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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
하남[허난성(河南省)] - 정주(鄭州) |
♧ 주소 |
鄭州緯二路 10號 |
♧ 전화 |
0371-5908141 |
♧ 홈페이지 |
http://www.henanews.org.cn |
♧ 설명 |
허난성(河南省)은 중국 중동부에 위치하고 황하(黃河) 중하류, 황화이하이 (黃淮海)평원 서남부에 위치하고 대부분의 지역이 황하(黃河)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허난(河南:강의 남쪽)”이라 칭한다. 2000여 년 전, 허난은 중국 9주 중의 중심인 위저우(豫州)으로 “豫”라 불려졌으며 “중저우(中州)”, “중원(中原)” 이라고도 한다. 허난(河南)과 허베이(河北), 산시(山西), 산시(陝西), 후베이(湖北), 안후이(安徽), 산둥(山東)과 인접해 있다. 총면적은 16.7만km2이며 이 지역에 유입되고 있는 황하(黃河)의 면적은 700여km이다. |
♧ 위치 |
옛날 구주(九州) 중의 중주(中州), 중원(中原), 동경 110.22도-116.38도, 북위31.23도-36.22도에 위치한다. 그 면적은 167,000 평방 킬로미터이고, 년평균기온은 13-15도이다. |
♧ 행정 |
전체성은 12개의 큰시, 5개의 구, 15개의 작은 시, 103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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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남성(河南省) 중국 화북지구(華北地區) 남부에 있는 성. 면적 16만 7000 km2. 인구 약 8949만(1994). 성도는 정저우[鄭州]. 북쪽은 허베이[河北], 북동쪽은 산둥[山東], 동쪽은 안후이[安徽], 남서쪽은 후베이[湖北], 서쪽은 산시[陝西], 북서쪽은 산시[山西]의 각 성(省)과 접한다. 그동안 전설상의 나라로 알려졌던 중국 고대국가 은나라가 실재했던 나라로 밝혀졌다. 그 도읍지는 현재의 정주였는데, 중국 고대 문명은 정주를 중심으로 한 하남성에서 발전했다. 은이 멸망하고 주가 일어났으며 다시 주가 쇠약해지며 춘추 전국시대가 전개 되었는데, 모두 바로 이 하남성을 무대로 펼쳐진 역사였다. 그래서 혹자는 "중화"의 발상지라고도 한다. 또한 예로부터 전국 제일을 자랑하는 밀을 비롯하여 목화, 땅콩, 참깨등의 경제박물도 재배한다. 또한 북경~광주, 연운~란주간의 철도가 정주에서 십자로 교차하며, 지선도 개발되어 있고, 평지를 가로지르는 하천도 수운에 이용된다. 현재의 성도 역시 정주이며 근처에는 5악의 하나인 崇山이 있고 소림사가 있다. 그외 주요 도시로는 역시 古都인 개봉과 낙양을 들 수 있다. 또 하남성에는 노자의 출생지인 녹음과 두보의 고향인 공현이 있어 역사적으로 볼 곳이 많다. 지형적으로는 서부의 산지, 동부의 평원으로 나누어진다.
