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담.설화.영험담.민담 읽으시고 댓글도 한줄 남겨 보십시요
우주의 존재는 모두가 가족이다-달라이 라마의 말씀
티베트 불교의 전승에서 볼 때, 윤회전생을 반복해 온 사람에게 있어서, 목숨을 가진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때 아버지였으면 또한 어머니였었다... 사랑과 자비와 비폭력을 지지하는 세계관이다.
Interview: A Visit With the Dalai Lama (Venture Inward vol. 2, no.1, 1986)
달라이 라마와의 회견 7시에 잠이 깨다. 인도 여행 11일째. 달라이 라마(텐진 갸쏘- 달라이 라마14게 .중국의 침략으로 1959년 인도로 망명. 그 후 세계에 사랑돼 비폭력을 설득하고,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역자 주)와 회견하는 날이다. 우리는 하 달람 사라(인도 북부의 서쪽 티베트에 가까운 마을 -역자 주)에 도착했다. u자 모양의 커브를 너덧 군데나 돌고 앞길을 가로막는 산양과 양떼의 무리나 길동무하며, 우툴두툴한 산길을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은 구형버스로 14시간이나 흔들린 끝에 어젯밤 도착했다. 오늘 아침은 쾌찬, 산 공기는 상쾌하고 맑다, ㅉ은 안내 말씀이 끝난 뒤 명상을 한다. 아침 식사는 유스호스텔 식이었다. 마을에서 쇼핑한 뒤, 망명중인 예하의 주택을 향해, 아름다운 히말라야 산맥을 버스로 오른다, 상달람사라 마을에 도착. 티베트는 1959년에 해체되고 10만 명이 인도 나 네팔로 탈출했다-역자 주)들이 사는 마을이다. 몇 명이서 불교 사원을 방문하고 버스로 돌아오니 두사람의 승려가 신기한 듯 버스를 보고 있어서, 손짓으로 리크리이닝시트의 레버 조작법을 가르치다. 두 사람은 시종 웃으며 해보고 있다. 총으로 무장한 경비병 옆을 지나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주택의 문을 지난다. 대기실로 들어가 수속을 마치고 오후의 회견을 기다린다. 회견 준비가 끝나고, 인도되어 언덕을 올라가 접견실로 들어간다. 바닥에는 깔레가 깔려 있고, 벽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벽걸이가 장식되어 있다. 붉은 색 승복을 걸친 달라이 라마가 미소를 띄고 인사한다. 악수할 때마다 관광 안내원이 한 사람씩 우리의 이름을 소개한다. 인사가 끝나고, 달라이 라마는 약간 높은 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신다. 우리도 자리 위에 앉다. 보좌 역이 몇 명 조심스럽게 옆에 서 있다. 우선 우리에게 어데서 왔느냐고 물으신고, 다음에 질문으로 들어간다. 질의응답의 일부를 생각해 낸다. 지구의 이변에 대한 티베트의 예언의 없었습니까/ "없습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웃음) 귀국을 침략한 중국을 원망하고 계십니까? "고백한다면, 바른 마음가짐을 유지시킨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괴로운 싸움이었습니다. (나는 이 고백에 감동이 되었다)중국 측의 입장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고방식을 바꾸는, 다시 말해서 적의 입장에 서서 보면, 우리의 생활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그들의 생활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적을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적은 우리에게 관용과 인내를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참모니 이타주의에 도달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이지요." 자기 방어나 비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족이나 국가를 지키려는 충동은 잘 압니다. 하지만 티베트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살 행위였습니다. 티베트 축에서 반격했던 바, 더욱 많은 중국인병사를 티베트에 '초청한' 셈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과는 재난이었습니다. 애정을 무기로 싸우는 일이 보다 바람직한 일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티베트 문화의 존속이 가능해지겠습니까" "승원이나 사원이나 학교를 갖춘 공동체에서, 모두가 함께 생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겠습니까? "누구나 행복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행복이 가져다주는 것을 구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인 욕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며, 돈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돈은 행복뿐 만 아니라 불행도 가져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감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행복의 열쇠는, 주위의 사람 모두에게 대해 남을 아껴 주는 마음을 키우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그는 말한다-"날을 아껴주는 마음을 행복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관용과 인내를 통하여 사랑하는 것, 남을 동정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마음 착한 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감동이 됐던 것 같았다. 질문이 끝나자, 예하는 "밖에 나가서 함께 사진을 찍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셔Y다. 이에 따라 일행 거의 모두가 일어섰으나, 눈물과 자기의 흥분된 감정이 마음에 걸려서, 나는 잠시 일어서기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의 웃음소리에 문득 쳐다보니, 그가 몇 명인가 사람 너머로 내게 손을 내밀고 계시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는 나의 다리를 잡아끌고 웃었다. 미소를 강하게 한 듯한 웃음이었다. 