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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현 순례사적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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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그리스도인 스크랩 예술가편(5) / 프라 안젤리코
레몬트리 추천 0 조회 16 12.09.10 09: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맑은 심성과 깊은 신심을 지녔던 프라 안젤리코는 삶에서 우러나온 영성적인 체험이 녹아 있는 많은 종교화들을 남겼다.
뛰어난 종교화로 하느님 찬미

유명 성당에 프레스코화 그려
성격은 온유하고 생활은 청렴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곧 천사 같은 수도자 화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안젤리코는 맑은 심성, 깊은 신심에 뿌리내린 삶에서 우러나온 영성적인 체험이 녹아 있는 많은 종교화들을 남겼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주로 활동했던 그의 원래 본명은 귀도 디 피에트로(Guido 야 Pietro), 혹은 조반니 다 피에솔레(Giovanni da Fiesole)라고도 불렸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 신부로서 그의 생애는 수도자로서의 성덕과 화가로서의 재능이 조화를 이룬 것이었다.

그에게 프라 안젤리코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준 것은 유명한 시인이자 라틴어 학자인 코렐라의 도미니코(Domenico da Corella) 신부가 그를 ‘천사 같은’(angelic) 화가라고 부른데서 비롯됐다. 여기서 ‘프라’는 ‘수도자’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프라테’(frate)의 줄인 말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비키오(Vicchio)라는 곳에서 1400년에 태어난 안젤리코는 1417년 형 베네데토와 함께 피렌체의 한 필사본 작업장에서 일했다. 여기에서 형은 필사가로 안젤리코는 채색 화가로 교육을 받았다.

20세 때 그는 형과 함께 피에솔레(Fiesole)의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얼마 뒤 코르토나 수도원으로 옮겨 10여년 동안 코르토나, 토리노, 피에솔레 등에서 지냈다. 당시 안젤리코는 조반니 다 피에솔레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했고, 신앙심 깊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 뒤 1463년에 피렌체의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옮겨 생활했다.

당시의 유럽 사회는 교회의 대분열과 흑사병 등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기를 겪고 있었는데, 안젤리코는 교회와 수도원 개혁을 주도했던 도미니코회의 복자 요한 도미니치, 베드로 카푸치, 리파 프라타의 라우렌시오, 피렌체의 성 안토니오 등과 함께 생활했다. 피렌체의 성 안토니오는 특히 후일 자신이 피렌체의 주교가 됐을 때 성 마르코 수도원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천국을 보지 않고서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경탄했다고 한다.

1445년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1431~1447)의 부름을 받아 베드로 대성전의 경당과 바티칸 궁내에 있는 경당 및 니콜라오 5세 교황(1447~1455)의 방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현재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파손됐다. 1447년에는 오르비에토 주교좌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화가로서 높은 명성을 누렸지만 정작 일상 삶에서는 청렴한 생활을 유지했다.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자신을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고자 했을 때에도 그는 같은 수도회의 다른 신부를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1450년경 피렌체로 돌아간 그는 약 2년 동안 피에솔레 수도원 원장을 역임하고 1453년 경 다시 로마에 왔다가 이곳의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1455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나 산타 마리아 델라 미네르바 성당에 안치됐다.
1960년에 시복됐고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에 대한 공식적인 전례를 승인했으며, 1984년에는 예술가와 미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안젤리코가 활동하던 시기는 피렌체에 르네상스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초기였다. 이에 따라 그의 초기 작품에는 장식적이고 우아한 고딕 양식의 영향과 보다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했던 르네상스 양식이 결합돼 있다.

성서의 내용과 성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교회적인 내용이 중심을 이뤘고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위해 제단화를 비롯한 많은 종교적인 작품들이 제작됐다. 그는 그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충실하게 전하고자 했고 자신이 묵상하고 체험한 종교적인 영성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서 화가로서의 활동은 곧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었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그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형제들이 목소리나 집필로 했던 웅변적인 설교를, 그는 붓을 통해 최고의 형태로 드러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그가 남긴 작품들의 교회적 가치는 다른 어떤 설교도 들리지 않는 곳에까지 웅장한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미니코회에서는 일찍부터 그를 복자로 존경했으며, 1904년 수도회 총회에서는 그에 대해 성인으로서의 공인을 교황청에 요청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2년 그를 시복했다.

혹자들은 안젤리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나 단테의 작품들처럼 보편적인 진리를 그만의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말한다. 그는 본래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해 칭송받는 것을 원치 않고,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소득을 나눠주기를 즐겼고, 또한 기도를 드린 후가 아니면 결코 붓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안젤리코는 인정받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특별한 고생을 요하지도 않았다. 그의 작품은 처음부터 칭찬받았고 그는 반세기 동안 이 도시 저 도시로 다니며 제단 장식을 비롯해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그가 이런 작업들을 하면서 요구한 것은 오직 하나,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봉헌했다는 확신 뿐이었다. 그의 이러한 겸허한 삶은 앞서 언급했듯이 피렌체의 대주교직을 마다하고 오직 그림을 그리고 남는 시간은 병자를 간호하는데 바친데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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