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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일출봉/시의 천기를 누설한 천재 시인 김민부 노래 같은 시, 시 같은 노래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이 노래를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반면 작사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시는「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김민부의 시다. 여기에 장일남이 곡을 붙이고 테너 박인수가 불러 국민적 애창가곡이 되었다. 사람이 외로워도 그냥 저냥 사는 것은 기다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다림을 이토록 쉬운 말로, 이토록 절절하게 풀어낸 시가 또 있을까. 그 기다림은 외로운 산모퉁이에 홀로 서 있는 망부석의 슬픈 사연이라고 해도 좋고, 이산가족의 아픈 애환이라고 해도 좋다. 기다림이 소중한 것은 기다림이야말로 '없는 자'나 '잃어버린 자'에게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친 사람에게는 한 번 주었다가 도로 빼앗지 못할 명시이다. 곡을 떼어놓고 시 형식으로 볼 때 이 시는 자유시도 정형시도 아니다. 이 시의 각 행을 보면 8·5조 가락인데(8·5조는 크게 7·5조로 봄) 4행으로 된 2연의 이 시는 각 연의 3행까지 한 자의 예외도 없이 8·5조가 반복되다가 마지막 행에 가서 9·5조로 변조되어 있다. 7·5조는 흔히들 왜색조라고 하나 그 7은 3·4조, 8은 4·4조가 합쳐진 것으로 우리의 3·4·5조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7·5조로 둔갑하여 역수입된 것이다. 그런데 3·4·5조는 원래부터 우리 시조의 가락이다. 이 시를 잘 보면 시조의 율조와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각 연의 1, 2행은 시조의 초장(2행은 1행의 반복으로 봄), 3행은 중장, 4행은 시조의 종장으로 대치해 볼 수 있다. 물론 자수는 틀리지만 각행은 전통시조의 4음보로 읽히고 시상의 진행과 의미의 확장, 장구법(章句法)이 시조를 닮아 있다. 특히 3행까지 똑같은 보폭으로 반복되던 리듬이 4행 둘째 구("물레 소리에" 및 "물새소리에")에 와서 변조된다. 이 변조가 시조의 반전법(反轉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시가 시조냐 아니냐를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시는 알게 모르게 시조의 율격과 가락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시를 쓴 김민부는 어떤 사람인가. 요절한 우리 시대 국민적 시인 김민부는 타고난 서정시인으로 어릴 때부터 그 천재성이 드러났지만, 그 천재성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31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대학 동기생인 이근배 시인(현 한국시인협회장)은 "버릇없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시의 천기를 누설했기에 신이 질투하여 그를 일찍 데려갔다." 고 할 정도로 그는 시의 진실에 가까이 갔던 시인이다. 김민부는 1941년 3월14일 부산 수정동에서 부친 김상필과 모친 신정순 씨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성남초등학교를 거쳐 고교 2학년 때인 1956년 8월 첫 시집 『항아리』를 내었다. 본명은 "병석"(炳錫)인데 일제시대 호적 잘못으로 중학시절부터 "민부(敏夫)"라고 불렀다. 스스로 "아이노꼬"(혼혈아)라고 할 정도로 깊숙한 눈에 저음의 목소리, 이국적인 마스크를 한 이 소년은 실은 코흘리개로 누런 코를 닦지 않고 윗입술로 받치고 다녔다고 그의 옛친구 조용우(전 국민일보 회장)씨가 회고한 적이 있다. 그는 영남의 명문 부산고교 2년 재학시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1957년)에 시조「석류」로 입선, 3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1958년)에 시조「균열」로 2년 연속 당선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천재다. 그는 고교시절 부산시내에서 한다하는 문학지망생들을 모아 <죽순> 동인(뒤에 <난> 동인으로 개명)을 만들어 그 대장노릇을 하고 다녔다. 그보다 2년 뒤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이 된 박태문(경남상고), 장승재(경남고), 권영근(부산상고), 오영자(경남여고), 박송죽(남성여고), 황규정(부산고), 박응석, 임수생 등이 그들이다. 그는 고교시절 부산·경남은 물론 전국의 문예콩쿨을 휩쓸어 이 땅에 불란서의 천재시인 랭보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고교생이 일반 무대에서 신춘문예로 당선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김민부는 나에게는 고교선배다. 내가 문예부에 들어가니 그는 부산고 역대 문예부의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김민부는 문학뿐 아니라 실제로 학과공부도 잘 하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두 번이나 월반하고 월반 당시 시기를 놓쳐 구구단도 잘 못 외우고 수업시간에 필기도 잘 하지 않았음에도 공동출제 중학교 시험에서 부산시내 최고점수를 받을 만큼 천재였다. 고교에서는 문학에 빠져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제 천재성을 믿고 서울상대를 지망하였으나 낙방하자 서정주, 박목월이 있는 서라벌예대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그 대학 동기생인 이근배 시인이 지금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는 말이 있다. 문학계에도 계급이 있다면 자신이 일등병이라면 김민부는 4성장군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이근배 시인 또한 1961년에서 1964년 사이에 조선, 동아, 한국, 경향, 서울신문에서 시, 시조, 동시 부문의 신춘문예를 모조리 휩쓴 천재시인으로 지금 한국시단의 중심에 서 있는 분인데 그런 천재시인이 자기를 능가하는 천재시인으로 "김민부는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한 수 위의 시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가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장일남 같은 작곡가가 노산 이은상에게 작사를 부탁하러 가면 "김민부처럼 훌륭한 시인을 두고 왜 나에게 작사를 부탁하느냐? 