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년은 한국에서 장로교 총회가 조직된 지 100주년이 된다. 지난 100년을 뒤돌아 보며 한국장로교회가 걸어온 100년의 발자취를 검토하는 일은 내일의 한국교회를 위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이 글은 한국장로교회 100년에 대한 역사적 검토1)에 이어 지난 100년의 장로교회의 역사를 ‘신학’으로 검토하되, 특히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기원에 대해 기술한 후 신학의 발전을 몇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흔히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정통주의’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 신학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 소개된 이 신학이 어떤 발전의 과정을 거쳐 왔는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사용된 개혁교회, 개혁신앙, 혹은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확립되어 스위스, 화란 스코틀랜드의 개혁파교회 혹은 장로교회를 통해 전수되어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과 화란교회 신학자들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석명된 신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2)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는 동의어로 보아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1.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기원 한국과 장로교회와의 접촉은 1870년대 만주에서 시작되었고 1876년에는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 등이 세례 받음으로 첫 장로교 신자가 된다. 곧 서상륜과 김청송이 세례를 받음으로 1883년에는 세례 받은 한국인 장로교 신자는 6명으로 증가된다. 이들의 협력으로 만주와 그 변방 지역에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만주에서의 첫 신앙공동체이자 첫 장로교회였다. 또 일본에서 이수정(李樹廷)은 장로교 선교사를 통해 개종하고 일본의 장로교 목사인 야스까와 토오루(安川亨, ?-1908),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녹스(George Knox)와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와의 접촉을 통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 온 한국학생들과 교포들에게 전도하여 1882년 말까지 20여명의 신자를 얻었고, 1884년 초에는 도쿄에 최초의 한국인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교파적으로 말하면 이는 장로교회였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조직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다. 1884년 9월 알렌의 입국에 이어 이듬해 언더우가가 입국함으로 한국에서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호주빅토리아장로교(1889), 미국남장로교(1893), 캐나다장로교회(1898)가 선교사를 파송하여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이들은 합의에 따라 선교지를 분담하여 사역하던 중 입교자들이 증가하여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3)
한국에서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기까지 몇 가지 과정을 밟아왔는데, 첫 조직은 1889년의 ‘연합공의회’였다. 이 회는 당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체였다. 그러나 호주선교사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곧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미국남장로교가 한국선교에 동참하게 되자 1893년에는 ‘선교사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미국 남·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체로서 전국교회를 치리하는 상회(上會) 역할을 했다. 1901년 9월에는 선교사와 한국인 대표가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교공의회’로 개칭되었다. 이때 회원은 선교사 25명, 한국인 장로 3명, 조사 6명이었고, 회장은 북장로교회의 스왈론(William Swallen)이었다. 이 장로교공의회는 영어사용위원회(English session)와 한국어사용위원회(Korean session)를 두었다. 장로교공의회는 1901년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노회설립 방침 의정위원(議定委員) 및 장로교헌법번역위원을 선정하였고,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신학교 설립건은 마펫(S. Moffett)을 교장으로 위촉하고 그에게 신학교육을 일임했다.
한국 전역에 교회가 설립되자 호주와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즉각적인 노회 설립을 주장한바 있으나 미국남북장로교회는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교사들만으로 노회 조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아 반대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 신자수가 증가하고 다수의 교회가 설립되자 노회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1906년에 소집된 장로교공의회는 노회조직을 결의하여, 1907년 9월 17일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최초의 노회가 조직되었다. 이 노회가 ‘죠션야소교장로회 노회’인데, 이 노회를 보통 ‘독노회’(獨老會)라고 부른다. 회장은 마포삼열(S. H. Moffett, 1864-1939), 부노회장은 방기창(邦基昌, 1851-1911), 서기는 한석진(韓錫晋), 부서기는 송인서, 회개는 이길함(Graham Lee) 목사가 선임되었다. 회원은 한국인 장로 36명, 주한 장로교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 등 도합 78명이었다. 찬성회원이란 당시 대한성서공회, 기독교서회, YMCA 등에 속해 있던 장로교 계통의 목사들을 의미했다. 노회의 조직과 함께 ‘12개 신조’를 신경(信經, Confession of the Faith)으로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성경무오, 하나님의 주권,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 성례전, 불가항력적 은혜, 부활과 심판 등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신경은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12개 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소신앙문답서’(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도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이 노회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 7명(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서경조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을 배출했다. 당시 한국장로교회에는 785개 처의 교회, 75,968명의 신자, 18,061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또 목사선교사는 49명, 한국인 장로는 47명에 달했다.
