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 천주교회사 1
★축복받은
영광순교지
-순교자(치명자)가 6분 탄생
(이화백, 복산 오씨, 최일안, 이우집, 김치명, 유문보)
-3분의 유배자
(이종집, 남조이, 홍순희)
-2분의 열심한 신자
(윤종백.김득겸)
.초세기 한국 천주교 신앙이 그대로
전수된 곳
-호남지역에 유항검, 윤지충, 최여겸의 신앙이 그대로 영광에 흘러들었다.
-영광은 호남에서 전주, 고산에 이어 세번째로 큰 교세와 교우촌을 형성했다.
(1784년 한국천주교전래 후 17년째되는 1801년에 순교자 탄생)
.순교자기념성당 지정의 영광
.광주대교구
순교1번지
.전국적인 순례지로 발전
.기도가 끊임없이 바쳐진는 곳
.지역종교문화 유산의
가치를 지닌 곳
(영광4대 종교 성지 중의 하나:천주교,기독교,불교,원불교의 성지)
.한국 103위 성인 중 6분의 유해가 모셔진 곳
(성 한재권 요셉,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신앙의 거울이 되는 순교자
.순교자의 삶에서 배운다
.말보다 행동력을
키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앞에서)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증언할 것인가?
-지금 나의 모습은 누구를
닮았는가?
★죽음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는 목소리
-유문보(바오로): (고문당하며)"예수,
마리아!"를 외치고 숨지다.
-홍순희(루시아) : "어머니 (강완숙 골룸바)와 오라버니(홍필주 필립보)를 살려주고 나를
죽여달라!"애원하다.
-1801. 형조취조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
*죄명: 사학교도.
대박청래 국사범.불고지죄.배교거부.
성물소지(서학서적 등)
-이화백(영광참수) 1801
-오씨(영광참수)
1801
-이우집(전주참수) 1801
-최일안(전주참수) 1801
-김치명(공주교수형) 1867
-유문보(나주옥사)
1872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초기교회사 ]
1603년 한국에 천주교서적
도입
.1920년대초. 나주본당 서미카엘 가족이 백수면으로 이주하면서 신앙공동체 형성.
노안본당의 카다스 신부의 활동으로
신자가 늘면서 영광공소가 됨.
.1937. 설립. 초대신부 강토마스멀켄 현재 부지 1851평과 한옥 1동 매입. 1942. 80평 규모
성당신축
6.25. 공산군 방화로 소실.
1965. 성당.사제관 재신축.
1967.5.13. 교구장 현하롤드 대주교에 의해
주보성인 성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정하고 축복식
(18세기 실학운동과 천주교)
중국통해 유입된 서학과 청의 고증학의 영향이
컸다.
그 중 서학은 우리에게 세계 그리스도교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생적 교회를 이루게 하였다. 17세기 초부터 중국에서 유입된
<천주
실의>,<교우론>,<칠극>,<천학문답> 등 수많은 한문서학서가 남인계 학자와 중인신분 층에 의해
학문적 관심으로 연구되다가 마침
내 18세기 후반 천주교신앙으로 발전되었다.
조선은 양반.양민.노비 등 불평등한 계급을 기반으로 형성된
신분제 사회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신분제도가 급격히 무너져가고 있
었다.
차별없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던 사람들은 만민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경도되었다. 그리하여 양반계층에서는 정권에서 소
외된 남인시파와, 중인, 평민,
부녀자 층을 중심으로 천주교는 급속히
전파되었다.
특히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예속적 지위에 대한 현실불만과 사후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교회설립 초기부터 많이
입교했다.
*18세기 이후 여성의 독서 열풍은 정조 때의 재상인 채제공(1720~1799)이 걱정을 할
정도였다.
