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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지리적 배경
사적 297호, 백제의 영토, 몽촌토성에 들어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서기 369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00년이 훨씬 넘는 그 옛날,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범합니다.
그 때 백제의 왕은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진격, 황해도 치양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결과는 고구려군 5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백제군의 승리.
그리고 2년 후인 371년, 이번에는 근초고왕이 3만 명의 기마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평양성,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평양성이 함락되고 백제군의 대승리로 끝납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이곳 몽촌토성은 바로 백제가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며,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으로 서울을 옮길 때까지 493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와 패배의 주인공이었던,
백제군의 주둔지이며 역사의 생생한 현장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아차산, 남쪽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아주 가깝게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5호선을 타면 아차산이 있는 광나루역 다음 정거장이 풍납토성이 있는 천호역입니다.
한성백제의 왕성인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서는 백제의 왕성임을 증거하는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몽촌토성은 풍납토성에서 불과 700m밖에 안 떨어져 있습니다.
아차산을 중심으로 고구려군이 세운 용마산 보루, 아차산 보루, 시루봉 보루, 그리고 홍련봉 보루의 배치를 보면,
백제를 넘보는 고구려군의 말발굽 소리와
거친 숨결이 한강을 건너 풍납토성 성벽 밑에서 아주 가깝게 들려올 듯 싶습니다.
그러므로 몽촌토성은,
백제의 서울인 풍납토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주둔지이자,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이 벌어질 때 각 지방의 군대들이 모여들어 전열을 정비하는 집결지의 역할을 담당한 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을 지키는 수도경비사령부이자, 백제군사령부라고 부를 수 있는 토성입니다 .
* 해자와, <곰말다리> 건너 몽촌토성길
몽촌토성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남한산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 비교적 완만한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구역 안에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석촌동 ․ 방이동 고분군과 같은 백제 초기의 유적들이 많아서,
일찍부터 토성의 높은 가치가 주목을 끌어 왔습니다.
고대 삼한 때부터 ‘곰말‘로 불렀던 몽촌은 ’큰 마을‘ 또는 “뒷마을’이란 뜻으로 풀이됩니다.
고려 때는 고원성(古垣城)으로 불렀는데, “고원”은 흙으로 둘러쌓은 담장, 즉 토성을 뜻합니다.
‘몽촌‘이란 이름은 조선초기부터 불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 이전까지는 잊혀진 역사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곳을 백제초기의 도성으로 추정을 했지만,
전면적인 조사는 서울올림픽 때 올림픽공원과 체육시설 조성공사가 추진되면서 1983년부터 7년 동안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6차례의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2. 토성의 형태
1) 성벽
몽촌토성은 높이 40m 내외의 자연 구릉지를 이용하여 축조한 불규칙한 형태의 성이며,
그래서 흙으로 쌓아 올린 토성(土城)이라기보다는 구릉을 이용한 산성(山城)의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구릉과 구릉이 맞닿는 낮은 곳인 안부(鞍部)나 끊어진 곳에는 풍납토성처럼,
‘다져쌓기법’ , 즉 판축법이라는 기술을 사용하여 5m 두께의 진흙판을 만들어 성벽을 쌓아 올렸습니다.
* 판축법 * 몽촌토성의 성벽 * 판축법으로 토성 쌓기를 체험하는 어린이들
판축법(板築法)은 판자로 사각형 틀을 짜고 고운 모래뻘흙과 황토를 섞어 채운 다음,
기구를 사용하여 단단하게 다져주는 것이 첫 순서입니다.
그 다음, 나뭇가지나 잎 등으로 흙과 흙이 밀려나지 않도록 한 켜 깔아준 다음,
다시 흙을 채워 넣기를 반복하여 마치 시루떡같은 모양으로 낮은 곳을 높게 채우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쌓은 토성은 돌로 쌓은 돌보다 더 튼튼한 성벽이 된다고 해서 지금도 공사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국 고서(古書)에는 토성을 송곳으로 찔러 한 치 이상 들어가면,
그 벌로 감독하던 사람을 흙에 같이 넣어 쌓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을만큼 토성은 튼튼한 성입니다.
또, 경사가 완만한 구릉은 깎아 내려 적군이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삭토법도 사용했습니다.
몽촌토성의 동쪽과 서쪽의 폭은 540m, 남쪽과 북쪽의 폭은 730m로 마름모꼴 모양이며, 전체 둘레는 2,285m입니다.
넓이는 21만 6천㎡이고, 외성을 합할 경우 총면적은 30만 2천 5백㎡에 달하며,
8천 명에서 1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일정하지 않아서 현재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망월봉이 약 43m이고,
대부분 지점의 높이는 낮은 쪽이 7m 높은 쪽이 30m 정도입니다.
그리고,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주변보다 3∼5m 정도 더 높은 토단이 만들어져 있어,
망루와 연락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는 모두 9개소인데, 성문은 북문터· 동문터· 남문터의 존재가 확인되었습니다.