제2회 독로회(1908) 당시 한국인 노회원은 59명, 선교사는 30명이었다. 제3회 독로회(1909)에는 한국인 회원 85명, 선교사 회원 33명이었는데, 이 해에는 다시 8명의 목사를 장립하였다. 제5회(1911) 독로회는 대구 남문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독로회 휘하의 7대리회(代理會)를 노회로 승격시키고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11년 10월 15일 전주성밖교회에서 목사 20, 장로 25명이 모여 전라노회를, 그해 12월 4일 새문안교회에서는 목사 12, 장로 21명이 모여 경충(京忠)노회를 조직했다. 1912년 1월 6일 부산진교회에서는 목사18, 장로 18명이 모여 경상노회를, 1월 28일 평양신학교에서는 목사 28, 장로 96명이 모여 남평안노회를, 2월 15일 선천북교회에서는 목사 26, 장로 15명으로 북평안노회를, 2월 20일 원산 상리교회에서는 목사 14, 장로 16명이 모여 함경노회를 조직함으로서 7개 노회 조직이 완료되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京昌門) 안에 있는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는 7노회가 파송한 목사 96명(한국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모여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 총회를 ‘죠선야소교 장로회총회’(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라고 불렸다. 이날 총회는 이눌서(W D Reynolds) 목사의 사회로 히브리서 10장을 본문으로 ‘장자회(長子會)’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성찬식을 거행함으로 개회되었다. 이튿날(9월 2일) 회의는 평양 서문밖의 신학교로 옮겨 속개하여 임원을 선출했다. 회장에는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William Blair), 부회계 김석창 씨가 각각 선임되었다. 이때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한국장로교는 하나의 총회로 남아 있었다.
총회가 조직될 당시 장로교회에는, 7개 노회, 134개처의 조직교회, 1,920개처의 미조직교회가 있었고, 한국인 목사 69명, 외국인(선교사)목사 77명, 장로는 225명에 달했다. 또 세례교인 53,008명, 학습교인 26,400명, 총신자수는 127,228명에 달했다. 치리회 조직에 있어서 장로교는 감리교 보다 훨씬 앞섰다. 감리교는 1930년에야 비로서 ‘조선감리교’란 이름으로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2.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1920년대까지의 기간을 ‘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의 한국 신학은 선교사들의 신학이었고, 선교사들이 신학교육과 연구와 집필 등 신학활동을 주도했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신학교육기관인 평양신학교는 1901년 시작되지만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다. 첫 한국인 교수인 남궁혁南宮爀, 1882-1950) 박사가 교수로 취임한 때는 1927년이었다. 1928년에 이성휘(李聖輝, 1889-1950)가 교수로 참여했고,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은 1930년부터 교수로 참여하게 된다. 송창근, 김재준이 귀국했을 때는 1933년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 의한 구체적인 신학 논구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1920년대까지의 신학을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주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말한다.
평양신학교 교지 형식으로 발행되었던 『신학지남』은 1918년 창간되지만, 창간 때부터 1920년까지는 왕길지(Gelson Engel) 선교사가, 1921년부터 1927년까지는 배위량(W M Baird)선교사가 편집인으로 일했다. 한국인 남궁혁이 편집인으로 활동하게 된 때는 1928년이었다. 1930년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이 주된 집필진이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한국의 신학교육과 신학 논구를 주도하였으므로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바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은 ‘한국신학’(Korean theology)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신학’(Theology in Korea)이었을 뿐이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주한 네 장로교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지만 사실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가 신학교육을 주도하였다. 북장로교 선교사 중에서도 1924년 라부열(Stacy L. Robert)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기 이전까지는 이길함(Graham Lee), 소안론(W L Swallen), 배위량(W B Baird), 곽안련(C A Clark) 등 메코믹신학교 출신들이 신학교육을 주도하였다.4) 해방 전까지 내한한 약 1,500여명의 선교사 가운데 약 70%가 미국 국적의 선교사들이었고,5)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671명중 76%에 해당하는 513명이 미국 선교사들이었다.6) 이 점만 보더라도 미국장로교회가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끼첬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 한국교회를 주도했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어떻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상이한 평가가 있어왔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에 대해, ‘보수주의 신학,’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 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7)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전통은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보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평가했다.8) 비록 한국교회 초기 신학에 대해 근본주의, 정통주의, 경건주의, 청교도주의, 그리고 복음주의 등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신학이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전에 내한하였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CF)에 준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의 논평은 이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는 1911년 이전의 주한 선교사들의 신학은 청교도적인 보수주의 신학이었다고 평가했다.9) 이점은 1890년에 내한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1909년 첫 25년간(1884-1909)의 한국선교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10)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 마포삼열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한국에서 활동했던 특출한 선교사였던 마포삼열의 이 두 가지 진술은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적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동시에 193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신복윤는 “1885년 미북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내한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평했지만,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을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1930년대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재학 중에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재학한 기간이 1930년대였음을 고려해 볼 때 1920년대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에서 ‘칼빈신학’이 처음 논구된 것은 1934년 남궁혁, 이눌서에 의해서였고, ‘칼빈주의’에 관한 논설이 처음 게재된 때는 1937년 함일돈(Froyd Hamilton)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함일돈은 이 글에서 칼빈주의라는 신학체계의 초보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11) 박형룡 박사가 로라인 뵈트너(L. Boethner)의 Reformed View of Predestination을 『칼빈주의 예정론』이란 제목으로 역간한 때는 1937년이었다. 