그에게 가거라."라고 했다는 김민부! 고교생 신분으로 신춘문예에 당선했을 때 부산의 문인 김정한, 이주홍, 이영도 등이 다투어 축하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김민부! 김민부야말로 지금까지 부산이 배출한 최고의 시인이라고 부르면 과언이 될까. 실제로 김민부는 부산시에서 펴낸『정말 부산을 사랑한 사람들』(2000년)에서 총37명 중 그 첫 번째 인물로 천거되어 있다. 좀 더 살았더라면 최고의 서정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을 것인데 불의의 사고로 일찍 간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그가 죽기 한달 전 부산에서 마지막 막소주를 함께 했던 박태문 시인은 그를 곡하며 '어찌하면 좋으냐./이 가을날/너의 죽음을/마른 하늘에 뻐꾸기/울음 우는 뻐꾸기 울음,/(중략)/이 햇빛/이 햇빛들을/내 어찌하면 좋으냐.'(「너의 죽음을」 일부) 라는 시를 써 그를 아끼는 주위를 울렸다. 시조「균열」의 분석적 읽기 내가 부산출신이라 해도 김민부를 염두에 두고 부산에 내려간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번 기행을 김민부로 잡은 것은 나의 시조기행을 애독한다는 모시인의 희망도 있었지만 나는 김민부가 지금까지 우리 시단 내지 시조단에 재능이나 작품의 비중보다 덜 알려진, 그러나 이제는 마땅히 알려져야 할 시인,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시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산에 내려간 날은 마침 부산역전 새마당예식장에서 부산시인협회가 주관하는 "시 가람 낭송회"가 열리고 있었다. 시와 시조를 사랑하는 부산 문인들이 자발적으로 갖는 모임이었는데 불청객으로 불쑥 들어선 나를 환대해 주는 주최측이 고마웠고 온 김에 시 한편을 낭송해 달라는 사회자의 주문을 받고 나는 주저 없이 평소 외우고 있던 김민부의 시「균열」을 낭송하였다.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 배 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 할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나 남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징역사는 사람들의/ 눈 먼 사투리는 밤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푸른 달빛 없는 것, 그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소리 바람불어..../ 아무렇게나 그려진/ 그것의 의미는 저승인가/ 깊고 깊은 바위 속 울음인가 더구나 내 죽은 후에/ 세상에 남겨질 말씀쯤인가 나는「기다리는 마음」도 좋지만 이 김민부의 시조「균열」을 더 좋아한다. 이 시조는 특별히 외우려고 들지 않았는데 쉽게 외워져 나의 애송시가 되어버렸다. 이근배 시인도 40년 전에 한번 읽었을 뿐인 이「균열」이 따로 스크랩해두거나 두 번 따로 읽은 기억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또렷이 기억되어 지금도 외운다고 한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 시를 어느 시 낭송회에서 낭송을 했더니 대학에서 민부와 나랑 시를 배운 은사 미당 서정주 선생께서 들으시고 "근배야, 그 시 참 좋다" 라고 말하며 흡족해 하셨다고 한다. 제자건 누구건 내놓고 "참 좋다!"고 까지는 안 하시던 미당 선생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민부의 시재는 보통이 아닌 게 분명하다. 대개 천재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은 민부에게는 덜 어울리고 그 뭐 신과 천재의 중간쯤? 아무튼 민부는 우리 시대에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하나의 환영 같은 시인이다. 이 같은 이근배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시조를 가만히 읊조리면 사람의 소리가 아닌 어떤 신운(神韻)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는 읽을 때마다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배가 곯아" 라는 시구를 읽으면 전쟁과 폐허 한 복판을 지나온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목이 메인다. "배를 곤다"는 것은 단순히 "배가 고픈" 것과 다르다. 배고픔이 일상처럼 단련되어 있어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 모르는 절대기아의 경지를 말함이다. 그래서 내딴엔 감정을 돋우어 이 시조를 읊었으나 청중 쪽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냥 내려오지 못하고 잠시 해설 삼아 시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그 작가가 「기다리는 마음」을 지은 사람이라고 했더니 노래는 알겠는데 김민부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명색이 시를 쓴다는 시인들조차 그것도 그를 낳아준 동향출신의 시인들조차 몰라주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각설하고 이제 이 시를 감상해 보자. 이 시는 우선 읽으면 뭔가 색다르고 좋긴 좋은 것 같은데,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과문인지 몰라도 누구든 아직 이 시에 대해 명확히 해설한 글을 보지 못했다. 그의 시가 순수시의 서정성과 모더니즘적 현상주의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은 대충 파악된 통론이나 아직 김민부를 정확히 심층 있게 분석한 평론은 나와 있지 않다. 그의 시는 사실 좀 난해한 편이지만 난해할수록 평론가들이 좋아할 법한데 그렇지 못한 것은 왜일까. 김민부는 어린 나이에 일찍 시문에 들어섰으나 정작 사회에 나와서는 생활고로 시에 몰입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그 재능이 미처 꽃피기 전에 져버린 미완성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대부분 십대, 이십대에 씌어져서인지 모르나 억지로 만들어낸 시가 아니고 활화산처럼 분출한 시이다. 