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 교정에 있는 현충 시설물. 왼쪽부터 삼일탑, 표충탑, 강재구 소령 흉상. 서울고총동창회는 이 3가지 현충시설 외에 2010년 6·25 참전 기념비를 세웠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서울고등학교 교정은 마치 현충원을 방불케 한다.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顯忠) 시설이 4개나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이갑성 옹의 친필 휘호인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가 새겨진 삼일탑(三一塔), 6·25 당시 학도병(學徒兵)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표충탑( 表忠塔·이승만 대통령의 휘호), 훈련 중 중대원 한복판에 떨어진 수류탄에 몸을 던져 중대원을 구하고 산화(散花)한 故 강재구 소령 흉상, 그리고 2010년에 건립된 6·25 전쟁 참전 기념비가 그것이다. 이 외에도 학교 본관 건물 복도에는 참전용사들 전원의 이름이 새긴 명패가 걸려 있다. 서울고 재학생들은 특별한 날이 되면 이들 현충시설에 헌화행사를 가진다.
서울고총동창회는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2010년 서울고 출신 참전 동문들을 기리기 위한 6·25 전쟁 참전 기념비를 건립했다. 서울고는 서울지역에서 가장 많은 학도병 참전자와 전사자를 냈다. 기념비에는 참전자와 전사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시 기념비 제막식 후 생존 참전 용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서울(중)고는 6·25 전쟁 당시 서울지역에서 학도병 참전자와 전사자(35명)가 가장 많이 나온 학교다. 전쟁기간 동안 457명의 재학생이 참전하였는데, 이는 1회부터 6회까지의 졸업생 1198명의 40%에 해당하는 숫자다. 특히 3회 기수의 경우 169명 중 118명이 참전, 70%에 이르는 참전율을 기록했다. 6·25가 발발했을 때 서울고는 개교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학교였다.
2010년 6·25 전쟁 참전 기념비 제막식 후 열린 호국음악제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강대신 서울고총동창회장.
서울고 제18대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강대신(姜大信) (주)케이티엠파트너스 대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명문인 이튼스쿨과 일본의 귀족학교인 학습원(學習院)의 20%대에 불과한 참전율과 비교했을 때 단일 학교에서 이러한 참전율을 기록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있는 경이적이고 자랑스러운 호국(護國)의 역사”라고 말했다.
서울고동창회는 모교(母校)의 호국 역사와 선배들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2010년 10월 6·25 전쟁 60주년에 맞추어 서울고동문참전기념비를 건립한 것이다. 기념비에 새겨진 ‘자유민주주의수호’라는 휘호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이다.
당시 서울고총동회장으로 참전비 건립을 주도했던 강대진 회장은 “기념탑에 새겨 넣을 휘호를 받기 위해 내가 직접 이명박 대통령께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며 “참전 동문과 전사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이 기념비가 후손에게 오래도록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큰 뜻을 전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1년 내내 이어진 서울고의 전쟁영웅 기리기 행사
강 회장은 참전기념비 건립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가 서울고 동창회장을 맡기 얼마 전 국립 서울대에 6·25 참전 기념비가 없다는 어느 교수의 신문 기고 칼럼을 읽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 제가 동창회장이 되었을 때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저는 이를 계기로 호국과 현충(顯忠)의 교풍(校風)을 이어온 우리 서울고가 모범적인 기념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온 서울고 동문들의 힘을 모아 기념비건립을 추진했습니다.”
서울고총창회는 모교 출신 참전자들의 수기를 모아 <경희궁의 영웅들>이라는 기념문집 편찬했다.
강 회장은 아울러 서울고 출신 참전자들의 수기(手記)를 모아 기념문집 편찬사업을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경희궁의 영웅들>이라는 서울고 동문 참전기념문집은 2010년 10월16일 참전기념비가 준공되는 날 기념비 앞에 헌정되었다. 강 회장은 “참전기념비 준공식에 참석한 서울고 출신 노병(老兵)들은 저마다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고 전했다.