그의 유머 감각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웃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 눈은 웃고 있었다. 예하를 선두로 밖으로 나온다. 머리 위를 높이 활공하고 있던 독수리가 건물 너머로 날아 내린다. 드높은 상록수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 떠나기 전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저서인 (세계 평화에의 길)이라는 소책자를 주었다. 그는 시종일관 편안한 모습으로 질문에 즉석에서 다변하시고, 자상한 배려를 해주셨다. 어떤 경우에도 잘난 체 하지 않고-이따금 이런 무리들이 있는 거지만- 우리가 이 토지의 고도(2400미터)는, 하고 질문하여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여도, 조금도 싫은 얼굴을 하지 않으셨다. 모두들 작별 인사를 마친 다음, 떠나기 전에 나는 "매우 편안했었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상냥하게, 가리키시는 것이었다. 붉은 색 승복을 걸친 이 쾌활한 인물에 대한 경의를 가슴에 안고 일행은 언덕을 내려갔다. 티베트 아이들의 한 떼가 놀고 있는 옆을 지나친다. 일행의 몇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가져 온 풍선을 분 다음, 입을 묶지 않고 날려보낸다. 아이들은 즐거운 듯 그 뒤를 따른다. 달라이 라마의 명랑함을 생각게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였다.
세계 평화에의 길 버스로 돌아와, 몇 시간 뒤에 도착할 다음 숙박 지를 향하여 산을 내려간다. 달라이 라마의 사상에 여유 있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있다. 창밖의 경치는 아름답다. 언덕 중턱의 계단식 밭에는 바나나, 유카리, 키 작은 소나무 등이 군데군데 있고, 12월이라는 데도 마리 골드나 페츄니아가 피어 있다. 다시금 달라이 라마에게로 생각을 돌리고 조금전에 받은 소책자를 읽기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라디오를 듣거나 신문을 읽거나 하면 폭력, 범죄, 전쟁, 재해와 같은 슬픈 뉴스를 접합니다. 어디서나 뭔가 가슴 아픈 사건이 보도되지 않은 날을, 난 단 하루도 생각해낼 수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아침 뉴스를 듣는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세속에서 결리되고, 세상을 버리고 사는 성스러운 인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현대사회에서 조차, 사람의 귀중한 목숨이 안전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의 세대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만큼 많은 나쁜 뉴스를 체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공포와 긴장을 겪지 않으면 안돼는 상태를 보고, 민감하고 남을 동정하는 사람이라면, 현대 세계의 진보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을 느낄 게 틀림없습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가 선진 공업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괴상망측한 일입니다. 과학이나 기술은 많은 분야에서 기적을 가져 왔습니다만,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입니다. 문맹률이 전에 없이 내려가도, 일반적인 교육이 선을 키워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마음의 불안과 불평을 키웠을 뿐입니다. 물질적인 진보나 기술의 증대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만, 아직도 우리가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고, 불행을 극복하는 일에 성공을 이루지 못한 보면, 이것도 어쩌면 충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진보와 발전에는 뭔가 중대한 결함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만약 이것을 속히 멈추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에 있어 파국적인 결과가 일어날 게 틀림없다는 결론을 도출해야 합니다. 나는 과학이나 기술이니 하는 것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이들은 우리의 물질적 만족이나 행복에 대해서도,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욱 깊게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인류의 경험 전체에 헤아릴 수 없는 기여를 해 왔습니다. 하지만, 과학이나 기술에 지나치게 중점을 두면 성실성과 이타주의를 바라는 인간적인 지식이나 이해라는 면과의 관련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과학 기술은 헤아릴 수 없는 물질적인 만족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각나라가 각자의 형태로 온 세계의 문명을 널리 이룩한 옛부터의 영적, 인도주의적인 가치를 대신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과학 기술이 가져 온 물질적인 은혜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옛날보다 더한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옛날과 같은 괴로움이나 두려움이나 긴장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발전을,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 인간적 가치를 놓고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완전히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것입니다. 