시가 치열한 만큼 자아와 객체가 미처 분리될 틈이 없었다. 순수시를 지향한 탓도 있겠으나 혼돈인 상태에서 이론이나 주의(主義) 이전에 자기 내면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 소리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시가 된 특이한 시인이다. 여기서「균열」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그 10년 뒤에 낸 『裸婦와 새』라는 그의 제2 시집 속에 나오는 또 하나의 「균열」이라는 자유시를 읽어보자. 할 일 없는 바위는/ 제 몸에다 새기고 있었다 몇 마리의 새가 날아간/ 슬픈 궤적과 바람에 헝클어진 꽃의 형상..... 무구한/ 처녀의 아랫도리/ 살과 살이 눌러 뒤틀리는 그 강인한 선을.... 어깨짬에/ 허리, 뱃대기에/ 지천으로 그려놓고 달밤이면/ 제 희열에 전율하는 저 암담한 오나니.... 제목도 똑같고 시상도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다만 쓴 연대가 다르고 후자가 좀더 관능적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작품 완성도를 놓고 볼 때 자유시의「균열」은 시조의 그것보다 후퇴한 느낌이 있다. 사실 뒤에 김민부는 좀더 다듬지 못하고 성급히 이 제2시집을 낸 것을 후회하고 모두 회수하였다고 한다. 미처 회수치 못한 시집 몇 권이 지금까지 시정에 돌아다닐 뿐인데 끝내 그는 새 시집으로 대치하지 못하고 영영 가버렸다. 두 작품 모두 '균열'은 바위와 관련이 있고 그 바위는 금이 간 바위다. 무구한 바위는 세상의 때(垢)에 찌들은 아픔을 제 몸에다 새기며 본래의 형상이 찌들어도 수용하고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김민부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떠난 순수서정을 모색했다고 하지만 무릇 작품이란 그 제작연대와 무관치 않은 것이다. 김준오(부산대학원장·문학평론가) 교수는 "그의 경우 시와 삶은 엄격히 분리되며 그의 시 세계는 사회 역사적 현실이 배제된 순수한 서정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이 작품이 쓰여질 당시엔 너나없이 배를 곯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전쟁과 기아 속에서 허덕이는 조국, 이 조국은 순진한 처녀로 환치되고 바위로 육화되어 동족상잔의 아픔을 남몰래 새기고들 있었다. 제 몸에 상처를 내는 일 말고는 아무 할 일 없는 암담한 현실에 시인은 전율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갈라선 한쪽의 승리는 달리 보면 다른 쪽의 패배가 아니던가. 열락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현실은 시인에게 이율배반의 자위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김민부가 쓴「雪野」라는 단편소설을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작품으로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최초로 발굴해낸 것임을 밝혀둔다.) -조용한 법당 안 염불소리에 가슴이 닳은 하루가 문전을 비쳐오는 달빛 속에서 그의 피로와 함께 찾아들고 있었다. 무료한 共感과 눈을 감으면 닥쳐오는 여래의 말씀에 대한 겸허한 옷가짐과 같은 마음과 허공에 대한 회의. 일시에 영겁으로 환원하는 혼령의 전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꽃내처럼 흩어지는 悅樂의 噴水. 달밤과 이성의 錯綜 -호 속에서 보는 11월의 싸늘한 달빛에서 수개월 전 절간에서 느끼던 그 달빛의 숭엄한 속삭임은 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내일 밤 "나는 또 다시 저 달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운명의 속셈을 하면서 달이 벌써 어떤 제시나 표상이 아니라 허공에 있었던 「존재」만으로 생각하였다. 다만 「존재」일 뿐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울음들이 스며 있는... 헤아릴 수 없는 기쁨들이 스며져 있는... 그것은 부르짖음이었다. 보이지 않는 깃폭이었다. 펄럭이는 깃발처럼 하늘을 울리는 노래와 전우들의 땀에 젖은 표정. 그는 이러한 울부짖음 속에서 드높은 열락(悅樂)의 소리와.... 행렬. 그들이 타고 가는 트럭. 뒤에 잇대어 따라오는 트럭들. 흐린 하늘. 그는 이 울부짖음에 저윽히 들려오는 영혼의 공명을 느끼고 있었다. -"불쌍한 건 그 계집애야. 우리가 아니란 말이야. 네놈이 그 애를 불쌍하게 여기는 게 싫었어. 불쌍하기는.. 우리도 그녀와 무엇이 달라. 똑 같애. 이 눈더미 위에서 서로 살아보자는 그거야. 우리라고 무에 나은 게 없어. 불쌍한 녀석이 다른 무엇을 불쌍하다고 하는 건 우습지. 제각기 자기로부터 버림받은 거야. 구제 받지 못한 목숨들, 그거야. 또 아침이 오겠지." -"자 배가 고프니 먹고 다투자," 돌을 고이고 밥을 지었다. 그녀가 제것도 얼마 없으면서도 넣어준 그 밀로써... "이것 다 먹을 때까지야 살랴구요." 그녀의 울음 섞인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달을 보았다. 동굴 입구 천장에 매달려 있는 달을.... 그는 그 달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1958년 청조문학) 이 소설의 줄거리는 혜전 불교과에 다니던 주인공이 전쟁에 참여하여 북부전선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낙오하여 눈 덮인 벌판을 헤매다 만난 오막살이, 거기 혼자 집 남은 처녀에게 잠시 의탁하다 결국은 버려 두고 남하하다 끝내 적병과 조우하여 교전하다 죽어간다는 이야기다. 원고지 100장 분량의 이 단편은 단순한 스토리텔링 식의 이야기가 아니고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동족상잔 전쟁과 살육의 무의미성을 고발하고, 생존의 냉엄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줄거리나 주제문제보다 소설의 문체와 그가 구사하는 문장력에 관심이 더 갔다. 이 소설을 다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나는 도처에서 그의 시의 힌트나 암시, 특히 시조「균열」의 모티브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시조「균열」첫 수에는 '바위'와 '달'과 '처녀'가 등장한다. 달빛은 배곯은 처녀의 내밀한 꽃내 위에서 착종(錯綜)한다. 