칙화 주화매국 아계만년자손 : 서양 오랑케가 침범하여 오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으로 화친을 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나의 자손만대에 깨우쳐 주라)」이라는 포고령으로 우리나라 변방 여러 곳에 세워져 있는데 2003년 부산시문화재기념물 35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옛날 비석임을 금방 알 수 있는 절제사들의 공덕비도 여러 기가 있어서 살펴보고 나오면서 교문 안에 있는 암나무와 수나무의 큰 은행나무 밑에서 염천 뙤약볕을 피하여 잠시 쉬고 있을 때, 정시인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암은행나무가 건너편 은행나무보다 작은 것을 보고 “아마 이 나무는 재취로 들어온 부인일 것 같다.”고 하여 모두들 시인의 예리한 눈과 상상력을 보라면서 웃었다.
가덕진성의 북쪽에 있는 성북왜성은 해발 155m의 갈마봉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있다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가이드를 맡은 박시인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박시인은“성북왜성은 고려시대의 축조방식과 같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점령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여 왜성으로 추정하고, 지금도 꼭대기에는 석축으로 된 관망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고 하였다.
두문리를 지날 때 박시인은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확인되며 이곳에 있는 지석묘(支石墓)는 가덕도에 있는 유일한 고인돌로 족장의 묘로 추정하는데 사유지에 있어서 촬영이나 취재가 어렵다면서 그냥 지나서 천성리에서 차를 세웠다.
천성리 마을에서 산기슬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작은 밭들이 돌무더기를 경계로 하여 각종 채소가 자라고 있었는데 이곳이 천성진성(天城鎭城:부산기념물 34)이라 하였다. 이곳은 일본에서 오는 배들이 마산과 진해로 들어가는 통로로 중종 13년에(1544년) 왜변이 일어났을 때 방어의 목적으로 축성된 것인데 둘레가 950m라고 하나 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란 밭둑을 걸어서 융성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 걷는 길이 험하여 돌아 볼 수가 없어서 “왜구의 가덕도 상륙을 막기 위해 만든 천성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 수군이 안골포에 정박해 있는 왜군 함대를 공격할 때 후방을 지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박시인의 해설을 듣고 이충무공전적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내려오면서 충무공의 지략을 상상하면서 이순신장군의 시조를 외워보았다.
십 년 가온 칼이 갑리에 우노매라.
관산을 바라보며 때때로 만져 보니
장부의 위국 공훈을 어느 때에 드리올고.
대항마을에서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 외항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일본군사령부 발상지로 그때 건물 여러 동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다. 여기는 국방부 소유로 신축과 개축을 할 수 없어서 비가 새는 지붕만 고쳐 산다고 주민들의 원성이 높다는데 일본군의 막사로 사용하였던 건축물들은 생활에 편리하게 조금 개조되었으나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올린 흔적이 있는 우물터는 9곳이나 있었다. 그 때에 견치식(犬齒式)으로 돌로 쌓아 만든 수로(水路)는 아직도 건재하여 100년을 내다보는 일본인들을 안전성은 본받아야 할 것이나 우리 조상들 고난의 역사가 그대로 보였다.
마을에서 산 쪽으로 500m 쯤에 있는 일본군 포진지를 답사하였다. 이곳은 6문의 곡사포가 거치되었던 포진지와 50cm 뚜께는 될 것 같은 2곳의 콘크리트탄약고가 당시의 화력을 말해 주는 듯이 대체로 잘 보존되고 있었는데 정시인은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방치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흥분하시기에 내가 “이건 일본 문화재 입니다. 우리 문화가 아니므로 등록은 어려울 것 같고, 보존을 잘하여 안보교육장으로 삼아 정신을 무장하여 다시는 일제 36년의 치욕과 같은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주방과 내무반으로 사용하였다는 곳은 출입문은 없었으나 그런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다. 내무반은 온돌을 사용했던 흔적이 있어서 역시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우리문화가 일본보다는 한수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 외항포는 재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가족이 용원에서 하루에 3번 다닌다는 배를 타고 와서 해변에서 고기를 굽어먹으며 4시간동안 즐겁게 놀다가 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해변에 큰 소나무가 방풍림으로 늘어서 있어서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무척 진한 감동을 받았는데 태풍 매미로 모두 쓰러졌다고 하여 안타까웠다. 해변의 몽돌밭을 걸으면서 처음에는 못생긴 돌이었으나 파도에 쉴 새 없이 자신을 다듬어서 아름답게 변한 몽돌에 나의 삶과 시조를 비취보고 채워지지 못하는 부분을 몽돌처럼 다듬고 싶은 욕심으로 지은 시조 ‘몽돌밭에서’를 외워보았다.