-수신서.유교경전.소설류 등
*18세기 말 조선의 불안정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일종의 이상향에 대한 강한 동경을 품을
정도였다. 이런 시기에 천주교의 내세론
은 신자들의 마음 속을 충분히 끌 수 있는 사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조광의 '황사영백서의 사회사상적
배경' 260~270쪽
★서학의 죄목
.평등사상
-당시 조선정부의 무군무부(無君無父) 논리는 비약
-하느님 앞에 계급없이 만인은 평등하다고 주장
-윤리 덕목이 대부분
-만인평등.이웃사랑
.제사거부(유교윤리위배)
-우상숭배
.지배사상인 주자학과 서학이 정면충돌이 마찰빚어
.교리공부에
남녀동석/토론
(남녀유별.풍기문란.불경죄)
-가부장적 유교윤리 질서파괴
.종교자유 불인정
(사학한 무리. 역적으로 처단)
.외부(서학) 학문을 불온시
(체제
유지의 불안감 반영)
★한국역사상 최장기 재판기록 남겨, 단일 사건 최다 사형집행 사건
.천주교 박해 만큼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잡아들이고 같은 사안으로
100여년간(1791~1881) 재판을 한 사례는 없다.
-이들 사건은 당시 조선 정부 문서 '사학징의(邪學懲의:신유박해시 포도청이나 형문의 심문기록)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1601년(선조 34)부터 1905년(광무 9)까지 일어난 각종 중요사건의 신문 기록과 판결서를 모은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1891년 신해박해부터 1873년 병인박해 끝무렵까지 천주교신자가 대략 10,000여 명이 처형되었다.
★영광지역의 천주교 전파
영광지역의 천주교 전파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우선 사도인 유항검을 통해 영광에 천주교가 전해졌다고 보아진다.
.유항검은 여러 곳해 산재에 있는 전답의 소작인들과 마름들에게
전교하여 복음을 잔라도 각지로 전파시켰다. 그는 전주.김제.금구 등
10여개 군에 줄잡아 15,000마지기나 되는 엄청나게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항검 형제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
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대거 입교하여 두서너 고을 백성들의
반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물론 다소 과장
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유항검 형제의 전교로 고을 백성들의 반이 입교한 두서너 고을 가운데는 뒤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영광도 포
함된다. 또한 신유박해 때 유관검을 신문하던 신문관도, "지금 허다하게 체포된 자는 너의 인척이나 가객이 아니면
모두 노비들이거나
소작인들인데, 그 무리가 거의 몇개 군에 걸쳐서 성행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여러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
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영광에 산재해 있던 유항검 형제의 전답의 소작인과 마름들 중에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고 믿어진다.
또한 유항검 집안의 인척관계를 통해서도 영광에 복음이 전해졌다. 영광의 월산리(현 영광군 대마면 월산리)는 유관검의 사촌 형의
처가가 있던 곳인데, 유관검은 사촌 형의 처남인 월산리에 사는 이우집 등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유관검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이우
집에게 재물을
베풀어 주면서 만날 때 마다 번번이 천주교를 힘쏘 배우도록 권하고 또한 베낀 책자를 주면서 자주 교리를 가르쳐 주었
다. 이우집이 1795년(정조
19) 무렵에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전주 사촌누이 집에 들렀는데, 유관검이 밤중에 찾아와 천주십계를 꺼내
보여주면서 배우기를 권유해서, 그는
유관검에게 교리를 배우고 또 기도서인 조만과 1책을 받아가지고 와서 공부를 했다. 이우집은
1897(정조21), 11월과 1800년(정조 24)
10월에도 유관검 집에 들러 그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1801년(순조 1) 3월
에도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유관검 집에
들렀는데, 이 때 유관검은 이우집에게 주문모 신부를 숨겨줄 만한 근면하고 성실한 영광지역
교우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천주교를 배워서 심하게 빠진 유항검의 사돈인 영광 사람 이종집도 역시
유관검을 통해서 입교한 것으로 보아진다. 또한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를 믿은 죄로 영광에서 참수형을 당한 양반 오씨도 그의 거
주지가 이우집이 살던 월산리에서 가까운 복산(현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 복산
마을)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유관검을 통해 입교한
이우집.이종집 등의 전교로 입교한 것으로 믿어진다.