아울러 서울고총동창회는 6·25 발발 60주년이 되던 2010년 한 해 동안 모교의 참전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참전 선배들과 함께한 서울고 가족 마라톤대회, 육군사관학교 내의 강재구 소령 동상 헌화 및 추모 테니스대회, <6·25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라는 주제의 학술대회, 재학생들의 6·25 관련 백일장, 호국가을운동회, 6·25 전적지 참배 산행 및 전투기념비 헌화, 동문 참전기념비 건립과 호국예술제, 참전동문 기념문집 발행 등이 그것이다.
이듬해인 2011년 7월에는 미국 뉴욕에서 서울고 재미연합동창회를 개최해 미국에 거주하는 서울고 1회부터 6회까지 참전 동문을 초청 뉴저지주 포트리시(市)에 있는 6·25 전쟁 참전 기념비에 헌화했다. 이 행사에는 30명의 미국 6·25 참전 용사들이 초청되었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찰스 랭겔 연방하원 의원과 포트리시 시장도 첨석했다.
강대신 회장은 “이 행사는 미국 내 50여개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며 “특히 당시에 서울고 출신인 김관진 국방장관이 보낸 국방부 로고가 들어간 기념 시계를 미국 참전 용사들에게 전달했는데, 노병들이 무척 감격해 했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미국의 많은 언론이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회가 왜 미국까지 와서 참전비에 헌화하느냐고 물어 왔는데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었다”고 말했다.
“61년 전 조국이 위태로워졌을 때, 당시 서울고 재학생들이 자원입대 참전하여 조국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 국민소득은 30달러 였습니다. 오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2만달러, 세계 12위권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서울고는 우리 조국을 구한 모교의 참전용사뿐 아니라, 미군 참전용사들까지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013년 6월, 정전 60주년을 맞아 국방부는 서울고 동문 참전용사의 이름을 새긴 명패를 전달했다. 명패에는 서울고 1~6회 출신 참전용사 45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패는 서울고 본관 건물 복도에 걸려 있다.
국군의 간성(干城)을 길러온 호국의 요람
서울고의 호국 전통은 6·25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에도 서울고는 수많은 국군의 간성(干城)을 길러낸 호국의 요람역할을 해왔다.
7회 졸업생의 경우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인원이 5명, 8회 때 27명, 9회 때 31명 등 매년 10명 이상이 입교함으로써, 전쟁 후 상당기간 동안 최다수 육사 입학생을 배출한 학교라는 영예를 유지했다. 그 결과 13회까지 장군만 32명이 탄생했고, 16회까지 확장하면 서울고의 육군 장성 출신은 40명에 이른다.
서울고가 6·25 당시 이토록 높은 참전율과 전사자를 기록하고, 지금까지도 호국의 전통을 이어온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서울고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고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 현재의 경희궁 터에서 개교(開校)했다. 그 자리는 일제가 경희궁을 헐고 지은 경성중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경성중학교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한 엘리트 양성을 위해 지은 학교다. 일제는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 궁궐을 철저하게 훼손하였고, 창경궁에는 동물원을, 경복궁에는 총독부를, 경희궁에는 학교를 만들었다. 경희궁에는 신사(神社)까지 두었다. 광복 후 이 신사를 헐어버리고, 삼일탑을 세웠다. 이 탑은 현재 서초동 서울고 교정(校庭)에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김원규 서울고 초대교장의 흉상.
서울고 출신의 많은 동문들은 광복 후 생긴 신생학교가 10년이라는 이른 시일 안에 명문고로 우뚝 서고, 호국의 전통을 이어온 배경에는 김원규(金元圭) 초대 교장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원규 교장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때 함흥고보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서울시 교육국장 시절 6년제 중학교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하는 등 우리 교육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교육자다.