얼마나 더 갈아야 각(角)이지고 둥글는지 /
날마다 뒹굴어도 / 모가 퍼런 나의 인생 //
온몸을 / 파도에 던져/ 깨어지고 부셔볼까.
짠물에 푹 삭이면 흑진주 빛이 나고
살을 깎아 문지르면 / 저렇게 탐이 날까 //
해조음 / 푸른 가락에 / 춤추면서 살고프다.
다시 차를 타고 경사가 심한 시멘트포장길을 올라 산 능성에 닿자 군부대통제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군사시설 지역으로 사진촬영금지 푯말이 붙어 있었고, 큰 개와 무장을 한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에 도착하였다. 초병에게 방문목적은 등대체험으로 인원수와 차량번호 등을 확인받고 통과하니 짙푸른 녹음사이를 파도치는 것 같은 좁은 비포장 산길은 요즘 내린 잦은 장마로 웅덩이가 깊게 파여 물을 멀리 튀기는가 하면 연방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여 매미가 목 놓아 울어대는 가덕도 자생동백군(부산기념물 36)을 내다볼 틈조차 주지 않았다.
언덕을 3개쯤 넘어서 17시 50분, 등대가 보이는 검문소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는 주민등록증과 방문증을 교환하고 군부대 내에서의 행동요령과 보안에 협조하겠다는 서약서를 적은 후에야 통과하였는데 군인들이 사용하는 건물을 돌아 남쪽 끝의 동두말(東頭末)에 있는 가덕도 등대 주차장에 도착 하자 가덕도항만표지소 당직이라는 강성환씨가 마중을 나오셨다.
강성환씨는 “이곳은 부산시 강서구 대항동 산 13-2번지 가덕도항만표지소입니다. 오시는 길이 험하여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등대 체험은 내일하기로 하고 우선 묵을 시설을 안내하겠습니다.”라고 한 후 널찍한 남자숙소와 여자숙소를 안내하면서 40여 명은 묵을 수 있다고 하였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비품과 이불장, 화장실 등은 좋은 숙박업소를 옮겨놓은 것 같아서 모두들 좋아하였다.
우리들은 우선 짐을 풀고 지하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 준비하여 온 쌀로 밥을 짓고, 고기를 굽고 끓이며 식사준비를 하여 낯선 곳에서 하는 오랜만의 만찬을 시작하였다. 강성환씨는 내가 준비하여 온 당귀잎사귀에 삼겹살을 싸면서 처음 먹어 보는데 향이 진하여 맛있다고 하였다.
식사 후 해풍에 더위를 말끔히 식히고 숙소 이층의 세미나실에서 강서문학회의 발전방안에 대하여 의논을 한 후 박시인의 트럼벳 연주가 이어졌는데 구슬픈 옛노래 가락은 파도를 타고 멀리 떠나가는 배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떠나는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 모두를 울리는 것 같았다.
7월 18일. 아침 장엄한 일출을 카메라에 담을 생각으로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물안개가 너무 짙어서 촬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옛날등대 주위를 돌아보았다. 전체가 하얀색으로 멋스럽게 지어진 옛날등대는 구한말 건축양식의 원형이 그대를 고스란히 남아있다는데 우리나라의 등대는 1903년 인천 팔미도등대를 시작으로 일제의 침략 야욕을 위하여 하나둘 씩 생겨났다고 한다.