즉, 서부산지는 북서부의 타이항[太行]산맥, 서부의 친링계[秦嶺系]의 푸뉴[伏牛]산맥, 남부의 퉁바이[桐柏],다볘[大別] 산맥 등으로 이루어지고, 화북평원은 북부의 황허강[黃河],화이허강[淮河]에 의한 평원과, 남부의 한수이강[漢水]에 의한 난양평원[南陽平原]으로 나누어진다. 수계(水系)로는 그들 하천 외에 하이허강계[海河系]가 있는데, 모두 황천(荒川)으로 예로부터 자주 수해를 일으켰기 때문에, 공산정권 성립 후 치수공사를 하여 북서부의 싼먼샤[三門峽]댐·평원부의 런민성리거[人民勝利渠],왕라오보축홍구[王老波蓄洪區] 등이 완성되었다. 또한 예로부터 농업도 활발하여 전국 제일을 자랑하는 밀을 비롯하여 목화,땅콩,참깨 등의 경제작물도 재배한다. 서쪽의 산지에서는 임업,과수재배가 이루어진다.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원료를 이용한 공업도 발달하였다. 자오쭤[焦作],하오비[鶴壁] 등의 석탄, 서쪽의 철광을 이용한 철강,기계, 싼먼샤 등의 전력, 화학 부문을 비롯한 중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석탄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우한[武漢]까지 수송되어,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콤비나트를 형성한다. 또한 이들 생산물은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망에 의해 성내(省內) 및 전국 각지로 분산된다. 허난성은 역사적인 도시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사적,명승지도 매우 많다. 카이펑[開封]의 샹궈사[相國寺], 뤄양[洛陽]의 룽먼석굴불상군[龍門石窟佛像群], 중국 최초의 절이라고 하는 바이마사[白馬寺] 등이 있다. | |
낙양 |
≪ 낙양(洛陽 : 뤄양, Luoyang) 하남성의 서쪽, 황하의 남쪽 해안과 낙하의 북쪽해안에 위치한 낙양은 중국 6대 고도의 하나인 유서 깊은 도시로서, 기원전 770년 주(周)나라의 수도가 된 이래로 동주(東周), 동한(東漢), 조위(曹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隨), 당(唐), 후량(後梁), 후당(後唐) 등 9개 왕조가 도읍을 정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아홉 왕조의 도읍(九朝古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 1세기 이후 불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낙양에는 한(漢),위(魏),당(唐) 등 여러 왕조의 유적과 중국 3개 석굴의 하나인 용문석굴, 백마사등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낙양이 가장 번영했던 것은 장안이 도읍으로 정했던 당나라 때이다.서안이 정치의 도시였다면 낙양은 예술의 도시로 전국시대의 노자, 당나라의 두보,이백,백낙천 등 많은 문인과 예술인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예술의 꽃을 피웠다.
특히 후한에서 당대까지의 사이에 정치중심지 서안에 비해서 경제·학술·문화의 국제적 중심지로서 번영했으며,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한 "삼국지(三國志)"이야기도 후한말기의 낙양이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 낙양의 지리적 위치가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천연적인 요세이다.또한 河南省 서부 지역을 지배하려면 반드시 낙양을 점령하여야 하므로 낙양에서는 수 많은 전쟁들이 일어났다. 이 때 낙양사람들은 약탁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보물들을 땅속에 뭍어 두었다. 더욱이 당나라가 멸망한 후부터는 전란이 끊이지 않아 많은 문화 유적들이 소실되거나 없어졌다. 지금은 용문석굴과 중국 최초의 절이라는 백마사를 보기 위한 관광객이 많이 몰려들고 있으며, 비단이 싸기 때문에 비단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낙양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서 사계절이 있다. 봄은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이 내리며, 가을은 온화하며, 겨울은 매우 춥다. 연평균 기온이 14.86°C 이며,강수량은 578.2mm 이다. 낙양 여행의 가장 좋은 시기는 봄,가을이다. 봄은 비록 건조하지만 목단꽃이 만발한 낙양을 볼 수 있으며, 가을은 신선하고 국화꽃을 볼 수가 있어 또다른 느낌이 든다. | |
≪ 용문석굴(龍門石窟 : 롱먼스쿠, Longmen Caves) 중국의 이름난 3대 예술보물고의 하나로 현존 감실 2,100여개, 불탑 43좌, 조각상 10만여기, 비문 3,600여건에 달한다. 가장 유명한 불상은 높이 17.4m 되는 봉선사의 노사나불상으로 성당시기 조각예술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 이곳을 빼고는 낙양을 다녀왔다고 말하지 말라. 뤄양 교외의 최대 볼거리인 룽먼석굴은 시의 중심에서 남으로 약 13㎞ 떨어진 곳의 이허(伊河) 부근에 펼쳐져 있다.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다퉁에서 뤄양으로 수도를 옮긴 494년경에 윈강석굴에 이어 건축한 것이다. 그 이후,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수(隋), 당(唐) 등의 왕조가 이어지는 400년 동안 보수를 거쳐 훌륭한 석굴군이 탄생하였다.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마주보는 벼랑에 새겨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동굴은 약 1,352개이다. 동굴 내에는 감(龕)이 약 2,100, 불상이 약 10만개, 불탑이 약 40개, 탑명이나 석각이 약 3,600개 등이 새겨져 있다.