이 책이 칼빈주의 신학에 관한 최초의 번역서였다.12) 비록 박형룡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 말하면서 “웨스트민스터표준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13) 이것은 1976년의 진술로서 후대의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단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때 채택된 교리 표준이다. 독노회는 ‘12개 신조’를 채택했는데, 이 신조는 영국의 장로교회가 작성한 것으로 1904년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했던 동일한 신조를 단지 서문만 고쳐 그대로 채택했다. 이 신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유일신 하나님과 그 성품,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성령의 역사, 선택과 수양, 성례, 신자의 의무, 최후 심판 등 12가지 기본교리가 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제정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동일한 고백을 갖게 함으로서 피선교국의 장로교회 간의 복음주의적 연대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들이 개혁주의나 개혁주의적인 장로교 전통을 세우고자 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집했을 것이다. 미국장로교회는 불과 4년 전인 1903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 채택했으나 이 고백서를 한국장로교회에 소개하지 않았다. 단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설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이라고 했을 뿐 교회의 공고백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때에는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서가 한국어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이 진술마저도 선언적 의미만 지닌다.
백낙준은 12개 신조가 “철저한 칼빈주의적 경향(strong calvinistic trend)을 지닌 것”이라고 했다.14) 간하배(Harvie Conn)는 이를 평가 없이 인용하고 있으나,15) 12개 신조는 칼빈주의적 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칼빈주의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12개 신조는 단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12개 신조는 개혁신앙의 특색도 없지 않으나 근본주의와 정통주의, 보수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12개 신조가 기본교리를 말하는 단문으로 되어 있어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김영재의 지적처럼 사실은 개혁주의적 내용이 희석화 되어 있다.16) 이 12개 신조에는 칼빈주의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만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던 이중예정에 관한 고백이 없고17) 무엇보다도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문화적 소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12개 신조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고백으로 규정할 수 없고 자유주의가 아닌 한 수용할 수 있는 기본교리를 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전통을 ‘개혁주의’로 간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간하배가 말한 바처럼 한국에 소개된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을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기독교”18) 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이점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1905년 교파교회를 고집하지 않고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 곧 ‘조선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하자고 합의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즉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장로교가 반드시 엄격한 개혁주의 신학을 견지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초기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을 보다 극단적으로 수용하여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양선에 의하면 길선주(1869-1935)는 선교사들 보다 더 극단적인 보수주의였다고 지적했다.19) 극단적인 보수지향적 신앙이해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데는 철저했으나 개혁주의 전통과는 다른 근본주의나, 경건주의, 혹은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었다. 이런 신학이 성경의 권위, 축자영감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그 결과 세상과 문화에 대해 분리주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근본주의적이고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그 이후 시대에도 동일했다.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종말론인데, 한국 장로교회 지도자들은 대체적으로 전천년설을 신봉했다. 일제하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독특한 현실에서 전천년설(前千年說)을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 전천년설은 상당한 정도로 세대주의 신학으로 채색된 것이었다.20)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되어 개혁주의 신학전통에서 다수 의견이었고, 바빙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화란 개혁신학자들도 무천년설을 지지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나 칼빈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무천년설이 지배적이지만, 박형룡이나 박윤선까지도 전천년설을 따랐다.21)
한국장로교회에 스며든 세대주의적 경향성을 지적한 인물은 간하배, 한부선(Bruce F. Hunt), 신복윤, 김영재 등인데, 간하배는 “서구로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온건한 형태의 세대주의가 유입되었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세대주의는 초기형태의 세대주의였다.22)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과 단순한 성경해석법이었다.23) 그 결과 모든 예언적 약속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문자적 성취라는 세대주의적 원리가 개혁주의적 이해가 결여된 초기 한국교회에 쉬 수용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세대주의 신학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세대주의가 곧 역사적 장로교인 것처럼 혼동하고,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24)고 지적했다. 이렇게 볼 때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개혁주의적인 특징이 있지만 보수주의 신학 혹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학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3. 1930년대의 상황과 진보적 신학의 대두 1930년대 한국장로교회에는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한국인들에 대한 신학논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감리교의 경우는 이보다 앞서지만 1930년대부터 한국인의 신학 활동이 구체화 되었고, 연구와 집필, 신학교육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신학연구의 시작이자 선교사 중심의 신학으로부터의 독립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동식은 1930년대(1929-1939)를 ‘한국신학의 정초기’라고 불렀다.25) 한국인에 의한 신학 연구와 저술의 첫 결실은 1929년에 출판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The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였다. 박형룡의 『기독교 근대 신학난제선평』이 출판된 때는 1935년이었다. 감리교의 경우, 정경옥의 『기독교신학개론』이 출판된 때는 4년 뒤인 1939년이었다. 1930년대 장로교의 남궁혁, 이성휘, 백낙준, 박형룡,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등이 1930년대 신학자로 활동하게 된다.