1909년 12월 25일.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가덕도 등대는 건평 105.6m²로 등탑이 9.2m 높이로 세워서 당시로는 웅장한 외관을 자랑하였다는데 외세 열강의 침탈이 더욱 노골화 된 시기의 건축물로 2003년 9월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으며 해양수산부에서도 영구보존 시설로 지정해 원형을 보존한단다. ‘서구식 건축양식과 건축재료, 의장수법 등이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등탑은 당시에 건립된 여러 등대들이 대부분 원형이 크게 훼손된 데 비해 가덕도등대는 상당 부분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서 역사적, 건축사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짙은 안개로 감춰진 등대에서는 뚜우- 하는 경적이 연달아 울리고 있었는데 불빛으로 항로를 알리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우리에게 안개로 불빛을 보일 수 없을 때는 소리로도 위험신호를 알리는 다른 방법도 있음을 알려 주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본격적인 등대체험을 할 수 있었다. 옛날등대로 들어서면서 강성환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팔미도 등대로 1903년에 세워졌으며, 가덕도 등대는 1909년 12월 83.6㎡ 규모로 지어졌으니 지난해 100살이 되었습니다. 옛날등대 시설은 사무실과 숙소, 등탑이 연결된 복합건물 형태로 붉은 벽돌과 미송을 사용했고 출입구 천정에는 그 당시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장이 새겨져 자주독립을 바라는 조선의 열망이 담겨있으며, 함석으로 된 지붕은 부식방지를 위해 함석 위에 피치타르가 덮혀져 있었다.”고 하면서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실내에는 등대지기가 거쳐하던 온돌방과 아궁이는 부엌, 샤워실로 물을 데우던 통이 있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화장실과 세미나실로 사용한다는 집무실로 안내하였다.
새 등대로 걸어가면서 강성환씨는 “2002년 7월에 새로 지어진 지금의 등대는 팔각으로 된 돌출형이며 등탑높이는 40.5m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등대로 같은 해에 건립된 울산 화암추등대(44.5m)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등대였습니다. 가덕도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자리 잡아 동으로는 다대포, 서남북은 거제도, 동북바다와 북으로는 유라시아와 환태평양의 관문이면서 동북아 허브항만으로 건설한 부산신항과 접하며 진해시 용원동과 거리는 4㎞, 인근의 거제도와의 거리는 10㎞ 정도로 2001년 5월부터 9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대양으로 진출하는 선박을 형상화하며 동북아시아 중추항만으로 도약하는 부산신항만의 역동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하였다.
등탑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하였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오르면서 누군가가 여수 오동도 등대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더라고 하니, 강성환씨는 “우리나라 등대 중 엘리베이터가 있는 등대는 여수 오동도 등대가 유일합니다. 걷게 하여 죄송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인양 머리를 끓으며 몇 계단인가를 헤아려 보기로 약속하였으나 모두들 오르기가 힘겨워서 잊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손시인은 “197계단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여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강성환씨는 가덕도 등대의 등질은 섬백광 12초 1섬광(FIW12s)으로 등탑에서 보내는 빛은 직선거리로 40km를 비추어 대마도가 48km거리에 있으므로 가덕도등대 불빛을 대마도에서 볼 수 있으며, 대마도등대의 불빛도 가덕도등대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맑은 날은 대마도가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바다에는 자욱한 물안개가 낮게 깔려서 육지와 바다도 구분할 수 없었으나 잠시 안개가 걷히는 순간에는 해변의 절벽 바위틈에서 목마름을 참으며 푸름을 자랑하는 작은 소나무를 보고 해금강을 관광할 때 지은 시조 ‘갈도 千年松’을 외워 보았다.
이슬에 목 추기고 안개로 목욕하고
벼랑에서 쪼그리고 세상을 내리 본다
천년을 / 맑고 푸르게 / 하루같이 산다며
태풍에 부대낄 땐 마음을 또 비우고
곧게 내린 뿌리로 한목숨 건졌단다.
살같이 / 아린 세월을 / 무심으로 산다했다.