산의 표면이 견고하기 때문에 바위에 직접 새겨 놓은 것이 특징으로 훌륭한 벽화를 가진 둔황(敦惶)의 고굴과 비교하면 룽먼석굴은 정교하고 치밀한 조각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관광객이 주로 방문하는 곳은 볼 것이 많이 모여 있는 이허(伊河) 서쪽의 룽먼산(龍門山)이다.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잠계사(潛溪寺) 동굴과 그 옆의 빈량삼(賓陽三) 동굴은 북위(北魏)시대에 총 80만 명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만불(万佛) 동굴에는 양쪽 벽에 새겨진 수㎝의 작은 불상이 1만 5,000개나 있다. 그리고 석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봉선사(奉先寺) 동굴은 제일 볼 만한 곳으로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앙에 앉아 있는 노사방(盧舍邦) 불상은 높이 17m이며, 당(唐)나라 유일의 거상으로 초기 당나라의 대표적 걸작이다. 그 얼굴은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석문으로 유명한 동굴인 고양(古陽)동굴은 룽먼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의 하나인 이궐불감지비(伊闕佛龕之碑)는 룽먼 20품의 하나라 할 정도로 예술성이 높은 것이다. 그 옆의 약방동굴에는 당나라의 한방약 약품조제법이 새겨진 중요한 석탑도 있다. | |
≪ 백마사(白馬寺 : 바이마쓰(Bai Ma Si), White Horse Temple)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건조한 첫번째 사원이다. 기원 68년에 건조, 현존사원은 명ㆍ청 시기에 재건된 것으로 전당이 100여칸이나 된다. 시의 동북쪽 12㎞ 떨어져 있는 한위(漢魏)의 낙양성 내에 있다. 백마사가 창건된 것은 후한(後漢)시대로 불교 전래 후의 중국 최초의 사원이다. 절의 이름은 천황이 인도에 파견한 일행이 백마(白馬)에 경전을 싣고 돌아온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백마사로 인해 불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절 입구 양쪽에는 송(宋)나라 때 만들어진 두 마리의 백마상(白馬像)이 서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는 왕주전(天王殿)이 서 있고, 그 뒤로 대불전, 대웅전 등의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대불전에는 무게 1.25t의 대철종(大鐵鍾)이 있고, 대웅전에는 원(元)대에 조각된 십팔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절의 동쪽에는 13층 정도 되는 약 24m의 제운탑(齊雲塔)이 있다. 금(金)나라 1175년에 세워진 석탑으로 탑의 앞에서 손뼉을 치면 개구리 울음소리를 닮은 메아리가 되돌아온다고 한다. 원래는 이곳까지 백마사 경내였다. 백마사 경내는 모란이 피는 시기에 찾아보는 것도 좋다. | |
≪ 관림당(關林堂) 속칭 관제묘로 삼국시기 촉(蜀)나라 장수 관우의 수급이 묻힌 곳으로 전해진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의 룽먼(龍門)석굴로 가는 도중에 삼국지로 유명한 관우(關羽)를 기리는 관림당(關林堂)이 있다. 삼국시대 촉(蜀)의 장군이었던 관우는 오(吳)나라 손권(孫權)과 싸워 후베이성(湖北省)의 쉬안창(宣昌) 근처의 탕량(唐陽)에서 패했다. 손권(孫權)은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우의 목을 잘라 보냈다. 이에 조조는 관우를 의사(義士)라 하여 제후의 예를 갖추어 이곳에다 극진히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에 이곳에 후삼전(後三殿)이 세워졌다. 관림당에는 장대한 관우상 외에 역대 묘지의 비석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이 있고, 건물의 벽면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관우가 사용하였다고 하는 3m 정도 되는 칼도 있다. 