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이 찬술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보면,
중악(中岳) 공산(公山)의 미리사(美理寺),
남악(南岳) 지리산(智異山)의 화엄사(華嚴寺),
북악(北岳) 태백산의 부석사(浮石寺),
강주(康州) 가야산(伽耶山)의 해인사(海印寺)와 보광사(普光寺),
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의 보원사(普願寺),
계룡산(鷄龍山)의 갑사(岬寺),
양주(良州) 금정산(金鼎山)의 범어사(梵魚寺),
비슬산의 옥천사(玉泉寺),
전주(全州) 모악산(母岳山)의 국신사(國神寺),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의 청담사(淸潭寺)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외 〈삼국유사〉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에도
화엄십찰 중 6개 사찰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중 5개 사찰은
〈법장화상전〉에 나온 사찰(부석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이고,
나머지 1개 사찰은 원주의 비마라사(毗摩羅寺)이다.
여기서 화엄십찰의 10이라는 숫자는 반드시 10개 사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10을 만수(滿數)로 생각하여 화엄십찰이라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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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영 규(연세대 명예교수)
1.
1952년 10월 나는 어떤 구실을 띠고 경상북도에 산재한 여러 사찰을 두루 돌아다니던 중, 태백산 깊숙이 부석사를 찾아볼 기회를 가졌었다.당시 이 지역은 아직도 그 일부에서 작전이 계속되고 있었던 탓으로 산악답사가 용이하게 어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첫 번 길에 영주읍에서더 나아가지 못했고 두 번째 길을 나서야 풍기, 순홍 등지를 거쳐 태백산 주봉 가까이 봉황산 부석사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경내에 들어설 때엔 이미 해도 저물고 땅거미질 무렵이었으나, 서남방으로 소백산맥의 연봉(連峯)이며 안동 하기산(下柯山)의 군봉(群峯)이 대해에 파도치는 물결마냥 내 발밑에 와서 습복(褶伏)하던 경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다.
이틀날 새벽, 넓은 경내에 오직 한 분뿐인 노주지와 더불어 나는 무량수전, 조사당, 그리고 화엄경판고 등 유서 깊은, 그러나 인적이 없는 건물로 인도받았다. 이른바 '선묘정(善妙井)과 '석룡(石龍)''에 관한 사전(寺傳)은 이때 처음으로 들은 이야기이다.
'선묘정'이란 승방에서 남쪽으로 30, 40칸 떨어진 한 칸 사방 넓이의 우물이다. 석재를 다듬어 정자 우물을 만든 품이 이 절의 주요건물이 설께되던 당초의 유구임을 dfrl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 하나 '석룡'에 관한 노주지의 설명인즉 법당 및 땅 속에 묻힌 석물을 가리킨다고 한다. 무량수전의 미타불대좌 밑에서 그 머리가 시작되어 S자형으로 동체를 꿈틀거리며 법당 앞뜰의 석등과 정대석(頂戴石)밑에 미부가 끝나기까지 십수칸 길이의 용형을 조각한 석물이 땅 속 깊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는 사찰 자산대장에도 석룡이란 이름이 적혀 있음으로 보아 전승의 유래가 오랜 것임을 알 만하다. 이때로부터 삼십 수년 전 경내의 몇몇 건물과 축대가 크게 개수되고 법당 앞뜰도 상당히 깊이로 개굴(開掘)되었을 때 거대한 석물의 일부가 땅 속 깊이 드러나 보였는데, 용의 비늘인 듯한 조각의 세부(細部)로 역력히 알아볼 수 있었다는 노주지의 주석이었다.
노주지는 또 몇 가지 설화를 이에 덧붙여 들려주는 것이었으나 부석사의 청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붙일 수 없는 후세의 풍수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며, 본디 그 석룡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던가에 대하여 전(傳)을 잃은 지 이미 오래임을 반증해 주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물론 '석룡'도 '선묘장'도 그것이 송초 찬녕(贊寧)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의상전에 나오는 선묘라는 여인의 설화에 관련된 것임엔 틀림이 없다. 선묘에 관해서는 일찍이 일본 경도시에 가까운 도가노 다카야마사에서 중세 가마쿠라 초기의 작품에 속하는 아름다운 신라의 여신상이 발견된 일이 있다. 발견되기가 무섭게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는 등 이 희한한 보고에 학계가 흥분하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요컨대 이 신라의 선묘는 화엄불교를 수호나는 여신으로서 천 년이 가까운 동안 이 절에 봉안되고 그리고 예배되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야마사는 또한 『화엄연기』라는 권자본(卷者本)의 제공처로서 유명하다.
