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두 딸이 있다. 나는 그들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 살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인생만큼 소중한 것이 있으랴. 힘겨울망정 스스로 선택했을 때 후회가 없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지켜보는 아버지로서는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두 딸은 잘 커주었다.
내가 딸들을 보면서 가장 행복한 때는 도서관과 다름없는 내 사무실에 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책을 고른 뒤 “아빠, 이 책 내가 가져가면 안돼?”라고 물을 때다. 골라놓은 책의 수준을 보면 딸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해서다.
건축학을 전공한 큰딸은 대학을 졸업한 후 지난 8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큰아이는 대학 시절에 무척 방황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에는 신나하더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불안해했다. 3학년 1학기 때는 스스로 주저앉았다고 표현할 만큼 흔들렸다. 그러더니 3학년을 끝내고는 휴학하고 말았다.
솔직히 나와 아무런 상의 없이 휴학을 결정해버렸을 때는 화도 났다. 그래서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 영어학원을 다니고 책도 더 읽는 등 정말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가을에 접어들자 유럽에 40일 동안 배낭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중에 그 여행이 자기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여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매우 가난하게 자랐다. 중학교는 극빈자장학생으로 겨우 마칠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 입학금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선생님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설립한 금오공업고등학교를 추천했다. ‘공업 입국’을 위해 신설된 이 학교는 최우수학생들을 전액장학생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자격요건을 채우지 못해 꿈을 접어야 했다. 키가 150㎝ 이상이어야 했는데 나는 딱 2㎝ 모자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왜 그리 키가 크던지.
선생님들이 다음으로 추천한 학교는 역시 전액 무료인 철도고등학교였다. 나는 동기생 14명의 원서를 접수하러 혼자서 서울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철도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 워낙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률이 높았는데 나는 체력장에서 20점 만점에 14점밖에 받지 못해 학과시험에서 몇 개 틀리지 않았는데도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학을 하고 싶었고 손재주는 무조건 젬병이었던 나는 두 학교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입학에서 졸업까지 모두 책임져주는 학교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철도고등학교의 탈락 사실을 알자마자 인문계인 평택고등학교의 원서를 사서 집으로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원서를 보자마자 “네가 무슨 돈으로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까지 가!”라며 내 뺨을 내갈겼다.
그런 사정을 잘 알았던 한 스승이 나에게 입주가정교사를 주선해줘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3학년 때 몇 선생님과의 다툼으로 오기가 작동한 나머지 자퇴원을 내고 말았다.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에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가 죽는다고 난리였다. 아예 방에 들어가셔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엉엉 울고 계셨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공주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혼자서 벌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주에 단 한 번도 다녀간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보태준 학비는 단 3만원뿐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요즘 전화만 걸면 큰손녀 걱정을 하신다. 집 떠난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한번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무심코 내뱉고 말았다. “아버지, 비록 국내지만 자식이 유학 갔을 때는 걱정 한 번 않더니 손녀 걱정은 왜 그렇게 하시오”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참 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차 싶었던 나는 “걱정 마세요. 원래 제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 아니겠어요” 하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글 /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1982년 출판계에 입문해 15년간 출판영업자로 일했다. 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출판비평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디지로그 시대의 책의 행방>, <디지털 시대의 책 만들기>, <열정시대> 등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