열강의 이해가 상충하는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서 따라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남고 싶어도 남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이 상황에서는 떠나는 자는 목숨 걸고 떠나고 잔류자는 남아서 할 일없이 제 어깨에 그 아픔을 새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새긴 아픔은 주름처럼 금이 가고 그 금에는 세월 따라 때(垢)가 낀다. 이 "때"는 김민부 시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의 시작(詩作)의 전 과정은 어쩌면 이 "때"를 세척하기 위해 하는 "빨래" 작업에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둘째 수는 이미 당도한 죽음의 세계이다. 서로 다른 고향에서 징역처럼 끌려온 병사들은 이유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절체절명에 빠진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매"하고 죽는 놈이나 "엄마"하고 죽는 놈이나 사투리는 사투리지만 그것은 일본말도 중국말도 아닌 분명 우리말이라는 것이 시인을 절망케 하는 것이다. 동족끼리 알아듣지만 알아들을 수 없기에 '눈 먼 사투리'가 되는 것이다. 이 슬픈 진실은 전선의 밤, 그 소용돌이 속 푸른 달빛에 파묻히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긴 죽되 그냥 죽지 못하고 아무 것도 없는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소리로 남는다. 이 죽음은 셋째 수에 가서 비로소 의미가 부여된다. 그녀가 기다리는 오막살이로 죽어서도 시적 자아는 다리를 절룩이며 가고 또 가는 것이다. '전환하는 하늘', '변조하는 하늘' 아래에서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가야 한다. 왜? 그것은 조국이라는 바위에 이름 없는 금 하나 새기기 위해서다. 그래서 시인은 죽어서도 그냥 죽지 못한다. 이 산하 어디에도 널려있는 바위들에 새겨진 저 무수한 균열들은 바로 그러한 눈먼 죽음의 서러운 자기확인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확신은 못한다. 그래서 '내 죽은 후에 남겨질 말씀쯤인가' 하고 시인은 반문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김민부 시인은 우리 산하 어디에선가 눈 부릅뜨고 배부른 우리, 남북대립에서 남남갈등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또 다른 동족상잔을 지켜보고 있는지 모른다. 천마산 허리에 선 일출봉 시비 나는 부산 자갈치시장을 지나 송도 쪽으로 달렸다. 암남동 동물검역소(옛 혈청소)로 가는 길은 웬만큼 도로를 넓혔다고 하나 워낙 배산임해의 지형이라 임시수도 당시의 길 그대로 비뚤비뚤하고 꾸불꾸불하였다. 내가 고1때 봄소풍을 갔던 이 길은 40년의 세월에도 별로 변한 바가 없었다. 차는 송도 앞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천마산의 허리를 배배 감고 달렸다. 그 허리의 배꼽쯤 되는 지점, 감천가도 고갯마루에 스무 평도 안 될 것 같은 자투리땅을 밟고 시비가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차를 대일 곳도 없어 발치께 얼른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비 앞으로 갔다. 외지고 쓸쓸한 마련해서는 시비는 의외로 깨끗하였다. 현재 김종문의 글씨로 전면에 기다리는 마음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 1995년 3월에 부산서구청장이 설치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주변에는 칠 벗겨진 벤치 두어 개와 기어오르다만 등나무 줄기가 엉거주춤 쓰러질 것 같은 차일 기둥을 붙들고 섰을 뿐, 아무도 찾지 않는 황량한 쉼터였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바다가 무슨 강물처럼 떠 있는데 레미콘을 실은 잡선들 너머 시선 끝에는 망망한 수평선이 아니라 영도의 제2송도가 앞을 막고 있었고 그 너머로 또 울창한 아파트, 그 위로 솟은 봉래산이 아침해를 가리고 있었다. 뒤는 어떠한가. 천마산이 지척에 솟아 있어 달은 뜨기도 전에 한밤이 먼저 올 것 같은 가파른 산 속이었다. 이곳 어디가 일출봉이고 월출봉이란 말인가. 나의 막연한 비감과는 딴판으로 그저 이만한 데라도 시비가 세워졌음에 감사하고 있다는 듯 시비는 저 혼자 달관한 듯 의연하였다. 그 옛날 사라호 태풍 때 저 송도 앞 바다에 매어둔 보트가 날아가 산꼭대기에 걸렸다는 그 과장법의 천마산 한 허리에 달랑 서 있는 시비는 그러고 보니 말잔등에 걸터앉은 형국이었다. 그래, '더러븐' 세상, 늘 보는 일출이나 월출인데 까짓거 못 보면 어떤가.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을 시인이여, 기왕에 천마를 탔으니 언제고 승천할 날만 기다리거라 하고 시비를 향해 묵도를 하고 있으려니 같이 간 시인들은 사진 한 장 찍고는 흥미 없다는 듯 저만치 몰운대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기왕 온 김에 나는 암남동 공원에 들어갔다. 암남동 공원은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패총이 있는 유서 깊은 곳, 17만 평 면적에 초록바다와 송림이 울울한 가파르고 외진 공원이다. 2002년에 이곳에서 열린 조각전에서 출품된 세계 유수의 조각품들이 온 공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어릴 적 기억에 있던 암벽에 부서지는 파도라도 보고 갈 요량으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데 노루목 명당자리에 거대한 외국조각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거대한 돌 두 쪽을 마주 세워놓았을 뿐인 이 조각물에는 "Two Pieces" 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누가 분단된 국가가 아니랄까봐 작품명마저 "두 조각"이란 말인가. 설치미술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냥 돌덩이일 뿐인 것을 최고 명당자리에 비싼 돈주고 사서 모셔둔 당국의 처사에 공연히 심통이 났다. 도대체 이 부산송도 바다와 이름 모를 외국인작품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세운다면 이 자리에 김민부 시비가 세워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김민부의 시비는 이 곳 말고 제주도 성산포에 세워져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사실 일출봉과 월출봉은 이 나라 어디에 가든 다 있을 것이다. 