두 번째 변화는 이전의 신학과는 다른 새로운 신학운동, 곧 ‘다른 전통’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보수주의 신학이 한국교회 신학의 주류를 형성하지만 1930년대부터 보수주의 아성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1930년을 전후하여 한국교회에는 어떤 신학적 변화가 있었는가? 이 변화는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는 진보적 신학의 대두였다. 신비주의 운동과 일본 무교회사상의 유입 또한 이 시대의 신학적 변화였다.
신비주의 운동은 1920년대의 경제적 시련과 일제의 정치적 압제 하에서 현실을 초극하려는 탈 역사적 신앙의 내면화 현상이 빚은 결과였다. 역사 현실이 암담하면 암담할수록 현실 도피적 주관주의나 신비주의가 창궐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930년대 한국교회에는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신비적 열광주의, 거짓 계시운동(僞經運動)이 일어났다. 신비주의적 종파운동이나 위경운동의 대두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미성숙을 반영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양기독교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주관적 신령주의의 폐해를 성찰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이 부족했다. 이것이 입신, 접신, 예언, 분별없는 방언 등 신령주의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이었다.『한국선교연감』(The Korean Mission Year Book for 1932)은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26)
1930년대에 대두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는 일본과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용이하게 수용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일본의 토착적 기독교인 무교회주의와의 접촉은 용이했다. 한국어 신학서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무교회주의 인사들의 저술이나 성경주석은 간단없이 수용되었다. 그래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비롯한 쯔가모토 토라지(塚本虎二), 구로사키 코우키치(黑崎辛吉), 난바라 시게루(南原繫), 야나이하라 타다오(失內原 忠雄), 이토 유우시(伊藤祐之), 마사이께 메구무(政池仁), 모리모토 케이조(森本慶三), 스즈키 수케요시(鈴木弼美), 후지사와 타케요시(藤澤武義) 등의 작품이 널리 전파되었다. 심지어는 주기철 목사도 쯔가모토의 주기도문에 관한 연구인 『主の祈の硏究』를 토대로 주기도문을 강해했을 정도였고,27) 손양원 목사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서적을 탐독하였다. 손양원은 이들의 저술을 기초로 성경공부를 지도하여 경남노회에서 논란을 빗은 일도 있었다.28)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전파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이었다. 그는 다른 다섯 동료들과 함께 1927년 7월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고 무교회 신앙을 전파했다. 1930년대 상황에 있어서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신학의 변화, 곧 진보신학의 대두였다.29) 진보적 신학 운동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유를 선언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이식해 준 신학으로부터의 단절을 주장했다. 따라서 보수주의 신학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이 점은 선교사 중심의 신학에서 한국인에 의한 신학적 논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보수신학과 성격을 달리하는 신학적인 문제들이 1930년 이전에도 대두된 바 있다. 이를테면 1916년 황해도에서 김장호(金壯鎬)목사가 성경해석상의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고,30) 1925년에는 선교사 게일(Gale, 奇一)이 의역본(意譯本) 성경이 문제시 된 일도 있었다. 1926년에는 소위 ‘서고도 사건’이 있었다.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인 서고도(William Scott)는 함흥에서 개최된 사경회에서 성서비평학을 용납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 목회자들과 논쟁한 일이 있었다. 그가 성경에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 무오설에 도전했을 때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김관식, 조희염 등은 이에 동조했다. 함흥지역이 캐나다 연합교회의 선교구역이었기 때문에 타 지역에 비해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의 영향 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1930년 이전까지는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진보적 신학 운동이란 부분적이며 지역적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연합교회의 선교지역인 함경도를 중심한 자유주의적인 경향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전국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31)
1930년 중반기 이후 한국교회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미국교회의 신학적 논쟁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프린스톤신학교는 1812년 설립된 이래 100여년 간 북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어서 유일한 보수주의 신학교였으나 1929년 교수진이 개편되어 점차 보수주의 신학에서 이탈하였다. 이렇게 되자 메이첸(J. G. Machen, 1881-1937)을 비롯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프린스톤을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은 브릭스(Briggs) 사건이나 오번선언(Auburn Affirration, 1924) 등에 연류된 미국교회의 신학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1930년 이후의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적 기류는 주로 미국교회의 영향 하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32)
성경관의 변화는 신학적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표인데, 1930년대에 와서 성경관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났다. 완전 영감설(完全靈感說)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성경 비평학이 도입되었다. 서울 남대문교회 김영주(金英珠) 목사는 모세의 창세기 기록설을 부인했고(1934), 함북의 성진중앙교회 김춘배(金春培)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33-34절의 해석과 관련하여 여권(女權) 문제를 제기하였다(1934). 또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사건(1935)을 중심으로 신학적 견해차가 분명하게 노정되었다.
