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김씨 시조 김대유 묘소의 外華內貧 전설에 의하면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김대유의 묘 터를 찾는데, 거북이(또는 자라)가 꿈에 나타나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 묘를 실전하였다가 다시 찾고 보니 똑같은 묘가 하나 더 생겨 봉분이 지금과 같은 두개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시조 묘소인지 알 수 없는 관계로, 두 묘소를 함께 받들고 있다고 한다.

사진은 cafe.naver.com/ddosan에서 퍼옴
이 묘소를 평하는 수식어 선인무수(仙人舞袖) : 선인이 춤을 추는 형태 옥녀탄금(玉女彈琴) : 옥녀가 가야금을 켜는 형상 금계포란(金鷄抱卵) :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 천마등공(天馬騰空) : 천마가 하늘을 오르는 모습 상운봉일(祥雲奉日) : 상서로운 구름이 해를 받들고 있는 모양 봉황포란(鳳凰抱卵) :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자태

또는 조선8대명당 중 한곳이라 평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미사여구가 붙어 다닌다. 이처럼 많은 별칭이 붙은 것은 그만큼 이 묘소에 대해 호의적이란 뜻인데, 그 배경을 볼 것 같으면 전체적인 흐름이 부모-태-식-잉-육의 結地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으며, 또 묘소가 위치한 당처가 우뚝하게 솟아있어 수많은 산을 마주보는 호쾌한 풍광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청풍김씨는 朝鮮朝 후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묘에 대한 선입관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 사이트에서 여러 차례 살펴보았듯이 묘소의 발응은 약 100년 정도가 한계이다. 따라서 고려 말에 이 묘를 쓰고 400년 후에 발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견강부회이다. 물론 始祖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나, 이 말은 전주 모악산의 김태서 묘로 인해 600년 후김일성이 절대 권력을 누렸다는 과장된 말과 다르지 않다.

<좌측은 김징 묘소, 우측은 김덕수 묘소>
한편 필자는 청풍김씨의 발복에 대해 수차에 걸쳐 조사한바 있는 바, 그 근원의 한곳에는 김징 묘소가 있었으며, 또 다른 쪽에는 김덕수 묘소가 훌륭하였다. 풍수지리 측면에서 바라본 청풍김씨의 명문가 형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선조들의 지극한 위선과 그에 합당한 명당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김덕수, 김비(판관), 김흥우(찹봉), 김육(영의정), 김좌명(병조판서), 김석주(우의정), 명성왕후(현종비, 숙종 生母), 김석익(한성판윤), 김석연(판서), 김징(관찰사), 김구(우의정), 김유(대제학), 김재로(영의정), 김취로(판서), 김약로(좌의정), 김상로(영의정), 김치인(영의정), 김종수(좌의정),
각설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묘소가 하늘 높이 솟구친 것처럼 덩달아 기분이 들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몇 가지 사항을 함께 검토해 보자.
첫째, 주산과 과협

준수한 모습의 주산에서 이어진 과협은 약 30m 정도의 장협으로 이루어졌다. 장협의 경우에는 상하좌우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중간 지점에 泡가 있어 기맥이 늘어지는 것을 이끌어 주고 있으니 좋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협처 곳곳에 노출된 암석의 상태가 매우 강한 암석으로 형성된 것이 다소 의아하다. 왜냐하면 혈을 맺는 기맥은 溫氣이므로 김대유 묘소가 혈을 맺고자 한다면 묘소에서 가까운 이곳의 암석도 어느 정도 박환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여유는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보겠다.
둘째, 入首龍

과협처에서 치고 오르는 기상이 썩 경쾌하지가 못하고 어딘가 석연치가 않다. 이와 같이 솟구치는 형상이면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치고 오르는 모습은 단숨에 매끈해야 좋은 법이다. 하지만 이곳은 마지못해 억지로 오르듯 꾸물대는 모습이다.
셋째, 당판 및 전순