삼전의 뒤에는 팔각의 붉은 담으로 둘러싸인, 관우의 머리를 묻었다는 무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뤄양오대석각예술관(洛陽五代石刻藝術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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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거이의 묘(白居易墓) 향산, 용문교 왼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백거이의 묘인 백원은 백거이가 생전하던 839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향산에 왕래하며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 등의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며,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무덤을 조성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나즈막한 언덕의 비탈길이 나오고, 여기저기에는 정자와 기념관도 서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돌아가면 평평한 곳에 백거이의 무덤이 있는데, 직경이 10m안팎, 높이 2.5m쯤 되고 밑둥에는 화강암으로 호석을 둘렀다. 무덤 앞에는 일주석문과 거대한 백낙천의 사적비, 일본인 불교신자들이 세운 백거이의 시비들이 서 있다. 백거이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사람이다.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다. 27세 때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좌습유(左拾遺) 등을 지냈으나 그리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고, 나이 50이 넘어서야 항주와 소주의 자사(刺使)를 역임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 향산에 은거하면서 시와 술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시는 민중시인, 사회시인, 풍유시인 등으로 불릴 만큼 하층빈민의 입장에서 세상에 대한 불공평을 개탄하는 내용이 많다. 그의 풍유시 170여수와 신악부(新樂府) 50수는 평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을 인본주의적인 견지에서 파헤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테마로 한 "장한가"를 비롯하여 "비파행(琵琶行)", "진중음(秦中吟)" 등을 들 수 있다. | |
≪ 향산사(香山寺) 룽먼석굴 건너편 강가에 있는 향산(香山)은 석굴의 수는 적지만 산중턱에 중당(中唐)기의 시인 백거이(白去易)가 방문했던 것으로 유명한 향산사(香山寺)가 있다. 그의 시는 대중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평이하고 명쾌한 것이 특징으로 대표작으로는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이 있다. 만년에는 불교에 심취해 이 향산사에 살았고, 이곳의 계곡미를 칭송하며 여기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룽먼석굴의 강 건너편으로 룽먼교(龍門橋)를 건너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음이 우거진 백원(白園)이 나오는데, 안에는 백거이의 묘가 있고 묘 앞의 석비에는 당소전백공지묘(唐少傳白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 |
≪ 낙양박물관(洛陽博物館) 시 중심 부근에 세워진 3층 건물의 낙양박물관은 낙양 주변에서 출토된 약 800점의 유물이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전체 박물관의 전시품은 2,000점이며, 소장품은 약 50,000점 정도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당삼채(唐三彩)로 당나라 때의 독특한 유약 광물이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당삼채는 당나라 때 만들어진 사람이나 낙타, 개, 항아리 등의 도자기를 말하는데, 19세기 말 시내 공사현장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 |
≪ 왕성공원(王城公園) 시내 중앙에 걸쳐서 펼쳐지는 왕성공원은 주나라의 왕성 유적이었는데, 본래 노동인민공원이라고 불렀다. 공원 안에는 은나라 때의 구정 복제품이 있다. 정(鼎)이란 천자의 상징물로서 두 개의 손잡이와 발이 셋 달린 솥을 말하는데, 높이 4m, 길이 9m 정도 되는 철로 만든 대형 솥이다. 그리고 공원 내에는 2개의 한(漢)대의 묘가 있는데, 전실과 후실에는 색채가 뛰어나고 예술성이 높은 해, 달, 별과 신선고사가 그려져 있다. 왕성공원은 또한 모란(牡丹)으로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일명 "모란화성(牡丹花城)"이라고 불릴 정도로 4월 15일∼25일 사이의 11일간은 모란축제가 열려 왕성공 을 중심으로 도시에는 모란꽃이 아름답게 핀다. | |