많은 서울고 출신 인사들은 “김 교장선생님은 ‘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으며, 그의 애국심과, 교육방침과 리더십이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증언하고 있다. 서울고 본관 출입구에는 김 교장의 가르침을 적은 글귀가 붙어 있어, 재학생들에게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재학생 절반 이상이 이북 출신
강대신 회장은 “서울고 출신의 남다른 애국심과 호국 정신 이면에는 이북 출신이 많았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울고 초창기 입학자의 과반수가 이북 출신이거나, 월남자들의 자제들이었습니다. 이들 서울고 선배들은 공산주의의 실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반공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전쟁이 나자 이들 다수가 자원해서 전장으로 뛰어들었고, 많은 분들이 전사했습니다. 이들이 세운 교풍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강 회장은 “서울고의 학풍은 ‘엘리트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며 “이런 교풍 속에서 배운 서울고 출신들은 어디서나 솔선수범해왔고, 국가와 사회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교풍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우리 서울고 출신들이 제일 먼저 나서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역사는 승리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라며 “이런 사실을 볼 때 지나간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젊은이들에게 잊혀져가는 6·25, 잘못 이해되고 있는 6·25를 명확하게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고 동문 참전용사들의 수기
2010년 발행한 서울고 동문 6·25 전쟁 참전 60주년 기념문집인 <경희궁의 영웅들>에는 다양한 참전 수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인상적인 수기 몇 편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독립포병 대대로 활약했던 서울고 출신의 유인준(3회) 중위. '경희궁의 영웅들'에서 발췌.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계속 총을 쏘라”
김봉태(3회, 육군소위)
전쟁이 나자 인민군 앞잡이들이 부친과 큰 형님을 붙잡아 갔고, 인민재판으로 처형되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가슴에 한을 품은 채 혹여나 아버님과 형님의 유골이라도 거둘 수 있기를 소망하시며, “절대로 장사동 집을 팔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3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전쟁 당시 서울에서 숨어 지내던 나는 서울이 수복되자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수도 없이 불렀다. 수복 후 나는 육군에 지원하여, 군인이 되었고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우리는 5월경 전열을 제정비하고 인제 동남방 소양강을 경계로 남쪽에 포진했다.
그때 중공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순간 터지는 포탄에 토사를 뒤집어쓰고, 의식을 잃었지만, 다시 깨어나서는 통증을 참고 숨돌릴 사이도 없이 혈투를 벌여야 했다. 나는 소대원에게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계속 총을 쏘라”고 명령했다. 어차피 도망쳐도 중공군에 죽을 몸이었다.
탄약이 떨어지자 강을 넘어온 중공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하지만 밀려드는 인해전술을 당할 수가 없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열흘 동안 산속을 헤매며 맴돌았지만, 결국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90일 동안 공포, 굶주림, 추위로 점철된 포로생활을 마치고, 휴전협정이 되면서 그리던 조국 품으로 돌아왔다.
6·25에 갖혀버린 어느 전쟁 영웅의 삶
목진홍(4회, 육군소령)
6·25 전쟁 당시 입은 부상으로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며 외롭게 살아온 목진홍씨와 그를 한평생 간호하며 헌신해 온 부인 방순이 여사.
※목진홍씨는 6·25 전쟁의 부상으로 극심한 언어장애, 기억력 쇠퇴, 뇌 퇴행성 파킨슨씨병,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급격한 노화 등 악성 질환에 시달리며 60년을 고독 속에서 보냈다. 목진홍씨는 서울고 동문에서 수기를 편집할 당시 80세였다. 그는 후배들이 찾아와 서울고 모표가 새겨진 벨트를 선물을 받고, 북받쳐 오르는 감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수기는 부인과 장남의 구술로 재구성되었다.