1934년에 모였던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대립이 분명히 노정되었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진보적 신학의 실재를 알리는 첫 신호였다. 이때 문제가 된 사건은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김양선은 1934년 장로교 제23회 총회에 제소된 창세기 저자문제와 여권문제를 가리켜 전 교회가 문제 삼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에 의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33)
창세기 저자문제는 김영주의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에 대한 강병주(姜炳周) 목사의 문의에서 비롯된 사건으로서, 이 문제는 결국 본문비평의 문제였다. 강병주의 제소에 대해 총회는 평양신학교 교장 라부열(Stacy L. Roberts)을 위원장으로, 박형룡을 서기로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총회는 다음과 같은 조사보고서를 채택하였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반대론은 근대의 파괴적 성경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이론인바 그들은 과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데 멎지않고, 오경전부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세시대로부터 여러 세기 후대 어떤 인물들이 기록한 위조문서로 돌립니다. 또 그들은 오경뿐 아니라, 구약의 다른 여러 책과 신약 여러 책을 후대인의 위조문서도 인정하며 그 기록의 내용에 신화의 고담과 미신과 허설과 각종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여 냄으로써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선 장로교회 안에서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창세기만이 아니라 오경 전부 내지 신구약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중략) 따라서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도 무시하며 능욕하는 사람이니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니라’(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조 21조)고 믿고 가르치는 우리 장로교회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 교회 제1조를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합니다.34) 김영주 목사는 이 보고서를 받아드리고, 자신이 주장을 취소함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은 새로운 도전 앞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34년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 제기된 김춘배의 교회에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문제 또한 본문비평의 문제였다. 김춘배는 <기독신보>(基督申報) 제977호에 “장로교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글 ‘여권문제(女權問題)’라는 항에서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오천년 전의 일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4:33-34까지의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였다. 김춘배 목사의 주장은 성경의 권위와 한계를 시사하는 것이었고 교회 안에서의 여권 신장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총회는 연구위원을 선정하여 앞서 말한 창세기 저작권 문제와 더불어 이 문제를 연구 보고 케 했는데,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을 발표되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의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2천년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 바울은 34절 하반에 ‘너희 율법에 이른 것과 같이 복종할 것이요’ 하여 여자에게 교권을 불허하는 규율의 성경적 근거를 지시하였으니 그것은 창세기 16절에 여자는 남자의 주관한 바 되리라 한 말씀이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의미하는 말씀임을 개설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기로 성경에 이미 명령되었으니, 남자를 포함하는 교회 위에 교권을 가지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은 우리 교회 교역계에서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령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試取問答)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적 해석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것이오며, 이미 임직을 받은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6장 42조,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입니다.35) 제24회 총회는 이 보고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김춘배 목사는 총회의 대세에 뜻을 굽혀, “성경을 해석함이 아니었고’ 또 ‘만약 그 문구가 성경의 권위와 신성을 파괴하고 교회의 피해가 급(及)할 염려가 있다면 책임의 중대함을 감하고 취소하기를 주저치 않는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함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아빙돈단권성경주석(Abigdon Bible Commentary)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1935년 총회에서는 당시 감리교의 유형기의 편집으로 번역 간행된 아빙돈 단권주석은 1930년 미국 감리교 출판사인 아빙돈사가 발간했던 것으로 미국, 영국, 카나다, 호주 등의 성경학자 66인이 공동집필한 것이었는데 한국감리교회가 희년기념으로 1934년에 출판한 것이었다. 이 주석의 한역자들은 대부분 감리교인들이었으나 장로교인 중에도 채필근, 김현근, 문재린, 김명선, 한경직, 윤인구, 김재준, 송창근 등의 목사들이 번역에 참가하였다. 이 주석은 성경의 역사적 비평을 수용한 진보적 주석이었으므로 장로교 목사가 번역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문제시 된 것이다.36)
길선주 목사는 그 주석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집필된 것임을 지적하고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목사들에게 엄중한 책임규명을 하므로 후일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진보적 신학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1935년 제24회 장로교 총회에서 이 문제를 제소하였고, 총회는 길선주 목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신생사 발행 성경주역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 장로교회의 교리에 위배되는 점이 많으므로 장로교회로서는 구매치 않을 것이며 동 주석을 집필한 본 장로교 교역자에게는 소관 교회로 하여금 사실을 심사케 한 후 그들로 하여금 집필의 시말을 기관지를 통하여 표명케 할 것이다. 채필근 목사는 집필의 과오를 사과하였으나, 송창근, 김재준, 한경식 등은 신학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총회의 독단에 응할 수 없다 하여 사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을 이끌고 있던 박형룡의 신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에 극히 형식적인 3인 연서의 성명서37)를 신학지남에 발표하므로 일단락 되었다. 이런 신학적 대립의 과정에서 박형룡은 보수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김재준은 진보신학의 중심인물로 각인되기 시작했고, 양자 간의 대립은 그 이후 계속되었다.
