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집 이야기(10)
산(山)과의 사랑에 빠지다
신림역에서 3번 출구로 나와 우리 집 방향으로 걸어오면 관악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지금은 아파트와 빌딩들로 뒤덮인 도시가 되어버렸지만, 내 어릴 적에는, 멀리 시외로 나갈 것도 없이, 서울 한복판에서도 머리만 들면 사방에서 산들을 볼 수 있었다. 북아현동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걸어 다니던 중고교 시절, 인왕산, 북한산, 남산, 관악산 등이 내 시야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풍광을 제대로 감상해보지 못 한 채 그 시절을 보내버렸다. 그 때는 늘 깊은 생각에 빠져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땅만 보며 걸었기 때문이었다.
관악산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 역시 특별한 감동 없이 무심히 쳐다보았다. 내가 저 산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니, 단지 눈을 시원하게 해 주는 존재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나마 여러 식구들과 북적거리며 일 속에 파묻혀 살다보니 눈을 돌려 하늘을 쳐다 볼 새도 없었다.
밥 해 먹고, 식구들 치다꺼리만 하던 일구덕에서 나를 밖으로 불러내신 분은 하느님이셨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부터 집을 나설 용기도 틈도 생긴 것이었다. 산을 알게 된 것도 성당 교우들을 따라 등산을 해 본 다음부터였다.
관악산은 도림천(道林川)을 경계로 동쪽은 관악산(630.2m)이고 서쪽은 삼성산(480.9m)이라고 부른다. 삼성산(三聖山) 아래에는 삼성산 성지가 있었는데,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가,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묏자리가 있는 곳이다.
그 때는 삼성산 성지를 신림동 성당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매달 21에는 그곳에서 평일 미사가 있었고, 9월 순교성월에는 전 신자가 함께 모여 미사를 드렸다. 돗자리를 가지고 가서 넓게 자리를 잡고 앉아 미사를 드린 후에는, 싸가지고 간 점심을 풀어 나누어 먹고 집으로 오는데, 더러는 산으로 발길을 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날 삼성산 성지에서 교우 몇 사람과 함께 오솔길로 접어들어 능선을 타게 되었다. 산을 오르는 일은 내 사전에 없을 줄 알았다. 나는 본디 운동에 소질도 없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생애 처음 타보는 산을 벌벌 기어서 올라갔고 엉덩이로 미끄럼 타면서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산을 오르고 내리던 영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본 순간 숨이 멎는 듯 했던 감동이 지워지지 않았다.
주말이 오자 나는 남편을 졸라 신림초등학교 뒷산에 올라 가 보았다. 평소에 잘 걷지 않던 남편은 초입 경사 길에서부터 얼굴이 해쓱해지면서 어지러워했지만, 잠시 쉬었다 다시 걸어 삼성산 입구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조금씩 산에 오르는 연습을 했고, 남편은 나 이상으로 산에 매료되어 틈만 나면 산으로 갔다. 퇴근해서 옷을 벗자마자 배낭을 메고서 약수 받으러 가자고 독촉할 정도였다. 아무리 바빠도 산에 갈 시간은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어떻게 해서든 데이트 할 시간을 갖는 것과 같았다.
어느새 산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산행의 맛을 알게 되고 조금씩 자신이 붙자 남대문 시장에 가서 등산화와 양말, 바지와 조끼를 사갖고 왔다.
우리는 연주대가 있는 쪽이 아닌, 그보다 훨씬 낮고 능선이 부드러운 삼성산을 주로 올랐다. 부모님 점심을 차려드린 후 집을 나서고, 저녁 식사 전에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짧은 코스를 택하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노인정에 나가셨을 때는 아이들 먹을 김밥을 넉넉히 말아놓고, 하루 종일 걷다 내려온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등산 인구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더구나 오후에 시작한 등산로는 더 한적했다. 어떤 때는 우리 둘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높은 봉우리에 올랐을 때의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함도 좋고, 사계절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을 보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산속의 고요, 그 장엄한 침묵이 나는 좋았다. 아무 생각도 않고 머릿속을 텅 비워도, 내 안에 채워지는 것이 있었다. 자연이 주는 평화와 자유, 그리고 치유였다. 산 위에서는 저 아랫동네에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걷다 보면 하느님을 향한 찬미의 노래가 입에서 절로 나오곤 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 산에서 내가 자주 부르는 성가였다.
48세에 시작된 산과의 사랑은 60세 전에 마무리 되었다. 나랑 같이 산에 다녔던 교우들의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보고 나서 그만 두었다. 10여 년 동안의 그 시기는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도 뜨겁게 불탔었고, 그분의 작품인 자연에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충만하게 살던 때였다. 덕분에 모두가 힘들어 하는 갱년기의 신체적 트러불도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토평으로 와서는 아차산(295m)과 망우산(282m)을 합쳐 서너 번 올라가본 것이 전부였다. 신림동 살 때의 관악산 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으며, 훨씬 낮은데도 등산을 포기한 지 오래 되었다. 우리 아파트 창문 밖으로 서쪽에 아차산, 북쪽으로는 멀리 불암산이 보인다. 오늘의 산은 내게 공기가 맑은지 탁한지, 기상 관측을 하게 해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산이 또렷하게 보이면 ‘미세먼지가 없구나!’ 산이 잘 안보이면 ‘공기가 탁하구나!’이다.
산에 못 오르는 대신 내 아파트와 붙어 있는 호수공원을 매일 걷는다. 꼭두새벽에 나가도, 저녁에 나가도 무섭지 않은, 내 안마당 같은 산책길을 밟으면서 나는 중얼거린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까?”
이 글, '내가 살았던 우리집 이야기' 를 쓰기 시작한 동기이다. 나의 수다가 여기까지 이르려면 좀 더 내가 힘을 내야한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 숨이 찬다. 끝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