의상과 선묘와의 구법설화를 그림과 글로 엮어서 꾸며진 권자본의 체재는 그 뒤 일본문학에 있어 이른바 연기문학이ㅡ 남상(濫觴)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이 죽어 구렁이가 되고 생전에 이루지 못한 남녀의 원을 뒤쫓는다는 이야기는 근세 일본문학에서 자주 보는 소재가 되어 있거나와. 그 연원을 이르고 보면 그것이 모든 『화엄연기』와 함께 『송고승전』의 의상전에서 시작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의상전에 보이는 의상과 선묘의 설화는 중국 산동성의 일각 등주(登州)를 주무대로 하여 있다. 등장하는 인물의 일방의 주인공이 우연하게도신라의 젊은 숭려라는 것밖에는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지기를 중국 땅에서이고, 그 위에 더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승해 내려오기를 일본 땅에서이고 본즉, 신라가 참여한 부분을 이중에서 찾아내기란 여려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 편언쌍구(片言雙句)로 이에 관한 전승을 이 땅에서 찾압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선묘정의 유구를 보고, 석룡에 관한 이 절의 전승을 들었다. 선묘설화의 진정한 연출자는 『송고승전』이 문자로 전하기 전에 바로 이부석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송고승전』을 다시 펴들고 이야기를 더듬는 소이다.
2.
『송고승전』권4에 실린 신라국 의상전에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부석사 연기에 관련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의상의 속성은 박씨(朴氏)요, 신라이 서울 경주 사람이다. 나이 스무 살 때, 마침 당나라에서는 화염교학이 한창이라는 소문을 듣고, 원효와 더불어 입당구법의 장도에 오르게 된다. 당으로 가는 선편을 얻고자 '본국해문 당주계(本國海門 唐州界)로 향했다는 것이나, 당시 두 나라 사이를 왕복하는 중요한 항구의 하나가 지금 남양만이었으므로 이 당주계란 곧 남양, 아산 일대를 가리킨 것인지 모른다.
당주계를 향해서 먼길을 나선 두 젊은 사문은 어느 날 깊은 산중에서 큰비를 만난다. 날은 저물고 찾아들 인가는 없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끝에 어떤 조그만 움집으로 기어든다. 이튿날, 날이 새면서 주위를 살펴 보고 두 젊은 사문은 비로소 당황한다. 무덤 속이었게 때문이다. 허물어진 옛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속에서 한밤을 보냈으며, 주위에뒹구는 촉루( )는 간밤에 물을 받아 마신 그릇이었던 것이다.
다음날도 비는 계속된다. 정녕 무덤이 아닌 빈집을 찾아 이 밤은 여기서 보내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원효는 온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어둠이 가져오는 갖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끝내 원효는 이렇게 생각한 . 어젯밤은 해골과 더불어 무덤 속에서 지낸 것이었건만 단잠으로 보낼 수 있어쏙, 이 밤은 오히려 갖가지 귀물에 대한 망상으로 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한 변화는 필시 내 마음 하나의 탓으로 해서 일으켜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음만이 있고 그 밖에 또 다른 법(法 三界)이 있을 수 없는 일이어든, 내 자신의 마음의 문제를 구태여 바깥 나라로 구하러 간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드디어 원효는 바랑을 고쳐 메고 그 길로 신라로 돌아간다.
하룻밤의 잠자리에서 대화엄의 진수(眞髓)를 깨치고 오던 길을 돌이킨 원효의 모습도 약여(躍如)하지만, 초지(初志)를 바꾸지 않고 당나라를 향해서 일로 불퇴전(不退轉)하는 의상 역시 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황해를 건너 산둥반도의 일각 등주에 상륙한 것은 총장(總長) 2년(669)의 일이다. 그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 아침 저녁의 탁발(托鉢)을 나선 의상을 보고, 그를 그리는 소녀가 있다. 선묘라는 이름이다.
의상이 나타날 때를 기다려 선묘는 있는 정성을 다해서 의상을 붙들고 희망을 걸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사문의 도심은 움직일 줄 모른다. 드디어 선묘는 의상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생생세세(生生世世)불법에 귀명할 것을 눈물로써 맹세하는 것이었다.