이 위대한 조정을 위해서는 인도주의적 가치를 되살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온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신적인 위기에 대하여 틀림없이 많은 분들도 나와 똑같이 걱정하고 계시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더욱 남을 아껴주는 마음과 정의와 공평한 일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도록, 같은 생각을 나누는 모든 인도주의자와 종교인에 대한 나의 호소에 동참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직 인간으로서 대승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의 위대한 종교의 근본을 이루는 인도주의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나는 여러분들과 같은 개인적인 견해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편적인 인도주의가 불가결하다. ??남을 아끼고 동정하는 마음은 세계평화를 지탱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도주의가 그렇듯이, 전 세계의 종교는 이미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세계평화를 향하여 오고 있다. ??개인은 누구나 인류의 필요에 봉사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책임을 갖는다.
티베트 불교가 주장하는 사랑과 남을 아끼는 마음 인도주의가 불가결하다, 혹은 세계의 여러 종교가 평화를 위해 이미 준비를 하고 있다고 예하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으나. 그가 말하는 남을 아끼는 마음은 평화에의 열쇠라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 소책자를 통해 남을 아끼는 마음에 대한 그의 소신을 읽는다. "불교도의 심리학에 의하면, 우리 괴로움의 대부분은 우리가 불멸의 실재라고 오해하고 있는 사물에 대하여 강한 욕망을 갖거나 집착하거나 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욕망이나 집착에 대상을 추구하면, 반드시 침략이나 경쟁을 동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심리적인 과정은 간단히 행동으로 옮겨지고 당연한 결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같은 과정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속에서 계속되어 왔습니다만, 현대의 상황하에서 이것이 행해졌을 경우, 그 효과는 한층 큰 것이 되고 맙니다. 방화, 탐욕, 침략과 같은 '독'을 억제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할까요? 온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혼란의 배후에 있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런 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남을 아끼는 마음이 세계 평화의 정신적인 기틀이라고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우선 먼저, 남을 아끼는 마음이라는 말로써, 내가 뜻하는 바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고 생각합니다. 몹시 가난한 사람에게 연민과 아끼는 마음을 느낄 때는 그 사람이 가난하기 때문에 동정의 뜻을 나타냅니다. 아껴준다는 것은 이타의 정신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한편,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친한 친구에 대한 사랑은 대개 집착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집착이 변화하면, 친절도 변화하여 사라지고 말겠지요. 이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애정은 집착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이타주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타주의에 바탕을 둔 참된 사랑인 경우, 남을 아끼는 마음은 사람들이 계속 괴로워하는 한, 남의 괴로움에 대한 인간적인 반응으로서 변함없이 남아 있겠지요. 이런 종류의 남을 아끼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노력해서 키워야 할 과제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에서라고 하듯이, 작은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감정이 있는 생물에 대한 차별 없는 자발적이고 무조건적인 도정은 친구나 가족에게 품는 무지와 욕망과 집착이 뒤섞인 보통의 애정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가 제창해야 할 사랑이란, 자기에게 해를 끼친 적에 대해서도 품을 수 있을만한 넓은 애정입니다. "어째서 남을 아끼는 마음을 주장하는가하면, 우리는 누구 나가 괴로움을 피해 행복을 추구하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아가서는 '나'라고 하는 분명한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 감정이 행복을 구하는 보편적인 욕구를 결정합니다. 분명히 누구나 모두 같은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려는 평등한 권리도 있기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과 수많은 남과를 비교하면, 자기는 단 한 사람인데 대하여 남은 인원수가 많으니까, 자기보다는 타인 쪽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또한 티베트 불교의 전승에서는, 온갖 유정(감정이 있는 것,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우리의 어머니처럼 생각하는데, 이와 같이 그들 모두를 사랑함으로써 감사함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불교의 이론에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여러 차례나 다시 태어나고 있고 생명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느 것이나, 예전에 한때 우리들의 부모였던 일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온갖 존재는 모두 가족인 것입니다. 