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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말 피폐한 농민들이 모여서 하북성(河北省)거록현(鉅鹿縣)출신인 장각(張角)의
주도로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 당시의 한(漢)나라전역을 휩쓸었다. 곳곳에서 관군
(官軍)은 난군(亂軍)에게 포위되고, 황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구원병을 이끌고 조조(曹
操)가 등장하고, 동탁(董卓)이 동중랑장(東中郞將)에 임명된다. 그리고 난이 평정되고 동
탁(董卓)이 제거되면서,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에 들어가 세력을 넓히다가 촉한(蜀漢)、
위(魏)、오(吳)의 삼국시대로 돌입한다. 성도(成都)는 촉한(蜀漢)의 도읍지로 유비(劉備)와
그를 도운 신하들의 이야기가 얽힌 도시이다.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를 전편에서는 개괄과
한소열묘(漢昭烈廟=劉備殿)를 중심으로 보았는데, 이번에는 무후사(武侯祠=諸葛亮殿)와 혜
릉(惠陵=漢昭烈廟=劉備墓)를 돌아본다.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를 금리(錦里)쪽 정문인 대문(大門)에서 관람순서
▲ 삼국정립시기(三國鼎立時期)의 위(魏)、오(吳)、촉한(蜀漢)의 세력범위
◆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사당 무후사(武侯祠)
제갈량(諸葛亮 : 181~234)은 중국의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모신(謨臣)으로, 자(字)는
공명(孔明)이고, 호(號)는 와룡(臥龍) 혹은 복룡(伏龍)이라고 한다. 서주랑야양도(徐州
琅捓陽都 : 今山東省临沂市沂南县)출신으로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 산문가(散文家), 서
예가 및 발명가이다. 생전에 무향후(武鄕侯)에 봉해졌고, 사후(死後)에 시호(諡號)를 충
무후(忠武侯)로 추서되었다. 후한말(後漢末) 군웅인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
국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208년 오(吳)의 군벌 손권(孫權)과의 연합을 이끌어내 적벽에서 당대 최강의 군벌이
었던 조조(曹操)를 격파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유명하다. 이후 형주(荊州)남부 4군
을 발판으로 유비(劉備)를 도왔다. 221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丞相)에 취임하
였고, 유비(劉備) 사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촉한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罰)을 일으켜 8년동안 5번에 걸쳐 위(魏)나라의 옹주(雍州)·양주(揚
州)지역을 공략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 今陕西省西部岐山县宝鷄
岐山)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중국역사상 지략과 충의의 전략가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가 북벌을 시작하면서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
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며, 이를 보고 울지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평하는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안의 제갈량(諸葛亮)사당인 무후사(武侯祠)
▲ 제갈량(諸葛亮)사당인 무후사(武侯祠) 문위에 선주무후동비궁(先主武侯同閟宮) 글귀가 있다
▲ 제갈량(諸葛亮)사당인 무후사(武侯祠)문 위 선주무후동비궁(先主武侯同閟宮) 편액이다
선주무후동비궁(先主武侯同閟宮) - 선주(先主=선대황제 즉 소열황제)와 무후(武侯=제갈량)에
대해서는 똑같이 삼가고 섬겨모셔야 하는 사당이다.
▲ 제갈량(諸葛亮) 사당인 무후사(武侯祠)에 들어와보면 유비전(劉備殿)이 조금 높고,
제갈량전(諸葛亮殿)이 낮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경내에 있어도 君臣關係
유비전(劉備殿) 뒤에 아래로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서(武侯祠는 漢昭烈廟보다 조금
낮은 곳인데, 이것은 古代의 君臣關係를 상징한다) 바로 앞뒤로 문이 통하는 대청을
쳐다보면, 무후사(武侯祠) 편액이 걸려있다.
▲ 제갈량(諸葛亮)사당인 무후사(武侯祠)전각에 "명수우주(名垂宇宙)" 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 名垂宇宙 란 말은 "그 이름이 온 세상에 드리운다" 라는 뜻이다.