. 다음으로 진산의 윤지충을
통해서도 영광에 천주교가 전해졌다고 보아진다. 일찍부터 고종사촌인 정약전.정약용 형제와 학문적인
교류를 해 온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인 1784년 겨울에 서울 숭례문 안쪽의 창동에 집을 구해 살고 있던 정씨 형제들을 방
문하였다가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들은 뒤 지척의
거리에 있는 명례방 김범우(토마)의 집을 방문하여 그 집에서 「천주실
의」,와 「칠극」을 보았다. 이때 윤지충은 이 책들을 빌려가지고 진산으로
내려와 필사하여 3년 동안 깊이 연구하며 묵상한 뒤 부족
한 교리 내용을 정약전에게 배우고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으로부터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그는 어머니 권씨 부인과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 외사촌 형인 권상연(야고보) 등 가족과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신앙공동체를
설립
★1795
영광 이우집 입교
-과거길에 유관검 집에 들려 교리접해
.주문모 신부의 1795년부터 1800년 12월까지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1795년 초 양근의 윤유일. 고산의 이존창. 전주의 유관검 집을 방
문하였다. 5월 11일 체포령이 내려지자, 최인길의 집을 나와 남대문 안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5월 이후 남대문 안의 권상문. 사
축서동의 김씨. 양근으로 이주한 권상문 집에 사흘, 연산 이보연 집에 2개월,
이존창, 전주 유항검 집에 머물렀다...
1799년 아현의 황사영 집에 유숙하고...1800년 4월경 서울로 돌아와
황사영.현계온.정약종.정광수 집에 머물렀다....
-'사학죄인 이기양등 추안'
-이우집
.1801 대박청래사건 체포됨
전주 압송 신문
.한성 의금부 심문.대질신문
.전주 신문과 배교 고뇌, 참수
1801.3.15. 주문모 공초
★유관검의 친사돈 이우집
★유항검의 사돈 이종집
★이우집의 사촌누이 이육희(유관검의 처.1802.순교)
★배교자 이우집 & 유관검
배교하였다고 하나 이들은 살지 못하고 참수 &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인간적인 나약함의 소유자
-이 둘은 공통적으로 순교자를 배출했다.
*이우집은 영광순교자 복산지 오씨에게 교리를 전파했다.
*유관검은 이우집, 이종집에게 교리를 전파했다.
(유관검 신문기록)1801.3.28
.서책은 윤지충과 이존창.최창현의 집에서 빌려오고 혹은 윤유일.권일신.권상연.민도 등의 집에서 베껴왔고, 천리경과 족자는 을묘 년
간에 서양인 주문모가 우리 나라에 나와 신부라 일컬으며 여러 사람을 전도한다고 들었는데, 서울로부터 내려와 이존창의 집에 옮겨
와 저의 집에 6,7일 머무르다가 그 뒤 제가 서울에 올라가 현계온.강씨 노파 등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스승의 예로써 대우하고 신부로
써 떠받드는데...
★남조이(김득겸의 처.황해도 유배자)
-평민 부인은 '조이'를 붙인다.
.양반 부인은 '씨'를, 김씨부인
.중인 부인은 '성'을 붙여 김성부인,
.천인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조광교수는 양반 부인에게도 '조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다고 주장.
('유 조이'경우도 양반 집안 출신 이었으나 '조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었음)
-'순교자의 삶과 신앙'(도서출판 형제애. 247~248쪽)
★홍순희 (루시아)
1867.4.7.순교(병인박해때)
동녀. 그녀는 강완숙 공동체 일원이었다가 1801년에 체포, 배교한 후 4월12일(5.24)에 영광으로 유배갔다.