≪ 구성(舊城) 옛날 시가지에 해당되는 구성(舊城) 부근을 걸으면 아주 오랜 옛날의 거리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을수 있다. 좁은 뒷골목과 불그스름한 벽돌담, 이끼 낀 작은 성문 등이 속살거리는 재미와 역사를 느끼게 한다. 동서남북으로 뚫린 대가(大街)의 교차점으로 시가의 중심인 이곳은 주위의 도자기점, 제등집 등 청(淸)나라 때부터의 상점도 많아서 여행의 맛을 더해 준다. | |
≪ 낙양고묘박물관(洛陽古墓博物館) 과학성과 예술성이 높은 중국의 첫 신형고분박물관으로 한대(漢代)-북송(北宋)시기의 고분 22좌를 원상태로 옮겨 놓았다. 100여 개의 원시사회 및 5대 옛수도의 유적과 고대분묘를 조사 발굴했을 때 출토된 문물을 기초로 설립된 분묘 전문의 박물관이다. 시가의 북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중국 최대의 고묘(古墓) 집산지이다. 전한(前漢)시대부터 후한(後漢), 서진(西晋), 북위(北魏), 당(唐), 북송(北宋)까지 약 22개의 대표적인 분묘가 복원되어 있다. 전한의 ‘타귀도(打鬼圖)’ 벽화분묘(서쪽), 후한의 ‘천상신수(天象神獸)’ 벽화분묘(동쪽), 후한의 ‘출행도(出行圖)’ 벽화분묘 등이 유명하다. | |
≪ 낙양민속박물관(洛陽民俗博物館) 중국의 민간공예품, 자수나 은 장신구 등을 전시하고 있는 독특한 박물관이다. 결혼식 장면을 인형과 음악으로 소개하고 있어 중국 문화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 |
≪ 망산(邙山) 뤄양시의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황허 줄기의 남쪽가에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중원의 땅을 지키는 자연의 요충지로, 옛날부터 수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에 태어나, 망산에서 장례를 치른다라고 하여 이상적인 명당 자리로 생각되어 왔다. 후한(後漢)의 광무제릉(光武帝陵)이나 북위(北魏)의 효문제릉(孝文帝陵)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황허는 일품이다. | |
정주 |
≪ 정주(鄭州, 쩽조우/Zhengzhou) 하남성 성도로, 하남성 중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황하에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숭산(嵩山)에 기대어 있으며, 동남쪽에는 광활한 황준(黃準)평원이 있다. 총면적은 7446㎢ 이며, 총인구는 600만명인데, 그 중에서 시내에 거주하는 인구는 205만명이다. 서고동저의 지리적 조건으로 서부에는 산과 언덕이 면적의 2/3를 차지하며, 반면에 동쪽은 평원이 대부분이다. 온난대 대륙성 기후로 사계절이 분명하고 연평균 기온은 14.4℃이다. 7월이 가장 더운데, 평균 기온은 27.3℃이며, 1월은 가장 추운 달로 평균 0.2℃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641㎜ 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정주 역시 3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역사도시다. 중국 최초의 원시자기가 이곳에서 출토되었고, 서주, 춘추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또한 정주는 교통의 중심지로 이곳을 통과하지 않는 열차가 거의 없을 정도다. 중국대륙의 중간부분에 있기때문에 남과 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교통의 요지답게 유수한 호텔등의 숙박시설과 레스토랑이 빽빽히 도시를 채우고 있다. | |
≪ 27기념탑 27 기념탑은 정주시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2·7광장의 중앙에 솟아 있는 탑으로 5각기둥 2개의 모양으로 되었있어 쌍둥이 탑(雙塔)이라고 불리워 지기도 한다. 1923년 2월 7일에 철도 노동자가 총파업을 한 기념으로 1971년 9월 29일 세운 것인데, 높이 63m으로 지하부분을 포함한다면 14층까지 있다. 27기념탑은 탑에 올라 시내를 바라볼 수 가 있으며 각 층에는 당시의 상항을 알 수 있는 전시품도 진열되어 있다. | |