▲ "명수우주(名垂宇宙)" 라는 명구의 편액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포커스로 확대촬영
제갈량전(諸葛亮殿)에는 “명수우주(名垂宇宙)”라는 편액(匾额)이 걸려있다. 서쪽에는
앞편에서 설명한 청(淸)나라의「조번(趙藩 : 1851~1927)」이 쓴 유명한 시(詩)《공심
련(攻心聯)》이 연달아서 써 붙여져 있다. 그 내용은 제갈량(諸葛亮) 및 촉한(蜀漢)정
권과 류장(劉璋)정권의 성패와 이해득실을 분석한 최종평가를 빌미로 삼아 지은 훌륭
한 명성을 지닌 대구시(對句詩)이다. 후세인들에게 촉한(蜀漢)을 다스리는데서 앞서간
사람들(前人)의 겪은 경험을, 나라를 다스릴 때 교훈으로 삼고 참고로 하여, 상대의 세
력을 와해시키거나 그 세력을 평가하는데 특별히 주의하도록 하였다.
▲ 정원당(靜遠堂) : 제갈량(諸葛亮)의 인물상(塑像)
▲ 정원당(靜遠堂) : 제갈량(諸葛亮)의 인물상(塑像)
▲ 제갈량전(諸葛亮殿) 정중앙에는 머리에 관건을 쓰고, 손에는 깃털부채를 쥐고 앉아있는데,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온 몸에는 금박이 입혀져 있는 인물상(人物像)을 만들어 두었다.
우리가 나관중(羅貫中)의《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읽어보면 ……頭戴綸巾,身披
鶴氅,飄飄然有神仙之槪……(두대관건,신피학창,표표연유신선지개) <공명은 머리에
관건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를 입었는데, 표연히 신선 같은 느낌이 있다.>……
라는 구절이 있다. “身披鶴氅”이란 身<몸-신>、披<나눌-피>인데, 이 “피(披)”자는 ‘나누
다, 쪼개다. (옷을)입다. 걸치다’는 뜻이 있고, 鶴<학-학>、氅<새털-창>이란 글자로, “학
창의(鶴氅衣)”란 ‘학과 같은 하얀 새털옷’을 말한다.
여기에서 관건(綸巾)은 '고대에 푸른 실띠로 만든 두건'으로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사용
하였다고 하여 “제갈건(諸葛巾)”이라고도 한다. 이 綸자는 일반적으로는 <낚싯줄-륜>자
이지만, 여기서는 <푸른실 허리끈 - 관>자이다. 필자도 제갈량(諸葛亮)의 인물상을 한어
(漢語)로 소개한 글 중 “诸葛亮头戴纶巾、手执羽扇的贴金塑像”을 읽고 처음에는 해석이
조금 어려웠지만, 위 구절의 생각이 떠오르고 나서야 비로서 이해되었다.「우선(羽扇)」
은 ‘새의 깃으로 만든 부채’이다. 그래서「관건우선(綸巾羽扇)」이라고 하면, 제갈량이
사용한 ‘관건과 부채’를 말한다.
▲ 제갈초려(諸葛草庐) :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찾았을 때 누추한 초갓집에 살았다.
-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삼고초려(三顧草廬)로 힘을 보태준 이야기에서 -
♣ 삼고초려(三顧草廬)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구하러 몸소 누추한 곳까지 찾아다니는 것을 일컫는 말로
서, 후한(後漢)말기의 혼란하던 시대에 유비(劉備)는 백성을 구제할 큰 뜻을 품고 뛰어
난 인재를 구하려 했다. 어렵게 만난 서서(徐庶)를 조조(曹操)의 모의로 떠나보내면서
소개 받은 사람이 제갈량(諸葛亮)이었다. 제갈량(諸葛亮)은 유비(劉備)가 찾아올 때마
다 자리를 피했으나 3번이나 찾아오는 정성을 받아들여 유비(劉備)를 돕기로 했다. 이
후로 제갈량(諸葛亮)은 한(漢)나라가 망하자 유비(劉備)를 한(漢)나라를 이은 촉한(蜀
漢)의 황제로 세웠다. 제갈량(諸葛亮)은 유비(劉備)가 죽은 후 유비(劉備)의 뜻을 이어
나라를 튼튼하게 기반을 다지고 한(漢)나라를 망하게 한 위(魏)나라를 정벌하러가면서
2대 황제 유선(劉禪)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렸다. 여기에 전대(前代)유비(劉備)가 자
신을 찾아왔던 일을 회상하며 “三顧草廬”라는 말을 썼다. 이전에도 영웅이 인재를 간곡
하게 찾아다닌 경우가 많았지만,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일화를 대표적으로 들
게 되었다.