장안(長安)을향하는 의상의 발길은 바쁘다. 장안의 종남산에 화엄의 강연을 펴고 있는 지엄 삼장(智儼 三藏)이야말로 의상이 신라를 떠나면서부터 그려 오던 목표다. 삼장이 회하엔 많은 고족(高足)들이있었다. 의상이 구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의상의 화엄학은 이미 삼장에게서 전수받은 것보다 더욱더 충만한 것이 되어 있었다.
동방에 새로운 화엄불교의 전포(傳布)를 기약하고 동문들의 축복 속에 의상은 장안을 떠나 신라로 돌아가는 먼길을 나선다. 등주에 다다르자 전날이ㅡ 단월가(檀越家)이던 선묘의 옛 집을 찾아가 본다. 불단 앞에 무릎을 꿇고 일심으로 합장 예불하는 서묘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자 의상은 그만 저도 모르게 대비로자나불(大毘盧자나佛)의 영광을 칭송하는 마음으로 가득함을 느끼며 조용히 발을 돌이킨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과연 선묘가 일심전념 기도드리던 바는 의상 대사가 보는 바처럼 칭찬불가사의(稱讚不可思議)한 데에 있었던가. 아니면 어린 소녀의 일인지라 의상이 돌아올 날이 있기를 크신 부처님의 힘에 빌고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의상 대사를 선창 길에서 보았다는 소식을 듣자 선묘는 미친 듯이 부두로 달려간다. 그러나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앞바다에 따가고 있다. 선묘는 옷 함(函)을 옮겨 들고 그것을 바다로 던진다. 의상이 돌아올 날이 있기를 기다리며 그 날을 위하여 정성을 다해서 마련해 놓은 법복들이 갖추갖추 들어 있는 함이다. 풍랑이는 바다를 향해서 선묘도 그 뒤를 따라 몸을 던지고 만다.
선묘의 어린 넋은 용이 되었다. 이 용은 황해의 거친 파도로부터 의상 대사의 안전을 지켰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 대사는 온 나라에 화엄불교를 홍포하기 위한 복선지지(福善之地)를 태백산에 점복(占卜)한다. 그러나 무수한 소승잡배(小乘雜輩)들이 이를 막고 방해하는 것이나, 여기서도 일대신변이 일어난다. 선묘의 어리고 착한 넋은 사방 십 리 넓이의 대반석(大磐石)이 되어 공중에 떠서 소승의 무리들을 쫓고 의상 대사의 화엄불교를 길이 수호하는 것이었다.
3.
여기까지 『송고승전』의 내용을 옮기고 나서 오던 길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볼 때, 그 주요한 부분에서 사실과 상위되는 바가 적지 않음을 발견한다. 『송고승전』에서는 의상의 속성이 박씨요, 20세에 신라를 떠난 당토(唐土)로 구학(求學)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속성이 김씨요, 나의 29세로 되어 나온다. 총장(總章) 2년에 산동반도 등주에 상륙했다는 소전(所傳)도 의심스럽다. 그의 스승이 될 지엄 삼장이 입적한 해가 그보다 한 해 앞선 총장 원년 10월이었으며, 의상의 이름을 후세에 전할 그의 명저 『일승법계도기(一乘法界圖記)가 삼장의 회하에서 지어진 것이 역시 총장 원년7월 15일에 있었으니 말이다. 의상이 상륙했다는 산동반도도 『삼국유사』
에서는 휠씬 남쪽인 강소성으로 고쳐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상의 행적에 관하여 좀더 정확한 사실을 추구하고, 그리고 『송고승전』에 전하는 바가 대개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의상전을 실은 『송고승전』30권은 북송의 초두 태종의 단공(端控) 원년(988)에 찬녕(贊寧)이 주가 되어 찬술된 것이다. 찬녕은 본래 당대에 요동에서 강소성 지방으로 집단 이재(移配)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성당(盛唐)이래 중국 고승들으 ㅣ전기를 찬술하면서 의상을 비롯하여 원측(圓測), 순경(順璟), 원효(元曉), 현광(玄光)등 많은 신라 출신의 전기를 입목(立目)편입해 있거니와, 이들에 대한 찬영의 감개가 어떠한 것이었던지 적이 궁금한 일이기도 하다. 