천석꾼 집안에 태어난 나는 부친이 최상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서울고에 진학시켰다. 전쟁이 나자 나는 “학업도 좋지만, 조국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태겠다”며 아버지께 입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입대가 아니라도 나라에 이바지할 길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렸지만, 나는 결국 포병 소위로 입대했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서울탈환작전, 봉일천 지구 전투, 두매리 전투 등을 거쳤고, 수많은 중공군을 물리친 공으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포탄을 맞아 쓰러졌고, 육군수도병원 시체 안치실로 보내졌다. 깨어보니 주위는 깜깜하고 목이 말랐다. 기침도 났다. 시체확인을 위해 병원에 온 딸이 내 기침 소리를 듣고 나를 긴급히 후송시켰다. 나는 의식은 돌아왔지만, 머리에 파편 7개가 박혀 반신불수가 되었다. 나의 부상에 충격을 받은 부친이 돌아가셨다.
1953년 부산 3육군병실을 드나들던 간호사 방순이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1957년 결혼식을 올렸다. 나의 자녀 4남매가 모두 공부를 잘해 성공했고, 막내는 의사가 되었다. 나는 1958년 병상에서 소령으로 전역했지만, 1급 상이용사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30~40대에는 푼돈이라도 벌고자, 휠체어를 타고 화장지, 연필, 칫솔 등을 파는 길거리 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상의 후유증이 너무 커 병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부인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등 시장이란 시장은 전부 누비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60년간의 고독한 생활을 보내왔지만, 나라를 위해서 지혜와 충성을 다했고, 부상당했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으로 인한 나와 같은 피해자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통한과 눈물의 포로생활 2년 7개월
현재복(5회, 육군일등중사)
서울 수복 후 학교를 찾아와 수학의 기초를 갖춘 학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모병관의 말에 군에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대공세에 끝내 포위망을 탈출하지 못하고 나는 포로로 붙잡혔다. 3월 하순경 평양 동쪽 강동군에 있는 수용소에 도착했다. 땅굴이었다. 이 굴에서 매일 한 두명씩 사람이 죽어나갔다. 밤낮없이 활주로 개설 작업 등의 노역이 이어졌다. 급식은 수수 잡곡밥에 소금국이 전부였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UN군이 폭격을 예고하는 삐라를 뿌렸다. ‘8월말에 대공습 예정이니 노인과 부녀자는 피신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아니 이런 전쟁방식도 있나’며 고소를 금치 못했지만, 얼마 뒤 폭격은 예고대로 정확하게 시행되었다. 이 이야기는 요즘 좌파들에게 물들어 날뛰는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포로 교환에 포함돼 8월 초순에 개성에 왔는데, 수용소에서 처음으로 현미밥에 감자국을 먹고 나니 꿈만 같았다. 8월 하순 드디어 판문점을 통과했다. 포로 교환 시 그들이 지급한 중국산 인민복과 신발은 몽땅 벗어 던졌다. 문산의 환영식에서 팬티차림으로 애국가와 만세삼창을 외치던 그 감격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하리오!
귀환 후 원대 복귀하여 군 복무를 마쳤고, 학업을 계속하고자 학교에 갔다. 학업을 중단한 지 3년 반이 지났고, 20대의 성년이 되었다. 학교 측은 자동 복교(復校)가 안 된다고 해서 선발고사를 보고 합격해서 복학할 수 있었다.
김원규 교장은 파안대소하며 입학허가서에 등록금 등을 일체 면제하라고 기재하고 나서 왕도장을 찍으셨다. 나는 학업에 매진하여 교직에 종사하여 정년을 마쳤다. 인격이 존중되고 소질과 능력을 발휘하여 인생을 보람을 이룰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이들 세 명의 수기 외에도 <경희궁의 영웅들>에는 키가 컸던 탓에 중학 2년 때 길에서 잡혀 의용군에 끌려 북행했다가 간첩으로 돌아와 자수한 이야기(7회 김용규), 미군 노무대원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9회로 졸업한 7회 출신 이야기(7회 이남규), 선후배 두 명이 중공군에 포위되어 탈출하면서 후배(6회 함경호)가 쓰러진 5회 선배(설규옹)를 이끌고 며칠 만에 아군 집결지로 돌아온 사연 등 서울고 출신 참전 동문들이 겪은 생생하고, 감동적인 수기 48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