누구든 그 봉우리에 서면 망부석이 아니더라도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랴. 장일남은 수많은 작곡 중에서도 김민부의 시를 보고 작곡한 「기다리는 마음」과 그가 쓴 오페라대본「원효대사」가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라고 하였다. 욕심 같아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봉마다 시비를 세웠으면 한다. 김민부가 두고 간 사람들 짧은 순례를 마치고 나는 서둘러 서면 영광도서 앞에 있는 황규정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서울서 내려가기 전에 미리 전화로 약속해둔 시간에 맞추어 달려갔더니 거기에는 김민부의 문우 김천혜(문학평론가·부산대교수)씨도 와 있었다. 황 변호사는 김민부와 같은 고교동기생이자 서울서 하숙도 같이 하여 친동기간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 내게는 고교와 대학 양쪽 더블선배가 되어 초면인 나에게 김민부에 대한 모든 것, 심지어 그 뇌쇄적인 감각시에, 그 록 허드슨처럼 잘 생긴 외모에 뭇 여성들이 반하여 많이 따랐다는 얼핏 부끄러울 것 같은 부분까지 스스럼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심지어 벽제 화장장에까지 나타나 울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기서 김민부의 뼈 한 조각을 훔쳐 수락산 꼭대기에 묻었다가 뒤에 따로 재를 지냈다고 한다. 말끝에 황 변호사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에 자기 책임도 있다고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김민부는 부산에서 MBC 방송의 스크립터로 일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MBC 작가실에 고정 작가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막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그는 별일 없으면 토요일마다 김민부와 만나 정동 MBC 앞 목로주점에서 술을 하는 것이 일과였다. 물론 술값은 김민부가 내었다. 1972년 10월27일, 운명의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그날 따라 뭔가 일이 생겨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못 갔는데 김민부는 안 오는 그를 무려 2시간이나 기다리다 3시경에야 할 일없이 마침 밀려있던 연말특집 원고나 쓰자 하고 갈현동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날 저녁 갑자기 한파가 몰아닥쳐 석유난로를 피우고 원고를 쓰다 날린 폐지에 불이 붙어 졸지에 중화상을 입고 적십자병원에 옮겼으나 운명하고 만 것이다. 그날 그가 그와 만나 늘 하던 대로 술이나 마셨다면 그는 그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인간사는 필연이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들 하지만 액운은 그 순간만 피하면 지나가는 것인데 그걸 못 피하고 가다니.... 이 죄 없는 죄책감은 그의 평생에 한이 되었다. 김민부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 아니냐 하는 말이 있지만, 또 그의 시를 보면 "죽음"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오지만, 그는 실제로는 낙천적이요 긍정적인 면이 많았던 사람이다. 섣부른 감상에 목숨을 끊을 성격도 나이도 아니었다. 김민부는 서라벌 예대와 동국대(62년)를 나온 후 생활고로 천재성과는 상관없는 방송작가로 활약을 하면서 수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앞서 시조 외에 제1시집 『항아리』(1956년), 오페라 대본「원효대사」, 제2시집『裸婦와 새』(1968년) 등이 있다. 그는 시와 시조, 수필, 꽁트, 평론, 희곡, 코미디 대본, 멘트, 영화각본(1970년, 김귀섭 감독 황금마차) 등 무릇 글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잘 했다. 시부문에서는 그는 시조의 율격을 체득하고 있어 그의 시에는 모두 강한 음악성이 깔려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시적 천재성은 생업에 쫓겨 제대로 발휘될 시간이 없었다. 100kg을 오르내리는 거구에 이국적인 눈망울로 끊임없이 원고지를 메워 나가던 그 무서운 필력은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드라마도 쓰고, 쇼프로도 구성하고, 「웃으면 복이 와요」대본도 썼는가 하면, 시사 프로그램, 방송 에세이도 썼고, 시추에이션 드라마 등 닥치는 대로 써나갔다. 동아방송의 인기프로 「한밤의 플랫홈」 같은 것은 선배작가 한운사도 그 재치와 맛깔스런 멘트를 격찬하였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부산 MBC 라디오 최장수 프로그램인「자갈치 아지매」의 창안자이자 최초의 PD가 김민부였다. 여기서 그 당시 같은 방송작가로 활동했던 윤청광 씨의 글을 잠깐 인용해 보자. 비위가 약한 나는 내 성격에 맞지 않은 프로그램은 청탁이 들어와도 사양하기 일쑤였는데, 김민부 형은 나와는 딴판이었다. “보거래이, 청탁은 물리치는 게 아닌 기야. 무슨 프로그램이건 청탁 오는 대로 다 써야 하는 기라.” 방송작가의 생활이 보장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사양하다가는 굶어죽기 알맞다는 충고였다. 그래서 그는 매일 나가는 프로그램만 해도 이 방송 저 방송에 대여섯 개나 되었다. 동아방송에는「밤의 플랫폼」, 기독교방송에는 「장군 멍군」, MBC에는「영이네 집」등 집필하는 프로그램이 수두룩했다. MBC 작가실 바로 내 옆 책상에서 그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글을 쓰곤 했는데, 그 숨소리가 어찌나 거셌던지, 그는 꼭 불 맞은 멧돼지 같은 거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 뒷자락을 곧잘 허리 밑까지 흘리고 다니던 그는 글을 쓰다가 풀리지 않으면 화장실로 달려가서 수도꼭지에 머리를 박고 찬물을 뚝뚝 흘리면서 작가실로 돌아오곤 했었다. 참으로 열심히, 참으로 끈질기게 글을 썼고, 참으로 많이도 술을 마셨다. 어느 날 내가 병들어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우리 집에 열흘쯤 누워 있을 때 그는 먼길을 김영곤 선생과 함께 걷고 걸어서 귤 한 상자 사들고 문병을 왔었다. “죽으믄 안 된데이, 퍼뜩 일나거라아.” 