찬영의 고승전은 그에 선행한 당나라 도선(道宣)의 『속고승전』이라든지, 양나라 혜교(惠皎)의 『고승전』과 대교(對較)해서 논평되는 경우가 많다, 도선의 경우처럼 자료 선정이 썩 엄밀치 못했었다는 것은 기실 그의 진고승전표(進高僧傳表)의 서(序)에서 자인해 있는 바이지만 여기에는 또 찬영대로의 어떤 소신에서 그러한 찬술 태도를 갖게 되었었던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나중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중국측에서 이루어진 의상의 전기로서는 이 밖에 또 원(元)의 담악이 지은 『육학승전(六學僧傳)』중에 의상전이 있으나, 이것은 찬녕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므로 여기서 더 믄제될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것으로서 의상에 관한 기록이라면 『삼국사기』·『삼국유사』·『원종문류(圓宗文類)』·『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그리고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량發願文略解)』 등에 전하는 것들이 있다. 이중에 가장 오랜 것이 『삼국사기』의 그것이나 송고승전보다 1세기 반이나 뒤진 찬술이고, 또 관계기사로 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 16년과 11년조에 보이는 몇 마디 구절에 불과한 것이므로 지금 우리에게 썩 많은 도움이 될 만한 양은 못 된다. 『삼국유사』에서는 권3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권4의 의상전교(義湘傳敎), 그리고 승전촉루(勝詮 )등 비교적 맣은 자료가 전해지고 있으며, 비교적 많은 전거 속에서 원용된 때문인 것도 같으나, 세심하게 시찰하고 보면 사실 하나의 원전이 몇 개의 접시로 요리되어 나온 것임을 알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후소장사리조에서 의상전운(義湘傳云), 거부석본비(據浮石本碑) 등의 출처에 관한 전거가 보이고 의상전교조에서 사재회후본전(事在崔侯本傳), 문재대문류(文載大文類) 및 여여최후소찬본전(餘如崔侯所撰本傳) 등의 소식이 보이며, 승전촉루(勝銓 )란 말이 나오고 있다. 이중에 상전(相傳)과 의상전(義湘傳)은 물론 동일한 완전일 것이며, 최후본전과 최후소찬본전도 서로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둘이 다 최후소찬 의상전이어야 할 것을 약칭하는 방법이 달랐을 따름이다. 최후(崔侯)란 곧 최치원을 가리킨다. 고려조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蔣總錄)』권1에 최치원이 지은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1권이 서목(書目)으로 나와 있거나와 소전(所詮) 『부석존자전』이 곧 의상전이며, 의상전은 최후소찬본전일밖에 업는 것이다. 생략에서 오는 이러한 변화는 위낙 한문을 닦는 길이 그러했기 때문이며, 유사(遺事)를 지은 이의 성벽의 탓은 아니다. 나는 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의 문장을 고래로 우리나라에 관절(冠絶)한 일품(逸品)의 하나로서 평소 칭송해 마지않는 터이다.
이상의 정리에서 한 가지 예외를 이루는 것을 전후소장사리에 무극(無極)이 첨가한 부기(附記)중 부석본비(浮石本碑)라는 것이 있다. 얼른 보아서 『부석존자전』과는 다른 계통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느껴지는 대목이 있으나, 양자의 이동(異同)을 밝히기에는 너무도 짧은 원용문(援用文)이므로 속단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부석사에서는 아무런 유물의 단편도 구비(口碑)도 이 비에 관하여 전하는 바를 듣지 못했다.
『삼국유사』의상전교 중에는 또 장안의 현수(賢首)로부터 의상에게 보내온 기해동서(寄海東書)가 인용되어 있고 대문류(大文類)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이 의천이 얶은 『원종문류(圓宗文類)』를 가리킨 것임은 물론이다. 『원종문류』에는 또 치치원이 지은 『고종남산엄화상보은사회원문(故終南山儼和尙報恩社會願文)』과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그리고 『화엄사회원문(華嚴社會願文)』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모드 의상의 행적과 교학(敎學)에 관련이 있는 문헌들이다. 같은 최치원의 찬(撰)으로 된 『법장화상전』은 의천의 『교장총록』에 현수전(賢首傳)1권으로 나와 있는 것이며, 현수 곧 법장은 지엄 삼장이 의상에게 의지(義持)의 호를 주고, 현수에게는 문지(文持)의 호를 내려서 문과 의로 사자상승(師資相承)을 양분한 사이에 있는 고족(高足)이다.