▲ 天下第一流 : 천하제일의 인물이며, 만세에 그 정신은 흐른다
이 현판은 촉한(蜀漢)승상인 제갈량(諸葛亮)의 무후사(武侯祠)글씨의 본보기이다
<天下第一流> 上書“漢丞相諸葛武侯祠”的字樣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의 공명원(孔明苑)
공명원(孔明苑) 안은 동서의 폭이 그렇게 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이 화
살과 쇠뇌촉의 연발이 가능한 무기를 지닌 군사를 거느리고 산굴잔도를 지나는 형상
을 만들어 두었고, 발굴된 약간의 실물도 있다. 거기다가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전
투를 하던 전쟁터의 유지(遗址)를 사진으로 전시해두었는데, 사진은 유명한 가정(街
亭)、오장원(五丈原)、정군산(定軍山)、팔진도(八陳圖)의 옛터 등 한번 볼만한 가치
가 있는 것이다.
▲ 공명원(孔明苑)의 폭을 조금 넓게 잡아서
▲ 삼국문화진열관(三國文化陳列舘)
▲ 삼국시대유물전시품(三國時代遺物展示品) ①
▲ 삼국시대유물전시품(三國時代遺物展示品) ②
▲ 삼국시대유물전시품(三國時代遺物展示品) ③
이러한 옛날의 현지 전쟁터를 한번 가볼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공명원(孔明苑)에서 더
욱 세세히 살펴보았다. 이런 유물과 사진은 공명(孔明)의 종적(蹤迹)을 기록해 둔 것으
로, 비록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황이 변하기는 하였지만, 역사에 포함되어 그 시대의 중
요한 정황이나 전쟁의 아픔을 살펴볼 수 있는 증거물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그 시
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심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 聽鵝舘이라면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집이란 말이다.
제갈량(諸葛亮)과 얽힌 성어(成語) 중에 “요아모선(搖鵝毛扇)” 이란 말이 있다. 搖<흔
들-요>、鵝<거위-아>자인데 진지를 말한다、毛<털-모>가벼운깃털을 말하고、扇<부
채-선>자을 쓴다. 전해오는 말로는 제갈량은 항상 손에는 우선(羽扇)을 잡고 작전을
지휘하였는데, 후세 무대에서 제갈량 같은 책사(軍師)를 연출할 때 손에 여러 우선(羽
扇)을 갖고 나왔다. 그래서 “요아모선(搖鵝毛扇)” 이란 말은 ‘계책을 꾸며 방도를 마련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흔히들 그런 일에 “요아모선(搖鵝毛扇)”의 방책이라도 있나?
식으로 쓴다.
♣ 제갈량과 관계된 성어로는 삼고초려(三顧草廬)、칠종칠금(七縱七擒)、요아모
선(搖鵝毛扇)、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仲達 : 司馬懿의 字)을 쫓아낸다(死諸葛
能走生仲達)、족식족병(足食足兵)、초출모려(初出茅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의 좌측에 있는 계련루(桂蓮樓)
▲ 제갈량전(諸葛亮殿)과 혜릉(惠陵) 사이의 연화지(蓮花池)
▲ 결의루(结義楼) : 도원결의(桃園結義)를 기념하는 누각
▲ 결의루(结義楼) : 측사면에서 촬영
◆ 한소열황제의 능(漢昭烈皇帝之陵) - 혜릉(惠陵)
▲ 혜릉(惠陵) - 한소열릉(漢昭烈陵) 입구문
▲ 혜릉(惠陵) : 겨울에도 상록수가 울창하고, 노란 은행잎이 보인다.
유비(劉備 : 161~223년)는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황제(재위 : 221~223년)로,
자(字)는 현덕(玄德), 시호(諡號)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다. 전한(前漢) 경제(景帝)
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일컫는 말
로는 유비(劉備)、촉한선주(蜀漢先主)、촉한소열제(蜀漢昭烈帝)、유비현덕(劉備玄
德)、유현덕(劉玄德) 등 여러 가지이다.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그 흔한 다른 군
웅들과 달리 뚜렷한 기반이 없이 짚신장수로 출발한 유비(劉備)였지만, 한고조(漢高
祖)의 풍도를 가지고 관우(關羽),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 등과 같은 인재들을 등
용하여 당대의 패자였던 조조(曹操)와 끝까지 맞서 촉한(蜀漢)을 건국하였다.
▲ 무후사(武侯祠)의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을 돌아보고 나서
그 다음에는 혜릉(惠陵)을 보게 된다. 릉(陵)으로 가는 적벽(赤壁) 길이다
▲ 사진에서 기와문을 지나면 사진우측으로 혜릉(소열제릉)이 나온다.