그는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그런데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글을 쓰다가 난로가 엎어지는 바람에 일어난 불로 젊은 나이에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저 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적십자병원에서 작가들의 정성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서 한운사 선생은 “가난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한다”고 조사를 해서 우리 모두를 다시 한 번 울게 하기도 했는데... 너나 없이 가난했던 시절, 그래도 동료작가들이 우정을 모아서 장례를 치르고 단 얼마의 돈을 남겨 부인 손에 전해드렸더니, 홀로 되신 부인은 가끔씩 작가협회에 꽃을 사들고 찾아오셨는데, 이제는 그나마 소식이 없다. 죽으면 안 된다고 해놓고 저 자신이 먼저 죽어버린 이 아이러니를 어찌 보아야 할까. 우리 시단의 큰 별이 되었을 김민부의 요절은 두고두고 애석하다. 어떤 청탁도 거부하지 않고 아무리 허접스러운 일감이라도 주어지면 열심히 해낼 뿐 아니라 어떤 고통도 강한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이겨내고 있었던 그가 자살하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위의 글처럼 집필 중 자기 실화에 의한 사고사인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 화재시 불붙은 남편을 안고 불 속에서 끌어내다가 자신도 얼굴이 타버려 지금껏 베일을 쓰고 음지에서 살고 있다한다. 그의 사망시 네 살이었다는 딸 지숙이 뜻밖에 황변호사 사무실에 있었다. 황변호사는 친구와 사별 후 그의 딸 지숙에게 장학금도 대주고 졸업후 지금까지 자기 사무실에 데리고 있다고 한다. 가고 없는 친구에 대한 의리와 변함없는 우정에 가슴이 물컹해졌다. 나는 뜻밖에 김 시인의 한 점 혈육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지숙은 이미 중년부인으로 몸집이 불어 뚱뚱하였으나 얼굴은 아직 앳되어 보였고 내가 본 사진 속의 김민부를 그대로 속 빼닮은 것 같았다. 어머니와는 오래 떨어져 살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안 난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그 표정엔 그늘 같은 것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유품 같은 것 없느냐고 하니까 대학시절 누이(지숙의 고모)에게 보낸 편지가 하나 있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여 그 편지를 카피해 받았고 단 한 장 남았다는 아버지 사진은 따로 우송해 받았다. 오빠는 잘 있다. 며칠을 해가 뵈이더니 종일 비가 나리는구나. 이렇게 비 속에서 갇혀 있는 날은 왈칵 고향생각이 나고 너희들이 보고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구나. 아렛밤 꿈에 누나를 보고 며칠을 누나걱정 때문에 편지오기만 기다린단다. 圭正이들이 신체검사 때문에 내려간다고 떠들썩하니 야단이니... 그래도 나는 부산으로 가고싶긴 하지만 내려갈 수가 없구나. 이것저것 마음이 가 닿지 않는 며칠이었다. 이 편지에는 그의 육친에의 정이 애틋하게 배어있고 어쩌다 불량배에게 맞은 부위가 흉터로 남아 그 흉이 평생 갈까 걱정하는 생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었다. 황변호사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으나 나의 일정 때문에 아쉽게 일어서야 했다.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쓸 수는 없고 다만 한 가지 내가 김민부의 작품이 생각보다 적은 것 같다고 했더니 다방면에 걸쳐 글을 쓰다보니 정작 자신이 추구하는 글을 쓰는 데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 했다. 또 워낙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이나 정리정돈을 못하는 성미라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MBC의 사장비서실에 근무하던 배모라는 여사원이 김민부의 글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녀는 김민부의 글이 좋아 김민부를 따랐고 작가실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김민부는 글을 쓰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겨서 던져버리기 일쑤였다는데 그 폐지마저 일일이 주워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민부 사후 이 배여사는 『창밖의 여자』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약 유명작가로 데뷰하였다. 그런데 김민부의 미망인 이영수 여사가 우연히 이 책을 보고 그 내용이 자신이 생전에 남편의 원고를 타이핑해준 것과 글자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똑같았으므로 이 소설이 김민부 작품임을 알고 추궁하였으나 완강히 부인하는 바람에 더 밝혀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시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라는 내용의「창밖의 여자」는 뒤에 조용필이 곡을 붙여 노래하여 히트하였다. 곡은 히트하였으나 그 가사의 작사자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배여사가 김민부의 미발표 시를 가지고 있다면 저작권이야 그가 갖더라도 고인과 문단을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세상에 내놓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부산과 일출봉-시의 천기를 누설한 천재 시인 김민부(2)/박구하 김민부의 작품세계 산문적인 요소와 감각적인 경험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순백한 경지에서 감동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 나의 시정신이기도 했다. 