≪ 망산풍경구(邙山 景區)황하유람구 정주시 서북쪽 교외에서 26㎞에 위치한 황하남안은 1970년에 세워졌다. 중국의 젖줄인 황하강을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만든 이 곳은 오룡봉, 악산사, 낙타령, 한패이왕성, 대우산 등의 오대풍경으로 나누어 개방된다. 중국 정부의 많은 지도자들은 이 곳을 시찰하고 나서 좋은 평가를 아끼지 않았으며, 정부 여행국에서 발표한 "중국여행명소 40곳" 중 한 곳으로 지정되었다. 악산사는 오룡봉에서 1.5km 떨어져 있는데, 명청시대의 악산사는 다양한 볼거리가 많아서 유명한 팔경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사내에는 "자금각"이라는 높이 33m, 3층의 누각이 서있다. 황하는 시 북부를 흐르고 있으며, 약 3000점의 비석이 있는 황하비림과 석각미술관, 우왕상 등이 있다. 또 근처에는 동굴모양의 음식점가가 있어서 다양한 지역의 향토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 |
≪ 황하(黃河, 황허) 전국 총면적의 7.8%를 차지하는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강으로(전체 길이 : 5,464㎞), 청해성 바얀하르산(巴顔喀喇山)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사천성·감숙성·영하회족자치구·내몽고· 산서성·섬서성·하남성·산동성 등의 9개 성과 자치구를 거쳐 마지막에 발해로 유입된다. 중국 지형의 현저한 특징인 서고동저의 형태로 서에서 동으로 4000m 이상의 청장고원·내몽고고원·황토고원·황준해평원이 가로놓여 있다. 동부지역의 평원은 수로가 지면보다 높에 매년 홍수의 위험속에 있다. 그러나 이곳의 토지가 비옥해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어서 중국 고대문명이 이곳에서 발상되었으며 중화민족의 요람이라고 불린다. 황하유역은 연평균 경류량이 580억㎥로 물이 적고 토사가 많으며, 물과 토사의 근원지가 다르고 지형의 차이가 극심하다. 황하는 일반적으로 세 개의 구간으로 나뉘는데, 서쪽의 발원지로부터 하구진(河口鎭)까지를 상류, 하구진에서 도화욕(桃花欲)까지를 중류, 도화욕 이하를 하류라 한다.
상류는 총길이가 1,368km로 지금의 내몽고 퉈커퉈현(托克托縣)까지이며 또한 발원지구간·협곡구간·충적평원의 3개 부분으로 나뉜다. 황하 중류는 하구진(河口鎭)에서 하남성 정주(鄭州)의 도화욕까지로, 진섬(晋陝)협곡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이곳은 황하 홍수와 토사의 주요 발생지로 수심이 깊고 하폭이 좁아 파도가 센 것이 특징이다. 반면 하류는 강폭이 넓고 평탄하며 수로가 지면보다 높은 지상하(地上河)를 이룬다. 황하는 강수량의 계절적 분포가 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류의 변화도 크므로 유량이 극히 불안정하다. 여름과 가을의 경류량이 연경류량의 70∼80%이고, 겨울은 10%, 봄은 15%를 차지한다. 이때문에 봄과 여름에는 가뭄에 늦여름과 가을에는 홍수의 재해를 입는다. 역사적으로 여러차례 홍수의 피해를 입어왔고, 3년에 두번꼴로 제방이 터지던 상황이었다. 지금은 황화유역의 꾸준한 수리공사를 통해 많이 나아지고 있다. | |
≪ 하남성박물관(河南省博物院) 하남성 박물관은 현대화된 역사,예술 박물관으로서 면적이 약 10여만 평방미터이며 건축 면적만 7.8만 평방미터이며, 1998년 5월1일 정식 개방이 되었다. 현재 13만개 이상의 물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 중 1급 ,2급의 물품만 5천여개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선사시대 이전의 유물과 상주(商周) 청동기, 역대 도자기, 옥제품등이 매우 특색이 있다. 전시실 내부에는 기본전시실, 전문전시실, 임시전시실 등이 있으며 외국인을 위한 외국어 안내, 컴퓨터 안대등이 설치되어 있다. | |
≪ 대하촌유적 정주시의 북쪽 교외의 대하촌이 있고, 정주시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약 5,000 년전의 앙소문화의 용산문화를 주로하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간주되고 있고, 다수의 고분, 회갱, 건축물의 기초부, 도기,서기, 골기등의 유물이 발굴되어 중국의 원시사회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실물자료가 되고 있다. | |
≪ 관도고전장(官渡古戰場) 정주시의 동쪽으로 35km 떨어진 중모현(中牟縣)에 위치한 삼국지의 관도 전쟁을 주제로한 전시관이다. 1993년 5월 문을 열었으며, 돔형의 예술관은 고대 전쟁시에 사용하였던 텐트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조조(曹操)와 원소(袁紹)의 대결에서 시작하여 조조가 승리하기 까지의 이야기를 인형을 움직여 38장면으로 재현하고 있다. 이 외에도 관제묘(關帝廟)와 조조의 조공대(曹公臺)가 있다. | |