돌혈의 경우 대개 당판이 작은 편이나, 이곳은 인작이 가해진 탓에 매우 크고 넓다. 크고 넓은 것이 흠이 되지는 않지만, 묘소는 넓은 당판의 중심을 지나 2/3 지점에 위치하여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려 불안정한 모습이다. 이 모습 때문에 몇몇 풍수인들은 묘소의 위치가 지금보다 뒤쪽이 정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당판에서는 2·3·4의 가지가 뿔뿔이 형성되었고, 특히 좌향의 초점이 되는 전순 부분이 U字 형태로 虛하여 下合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지점에 바위가 박혀 있어 전순을 대신하고 기의 누설을 막는다고 말하지만, 기가 이곳으로 흘렀으면 암석의 색은 좀 더 깨끗한 모습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곳의 바위는 매우 억세고 강한 형태를 하고 있으니, 설사 이곳으로 약간의 기맥이 통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溫氣가 아니라 冷氣라는 뜻이다. 지표에 노출된 바위의 형태가 과협처와 전순이 동일하므로, 기의 변화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오목한 전순부분과 암석>
누군가 말하기를 돌혈에는 懸針砂가 있어야 하므로 위 그림이 합당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강회백 묘소에 현침사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설사 위 그림 1·2·3·4를 현침사라 하면 어떠한 규칙과 합리적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나, 이곳의 가지는 아무런 질서 없이 산만할 뿐이다

비슷한 논리로 와혈에는 축대와 같은 반듯한 臺가 있어야 하는 까닭에 의왕시 김인백의 처 권씨할머니 묘소가 와혈의 교과서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판단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없다.(우측사진) 혈을 맺고 남은 기맥은 餘氣로서 전순을 만들기 때문에 당판은 반드시 橫보다 從이 길어야 한다. 대표적인 것들이 김성우 장군 묘소, 이석형 묘소, 김 징 묘소, 김 호 묘소, 정난종 묘소, 이안성 묘소 등이 그러하다.

<김성우, 김징 묘소>
 <김호, 이석형 묘소>
아마 이글을 읽는 풍수인들은 위 묘소 대부분을 답사하였을 것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묘소 앞에 전순을만들어 당판이 좌우보다 상하가 길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곳 김대유 묘소는 전순부분이 오목하여 위 묘소들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넷째, 명당과 수세

이곳의 전경은 남원에 있는 황희정승의 조부 황균비 묘소와 흡사하게 닮았다. 이 같은 모습의 명당과 수세는 어찌 보면 좌우에서 합수된 물이 모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길게 빠지는 형태 같기도 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득수처보다 파구처가 길다면, 得보다 失이 많은 경우라 하겠다.
다섯째, 청룡 백호 위성사진으로 보는 주산의 능선은 병풍처럼 좌우로 길게 펼쳐 주었다. 이때 주산에서 용호가 펼쳐주었으면 좋았으나, 이곳은 주봉에서 시작된 本身龍虎가 아니라 다른 봉우리에서 이어진 형태이다. 그들이 장풍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준다면 문제될 것이 없으나, 이곳의 龍虎는 묘소의 과협처와 일직선으로 凹陷하였다. 이것은 A·B·C 세 지점을 연결하는 일직선이 바람의 경로라는 의미이므로, 과협처 A는 결정적인 風害를 당한 것이다.


준수한 주산에서 의욕적으로 출발한 기맥은 과협처 인근에 이르러 뜻하지 않은 골바람이 치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땅속 깊이 숨어 버린다. 그 까닭에 과협처의 암석이 거칠고 추한 상태였던 것이다. 높은 산과 바닷가 근처의 산들이 오랜 세월 무방비 상태에서 바람을 맞은 탓에 흙살이 벗겨지고, 앙상한 바위만 남은 것과 같은 현상이다.
과협처의 바람을 피해 땅속 깊이 숨은 기맥은 어렵게 다시 솟았으나 정면에서도 바람이 불어 전순부분이 凹陷하자 아예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용호가 교쇄를 못하여 앞이 휑하니 뚫린 탓인데, 氣乘風卽散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산 이하 용세의 흐름이 교과서적인 과정을 거쳤음에도 무언가 부실하고 석연치 않은 이유를 확연히 알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곳은 풍파가 심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곳 묘도 失傳되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뒤늦게 찾았다고 하며, 김대유의 직계후손들(2세-인우, 3세-현, 4세-창조, 5세-중방) 묘소까지도 전부 실전되어 어쩔 수 없이 충북 음성에 竪碑設壇하였다고 한다. 또 김대유 부터 5세까지의 생몰연대 기록도 전무한 상태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곡절이 많았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음이다.

<충북음성의 壇>
각각의 가문에서 시조 묘를 숭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풍수인들은 좀 더 냉철할 필요가 있다. 특히 돌혈은 화려한 모습 때문에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른 혈상에 비해 장풍과 득수에 불리하므로 더욱 신중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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