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홍석모(洪錫謨, 1781년∼1857년)의 시문집. 오사란(烏絲欄)에 필사한 필사본(수고본). 50권 21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부(敬敷), 호는 구화재(九華齋)·근와(近窩)·도애(陶厓)·망서당(望西堂)·사옹(蒒翁)·옥탄거사(玉灘居士)·일양헌(一兩軒)·자각산인(紫閣山人)·찬승자(餐勝子).
조부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이며, 부는 이조판서 훈곡(薰谷) 홍희준(洪羲俊)이고, 사촌형인 이조판서 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이며, 모는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낸 이장호(李章祜)의 딸이고, 부인은 대사헌(大司憲)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한용탁(韓用鐸)의 딸이며, 홍건주(洪健周)와 홍선주(洪善周)가 아들이다.
유년기의 교육은 조부인 홍양호에게서 이루어졌고, 집안은 풍산홍씨로 조선후기의 벌열세가에 속한다.
그는 조부로부터 서예와 경전을 직접 배웠고. 교유한 인물로는 송지양(宋持養), 송만재(宋晩載), 최황(崔璜), 남진화(南進和), 이탁원(李鐸遠), 정원용(鄭元容), 이교영(李敎英), 홍현주(洪顯周), 이명오(李明五), 조운현(趙雲鉉), 남진화(南進和), 윤명규(尹明奎), 조봉진(曺鳳振), 박영원(朴永元) 등이 있으며 서유구(徐有榘)를 종유(從遊)하였다.
유년기는 종형인 관암과 함께 조부 홍이계를 모시면서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나, 18세 무렵 혼인을 계기로 홍이계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1804년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2등으로 합격하였다.
1815년 35세에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대학장의(大學掌議)가 되었다.
1818년 38세에 추조(秋曹)에서 근무하였고, 1819년 39세에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부임하였으며, 1820년 40세에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826년 겨울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떠나는 아버지 홍희준을 배행하고 연행을 하였다.
1832년 52세에 세자익찬(世子翊贊)이 되었고. 1833년 4월 17일 태창령(太倉令)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 9일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임명되었다.
1839년 59세 되던 4월 3일 강릉령(康陵令)에 임명되었고, 그 해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국사(菊社)라는 시사를 주도하였고. 1857년 10월 15일 부인이 죽고 나흘 뒤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