종교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사랑과 동정심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없습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부모의 따뜻한 보호 아래에, 늙어서 병고에 직면하면 다시금 남의 친절에 의지합니다. 인생의 최초와 최후에도 타인의 신세를 진다고 할 때, 어찌 인생의 중간에 남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자비로움(모든 사람에게 친밀한 정을 품는 것)이 돈독하다는 것은, 보통 기성 종교의 실천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는 신심의 깊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비심은 종교를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어떤 민족, 종교, 정당에 속해 있는 것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가 인류라는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비심이 풍부합니다. 이 자비심이란 우리가 키우고 응용해야 할 강력한 감정이지만, 특히 인생의 크라이막스에 있어서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을 때, 오히려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행복하고 싶고, 괴로움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모든 사람이 바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서서 생각하고, 수많은 남과 비교하여 자기의 중요성이 적은 것을 염두에 두면, 자기의 가진 것을 남에게 분배하는 일은 가치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나옵니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에 익숙해지면, 진정한 자비심-남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도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게 되고, 남을 사랑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생기는, 매우 훌륭한 부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의 또 하나의 성과이며, 매일 매일의 생활에 매우 도움이 되는 것-그것은 평온함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이 변하고 수많은 곤란한 경우와 계속 부딪치게 됩니다. 조용하고 맑은 마음으로 대처하면, 모든 문제는 잘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미움이나 이기심, 질투, 분노 따위로 마음을 조정할 수 없게 되면 판단력도 일어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은 장님이 되고 격정에 잠긴 순간에는 전쟁을 포함한 무슨 일인가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남을 아끼는 마음과 예지의 실천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특히 세계평화의 기틀을 창조하는 힘과 기회가 그 손에 달려 있는, 국가를 움직이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달라이 라마의 예지적인 책을 읽는 사이에도, 여전히 구형 버스의 엔진은 소리를 계속 내면서 달리고 있다. 우리의 여행길은 멀다-찬미갈(인도 북부에 있는 델리 북쪽의 도시-역자 주)로 향하는 사정이 좋지 않은 길도, 그리고 세계평화의 길도... 달라이 라마의 소책자를 전체적으로 대략 훑어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불교로 개종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다양한 성품의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갖가지 여러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교의의 차이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가 모두 주장하고 있는 선행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종교가 근본적인 영적 가치라니 s점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또한 '여러 가지 정치 조직이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로, 인간 사회 내부의 갖가지 성질에 적합한 것이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공통된 영적 가치에 의해 연결된 각 사회는, 자유스럽게 각자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을 발전시켜야 한다. 남을 아끼는 마음과 관용과 인내라고 하는,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적과도 공존하면서 모든 인류가 함께 평화스럽게 사는 기반이 되는 것은, 우리의 정신적인 강도를 시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상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석양이 어둠으로 바뀌었다. 휘황찬란하게 달이 뜬다. 그는 그 이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그 이상의 여러 가지 의미를 달밤을 여행하면서 충분히 음미할 수 있다니 정말 기쁜 일이다. 당신의 적은 당신에게 인내와 관용을 가르쳐 줍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열두 시간의 버스 여행도 인내와 관용을 가르쳐 주지만, 이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전 4시, 찬다갈에 도착했다. 장말 참기 어려웠다. 장소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는데도 쉬운 일이 아닌 듯 히디.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마음속으로부터 통감하였다.
