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춘
[李靑春, 1886~1955]
본명은 화춘(化春). 법호는 오타원(五陀圓). 법훈은 대봉도. 1886년 3월 26일 전북 전주시 청수동에서 부친 인경(仁京)과 모친 김설상화의 3녀 중 셋째로 출생했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가정환경이 순조롭지 못하여 파란중첩한 생활을 했다. 중년에는 박윤상(朴潤相)과 인연을 맺었으나 자녀가 없이 외롭게 살았으며, 절약 검박을 주장하며 어려운 살림을 했다. 38세 꽃다운 시절을 흘러보내고 불혹을 바라보는 세월을 살다 우연히 마당 가운데서 돼지 자웅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홀연히 느낀 바 있었다.
“우리 인생으로도 마치 오욕생활(五慾生活)에 탐몰하여 인생의 본분을 찾지 못하면 저 돼지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니 누가 돼지껍질을 벗겨다가 자신의 얼굴에 씌우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인생의 본분을 찾고 참다운 사람의 길을 걷고자 결심한 후 당시 유행하던 태을도(太乙道)를 믿었으나 허망히 여기던 중 1923년(원기8) 12월 27일 최도화로부터 소태산대종사의 고명한 성체(聖體)와 도덕을 전해 듣게 되었다. 39세가 되던 1924년(원기9) 봄, 전주에 행가한 소태산을 뵙고 환희용약한 마음으로 제자가 되어 인생의 본분을 찾기로 서원했다.
본명이 ‘화춘(化春)’이었으나 소태산으로부터 법명을 ‘청춘(靑春)’이라 받들고 “우리 선생님께서 나를 구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어찌 이 고목생춘(古木生春)의 갱생로(更生路)를 잡았으랴 앞날의 화춘은 만물조락하는 심동(深冬)을 당하면 변함이 있으련만 오늘 청춘(靑春)만은 봄이 와도 청춘이요 여름이 와도 청춘이요 가을이 와도 청춘이요 사시 청춘 내가 되며, 십 년이 가도 청춘이 되며, 백년이 가도 청춘이요 천년이 가더라도 오직 청춘은 청춘으로 일관하리라”(《월말통신》 제22호)고 발원하며 결심을 굳게 했다.
1924년 3월 전주에서 소태산이 7인 제자로 발기인을 삼아 불법연구회 창립을 서둘 때 여성으로 유일하게 창립발기인이 되었다. 1925년(원기10) 한결같은 신성으로 그동안 근검저축했던 전 재산 70두락의 토지를 입교기념으로 희사했던 바, 소태산은 “심심장지(深深藏之)했던 귀한 재산을 별안간에 전부 희사함은 불가하니 차차 지내면서 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은 것이오니 회중(會中)에 유용하게 사용해주시라”고 간곡히 말하며 기어이 희사함으로써 원불교의 창립에 기초를 공고하게 했다.
1926년(원기11) 2월에는 모친을 모시고 총부 구내로 이사함과 동시에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이러한 공덕으로 1928년(원기13) 제1대 제1회 기념총회 때는 1등 유공인이 되었다. 1931년(원기16)에는 여자수위단 이방(零方) 단원으로 내정되기도 했으며, 1934년(원기19)에는 총부 순교로 1년간 봉직했다. 1935년(원기20)에는 전주지방의 교화사업의 포부를 가지고 사재 1천여원을 투입하여 노송동에 회관을 마련하고 전주 교무로 부임한 4년간 교당발전과 교세확장에 헌신했다. 1943년(원기28) 여자수위단 정수위단 손방(巽方) 단원에 피선되었으며,
1948년(원기33)에는 남선(南仙)지부 교무로 1년간 재직했다. 1955년(원기40) 7월 19일 전주양로원에서 세수 70세로 열반했다. 귀중한 정재(級財)를 회상 초창기에 쾌척하여 대도회상 창업을 도왔고 불우한 운명을 극복하여 행복한 미래를 개척한 그에게 1988년(원기73)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했다.
‧ 1886년 3월 26일 전북 전주 출생
‧ 원기 11년(1926) 3월 출가
‧ 중앙총부 순교 / 전주․남선 교무 / 수위단원 역임
‧ 법랍 29년
‧ 정식 법강항마위
‧ 원기 40년(1955) 7월 14일 열반
‧ 원기 73년(1988) 대봉도 서훈
ㆍ 일화
익산총부에 대각전이 설립됨과 아울러 전주교당이 발족되었다.전주 노송동 회관은 원기20년 4월28일, 설립과 동시에 정식으로 전주지부로 승격되고 5월17일 대종사가 전주에 방문하였다. 이날 대종사는 제자들과 다가공원에 소창도 가고 기념 촬영하였다.