이상과 같은 장로교 총회 차원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성경관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완전 영감설은 한국장로교회가 서 있는 양보할 수 없는 기초였다. 문제는 이런 신학적 토론의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는 보다 방어적 성격을 뛴 근본주의적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이후 점차 대두되던 이런 신학운동은 총회 차원의 결정이나 사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발전되어 장로교 안에는 자연히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이 뚜렷해졌다.
4.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진보신학 한국에서의 진보신학의 중심 인물은 김재준이었다. 김재준은 김익두 목사의 감화로 입신하였고, 일본 아오야마 가꾸인(靑山學園) 신학부에서 3년간(1925-1928) 유학하고 도미하여 핏츠버그에 있는 웨스턴신학교(Western Seminary)에서 3년간(1929-1932), 그리고 프린스톤에서 일년간 연구한 후 1933년에 귀국하였다. 남궁혁은 그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추천했으나 그의 신학사상을 문제시 한 박형룡의 반대로 교수로 채용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930년대의 대부분을 평양 숭인고등학교(1933-36)와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1936-39) 성경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편집인이었던 남궁혁의 배려로 『신학지남』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는 1933년 귀국 후부터 1935년 신학적인 문제로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쓸 수 없게 될 때까지 8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다.38) 이런 기고문을 통해서 김재준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해 나갔고 역사비평학적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신학지남』 1934년 1월호에 쓴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였다. 김재준은 이 글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의 ‘처녀’를 ‘젊은 여자’로 고쳐 읽었다. 또 이것이 사실에 가깝고 본문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표적’을 꼭 ‘이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지적하여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 성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김재준의 이러한 해석은 당시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때 편집위원으로 있던 박형룡은 편집인 남궁혁에게 사표를 제출함으로 항의하였고, 김재준은 1935년 5월호를 끝으로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박형룡이 볼 때 김재준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하고,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오류를 주장는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이런 입장은 장로교 전통과 신학적 정통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김재준과 박형룡의 대립는 시작에 불과했다. 신학적 대립은 캐나다연합교회 선교구역이었던 함경도 지방에서 보다 뚜렷했다. 곧 해외에서 신학을 연구한 이들이 귀국하면서 ‘다른 전통’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경고가 마포삼열의 충언이었다.39) 1930년대 말 한국장로교의 신학적 판도는 크게 변화되고 있었다. 이 변화의 한가지 요인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교회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고 교회에서의 구약설교를 금지시키는가 하면 성경과 찬송 일부의 삭제를 명하기도 했다. 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거부로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는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사실상 폐교되었다. 1918년 창간된 이래 22년간 장로교회의 신학을 주도해 오던 『신학지남』은 1940년 8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의 연구와 변증은 제한을 받게 되었고, 그 영향은 해방 후까지 계속되었다. 박형룡을 비롯한 보수주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했고, 주한 선교사들은 1941년 강제 출국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보수주의 신학의 약화를 초래했다. 보수주의 신학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이런 신학적 공백상태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지경을 넓혀갈 수 있었다. 결국 보수주의 신학은 급속도로 위축되었고, 교회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자의 손에 넘어갔다. 김양선은 “보수주의는 붕괴되고 지금까지 저들의 손에 있던 교회의 지도권은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40)
이런 상황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가 개교했다. 1940년 4월, 김재준, 송창근(宋昌根), 윤인구(尹仁駒) 등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새로운 신학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이미 존재했던 평양의 장로교신학교가 폐교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신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중심 인사들이 일제의 정책에 순응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말하자면 조선신학교는 처음부터 일제와의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김재준은 ‘선교사 집권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고, 신학과 신학교육의 자주를 내세웠는데, 이것은 세계교회로부터의 한국교회를 이탈시키고자 했던 일제의 정책과 일치하고 있었다. 