▲ 혜릉(惠陵) 정문 앞 마당과 맞은 편 문
▲ 혜릉을 지키는 사자상
▲ 혜릉(惠陵) 입구 문
▲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
유비(劉備)의 황제시호(諡號)는 소열제(昭烈帝)이고, 능묘의 이름은 혜릉(惠陵)
이다. 그래서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이라고 돌에다 새겨 놓았는데,
어느 때인가 릉(陵)자를 하나 쪼아서 아예 지워버렸다.
▲ 혜릉(惠陵) 휘호
유비묘(劉備墓)는 역사에서는 “혜릉(惠陵)” 이라고 말한다. 백제성(白帝城)에서 돌
아간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劉備)를 제갈량(諸葛亮)이 지세가 빼어난 곳을 골라
서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 앞 향로
▲ 혜릉(惠陵) 앞의 향로
▲ 혜릉(惠陵)의 향로 앞에서 뒤를 바라본 장면(즉 조벽의 안쪽 면)
▲ 고상재(古相齋) - 옛날 일을 서로 엄숙히 생각해 보는 집(?)이라란 무슨 뜻인가?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 안의 혜릉(惠陵) 문 바깥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의 혜릉(惠陵)에 겨울에도 피어있는 화초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의 혜릉(惠陵)에 있는 천추표연(千秋漂然) 편액
- 천추표연(千秋漂然) : 심원하고 원대한 마음, 천추에 빛나리라 -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의 혜릉(惠陵)으로 들어가는 문
▲ 혜릉(惠陵)에 있는 천추표연(千秋漂然) 편액 아래 서있는 두류봉
적벽대전(赤壁大戰 or 赤壁之战) 은 후한(後漢)의 헌제(獻帝)때인 건안(建安) 13년
(208년) 삼국시대초기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曹操)에게, 손권(孫
權)과 유비(劉備)가 연합해서 대항하여 양자강의 적벽(赤壁 : 今湖北省赤壁市西北)일
대에서 벌어진 큰 전투로,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의 연합군이 적은 병력으로 조조
(曹操)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은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이긴(以少勝多)’ 것이
며, ‘작은 힘으로 강한 것을 물리친(以弱勝强)‘ 유명한 전쟁이었는데, 이로서 삼국정립
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역사에서 “이소승다(以少勝多)” 의 유명한 전쟁
의 하나이면서, 삼국시대 3대 전쟁 중에서 제일 유명한 한판의 진검승부이다. 그것은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양자강유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강하작전(江河作戰)이었으며,
그 이후는 중국의 정치군사중심이 황하유역으로 바뀌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않
는다. 마지막에는 조조군(曹操軍)을 화공(火攻)으로 대파하였다. 조조군(曹操軍)은 북
쪽으로 방향을 바꿨고,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의 연합군은 각각 형주(荊州)의 일부를
탈취하였다.
▲ 혜릉(惠陵)의 능묘 위에 있는 초목들
▲ 혜릉(惠陵)의 능묘 표지글을 한소열지릉(漢昭烈之陵)이라고 써두었다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의 혜릉(惠陵)에 있는 광익당(廣益堂)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 안의 혜릉(惠陵) 문 바깥
▲ 동한시대(東漢時代)의 석관(石棺)
▲ 당비(唐碑) : 당(唐)나라시대의 비석
▲ 당비(唐碑)설명
당비(唐碑)는 809년에 건립하였는데, 전체이름은《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蜀丞相諸
葛武侯祠堂碑)》이며, 당(唐)나라때 이름난 승상(丞相)인 배도(裴度)가 글을 짓고, 저
명한 서예가인 류공작(柳公綽 : 柳公權의 형)이 글을 쓰고, 유명한 조각가인 로건(魯
建)이 비석에 글을 새겼다. 그 문장과 서법 및 조각솜씨가 매우 정예하여 “삼절비(三
絶碑)”라고 부른다.
♣ 현장설명에는 綽자를 한글로 ‘탁’이라고 읽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綽자는 <너그러
울-작>임. '탁'이라고 쓴 것은 틀린 것임.
x 柳公綽(유공탁)、o 柳公綽(류공작)
▲ 명비(明碑) : 명(明)나라시대의 비석
▲ 명비(明碑) - 1547년 장시철(張時徹→张时彻)이 문장을 짓고, 고등(高登)이 세운 명비(明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