후 기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윤회전생에 대해 관심이 높은 나라는 아마 미합중국일 것이다.'??(벤처 인 워드(Venture Inward)) 편집장인 A, R, 스미스씨의 말과 같이,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인의 흥미는 상당한 것 같다, 영국인이 캘리포니아에 갔는데, 파티 석상에서 당신의 전생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이런 이야기를 바로 얼마 전에도 들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생각해 볼 때, 착실히 전 미국에 침투하고 있는 뉴에 이지 운동이라고 하는 사회적인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다. 1960년대, 켈리포니다에서 시작 된 뉴에 이지의 작은 물결이 지금은 환경보호 운동에서, 뉴에니지 음악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분야를 휩쓸고 하나의 큰 조류로 성장하여 미국인의 생활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하고 있다.
뜻밖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예로부터 믿어온 윤회전생은, 미국사외의 의식혁명이라고 할 만한 이 새로운 운동 속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 (뉴에 이지 백과사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뉴에 이지 철학에 불가결한 것은 윤회전생 및 이와 상관관계에 있는 카르 마이다. ) (윤회전생이란, 서양 문화에 있어서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뉴에 이지 신념의 두 가지 요서(또 하나는 점성술)가운데 하나이다. 두 가지 모두 '윤회전생과 가르마'의 항목에서 뽑은 것이지만, 이 항목 자체가 (뉴에 이지 백과 사전 )안에서 6페이지 반에 걸친 많은 분량으로 취급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정평 있는 게일 리써치사의 (아메리카 종교학 사전)편자인 J, 고든, 멜튼 박사와 그 외 편집자들의 편집으로 같은 회사에서 출판되고 있다)
여기에는, 미국에 있어서 윤회사상을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또한 뉴에이지 운동의 숨은 원동력이 된 하나의 조직이 있다. '전개되어 가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의 주요한 조직적 구성 요서가 되었다'라고 같은 책에서 평가한 ARE가 바로 그것이다. ARE란 이름은 모르더라도, 에드가 케이시(1877--1945)의 이름은 들은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14,000건 이상의 투시와 예언으로 많은 사람을 도왔고, 2,500건의 '라이프 리당'이라 부르는 개인의 인생을 투시하는데서, 그 사람의 현재의 성격과 체질이나 질병 같은 것이 과거 세에 원인이 있다는 것, 인간은 윤회전생을 되풀이해서 발전되고 개발되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 ARE는,케이시가 남긴 방대한 양의 정보를 보관, 연구, 홍보하기 위해 1931년에 설립된 것으로, 정식 명칭은 Association for Reserch and Enlightenment, Inc.(연구와 계몽을 위한 협회)인데, 에드가 케이시 재단이 그 운영을 맡고 있다. 창설 60년이 지난 지금도 출판 활동이나 연구회, 강연회 활동 같은 것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이 책에 게재된 내용은, 모두 이 ARE의 기관지인(Venture Inward -마음의 내부를 탐구하다)에서 뽑았다. 그러므로 이(벤처 인 워드)지 대해서도 한마디하고자 한다. 미국에서는 현재, (뉴에 이지 저널)(요가 저널)(뉴 리어리티즈)같은 수많은 뉴에이지 지가 발행되고 있으나, 이 잡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선도적인 잡지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원래는 (ARE 저널)이란 이름이었으나, 1984년에 동명인 케이시 전기의 표제를 따서 세계 각국의 11만 7천명의 회원에게 직접 발송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윤회전생이 그 중에서도 큰 위치를 차지하는 뉴에이지라는 새로운 움직임에 대하여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 내용이 너무도 다양하고 본질을 찾기 힘든 탓인지, 우리 나라에서도 그다지 이 운동이 주목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최근까지도 뉴에 이지는 당사국인 미국인의 눈에도, 요령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잡다한 현상을 집약한 것처럼 비춰졌던 모양이다. 미국 신사조 계의 대 선배인 캔 월버 박사조차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요가 저널) 81호 (1988년)의 인터뷰에서 대답하기를, 차네링, 수정을 사용한 심령치료, 피라미드파워, 신비주의, 선, 요가, 셔리 맥레인, 동서의 비교 연구, 에드가 케이시 같은 모두 24항목을 들어, '뉴에이지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 사용되고 있고...매스콤 좌도 간단히 요점을 가진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혀 무엇이 무엇인지 요령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대중 속에 깊게 조용히 번져감에 따라서 차츰 그 본질이 분명해졌다. 