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 2월 17일 독일 ‘낭만주의’ 시인 하이네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이네라면 대뜸 〈로렐라이〉가 떠오른다.
“바람은 차고 날은 저무는데 /
라인 강은 고요히 흐르네 /
산마루에는 저녁 햇살이 /
눈부시게 반짝이는데”
“그 뒤편에 아름다운 처녀 /
눈부신 자태로 앉아 /
금빛 장신구를 반짝이며 /
금빛 머리카락을 빗고 있네”
“황금빗으로 금발을 빗으며 /
그녀는 노래를 부르네 /
그 노래, 듣는 이 모두의 가슴을 뒤흔드는 /
놀라운 곡조라네”
“나룻배를 탄 어부들 노래를 들으며 /
한없는 슬픔에 사로잡히네 /
그들은 절벽을 보지 않고 /
바위 언덕만 바라본다네”
어떤 독자는 이 대목에서 문득 의아함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어부들이 왜 갑자기 슬픔에 사로잡힌 것일까? 금발의 아가씨가 황홀한 노을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더할 나위없는 정경을 보면서 뜬금없이 슬픔이라니?
하이네는 〈로렐라이〉의 이미지 탓에 ‘낭만주의’ 시인으로 여겨진다. 그가 30세에 《노래들의 책》을 펴냈을 때 슈만을 비롯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시에 곡을 붙였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 그저 그런 반응을 얻었던 《노래들의 책》은 슈만 등에 의해 가곡으로 재탄생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하이네는 그 이후 낭만주의와 담을 쌓은 작품 경향으로 돌아선다. 심지어 생애 후반 20여 년을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로 보낸다. 줄기차게 독일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한 것이 죄목이었다. 그렇든 말든 일반 독자들은 줄기차게 하이네를 낭만주의 시인으로 숭앙한다. 자신이 ‘낭만적’이고 싶어서이다.
낭만적인 인간형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슈만이 잘 보여준다. 1854년 2월 17일 하이네의 고향 뒤셀도르프 라인강 높은 언덕에 서 있던 슈만이 “사랑하는 클라라. 나는 라인강에 결혼반지를 던지려 하오. 그대도 그렇게 하오. 그러면 우리 둘의 반지는 영원을 함께할 것이오”라는 유서를 남기고 몸을 던진다. (슈만은 구조되어 목숨을 부지했다.)
아무튼 대중은 로렐라이 전설과 클레멘스 브렌타노 소설 〈고트비〉의 작중시 '라인 강변의 바하라흐'를 명작으로 다시 가꾸어낸 하이네의 〈로렐라이〉를 지극히 사랑했다. 하이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프로이센 국가 당국도 기원전 213년 진시황이 보여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다시 실행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뜨거운 열광 탓에 그러지 못했다. 정권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로렐라이〉를 ‘작자 미상’의 시로 유통시켰다. 반체제 시인 하이네는 ‘권력의 굴욕’에 힘입어 그 이후로도 변함없이 낭만파 시인으로 남았다.
첫댓글 매일 주신 시를 필사하면서 마음에 한뼘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시가 글이 주는 편안함이 술이주는흥분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