성 안에는 남북을 잇는 도로와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대체로 바둑판 모양의 직교식(直交式) 형태를 띠고 있어,
고구려 왕성이었던 국내성처럼 조직적인 배열을 갖추도록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동쪽 목책 *북서쪽 목책
2) 외성(外城)과 목책(木柵)
몽촌토성의 동북쪽에는 직선 형태로 약 270m 정도 뻗어나간 외성(外城)이 하나 있습니다.
<몽촌역사관> 뒤쪽 숲이 있는 구릉지대입니다.
그리고 외성과, 외성의 위 아래쪽인 북서쪽과 동쪽의 토성에 목책을 세웠던 자리가 발굴되었습니다.
목책(木柵)은 땅 속 바위 위에 지름 40∼50cm, 깊이 30∼90cm 크기의 구멍을 파고 중심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을 약 1.8m로 잡고 보조 기둥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목책의 높이는 2m 이상으로 추정되며, 현재 우리가 보는 목책은 발굴된 원래의 목책기둥 자리 위에 복원한 것인데,
목책의 윗 부분을 나란히 보기 좋게(?) 잘라서,
방어용이라기보다는 전시용 같이 만들어 목책의 쓰임새에 어긋난 형태를 보여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습니다.
* 동쪽 해자 * 북서쪽 해자
3) 해자(垓字)
그리고 성 밖 둘레에 돌아가면서 경사면의 생토를 깎아내고 경사를 급하게 만든 다음,
성 앞에 방어용 하천인 해자도 설치했습니다.
해자(垓字)는 목책과 마찬가지로 북서벽과 동벽의 아랫부분에서 확인되었는데,
북동쪽을 휘감아 흘러 자연적 방어선을 이루는 성내천과 연결하고,
북쪽의 외곽 경사면과 외성의 정상부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외성과 목책과 해자가 있는 몽촌토성은 우리나라의 초기 성곽의 형태를 잘 보여주면서,
성의 방어력을 강화한 백제인의 지혜를 가늠하게 하고 있습니다.
3. 주요 출토 유물
* 몽촌토성 발굴현장 * 저장구덩이 속의 유물들
1985년 전후로 올림픽 공원 조성을 위해 몽촌토성의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6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4채의 지상 건물터와 12개의 움집터가 나타났습니다.
유물은 움집터와 저장구덩이와 무덤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움집의 저장구덩이 속에서는 3세기초 중국 서진왕조의 청자편 도자기들과, 백제 토기의 특징인 세발 달린 삼족기와,
4∼5세기의 원통형 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지하 1m의 움집터에서는 뼈갑옷 파편과, 쇠로 만든 화살촉 같은 무기와,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과 발걸이와 방울같은 마구류가 출토되어 근초고왕의 3만 기마대와 백제의 철기문화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성 안과 성벽 위에서 돌무덤, 널무덤, 독무덤 같은 초기 백제시대의 각종 유구를 많이 찾았습니다.
구릉과 구릉 사이의 저지대에서는 5m 두께의 판축(板築)이 나타났습니다.
그밖에 생활 도구로 쓰는 그물추와 낚시바늘, 가락바퀴, 거푸집, 돌절구가 나왔고,
신앙과 관련 있는 나무로 만든 목제오리 조각품 같은 유물과 백제 기와가 많이 나왔습니다.
연꽃무늬를 새긴 막새기와와 중국제로 보이는 벼루도 나와 지배층의 주택이나 행정관청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으며,
굽다리접시, 목이 짧거나 긴 항아리, 허리띠 장식, 가위, 작은 돌절구, 금동 띠, 시루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이런 유물들은,
대부분 4~5세기에 백제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물건들로서,
몽촌토성을 하남 위례성인 풍납토성의 수성(守城)으로 보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서쪽 고지대에서 발견된 온돌터에서 고구려식 온돌고래와 굴뚝시설이 확인된 것과,
부장용이나 의례용기로 사용하는 나팔입항아리와 세발단지 같은 고구려 토기가 출토된 것은,
고구려가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동안 한강 유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으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1) 움집터(수혈주거지)
* 평면 육각형의 주거지 * 평면도와 복원한 움집
해발 25m가 넘는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움집터는 3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첫째는, 언덕의 경사면을 L자 형태로 파서 만든 것으로 움집터 중에서 가장 많았으며,
둘째는, 지면으로부터 1m 정도 깊이 파서 장방형 형태으로 만든 것인데,
이런 형태의 움집에서 말뼈나 철제 무기류가 많이 출토되어,
일반 살림집이 아니라 군사와 관련된 특수한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셋째는 평면 육각형의 건물지로, 동남쪽에 출입시설이 있습니다.
벽의 각각 길이는 4m에서 6m 가량 되고, 벽에는 기둥구멍이 10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기둥구멍의 간격은 50cm 내외입니다.
움집내부에는 저장구덩이와, 북동쪽 모서리에 온돌모양의 화덕시설이 놓인 것이 있었습니다.
