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 <조선시대>- 제16대 인조, 인렬왕후 한씨,
| >
인렬왕후 한씨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로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 능양군과 결혼 하여 청성현부인에 봉해지고 1623 년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슬하에 소현, 봉림, 인평, 용성 등 네 아들을 낳고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장릉으로 인조와 함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영조 때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로 옮겨졌다.
장렬왕후 조씨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1635년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 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고 1659년 효종이 죽자 다시 대왕대비가 되었다. 이때 그녀가 입어야 할 상복이 정치 문제화되어 서인이 만 1년만 착복 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하여 그 절차대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착용해야 한다는 3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을 공격했다. 이에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 아들이므로 복상은 1년만 착용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다시 주장했고, 남인 윤후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맏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하며 3년설을 주장했다.
결국 이복상 문제는 양당간의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고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설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입지가 약해지고 서인의 입김이 강해졌다. 하지만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다시 이복상 문제가 대두되어 남인은 기년설을, 서인은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하였는데, 이 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1688년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능은 휘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소현세자 인조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왕,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 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 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이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 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같은 외교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소용과 세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 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인다. 입국 후 2달 뒤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지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3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 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인평대군
인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요, 자 는 용함, 호는 송계이다.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7년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심양을 다녀왔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했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 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산수도', '노승하관도', '고백도' 등이 있다. 이러한 미술품 이외에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의 저서가 남아 있다. 사후에는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이 다.
|
|
|
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