의상의 교학을 전하는 으뜸가는 자료는 앞에 든 『일승법계도기』1권과 『법계도기총수록』2권 책일 것이다. 총수록은 도기(圖記)에 대한 각가(各家)의 학설을 모아 성서(成書)된 것이거나와, 그중에 그 직제자들의 필록으로 된 부분은 한층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일등제자들에 둘러싸여 애연( 然)한 중에 답문하는 의상 대사의 모습은 여기서 더욱 방불해 있거니와, 또한 그것은 신라 화엄교학이 이루어 놓은 하나의 정점이기도 하다.
고려조에 만들어진 문헌으로 이례(異例)에 속한 것에 문종 때 박인량(朴寅亮)의 『해동화엄시조부석존찬(海東華嚴始祖浮石存讚)』이 있다. 비로소 여기서 선묘의 이름을 접하게 되거니와, 달고 보면 그것은 『송고승전』의 그것을 손쉽게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또 『백화도량발원문약해』를 보면 그 첫머리에 의상의 약전이 붙여져 있다. 이것은 약해(略解)의 저자 체원(體元)이 최치원의 『의상전』을 보고 옯겨 놓은 것이다.
제일 나중에 나온 문헌이기는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영주군(榮州郡)부석사존(浮石寺條)에 연산조(燕山朝)의 '신증(新增)'으로 "부석사 동편에 선묘정(善妙井)이 있고, 서편에 식사용정(食沙龍井)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면 응험(應驗)이 있다"는 소식이 나와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여지승람』은 내가 늘 좌우에 두고 참고하는 터였지만, 이러한 기록이 있는 것을 근자까지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선묘정의 소식은 정녕『송고승전』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절에서 독자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오던 것임에 틀림없다.
4.
의상에 관하여 내외에 전하는 현존 자료는 대개 이상과 같거니와 이들을 토대로 하여 의상의 행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몇 가지 문제를 다음에 검토헤 보기로 하자.
『부석존자전』이나 『부석본비』가 모두 의상의 생년을 무덕(無德) 8년(625)으로 하고 있는데에는 일치하지만 『부석전』은 그가 29세에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했다는 것이고 『부석본비』는 20세에 출가했으며, 영휘 원년(26세)에 원효와 더불어 입당을 시도하다가 실패, 용삭(龍朔)원년(37세, 661)에 두 번째로 단독 재정(再征)이 성공했다는 그 자체의 연대 계산에 착오가 보이기 때문이다. 원효와 더불어 육로 초정(初征)은 최치원의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에 의하면, 요동 땅에서 첩자의 혐의를 받고 고구려 수라(戍羅)에게 붙들리어 수폐(囚閉)된 지 수순(數旬)만에 풀려 돌아온 것이었다.
나이 37세에 의상이 재정의 길을 나섰다고 하는 용삭 원년을 앞에 적은 『해동초조기신원문』에서는 용삭 2년(662)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룡삭이재(於龍朔二載) 예종남산지상사(詣終南山至相寺)"했다는 것이므로 먼길 장안의 지상사에 도달한 해를 가리킨 것이라 본다면 용삭 원년 재정설(再征說)과 서로 모순을 가져올 것까지는 없다. 이 경우 해로(海路)로 양주에 상륙하고,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의 아내(衙內)에 머물러 있으면서 융숭한 공양을 받았다는 것인데, 정녕 이러는 동안에 분주히 연말 연시를 보내게 되었던 것으로 봄이 좋을 것 같다.
육로 요동길이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었음은 영휘 처년의 시도가 실패했던 것으로 증명된 바이거니와 해로 산동반도로 통하는 항로도 기실 칭찬할 만 한 것이 못 되었다. 백제와의 사이에 최후의 결전이 전개된 것이 이 해를 중심한 양 3년 간의 일이었으며,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이 길을 취했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 했었던 것은 『삼국사기』진덕여왕 2년(648)조에서 보아온 바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설혹 이때 의상이 탄 배가 남해 다도해를 뚫고 산동을 향해서 일로 북상을 꾀했다손 치더라도 이때가 한창 겨울이고 본즉, 몽고로부터 불어오는 계절풍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상이 장안의 종남산 지상사에서 지엄 회하에 든 것이 용삭 2년이었음은 앞에 적은 바이거니와 7년이 지난 총장 원년 10월 지엄 삼장은 청선사(淸禪寺) 반야원(般若院)에서 천화(遷化)한다. 『총수록』에 인용된 '도신장(道身章)'과 '고기(古記)'에 의하면 여기서 삼장이 천화하기 10일 전, 삼장과 의상과의 사이에 미진(微塵)이 곧 전체이며, 영원이란 곧 일순(一 塵中 十六世界 無量 卽一念)이라는 상즉상입(相卽相入), 절대의 이론이 문답된다. 그리고 10월 11일에 의상은 삼장으로부터 '보법궤칙(普法軌則)'을 전수받았다.