2) 도기와 토기
① 회유전문도기편 ② 세발토기(삼족기) ③ 그릇받침대 ④ 검은간 토기잔
① 갈색 회유전문도기편(灰釉錢文陶器片)
저장구덩이에서 나온 중국 서진(西晋, 265∼316)시대의 전문도기편은 서진의 동전무늬가 찍힌 도기조각인데,
중국과의 교류를 확인하면서, 몽촌토성의 증축이 이루어진 이후의 유물인 것으로 밝혀져,
몽촌토성의 축조연대가 늦어도 3세기초까지 올라갈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② 세발토기(삼족기)
보통 접시에 세 개의 다리가 달려 있는 토기로 중국 육조(六朝)문화의 영향으로 봅니다.
몸체는 깎아서 다듬은 흔적이 옆으로 나 있고 다리도 깎아서 다듬었습니다.
어깨에는 지름 0.5cm 가량의 원이 한 줄 찍혀 있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몸체가 깊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리의 모양도 중국 청동기의 동물다리 모양 장식에서 점차 바뀌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③ 그릇받침대 (기대)
찰흙으로 빚은 회색연질토기로, 바닥은 나팔모양의 굽받침이 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가리는 나팔모양으로 벌어져 있어 항아리 같은 그릇을 올려 놓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몸체는 좁은 띠로 4단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띠와 띠 사이에는 지름 1cm 내외의 구멍이 6줄 뚫려 있습니다.
일본의 무덤에서 많이 나오는 그릇받침은, 제사 때 사용하는 의례용구로 추정되는데,
백제에서만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와 일본의 대외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입니다.
④ 검은간 토기잔(흑색마연토기 黑色磨硏土器)
겉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의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서 광택이 나게 한 반질반질한 토기입니다.
* 계란 모양의 항아리 * 항아리와 그릇과 뚜껑
3) 전투 장비
① 말 재갈 ② 뼈갑옷 ③ 화살촉
① 말 재갈
몽촌토성 움집터 3호 구덩이에서 말 재갈이 발굴되었습니다.
쇠로 만든 이 재갈은 말의 입에 물려서 말을 통제하는 마구인데,
반원 모양의 쇠뭉치 2개를 꽈배기처럼 꼬아 쇠줄 고리로 연결하였습니다.
백제는 말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였으며, 말은 그 당시 군사력의 척도였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말을 타고 전투를 치른 백제 기마병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온조왕 10년(서기전 9년) 겨울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이 친히 정예 기마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물러갔다."
"구수왕 3년(216년) 가을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굳센 기마병 8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는데,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와 같은 기록에 미루어 근초고왕이 평양성으로 출정할 때도,
기마병이 선봉에 서서 위풍당당 위세를 떨치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② 뼈갑옷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좋은 갑옷 재료는 코뿔소 가죽이라고 하는데,
몽촌토성에서는 돼지나 사슴 같은 짐승의 뼈를 얇고 납작하게 깎아서 만든 자그마한 판대기들을,
가죽끈으로 묶어서 만든 찰갑(刹甲)이 나왔습니다.
돌이나 쇠로 만든 갑옷에 비해 뼈갑옷은 가볍고 움직이기 편해서 기마용으로 입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③ 화살촉
90여 점이 출토된 화살촉은 쇠를 녹여서 틀에 부어 만들지 않고,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만든 것이 많았습니다.
머리 부분의 형태는 버드나무잎모양, 미늘이 있는 것,
긴 삼각형, 원추형, 독사머리형 등 여러 가지가 나왔는데 실제로 나무에 묶어서 사용했던 것도 있었습니다.
4. 몽촌토성과 한성백제의 부활
* 2010 <한성백제문화제>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한성백제
서기 475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군사 3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하남 위례성인 풍납토성이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성에 진(陣)을 칩니다.
백제의 왕은 21대 개로왕,
궁궐을 새로 수리하고 강 가에 아름다운 누각을 짓고,
왕릉을 단장하느라 나랏돈을 탕진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산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위례성은 불에 타 함락되고, 아차산에 끌려간 개로왕은 목이 베어지고,
한성백제 493년간의 역사는 풍납토성을 지키던 몽촌토성과 함께 연기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자, 저와 함께 몽촌토성 위로 오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부터 백제군사입니다.
북쪽으로 손 내밀면 닿을 듯 아차산이 보이고 그 사이에 있는 풍납토성이 떠오릅니다.
한강을 건너 풍납토성을 함락한 고구려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1차 방어선인 해자를 건너 쳐들어옵니다.
화살이 빗발치고, 이제는 2차 방어선인 목책을 넘어 고구려군사들의 창 끝이 우리 목을 겨누고 있습니다.
백제의 역사는 678년,
한성백제는 493년간의 역사, 웅진과 부여의 역사는 다 합해도 200년이 안 됩니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王城)으로 떠오르면서 몽촌토성의 역할과 위상이 높아지는 가운데,
백제의 건국과 성장과 융성했던 한성백제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몽촌토성에 오른 우리들 백제군사가 “한성백제 부활운동”의 주인공으로 나서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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