셔리 맥레인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유명한 차네러인 케뷘 라이어슨의 말에 의하면, 뉴에이지란 '여러 가지 오래된 전통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응용하는' 사회 운동이다. 근대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선진 제국에서는 무시되어 왔고 , 서구 문명과는 단절된 곳에서만 간신히 살아나갈 수 있었던 주술적, 신비적인 전통에 관한 것-그런 것들이 지금, 또다시 이 운동 속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지금까지 문명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큰 조류를 다고 한꺼번에 표면으로 되살아나 느낌이다. 이 책의 주제인 윤회전생도 이 움직임 덕분에 바로 과거에서 현대로 '전생'한 것이었다.
윤회란 '삼사라'라는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이 말이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 것은, 고대 인도의 철학서적(우파니샤트)라고 한다. 하지만 이 사상은 동양에서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고대 켈트나 서구 문명의 원천인 희랍에서도 믿어져 왔었다. 또한, 제 6장 (그리스도의 전생)에 있듯이, 기독교의 내부에서도 믿어 왔었다, 이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참된 종교의 근원은 하나인 이상, 모든 종교의 가르침도 하나인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본문을 읽어보기 바라고, 여기에는 교회가 국가나 권력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윤회전생 사상이 기독교에서 배제되고 말았다-다시 말해서 구노시스파를 비롯한 윤회전생의 신봉자들이 이단으로 처단되고 말았다-는 사실들이 갖가지 자료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윤회 전생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존재와 운명도 모두 스스로의 책임과 관계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구원'이란 남에게서 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라, 원래 신과 같이 있었으나 물질계에 전략하여 육신인 몸에 갇혀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잊어버린 존재이다, 자기자신의 마음속에 파묻혀 윤회 전생하여 배우면서 깨달음에 이른다. '당신들 자신을 출발점으로 궁극적 존재인 그를 찾으십시오... 슬픔, 기쁨, 사랑, 미움의 원인을 파악하십시오. 당신들이 이와 같은 주의 깊게 음미한다면, 당신들 자신의 속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어떤 구노시스주의자가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본래적인 자기가 지극히 높은 존재인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인식하는 일이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의 마음 속에 확고한 의지처를 갖고, 권위에 맹종하는 일이 없는 사람과는 달리, 신의 권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차츰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윤회를 믿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을 받들고, 완성된 때에 인간은 모두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이소그리스토'라고 불리우는 수도사들이 나타나자, 당시의 위정자는 자기의 권력의 위기를 알아차리고 윤회 전생설을 배척하기 위해 한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이것이 서기553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 5회 종교회의에 내놓은 '오리게네스에 대한15개 조항 이단 선고문이다. 이 때를 시점으로 하여 윤회전생은 기독교의 교의에서 빠지게 되었다. 또한 제 3장에 쓴 것과 같이, 무서운 탄압 때문에 윤회를 신봉하는 최후의 그리스도 교도가 된 카다리파가 13세기에 전멸되었을 때 윤회전생 사상은 기독교에서 사라졌다. 카다리파의 원류에 대하여는 제 3장에서 기술되고 있는 보고밀파 유래설 이외에도, 고대 마니교라는 설, 구노오시스설, 또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카다리파 자신은 '그리스도로부터 대대로 계승되었다' 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윤회의 교의를 잃기 이전에 기독교는 이미 또 하나의 중요한 논리도 버리고 있다. 325년의 니케아공의회에서 ' 신과 성령과 그리스도는 일체이다'라고 하는 삼위일체설을 채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지닌 인간으로, 성령의 힘에 의하여 신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주장을 배척한 것이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인간이, 같은 인간인 그리스도를 모범 삼아 완전성을 획득하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며, 내면의 소리에 따라서 하나님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길을 