의상이 귀국한 해를 『부석본비』와 『초조기신원문』에서는 함형(咸亨) 2년(671)에 걸어 있고, 『부석존자전』계통에서는 함형 원년에 걸어 있다. 역시 입당(入唐)의 경우와 같은 소식일 것이다.
귀국한 의상이 왕명을 받들고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한 해를 의상전교조에서 의봉(儀鳳)을 『부석본비』는 장안 2년(702) 78세로 걸어 있다.
5.
위에서 보아 온 바 의상의 행적에 관한 몇 가지 주요사실을 『송고승전』의 그것에 대교(對較)할 때 주요사실을 『송고승전』에서 의상의 입당을 초정(初征), 재정(再征)의 구별도 업싱 총장 2년으로 걸어 있으나 사실이 될 수 없음은 물론, 원효가 하룻밤의 잠자리에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요체(要諦)를 오득(悟得)하였다는 소전(所傳)도 기실 원효의 사상적 편력과 학적 성격의 전모가 보편화되기를 기다려서 설화화된 하나의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의상이 산동성 등주를 통해서 입당했다는 『송고승전』의 설도 사실이 아니다. 그 이유 몇 가지를 앞에서 이미 말해 두었거니와 , 등주라는 지명 자체가 『구당서(舊唐書)』지리지에 적혀 있듯이 여의(如意) 원년(691)으로부터 시작된 이름이며 의상 당시엔 내주(내州)로 불렸었다. 여기서도 『송고승전』이 갖는 그 허구성을 감출 길이 없다.
비록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허구적 요소를 갖춰 있을망정, 『송고승전』의 의상전은 하나의 역사적 진실이 전해 있음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이 진실은 심히 교묘하게 손질되어 있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 구비로 전승되어 가는 동안 뭇사람들의 지혜가 골고루 보태져서 그토록 아름다운 것으로 다듬어졌을 것이다. 찬녕이 서문에서 『고승전』을 찬술한 자가(自家)의 입장을 설명하되, "행장과 비문을 상고하고 지방지와 서첩(書帖) 등을 널리 수탐했을뿐더러, 혹은 사신들에게 묻고, 혹은 지방 구노들에게 들어서" 자료를 수집했다는 것이며, 이 점『송고승전』으로 하여금 그에 선행한 도선의 『속고승전』과 서로의 온도에 차이를 낳게 한 소이이기도 한다. 의상전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정녕 그것은 '혹은 사신들에게 몯고,혹은 지방의 고노들에게 들어서' 얻어진 것임을 틀림이 없다.
6.
선묘설화가 꾸며진 시기를 신라 하대에 두려고 했던 전일의 나의 추론(『朝光』? 1942)은 지금에 와서도 변경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실과 모순되는 무리를 저질러서까지 선묘 설화의 주무대를 굳이 산동의 일각 등주로 설정해 있는 대에는 설령 그것이 알고서 된 일이라 또는 모르고서 된 일이든간에 전승하던 이들의 강인한 작의 (作意)가 움직여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산동의 일각 등주가 그처럼 신라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시기라면 곧 신라의 하대를 두고 달리구할 길이란 없는 것이다.
이 시기를 통해서 신라 사람들의 해외진출에는 놀라운 것이 있었다.황해와 남해의 전 해역에 걸쳐 신라의 위풍이 떨치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으며, 장보고라는 걸물이 나타나서 극동의 제해권이 그의 손에 장악되고 종횡무진의 활약의 역사를 남기던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므로 가령 한사람의 일본 승려가 당나라로 구학의 길을 나섰다면 그는 그 여행의 시종을 신라 사람들의 제해 세력에 의존해야 했고, 그 비호를 입지 않고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