발레리가 감동을 주로 하던 순수시론을 쓰고 후기에 이르러 그 자신이 순수의 실제성을 부정한 것은 순수시의 세계를 현대적 위치에서 본질적인 파악을 기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15살 짜리가 쓴 자기 시집 『항아리』의 후기 첫 부분인데 어느 평론의 자리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시론이다. 이처럼 그는 순수 서정을 자기 시의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거기서 '내면적인 고전선율'(즉 시조)을 추구하고 그 궁극의 심상을 찾아 방황하면서 차츰 탐미주의적 감각주의와 모더니즘 경향으로 이행한다. 그는 시조 5편, 자유시 58편 총 63편의 시를 남겼을 뿐인데 이 시들은 대부분 허무적이고 부정적이고 하강적, 여성적 이미지와 감각적이다 못해 관능적인 시어들로 충일해 있다. 그의 시에는 "죽음" 또는 그와 유사한 시어(빈사, 역살, 꽃상여, 저승, 무덤 등)가 유달리 많이 나오고, "육체"와 "영혼", "황혼", "일모", "노을" 등도 자주 나온다. "달빛"과 "하수구"도 단골인데 "새"가 유일한 그의 긍정이요 희망이다. 고교시절에 이미 시쓰기가 끝나버린 이 시인에게는 인간의 유위성이 한낱 죽음으로 내닫는 허무로밖에 보이지 않았는지 모른다. 김준오 교수는 그의 시를 평해 단형 소품에 뛰어나다고 하면서. "언어절약의 짧은 호흡은 원론적으로 말해서 사상과 감정의 절제에 등가가 되어 시의 어조를 넋두리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법이 없다."고 한다. 이제 김민부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보자. 첫째, 그의 시는 형식상 길든 짧든 대개 시조의 음보에 편승하거나 시조가락의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자유)시는 시조로 분류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① 길바닥에/ 죽을 상을 한 여자가/ 싸리 조롱을 놓고/ 점을 치고 있다 때묻은/ 새가/ 물어다 주는/ 종이 한 장... 대낮에/ 행인의 손아귀에/ 죽음을/ 쥐어준다 (「구름」 1연) ② 여자대학교의/ 기숙사 같은 거/ 그 가을날/ 그 진구렁의 진구렁의/ 죽은 풀꽃/ 마르던/ 냄새 같은 거 오- 육신/ 밖으로 나가고싶어/ 육신 밖으로/ 나가고싶어 (「바다」 전문) ③ 어디선가/ 새가 울면/ 풍금소리를/ 들으면서 더 짙은/ 꽃내의 밀도 속에서/ 진동하여/ 미동하는 그것은/ 숱한 달빛이/ 착종하는/ 꽃밭이었다 (「나부와 새」 마지막 연) ④ 사슴도/ 배암도 없는/ 돌담을 타고/ 이끼 젖어 고함치는/ 바위들/ 돌멩이들/ 오랜 풍우에 닳은 어깨를/ 신념 마냥 내밀고/ 그래도/ 통곡하여라 (「城址」 마지막 연) (*빗금과 행갈이는 편의상 필자가 임의로 한 것임) 이상은 내가 그의 1, 2시집에서 아무렇게나 뽑아 본 (자유)시들인데 이들이 전통적 시조형식에 꼭 들어맞는다고는 볼 수 없으나 거의 시조의 기본 음보를 밟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김민부 시의 형식상 제일 큰 특징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느 부분을 읽더라고 고저장단의 리듬이 있고 흥청거림이 있다. 그가 시조로 등단하고서도 정작 시조는 통틀어 5편밖에 없어 어찌된 영문인가 하다가도 이처럼 시에 심어놓은 가락을 보면 그는 영락없는 시조시인이다. 둘째, 그의 시는 두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초기시는 전통적인 가락을 바탕으로 한 자연시가 많은데 이는 50년대 시류를 탄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적 대상도 산양, 산그늘, 들꽃, 산, 바다, 피리, 성지 등이며 시조「균열」,「석류」등도 이때 씌어졌다. 시조가락을 탄 시상의 율동과 절제와 압축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적 힘은 허무적이고 영탄적인 내용까지 웅혼하게 만든다. 그래서 전편(全篇)에 외재율이 충만하여 장시를 읊는데도 무리가 없고 단시에서는 더욱 빼어난 효과를 거두고 있다. 가요시「기다리는 마음」(전통3음보)도 크게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하겠다. ⑤ 불타오르는 정열에/ 앵도라진 입술로 남몰래 숨겨온/ 말못할 그리움아 이제야 가슴 뻐개고/ 나를 보라 하더라 (「석류」 전문) ⑥ 항아리는 질항아리는/ 이울리는 배꽃을 이슬 젖은 가슴에 안겨두고// 구름을 이고 꽃별을 마시며/ 눈물 젖은 자욱을 이어간 선들의 어울림// 바람에 작은 나래를/ 숨긴 그 속으로 흐르는 그윽한 소리 소리// 초록 배암의 상처/ 처량한 고요로 굳은 가슴에 안겨두고 (「항아리 1」 전문) ⑤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가작(1957년)으로 장일남이 곡을 붙인 시다. 흔히 말하는 수줍음과 그리움의 표상인 석류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고교생답게 소박하게 드러낸 평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보다 10년 전에 발표된 조운의 시조 「석류」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이라는 이미지를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쓴 ⑥은 고교생의 의식수준을 이미 넘어서 있다. 더 이상 석류를 보며 그리움에 애를 태우는 소년이 아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허덕이는 가망 없는(?) 민족이 그의 망막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픈 교감만 있지 그는 아직 상아탑 안에 있을 뿐이다. 아무 담을 것도 없는 서러운 '항아리'에 꽃이나 꽂고 지는 꽃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을 뿐 아직은 그 의식이 허무에 가 닿지는 않고 있다. 시 전편에 아직 육탈치 못한 영혼의 울부짖음이 작품마다 치열하게 배어있다. 이에 비해 후기시는 철저히 인간적이다. 자기인식과 존재에 대한 의문과 고뇌로 가득한, 그래서 비교적 난해한 시편이 주류를 이룬다. 그가 처한 현실과 추구하는 이상의 괴리에 고뇌하고 그 고뇌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로 전이된다. ⑦ 새들은 제 몸무게만큼/ 나뭇가지를 흔들다 가고 여자는 제 영혼의 무게만큼/ 날 흔들다 가고... 가을이여/ 떫디 떫은 나의 피를 향그럽게 익히소서/ 저 항아리 속의 죽은 달빛과 葡萄를/ 발효시키듯이 (「기도」 전문) ⑧ 가을은/ 들메뚜기의 비취빛 눈망울 속에서/ 등불을 켠다 가을은/ 죽은 가랑잎을 갉는/ 들쥐의 어금니에 번쩍거린다// 가을은/ 묘비를 적시는/ 몇 줄기 비로 내려서..... 