≪ 상성유적(商城遺跡) 정주시 안에 넓이 25㎢의 지역에 유적과 성벽이 발견되었는데, 안양현(安陽縣)의 은허(殷墟)보다 오랜 왕조인 상(商)대 전기인 기원전 15세기 경의 도시 유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주거자리와 청동기의 공장 등도 발견되었으며 출토품은 현재 허난(하남)성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주거 유적 이외의 곳은 자유롭게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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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
≪ 개봉시(開封市) 중국인들은 서안(西安), 낙양(洛陽), 개봉(開封)의 세 도시를 3대 고도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개봉은 전국시대의 위(魏)나라를 비롯해 오대의 양(梁), 북송(北宋), 금(金)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던 유서깊은 도시로 중국 6대 고도(古都)의 하나이다. 현재 구는 60만명 정도 되는데 북송시대에는 100만명을 넘는 대도시였고 강남의 여러 도시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천하의 요회(要會)』라고 불렀다. 볼 곳으로는 1,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상국사(相國寺), 송(宋)대의 건축을 복원해 아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송도어가(宋都御街), 송대 황거(皇居)의 어원(御園) 일부였던 용정공원(龍亭公園), 북송시대에 창건된 높이가 55.08m이며 8각형 모양의 13층인 철탑(鐵塔), 개봉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건축물인 번탑(繁塔) 등 있다. | |
≪ 철탑(鐵塔) 송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개봉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식명칭은 개봉사탑(開封寺塔)이라 한다. 북송 1049년에 건립한 13층 팔각형 탑인데, 높이는 55.58m에 이르고 탑의 표면 전체를 갈색의 유리로 씌워 멀리서 보면 갈홍색 빛이 난다. 탑내에는 계단이 있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만들었고 꼭대기에서 개봉시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다. | |
≪ 상국사(相國寺) 555년 북제 때 창건되었으며 건국사(建國寺)라 했으나 당나라 때 예종(睿宗)이 상왕의 왕위를 계승한 것을 기념하여 상국사로 이름을 개칭했다. 북송 때 가장 번창했으며 명나라 때 홍수로 인해 훼 되었다가 청나라 때 재건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이 되었고 팔각 유리단 주위에 회랑을 둘러치고 지붕을 유리기와로 깐 건축이며, 은행나무의 고목을 조각해서 금도금칠을 한 높이 7m의 훌륭한 천수관음보살상을 모셔놓고 있다. | |
≪ 우왕대(禹王臺) 하(夏)왕조의 시조인 우왕의 사당으로 명나라 때 세워졌다. 춘추전국시대 진(晋)나라의 대음악가 사광(師曠)이 이곳에서 악기를 연주했다고 해서 취대(吹臺)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우왕대 양쪽에는 각각 작은 사당이 있는데, 동쪽 것은 삼현사(三賢祠)로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고 두보(杜甫) 그리고 고적(高適) 세 사람이 취대에 올라가 시를 읊었던 곳이다. 서쪽은 수덕사(水德祠)라고 하는데, 중국 역사상 치수에 뛰어난 공적이 있는 37명의 위패가 걸려 있다. | |
≪ 용정공원(龍亭公園) 개봉의 중심지로 예전에는 송나라와 금나라 때의 황궁자리였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정면의 72단 돌계단에는 운룡이 새겨지고 오조문외에는 송대에 만들어진 한쌍의 사자상이 있다. | |
≪ 번탑(繁塔) 원래의 이름을 홍자탑이라 하기도 하고 천청사탑이라고도 한다. 북송 977년에 세워졌으며 개봉에 현존하는 건축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육각형 3층 탑이며, 높이 31.6m에 탑 벽면에는 약 7000개 벽돌이 세워졌으며 하나하나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다. | |
≪ 송나라거리 유명한 옛 그림 <청명 상하도>(淸明上河圖)에 근거하여 만든 송나라시기의 거리, 골동품가계들이 많다. 이 거리를 거닐면 송나라로 되돌아 간듯한 기분이 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