김재준은 평양신학교의 교육이념과 전통을 전적으로 개혁할 것을 말하면서, “조선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에 넣는 신학”을 강조했는데,41) 이것은 한국교회의 기존의 신학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했다. 이 조선신학교는 1940년대 보수주의 신학의 폐허 위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기반을 다져갔고, 해방 후 1946년 6월 11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한 ‘남부총회’에 의해 장로교 직영신학교육기관으로 승인되었다.42) 정리하면 해방된 상황에서 장로교회의 신학교육기관은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 뿐이었고, 이 신학교는 선교사와의 독립, 신학적 자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곧 타협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에서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신학교 설립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5.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개혁주의 신학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한국교회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계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해방 후 설립된 최초의 장로교신학 교육기관으로서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교육이념을 계승하고,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통해 한국교회를 쇄신하고자 했다.43)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인 한상동과 주남선은 비록 투옥되어 있었으나 해방을 예견하고 한국교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해 신학교의 설립을 의도했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입교(神學立敎) 의지였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는 일제하의 경험을 통해 자유주의는 그 시대의 요구에 타협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이들에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시급성 때문에 이들은 교사, 도서, 교수가 준비되지 못한 가운데서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초기 교수로 초빙된 대표적인 인물은 박형룡(朴亨龍, 1897-1978)과 박윤선(朴允善, 1906-1988)이었다. 박형룡은 만주에서 귀국하여 1947년 10월 14일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불과 6개월이 못되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한상동과의 결별하였다. 그는 곧 상경하여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했다. 따라서 그는 고려신학교에 직접적인 영향은 주지 못했다. 그러나 1946년 고려신학교의 개교와 함께 교수로 일했던 박윤선은 고려신학교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바로 박윤선의 신학이었다. 고려신학교 교수로 임명된 박윤선는 고려신학교를 모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우리의 신앙노선』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신학 노선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로 이 노선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및 그 대소요리문답을 교리로 하고 또한 그 예배 모범과 권징조례를 순수히 지킨다. 둘째로 일제말기의 흐리워졌던 오점을 밝히 회개하여 청산함이 절대로 필요한 줄 알고 실행한 것이다. 셋째로 신학에 있어서 타협주의는 배척하고 순수히 칼빈주의 신학을 보수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사도적 전통으로 가지지 않는 현대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를 반대한다.44) 고려신학교는 교회정치에 있어서는 장로교 전통을, 생활에 있어서는 성화적 삶을, 신학에 있어서는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박윤선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자였고,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고려신학교 교육의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개혁파의 신앙노선을 따른다. 그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이 칼빈주의 신학을 주장함에 손색이 없어야 한다. 신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자유주의, 발트주의, 알미니안주의. 우리는 위의 모든 신학을 반대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중간주의 신학도 좋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깨달은 성경주의라고 할 수 있는 칼빈주의 신학을 강력히 파수한다.”45)
박윤선은 고려신학교를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이를 교육하고 파수하는 것을 신학적 이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개혁주의를 복음주의와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신학을 깨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 신앙은 안 가진다.46) 박윤선은 이런 신학입장에서 고려신학교를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고 광포하고자 했다. 그는 고려신학교에 재직하는 14년 동안 고려신학교가 발간했던 『파숫군』에 218편의 논문(논설)을 발표했는데, 이는 연 15.6편을 발표한 샘이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고신 신학의 전성기였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열정적인 ‘학구의 기간’ 이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닌 학자이자,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지닌 학자였다. 그를 통해 한국교회에 개혁주의 신학을 보급한 것이다. 말하자면 박윤선은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재확립과 계승을 위해 헌신했다. 간하배의 지적은 사실이다. “고려신학교는 교회 내에 보수주의 사상을 심어줄 터전”47)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분명히 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는 묘판의 역할을 했다.
