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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단원(6:1-4) 자녀들아 아비들아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1).
“아내들이여, 남편들아” 하고 부부 관계를 창조와 구속의 원리에 입각해서 권면한 사도는 이제 “자녀들아, 아비들아” 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녀 관계를 다룸에 있어서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된 우리” 관계를 의중에 두고 권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는 교회란 가정들이 모여서 구성이 되는 하나님의 가정(권속)임을 의중에 두고 권면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단을 다룰 때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 한 “성령충만”으로 만이 가능하여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다운 자녀와 부모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술취한 듯한 방탕한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딤후 3:1-2)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죄의 목록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 (롬 1:30)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거역한다는 점을 구속사의 맥락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주 안에서 순종하라
아내에게 “복종”을, 남편에게 “사랑”을 말씀한 사도는 자녀들에게는, “부모에게 순종하라” 합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 말하고, 불신자들도 부모를 공경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주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에 대해 어려움과 곡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 경험을 통해 볼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그리스도와, 부모” 중간에 끼어있는 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따르자니 주님이 울고, 주님을 따르자니 부모가 운다는 식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을, 순종을 제한(制限)하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것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주 안에서 순종하라 하셨어 그래서 난 순종할 수 없어, 순종하는 것은 지는 것이야” 라고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과연 주 안에서의 의미이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다.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말씀하고,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하라”고 권면한 사도가 더욱 중요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는 제한적인 순종을 말씀했을 것으로 여겨집니까? 그러면 아내들과 남편들에게는, “주 안에서 복종하라, 사랑하라” 하지 않은 사도가 유독 부모에게만은,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씀한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묻습니다. 형제는 “주께 하듯 하라는 말과, 주 안에서” 라는 말 중 어느 쪽에 더욱 무게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 신학에 있어서 “주 안에 있느냐, 주 밖에 있느냐”, 즉 “그리스도 안에” 라는 주제는 사활을 좌우하는 핵심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은혜와 축복이 “주안에서” 주어지고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라는 말은 “주 밖에 있는” 불신자와의 차별을 나타내는데 “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 밖에 있는 자들보다 부모에게 더욱 순종하고 공경하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듯 하라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에베소서와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20절에서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의 주(主)는 그리스도시요, 그의 최종적인 충성과 영광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돌려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마찰과 갈등을 겪게 되기가 쉽습니다. 자녀는 그리스도인인데 부모는 아닐 경우, 아내는 그리스도인인데 남편은 아닌 경우 창세기 25장에 기록된 리브가의 태속에서 싸우는 “에서와, 야곱”을 생각하면서 갈등을 합니다. “두 민족”이 한 가정 안에 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5: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한 말씀은 성도 상호간은 물론 “아내, 남편, 자녀”에 있어서도 원리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한 사도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주 안에서” 라는 심오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한이 아니라 도리어 최대의 순종을 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순종하라” 함은, 성경 이곳 저곳을 갖다 붙이면서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시키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구적(字句)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고르반”(막7:8-13) 하기만 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그만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義,仁,信)은 버렸다고 책망하십니다.
“너는 주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라,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30년 동안이나 어떻게 순종하며 섬기셨는지,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까지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을 기억하여라. 너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불신자 보다 더욱 순종하여야 한다”는 그런 뜻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부모에게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 부모라면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 순종의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모만이 아니라 그 누구,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극한 점이 있다는 점을 언급해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 시키려는 경우입니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줄 수도 있습니다. 겉옷 달라면 속옷까지 줄 수도 있고,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까지 돌려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끊어 놓으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이것만은 안됩니다. 이것만은 제 맘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울면서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식된 도리로써 부모를 거역하는 아픈 마음, 상한 심정으로 말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가운데서 자식의 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사도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 3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가 “이것이 옳으니라” (1하) 합니다. 성경이 옳다 하는 것은 교훈적으로 옳다는 뜻만이 아니라 창조 원리, 즉 교리적으로 옳다는 뜻입니다. “효도”하면 유교를 생각할 정도로 유교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창조 원리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허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주신 십계명은 두 돌비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하신 제 5계명은 첫 돌비에 기록이 되어 있습
니다.
이렇게 행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부모 공경을 인륜(人倫) 관계가 아니라 천륜(天倫) 관계로 보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공경은 이웃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부모와의 관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3절에서는,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제4계명과 졔5계명을 결부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레위기 19:32절에서도,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노인 공경과, 하나님 경외”를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창조원리로 볼 때에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옳으니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약속있는 첫 계명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2).
둘째는,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2)고 말씀합니다. 10계명을 보면 약속이 제2계명과, 제5계명에 있는데 그러니까 제 2계명이 약속있는 첫 계명인 셈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모 공경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제2계명의 약속, 즉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신 약속은 10계명 전반에 대한 약속이요, 그 계명 자체에 주어진 약속은 5계명이 첫 계명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난점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효자가 반드시 장수하고 잘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에는,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로 되어 있습니다. 즉 육적인 번영과 장수가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자손만대로 번영할 것에 대한 구원사적인 약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육적 이스라엘은 그런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바벨론과 앗수르로 추방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나님 아버지, 즉 영적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본다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말씀을 부모 공경하면 사업 잘되고 장수한다
는 식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시들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약속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비들아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
“자녀들아” 하고 권면한 사도는 이제 “아비들”에게 권면을 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4상)고 먼저 부정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럼 “오냐, 오냐” 하란 뜻인가? 아닙니다. 교회, 즉 성도들을 섬기는 일만이 아니라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5:18절의 적용, 즉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5:18)을 받아야만 가능하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의 뜻은, 술 취한 듯이 방탕하게 다루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잠언은,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3, 14)고 말씀합니다. 여기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데 이를 조화롭게 수행할 수 있으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하)고 적극적인 권면을 하는데 무슨 뜻인가? “교훈”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한 원리적인 교훈을 가리키고, “훈계”는 그때 그때마다 타이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고백합니다. 자녀들에게는 “죄악”이 계발되지 않았을뿐이지 선의 경향과 악의 경향이 함께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부의 심정으로 잡초는 뽑아주고 좋은 싹은 북돋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잡초를 보고도 방치해 두면 그 마음밭은 가시덤불로 뒤덮이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바로 잡아주려다가 노엽게 해서 부서뜨려서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