.강완숙이 만든 여성공동체 10여 명 중 친딸 홍순희를 비롯하여 7명이 배교하고 유배를 갔다.
('윤유일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제3집, 41쪽)
*홍순희는 1801년 박해때 형조에서 신문을 당했다. 그때 홍순희는 "어머니 강완숙과 오라버니 홍필주를 살려주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나 그는 전라도 영광 땅에 유배되었다. 아마도 그 동정녀는 당시 여늬 여성 유배죄인처럼 관리들의 노리개로 전락되었
을 것이다.
-'들숨 날숨'2002.9월호에서 발췌
-홍순희의 삶
.모친 강완숙의 서울 이사로 아버지와의 결별(강완숙이 남편 홍지영에게 쫒겨남)
.영광으로 유배(두번째 결별)
-관노비의 수모의 삶
.모친과 오라버니의 죽음
-1867 순교까지 질곡의 삶
★
영광순교터 증언
-전 영광문화원장 조남식의 부모(부:요셉, 모:요안나)한테 구전으로 전해들어)
-성당 근처에서 59년 동안 거주한
정태복(88세:2009년당시)영광군 산림과장도 208년전의 이야기를 구전으로 전해들음.
-참수후 당산나무 위에 목을 걸어 효시역할을
함
-당시 영광 우시장 성황은 교통요충지역으로 인근 무안, 함평, 전북 무장, 고창, 장성등의 지역에서 영광장날엔 왕래가 비좁을 정도로
성황.
-항상 우물이 마르지 않은 큰 공동샘이 있고, 공동샘 옆에는 하천이 있어서 참수후 칼등을 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옛
우시장터가 참수장소ㅡ영광읍 도동리일대)
-성당 정문앞 부근
영광 도동리 석장승(1832년 세워짐)
도동리 홍교
서종태 박사가 추정한 순교터 자료
★황사영 백서(62×38 실물크기와
유사)
-국사범.반역모반죄
-1801.11.5. 27세. 서소문밖. 능지처참(능지처사)
-재산몰수. 모친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마리아는 제주도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유배.
.이가환.이승훈.최창현.정약종과는 오랜 친구관계임.
(황사영과 황심의
대화)
-"이 편지를 중국에 와 있는 서양인에게 보내어 서양가는 배를 통해 교황께 전하여 무엇을 청해 와야 겠는데 전할 길이 없으니 그대는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느냐?"
"내 이미 들으니 그대와 선천 사는 옥(천희) 씨가 서로 친하다고 하니 이 편지를 선천 옥가한테 전하여 그로
하여금 중국에 있는 서양
인한테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
★ 황사영 백서의 내용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여성신자 수는 전체 신도의
3분의 2라고 하였다.
또 3분의 1이 천민이었다.
(103위 성인유해)
.성 한재권요셉
-31세 순교. 고을원님. 학덕출중. 덕성의 소유자.
"천국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날이다. 기뻐하고 기뻐할 일이다."(형장으로 끌려갈때)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67세순교. 병인박해. 전주숲정이치명
.김대건 안드레아
-1846(병오박해). 순교
[강완숙 골룸바]
★강완숙 골룸바.1760~ 1801.5.23(양력7.2). 충청도 내포 양반가문의 서얼로 출생.
1770년대 초 중엽 불교귀의하나 허망함 깨닫고 따르지 않음.
1780 중엽 덕산양반 홍지영후처로 혼인. 천주교에 대해듣고 시어머니에게 선교.
41세.참수. 서소문밖. 여회장.
★강완숙의 5가지 영성
1. 완전히 하느님께 사로잡힘
2. 섬김과 돌봄의 영성
-'살리는 영성'
실천하는 신앙인.언행일치
-1791신해박해 감옥수 수발하다 잡혀들어가 문초당함
-효성스런 며느리(유교의 효)
-"부모를 공경하라"(10계명)
-주문모.황사영.윤점혜 피신자 돌보고 순교자 가족 돌봄
3. 지도자 영성
개인적으로나 공적인물로 강완숙 만큼 조선교회를 위해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간 인물도 드물었다.