6. 박윤선과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 박윤선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일은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고려신학교 교수 혹은 교장으로 봉사했던 박윤선은 1960년부터 63년까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동산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로 활동했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17년간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 교수로 봉사했다. 이 기간 동안 개혁주의 신학은 합동교단으로 확산되었고,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 1980년 10월 말 박윤선은 총신대학 대학원장직을 사임하고 그해 11월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여 원장 혹은 교수로 봉사하게 된다. 이때부터 1988년 6월 30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합동신학교(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명예교장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교수했다. 결국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는 고려신학교에서, 1960년대 이후에는 총회신학교에서 1980년 이후에는 합동신학교에서 직접적으로 개혁주의 신학과 삶의 이상을 교수하며 실천했다. 그의 영향 하에 개혁주의 신학과 그 학맥(學脈)은 고신대학교,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와 그 주변으로 계승된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정초를 놓은 인물은 박윤선이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주경신학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 보다 앞선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사변적 난해성 때문에 대중적 수용도가 낮았다. 그러나 주경신학자였던 박윤선의 저작들, 특히 성경주석은 일반 목회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한국목회자들의 서제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박윤선의 주석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박윤선은 그의 방대한 저술과 30여년간의 신학교육과 목회적 활동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공표하고 가르치고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선언적 의미가 컸지만 박윤선의 성경주석은 목회적 터전에 쉬 용해되고 착근할 수 있었다.
그는 고려신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1953년 10월 48세의 나이로 화란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비록 체류한 기간은 불과 6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화란의 개혁신학을 직접 접하게 된다. 박형룡은 미국의 구 프린스톤 신학을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으로 보수하고 파지하려는 입장이었으나, 박윤선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구 프린스톤 신학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 전통의 개혁주의 신학과, 19세기 화란에서 석명된 개혁주의 신학, 이 두 흐름을 적절히 종합하여 한국교회 현실에 착근하게 했다. 박윤선은 일생동안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위해 일관된 생애를 살았는데,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중요한 봉사가 주석 집필이었다. 그의 주석 집필은 193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40년간의 노고 끝에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완성하고 1979년 10월 9일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드린바 있다. 그의 주석은 분량으로 보면 구약은 총 7,347쪽, 신약은 총 4,255쪽에 달해 신구약 주석은 총 11,602족에 달하며 매년 약 240쪽의 주석을 집필한 샘이다.48) 그의 성경 주석에는 41편의 소논문이 특주(特註) 혹은 참고자료로 포함되어 있고, 1,053편의 설교가 포함되어 있어 시골의 전도사로부터 도시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을 능가하며, 한국교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학자였다. 그는 주석이나 설교, 단행본 외에도 고신의 『파숫군』에 218편, 총신의 『신학지남』에 40편, 합신의 『신학정론』에 1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박윤선은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에도 박식하였고, 그의 성경주석에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의 신학자와 하지, 워필드, 메이첸 등 미국신학자들은 물론, 잔 메이어(Jahn Meter), 델리취(Delitzsch) 등 독일 신학자들과 아브라함 카이퍼, 비빙크, 보스, 리델보스, 스킬더 등 화란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동시에 소개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석명하고 이를 구체화하였을 뿐 만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 위에서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다. 그의 첫 신학논문은 바르트 신학을 비판한 것이었다.49) 그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다. 그의 신학논구는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을 비판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천착하고자 했다.
박윤선는 옛 평양신학교의 한계를 극복한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하비 콘은 박윤선은 근본주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고 함으로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자 였음을 지적했다.
박윤선은 과거 평양신학교가 너무나 제한된 분야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반은총의 여러 분야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회가 세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는 단순한 근본주의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 즉 한국교회가 칼빈주의라는 보다 원시적인 안목(the larger perspectives of Calvin)에서 바라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개혁신앙에서 동료였던 박형룡과는 달리 박윤선는 조직신학 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신약연구를 통해서도 이런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50)
그가 말한 칼빈주의에 대한 ‘원시적인 관점’이란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의미했다. 그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그는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으로 체달(體達)했던 신학자였다. 그는 경신애학(敬神愛學)의 삶을 살았다. 그를 통해 한국장로교회에 개혁신학을 확산한 것은 그의 가장 큰 기여라고 할 수 있다. 8. 맺는 말: 남은 과제들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신학적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한국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며 한국교회 전반에 착근케 할 수 있는 가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을 보다 분명하게 석명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계승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학적 경계선을 획정하고 비판도 해왔다. 그러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세대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혹은 오순절 운동과의 경계선이나 그 신학적 차이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석명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개혁주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세대주의 혹은 근본주의적인 신학에 안주해 오지 않았는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복수적인 장로교회가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근본주의, 세대주의 혹은 경건주의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일반은총이나 문화소명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던 점 또한 반성해야할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 간의 연합을 추구하는 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교회사에서 우리는 교회의 순결(purity)과 연합(unity) 사이의 진자(振子)를 목격해 왔다. 순결을 지나치게 요구할 때 연합이 깨지고, 연합을 우선시 할 때 순결이 훼손될 수 있다. 교리적 순결과 정통을 강조하되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한국 장로교회도 연합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51) 한국장로교 100년의 신학을 고찰해 볼 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외국신학의 소개나 번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학적 자립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