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에서 심수관 선생을 만나고 돌아가기 위해 지역의 간이역으로 향하게 됐다. 방문단 일행과 함께 간이역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였다. 멀리서 한명의 여자가 달려오면서 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그 여성은 방문단이 머물렀던 숙소의 직원이었다. 직원이 달려온 이유는 나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던 김기삼 당시 교수의 물건때문이었는데 김 교수는 숙소에 자신이 사용했던 타월과 칫솔, 치약을 놓고 그대로 나왔던 것이다. 청소하다가 이것을 발견한 여직원이 물건을 전해주기 위해 간이역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사실 놓고간 물건은 버려도 무방한 값어치가 떨어지는 물건들이다. 우리나라였다면 놓고간 물건은 폐기처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겠지만 일본에서는 작은 물건이라도 손님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달려오는 정성까지 쏟는 모습을 보고 작은 감동을 받았다.
일본을 찾아가 도자기와 관련이 없지만 에피소드 하나가 있었다. 벳부라는 온천도시를 찾게 됐는데 그곳에서 일본식으로 식사를 하게 됐다. 그곳에서 김치가 상당히 귀했는데 작은 접시에 붉은색을 띤 김치가 나왔는데 단 4조각뿐이 없었다. 당연히 순식간에 김치는 바닥이 났고 종업원에게 김치를 추가로 가져다 달라고 주문했다.
나올때마다 4점씩 나오는 바람에 방문단만 여러명이다보니 여러번 김치를 재주문해서 먹게 됐다. 이때만 하더라도 김치가 식사비용에 추가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김치는 무료로 제공해주는 서비스 음식이라는 개념이 있기때문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기 위해 계산을 하다보니 김치가 접시마다 모두 요금이 추가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유를 듣고 보니 일본에서는 반찬에 가격이 책정돼 있어 추가 주문을 하게 되면 가격이 붙는다는 것을 알게 돼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방문단은 여러 도시를 거쳐 오사카의 동양박물관이란 곳을 가게 됐다. 그곳을 방문한 이유는 도자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기와집 형태로 만들어져있었던 박물관에는 여러 가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상당수가 우리나라에서 반출된 그런 도자기들이었다.
이 도자기들을 관람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이 떠오르면서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충분히 국보급 대우를 받았을 법한 도자기들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볼수 없고 일본에 와야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서글퍼졌다.
한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일본에서 국가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반출된 도자기임에도 국보로 지정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또 임진왜란때 잡혀간 도공들이 정착해 살면서 형성된 마을도 보게 됐다. 그곳에서는 조선시대에 전쟁와중에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개의 도자기들도 진열돼 있었다.
이렇게 일본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도자기를 보고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들도 만나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좋은 공부가 됐다.
특히 교토에서는 유리문을 두고 도자기를 제작하는 과정을 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강진과 달리 그 시기부터 이미 상당부분 기계화가 되어있었고 전기가마가 보편화되어 도자기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나는 이때 경험했던 일들을 귀국후 당시 칠량에서 약국을 하던 윤도현씨에게 전해주었고 이는 윤도현씨가 강진에서 최초로 도강요라는 개인요 업체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윤도현은 나와 함께 일본을 방문해 전기가마 등 도자기 관련 장비와 시설들을 둘러보기도 했다. <정리=오기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