.영적 통찰력과 식별력
'마치 종소리에 북소리가 맞장구치듯이 응하였다.'
.관계의 귀재
4. 선교 영성(선교사)
-가정교회 제공
-여성공동체 활용
-이웃에 애덕실천
5. 최상의 헌신 순교의 삶
-종말과 내세 사상
-순교는 영성의 최고형태
-순교는 천국가는 확실한 징표로 믿어
-그리스도의 가장 완전한 모방
★신유박해와 강완숙의 위치
.바늘 하나를 꿰어 그물 전체를 들어 올린다는 말이 있는데, 강완숙은 바로 그물코에
해당하는 사람.
.한국교회사와 조선사회 구조를 파악하는 열쇄.
.조선천주교초세기 교회경영자
.여성공동체
회장
-전교.생협.복지.인권.정의 등
.조선천주교회의 버팀목
*"제가 항시 편지를 주고 받은 곳은
정약종.정약용.오석충.권철신.문영인의 집입니다."(당대 지성계의 대표들과 교류)
.'신앙인의 모델'로 존경받음
★강완숙이 가르친
이들은 자신의 딸인 홍순희(루치아. 동정녀로서 공동체 생활. 배교하고 1801. 4. 12 영광으로 유배)
-사학징의 권1.
97쪽
★교회의 본거지-강완숙의 집
-장작광속에 주신부 숨기고 포졸을 문앞에서 물리쳐
-조선천주교회를 총괄하는
곳
-교회유지 헌신 주체
-신앙 공동체 역할
-오늘날 사회복지센터 구실
(교도소사목.불우한이돌봄쉼터 같은
방향제시)
-핵심 인물들의 거주지
-본가와 여러 지가(枝家)를 둠
-첨례장소.교리강습소.교회업무에 관한 회의 장소
-여러
번 이사(남창동-인사동-관훈동) 주신부 피신처 변경과 교회규모 확대로 인해 점점 더 큰집이 필요했음.
-불우여성 돌봄센터
역
(과부.노비.감옥 & 순교자 가족)
★교리교사 양성 역할
강완숙은 여성들을 모아 한글과 교리를 가르쳤고, 교육이
끝나면 그들을 파견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주를 믿을 것을
권고하도록 하였다. 교리교사를 양성한 것이다.
.황사영과 달레는
당시 남녀신자 가운데 강완숙이 가장 활발히 전교활동을 벌렸다고 기록하였다.
-황사영백서
.강완숙은 교리강습겸 강학회도 주관하였고
특히 첨례 때 교리를 강학하였는데, 주문모 신부, 교리에 밝은 남교우, 혹은 강완숙 자신이 교리강좌를 베풀었다.
강완숙은 자신의 딸인
홍순희와 윤점혜,문영인(궁녀.문서작성일도와), 정순매 등을 모아 교리를 가르쳐 교사로 양성하여 외부에서 전
교하게 하였다.
*강완숙이
처녀들을 모아 가르칠 때 그를 주로 도운 사람은 윤점혜와 홍순희였다.
-'순교자 강완숙 역사를 위해
일어서다(가톨릭출판사.180쪽)
*신분 초월-모든 이에게 전파
-자신의 종들에게도 교리입문
-남여. 상하 불문
★선구적
여성, 개화기 신여성
*'해방자' '여성학자''여장부'
.가부장적 억압에서 해방
.성차별주의 해방
.(그릇된)사회관습에의
해방
.천주교 귀의로 해방
*박애.평등.자유의 실천
*천주교 수용으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깨우쳐주다.
*근대적
여성관형성에 큰영향
*여성신자들에게 강완숙 그 자체가 신앙의 구심점
당시 유교체제에 얽매어 예속적으로 살아야했던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며 자신이 스스로 택한
종교를 위해 행동했던 선구적인 여성이다.