이 하룻밤/ 내 슬픈 외도(外道)에 욱씬거리는/ 통증으로/ 온다 (「가을은」 전문) ⑨ 흉장(胸墻)밑에/ 함박눈이 펑펑 울고 습기 있는 달빛과 음악을/ 탐식한 벽난로엔 그리운, 그리운 네 얼굴이/ 타던 夜半에/ 香 풀로 짓이긴 먼 강물에 銀의 못을 박고/ 울던 겨울이여.... (「겨울에」 전문) ⑩ 밤이면 취하나니/ 술잔은 엎어지고 비창(扉窓)엔 복사꽃이/ 무데기로 내려도 내 육신 버릴 데 없이/ 살 부비는 덴/ 저승 같은 봄 (「조춘」 전문) 이제 항아리는 더 이상 무엇을 담거나 꽂아두는 용기가 아니다. 제 '떫은' 피를 받아 익히는 제단이 된다. 계절은 내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리 있고 할일 없는 나는 '찻잔 속에 남은 죽음'이나 핥으며 술픈 '외도'나 한다. 이 본의 아닌 쾌락주의는 ⑩같은 극단의 탐미적인 시를 슬기도 한다. 눈만 뜨면 부딪치는 소외감과 무의미한 삶에 저항하는 길은 이렇게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⑪ 葬行이던가? 울어대는 달의 여울에 동짓달 하늬바람에 꽃상여가 밀리듯 저승쯤 되는 강물을 건너가는 저 짐승떼... (「기러기」 전문) ⑫ 몇 마리의 새가/ 뒹굴고 있다/ 잿빛 하늘을 쪼아먹는 새/ 새장 속에 거꾸로 매달린/ 빈사의 새/ 어두운 사내들이/ 돌아앉아 술을 마시던/ 그 술집에서/ 그들의 잡담이/ 태워버린/ 나의 손// 배경엔/ 겨울이/ 마악 퇴장하고 난 후/ 아직도 돌고 있는/ 은빛 도어의 손잡이 (「은지화 1」 전문) ⑬ 공원엔/개가 한 마리/가고 있었다/벤치엔/예수 같은 사나이가/빨래처럼 널려 있었고/사나이의/미간에/죽은 신문지 우에/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자가 둘 있었다/죽어버린 여자와/잊어버린 여자가/어깨동무를 하고/누군가의/발자욱에 갇혀/울고 있었다// 한 구석에서/ 낙관처럼 찍혀 있는/ 가로등에 불을 켜는 노인의 실루엣.... (「은지화 Ⅱ」전문) 김민부의 후기시는 대체로 이렇게 암울한 빛깔의 존명시로 일관되어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고 했던가. '대단하지도 않은 물질주의가 사람들의 눈망울마다 토라홈처럼 번창하는 시대'(『나부와 새』후기 중에서)에서 그는 가을의 '슬픈 외도'를 통증으로 느끼면서 겨울 날 기러기떼도 '꽃상여'에 실어 떠나보내고 흔들리는 '은빛도어의 손잡이'를 잡고 '가로등'에 불을 켠다. 젊은 날 어지간히 헤매던 정신적 편력도 이제 끝내고 싶다. "가을이 올 때마다 나는 내 목숨을 줄이더라도 몇 편의 시를 쓰고픈 충동에 몸을 떨었다" 라고 고백한다. 드디어 참글을 쓰기 위해 '십리쯤 시오리쯤 밖에서' 새벽을 향한 어떤 기별을 받는다. ..... 이제 잊었지만은 / 요즈음도 네 기별을 듣긴 듣는다/ 이 가을/ 날 쳐죽일려고/ 마른 번개로/ 마른 번개로/ 치긴 치지만/ 십리쯤 시오리쯤 밖에서/ 헛치고/ 십리쯤 시오리쯤 밖에서/ 아드득 이를 가는/ 섬광으로만/ 섬광으로만/ 오는 기별을... (「기별」 후반부)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바야흐로 새로운 시의 세계로 나아가려고 다짐하는 단계에서 이 시인은 돌연한 죽음을 맞게 된다. 자기를 '쳐죽이려고' 달려온 '마른 번개'를 피하지 못하고 '십리쯤 시오리쯤' 밖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시인 특유의 감성으로 어떤 '기별'을 듣긴 들었는데 그 기별이 그의 문전에 당도하기도 전에 수취인이 수취불능을 자초한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이 외롭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위대한 미아가 되리라' 다짐하던 그는 평생 서른 한 번째의 가을을 다 못 채우고 갔다. 찍다만 영화필름이라 할까. 다 못 돌린 영화랄까. 한 천재의 시극(詩劇)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우리 시대의 천재시인은 시인이었으면서도 그의 장례는 시인협회장이 아니라 방송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이렇게 가버린 김민부는 한참 잊혀져 있다가 그의 사후 20여 년이나 지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김민부의 유고집이 나왔다. 문우 김천혜의 제안으로 흩어져 있던 작품을 거의 망라하여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1995, 민예당)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우선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발굴한 단편소설 『雪野』와 평론 『古典이 풍기는 情緖』도 누락되어 있지 않은가.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에서 이번 기행 내내 머리 속에 남아있던 화두 하나를 떠올려보았다. 그가 시집의 후기에서 마지막 남긴 말 "난 너무 괴로워하지 않고 살았나보다." 라는 말을 어떻게 새겨야 할까. 그것은 어쩌면 나에게 던져주는 민부 형의 충고인지 모른다. 과연 내 삶은, 내 문학은 얼마나 진지했던가. 누구보다 존재의 심연에서 본질과 대결하고 고뇌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제 와서 자기는 위대한 시인이 아니라 보통 시인이었다고 꼬리를 내리는 것일까. 아니면 석가모니 부처가 40여 년을 설법을 하고도 "나는 한마디도 설법한 적이 없다" 하고 열반에 든 것을 흉내내본 것인가. 독자들은 아래에 옮기는 그의 시를 읽고 그 말뜻을 새겨보기 바란다. 어깨든 가슴이든.... 나는 때때로 죽음과 조우한다 조락한 가랑잎 여자의 손톱에 빛나는 햇살 찻집의 조롱 속에 갇혀 있는 새의 눈망울 그 눈망울 속에 얽혀 있는 가느디 가는 핏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문에 퍼덕이는 빨래.... 죽음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 어떤 날은 숨 쉴 때마다 괴로웠다 죽음은 내 영혼에 때를 입히고 간다 그래서 내 영혼은 늘 정결하지 않다 (「서시」전문) 박구하 약력 서울법대 졸업. 《시조문학》 천료. 본지 편집장. <연대> 동인 한국정가연구회장. 서울신문 명예논설위원. 공동시집 『예감』 외 *이글은 시조월드 제9호(2004 가을호)에 발표된 글임. [출처] 김민부 시인에 대하여|작성자 김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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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산의 위대한 시인 김민부, 그의 시는 이토록 아름답고 당차도 큰 빛을 보지 못해서 아쉽기 그지없군요.
알고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 아주 훌륭한 시를 쓴분이군요 아까운 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