정식 교무로 발령을 받고, 좌담엔 능하였지만 강연엔 영 자신이 없는 이청춘은 예회 때마다 총부에 지원 요청을 하였다.
하단지부 삼산 교무가 방문하고 이어서 예회 때마다 정산 교정원장, 유허일 총부 교무, 서대원 연구부장, 이공주 통신부장이 번갈아 방문하여 강연을 하였다. 5월21일 전주 노송동 회관을 방문한 삼산은 이청춘과 지기가 통하는 동지였다.
원기13년 가을, 삼산이 성리 설하는 것을 듣고 대종사는 견성인가를 하였다.『오늘 내가 비몽사몽간에 여의주를 얻어 산삼에게 주었더니, 받아먹고 즉시로 환골탈태하는 것을 보았는데, 실지로 삼산의 성리 설하는 것을 들으니 정신이 상쾌하다』
대종사의 이 말씀에 이청춘은 남 먼저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삼산보다 네 살 손위인 이청춘은 누구보다도 기뻐해주던 동지였으며, 삼산이 멀리 부산 교무로 떠날 때 누님처럼 동행해 주던 여인이었다. 이청춘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전주지부에 와 삼산은 정원에 꽃을 옮겨 심으며 말하였다.『청춘씨, 내가 전주에 언제 올지 모르니 내 본 양 이 꽃을 보시요』
전주에서 열흘간 머물고 삼산은 부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해 9월에 46세의 나이로 입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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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계에서 출가하여 수위단원까지 된 이청춘, 3일 구류 살고 담배를 끊은 이청춘, 재물 희사에 대한 대종사님의 자세
이청춘 선진님은 전주사람으로 아주 언변이능하고 실천력이 투철한 불법연구회제 1대 1회 특공인이었다.
그녀는 어려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화류계에 몸을 담았다가 그녀의 나이 38세에 깨달은바가 있어 출가했다.
어느날 우연히 마당 한 가운데서 돼지 암수가 교미하는 것을 보고 우리 인생도 오욕생활에 탐닉하여 인생의 본말을 찾지 못하면저 돼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이제 인생의 본분을 찾고 참다운 사람의 길을 걸으려면 정법의 스승을 찾아야겠다.
이렇게 원력을 세우고 기도하던 중 마침, 전주에 계시는 대종사님을 뵙고 기쁘게제자가 되어 청춘(靑春)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청춘선진님은 즉시 세간생활을 청산하고 원불교에 들어와 힘쓰던 중 그 동안 많은 수고를 해서 근검저축으로 모아온 논 70두락을 입교기념으로 희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종사님께서는 “너의 뜻은 심히 아름다우나 사람의 마음이란 처음과 끝이 같지 아니할 수 있으니 더 신중히 생각해 보라.” 하며 여러차례 거절하며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이청춘선진님은 대종사님께 “제가 한번결정한 마음에는 추호도 변동이 없습니다.회중에 유용하게만 써 주십시오.”
그리하여 원불교 입교기념으로 논 70두락을 희사하여 이 회상 창립기에 유지대책의 기초를 공고히 해 주셨다. 그 논은 현재도 총부 유지답으로 남아있다.
이청춘선진님은 1년 뒤에 전무출신으로출가하여 동하선 훈련에 빠지지 않고참례하였고 일생을 청빈하게 수양에 전념했다.
원기 20년에는 남은 재산을 다 털어 고향인 전주에 교당을 마련하고 교화를 하여 전주교구 교화의 초석이 되었고 후일에 오타원이라는 법호를 받고 여자 수위단에까지 피선되었으며 지난 2대말총회때는 대봉도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청춘선진은 출가를 해서 생활을 했지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피워온 담배였다.
하루는 대종사님으로부터 엄한 경책을 받고 ‘내 어떤 일이 있어도 담배는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내가 담배를 끊으면 세상에 나가고 못 끊으면 밖에 나가지 않으리라.’ 하여 3일 동안을 방안에 칩거하였다고 한다.
결국 3일째 되는 날
담배를 끊고 나오니까, 주위에서는“청춘이가 3일간 구류 살고 담배 끊었다”며 얘기를 하고는 그의 무서운 결단을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