-여성 신도들에게 구심적인 역할.
초대여성회장(명도회)
.강완숙은 황사영과 주문모 신부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토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학징의 강완숙
조
.경제력과 재정에 대한 주도권
-여성에게 경제력이 없고 경제활동 역시 제한되었던 시절, 자율적 재정권을 가지고 경제를 운용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침선.상인.고공.세탁.조리.육아.교회서적 번역.필사 보급과 성물판매 등)
★동정녀의 의탁처. 집합처
금욕주의적
개념에 바탕을 둔 자발적 가치의 실현(유교적 수절과는 다름)
-조선천주교회의 특징, 강점
.황사영이 망명했을 때는
그를 위해 주선하여 몸을 숨겨 피하게 하고, 스스로 사학의 괴수를 삼았으며...
[강완숙의 말]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옳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
.이미 이 학을 배워 믿었으니 죽으면 천당에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형벌을 받아 죽더라도
조금도 후회는 없습니다."(사학징의)
."주신부님은 당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면서까지 우리의 영혼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는 그은혜와
사랑을 보답하기는 커녕..."
★강완숙은 내포 출신이므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으로부터 교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생애결정적
전환점-1891신해박해.
자발적 신자 옥바라지하다 구금, 남편(홍지영)도 이에 집안다스리지 못한죄로 추궁당함, 이후
강완숙쫓겨남.
이에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 자신 소생 딸 홍순희를 데리고 서울 남대문 안 창동(지금의 남창동)으로 이주함. 홍필주가
아버지 곁에
머물지 않고 계모인 강완숙을 따른 것은 오로지 천주교 신앙 때문이다.
★강완숙의 세례
1794년 12.23일 주문모신부가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하자 1795년 주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여성 최초로 회장에 임명되어 여교우
를 보살피는 일을 부여 받았다.
★사형장의 여권 신장
사형수의 옷을 벗기는 규정을 여성들에게는 쓰지 말아달라는 강완숙의 마지막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가장 먼저 형을
받음.
-강완숙(사형수에게 옷벗기는 관례가 있었으나 강완숙은 여자의 자존심을 지키게 해달라고 청하여 받아들여짐.
]처형자 중 가장 먼저 목을 베임)
★(예수처럼)세번째 넘어지신 분은 누구였을까?
-강완숙:
.1791신해박해시 체포문책
옥바라지하다가 붙잡혀
-신앙인,어떻게 살 것인가?
.남편과의 결별
-남편은 과연 그녀를 버렸을까?(재정적 후원?)
.1801. 순교시 가족연민
-무남독녀 딸과. 의붓아들, 시어머니를 놔두고 고뇌의 눈물을...
★홍필주 필립보.1801.8.27.(10.4) 28세.강완숙의 전처 아들. 덕산출생.
서소문밖 참수. 주문모복사.
★명도회
한국천주교 초기에 주문모신부에 의 세워진 평신도 교리 연구 및 전교단체. 집회 장소는 6군데(육회) 홍필주.홍익만(홍필주의 장인).
김려행.현계흠.황사영의 집이었다. 그들은 매달 첨례 때마다 참석했고, 육회는 3~4, 5,6명으로 구성됨. 초대회장: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전라도고산. 1801.9.17. 38세.
전주참수. 양반.정약종의
외사촌.
★유항검.유관검.김유산
1801. 10.24. 전주.참수
★외국인최초순교-주문모신부
교인들의 희생이 크자 1801.3.12. 스스로 자수하여 1801. 4.19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처형됨.
*예수회 소속 신부. 소주 출생. 북경교구 신학교에서 교육받고 1787년 서품받음. 1794년 한국입국.
1801년 참수
.회자수=망나니=휘광이
.성당종-미국 피츠버그 1873
300kg(병인박해시기
제작)
[순교자 육화일기]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
-테르툴리아노 교부
(부산오륜대 성지 돌에 새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