강성환씨는 구등대 입구에 묻힌 타임캡슐에 관하여 설명하여 주었다. 2002년 7월 준공식에서 새 등대건설의 배경과 공사과정을 담은 기록을 영구보전하기 위해 타임캡슐에 넣어 저장하는 행사를 가졌고, 타임캡슐 개봉일은 2103년 6월 3일, 가덕도 등대 200주년 기념일이라면서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가덕도 등대를 찾아와서 타임캡술의 내용물도 확인하고 추억도 들추어 보시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등대에서 내려와 숙소의 윗층에 있는 ‘가덕도 등대 100주년 기념관’을 견학하였다. 등대의 10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등대유물 전시실’과 섬지역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알아 볼 수 있는 ‘가덕도 생활문화 전시실’에는 등명기(燈明機· 불을 밝힐 때 사용하는 조명등), 어로 기구, 가덕도 민속품 등 자료가 250여 점이나 전시되고 있어서 등대의 발전상과 가덕도 주민의 생활상을 아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사실 나는 등대체험이 처음이 아니다. 부산에서 먼 곳 진주에 살면서 굳이 이번 체험행사에 참석한 것은 지난 92년 여름방학 때 전라도의 가사도등대에서 2박 3일을 보낸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가용도 없던 그때에 버스를 7시간이나 타고 목포로 가서 다시 배로 3시간이 걸려서 그곳까지 간 것은 89년 회사동료들과 홍도를 여행했을 때 홍도 2구마을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출을 보기 위하여 홍도등대로 오른 것이 인연이었다.
홍도등대 등탑으로 오르는 사무실 통로 탁자위에 하얀 꽃을 피운 석곡(홍도의 자생란)의 향기가 너무 짙고 좋아서 똘이엄마가 등대직원에게 한 촉만 달라고 자꾸만 졸랐었는데 그때 직원은“석곡은 원칙으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머니께서 너무 떼를 쓰시니 좋은 향기를 맡으며 맑고 밝게 생활하시라는 뜻으로 드립니다. 재간 것 가지고 가십시오.”라면서 2촉을 주셔서 가져 온 것이 계기가 되어 감사의 편지를 ‘홍도등대 00일 아침에 근무하신 분’앞으로 보냈고, “가볍게 드렸는데 등대생활을 이해하셔서 무료한 나날에 기쁨을 주어 고맙다.”는 답장이 오게 되어 펜팔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동갑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서로의 사생활도 편지로 주고받으며 염려하는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조금은 가까운 당사도로 전근하였다면서 그곳의 절경을 전화로 전하고 다녀가길 몇 번 부탁하였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또, 조금 먼 가사도에서 "오늘은 2m가 넘는 장어를 낚았습니다. 전형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고 소식을 전했을 때 용기를 내어 찾아갔던 것이다.
가사도는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모래보다 더 작은 하얀 흙가루로 만들어진 넓은 백사장은 인적이 없어서 뛰고 놀기가 참 좋았는데 이곳의 방풍림은 단골 영화촬영지로 이름난 곳이라고 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영표가 “엄마 해가 바다에 빠졌어”라고 말할 정도로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붉게 물든 노을은 아직까지 한번 밖에 보지 못한 장관으로 각인되어 있으며, 갯가에서 주워온 조개로 국을 끓어 먹고 두드러기와 발열로 고생하는 재표를 상비약으로 치료하여 주신 등대장님의 지난 30년의 등대이야기와 빗물을 받아서 사용하는 등대직원의 고된 일상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었다. 또 강풍으로 선박운항이 중지되어 항만청의 작은 배를 얻어 타고 해남으로 상륙하여 강진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귀가한 고생과 추억들이 곰삭아서 이번 가덕도등대체험을 유혹한 것 같다.
20일을 근무하고 열흘은 가족이 있는 목포에서 지낸다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생활환경은 많이 좋아진 것으로 보이나 항상 외로움 속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내면서 해난사고를 예방하는 밤과 낮이 없는 등대직원들의 처우는 더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전형 이젠 더는 못하겠습니다.”하는 전화로 오래전에 퇴직을 하고 목포에서 사업을 하는 임월동형에게 낡은 수첩을 뒤져서 전화라도 한 통화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짐을 챙겨 나오서 하얀 등탑을 올려보면서 나의 첫 번째 시조집 <아버지의 산>에 있는 ‘등대지기’를 중얼거려 보았다.
조명이 꺼진 무대 / 어둠이 세운 등대
재울 수 없는 파도 / 불빛으로 다독이며
사방에 / 펼쳐진 침묵 / 고독(孤獨)으로 즐기고.
나팔로 소리쳐서 / 장막을 열어주고
지나는 배우(俳優)마다 / 박수로 보내다가
또 다시 / 밤이 내리면 / 기다리는 그리움.
<현대시조 2011년 봄호 175-1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