막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그리스도는 인간과는 들리 하나님이라고 하는 새롭게 채택된 주장에 의해,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구별되는 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가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서서 사람들의 구원을 맡겠다고 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칭하는 것이 주류가 되고 남을 배척할 때, 이단으로 배척된 전통은 문명의 밑바닥에 흐르게 되고 표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즉, 정수를 잃은 기독교만 남은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그리스도교의 권위가 얼마 후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도 하나의 권위에 의지하면서 자기 책임을 회피한다고 하는 패턴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정통 신앙 유지와 이 달을 부정하는 태도는 그 뒤 오랫동안 서방 적인 인간의 혼을 지배하는 강력한 역사적 원점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얼마 후에 세속화된 형태로 비 서양세계에 대한 유럽 정신의 존재 방법을 규정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낡은 가치체계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짐승들'이라고 부르면서 노예적인 도덕으로부터 탈출을 주장하면서 '모든 신들은 죽었고, 이제야 우리는 초인이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니체가 주장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겨우 100년쯤 전의 일이었다. 위태롭게 된 하나님의 자기에 이데올로기나 과학과 같은 대리인을 않히고, 사람들은 히리즘이라는 아슬아슬한 위험한 길을 걸어 왔다. 그러나 이 대리인도 그다지 의지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자, 늦었지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잠자고 있던 수맥을 재발견하고, 잃어버린 낡은 전통을 새로운 모습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21세기를 예견하고 뉴에이지 운동에 주목하는 미래 예측학자인 죤 네스빗츠는 "뉴에이지 무브먼트의 첫 번째 원칙은 개인적인 책임이다. 이것은 고대 동양의 카르마, 다시 말해서 인과 응보라는 가르침의 서구적인 해석이다. 성경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자기가 뿌린 씨는 스스로 거두지 않으면 안되느니'가 된다. 하지만 자신만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제 멋대로' 식의 개인주의는 아니다. 이것은 개인을 지구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윤리적인 철학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쟉 퍼셀씨의 '차네링 하는 라자리스'도 제 11장에서 '사람들이 자기 능력을 회복하여 자립하기 시작하고 자립에 따르는 책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함에 따라 과거의 권위는 개인의 권위로 대체될 수 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혼의 자립'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이것을 상징하기라도 하듯이, 한 장면을 나는 지난 번 소련의 쿠데타 사건 TV보도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어떤 아나운서가 시민에게 발포할 것이나, 하고 질문한 것에 대해 전차의 병사는 '명령일지라고 같은 국민을 죽일 수는 없다'라고 단호히 말한 장면이다. 결국 이 병사처럼, 자기 내면의 소리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힘이 결집되었으므로 무력을 배경으로 한 군대나 KGB의 권위는 패배 당했다. 이 쿠데타의 종결을 전하는 신문지상에는 '국민이 자각했다', '오직 복종을 받아들일 시대가 아니다. 라는 활자가 크로즈업 되었다. 사람들이 권위나 독단에 복종하는 시대는 이제 끝나고 있다. 외형적인 권위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온 세계에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자기는 원래 뭔가를 사랑하도록 되어 있다... 원래 남과 연관되는 것이며, 인간은 성장할수록 더욱 더 애정이 나타나게 됩니다. 감상적인 뜻에서 사랑이 아니라, 남이나 자연이나 생명, 우주 같은 것에 대해 아끼는 마음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 -이것은 제 12장의 니들맨 이야기이다. 우리는 윤회 체험을 몇 번씩 되풀이하면서 영혼의 성장을 거듭해 왔다. 지금 우리는 자기 내면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자신들이 이 지구상에 온 것은 배우고 성장하여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해 온 인류의 1990년대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사랑에 의한 선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1994.9. 편역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