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천은 1958년의 개천절날 제주도를 원적으로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개천(開天)이며, 법명은 석천(石千)이고 호는 운재(雲齋) 또는 선암(禪岩)이다
먼저 그는 약관 24세 때부터 미국 로스엔젤레스, 알래스카,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설계 사무소, 건설 현장, 학교 등지에서 건축 구도생활을 약 10년간 하였다
Pasadena Art Center College of Design에서 환경디자인을 수학하였으며
중앙대 대학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철학박사 과정에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건축대학원 겸임교수, 비평건축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이도건축(二圖建築)을 통한 예(禮)의 행각을 행하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실내건축가협회와 한국실내디자인학회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인테리어디자이너가 된 동기와 배경
개천절날 태어난 이유로 아버님이 지어주신 ‘開天’이라는 내 이름은 어린 시절 ‘무엇이 하늘을 여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종종하게 하였으며, 그 하늘에 대한 관심은 뒷산에 누워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들을 쳐다보는 일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구름은 그저 신비롭고 환상적인 것이었으며, 성장과 더불어 변화무쌍하고 자재무애하는 구름의 조형은 저러한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한 욕구가 조형예술인 건축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후일 작가가
될 것인가, 스님이 될 것인가를 두고 고심을 거듭하다, ‘하늘을 옮아가는 구름에 어떤 흔적이 있던가’ 하는 스님의 말에
작가 그리고 禪을 공부하는 철학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작품 방향
禪의 空間은 역사적으로 간명하고 직접적인 구조를 통해 이룩되었으나, 그 동안의 작품은 정(靜)에도 머물지 않고 동(動)
에도 머물지 않는 靜中動 動中靜이 아니라, 靜도 없고 動도 없는 둘이 아닌 일합(一合)의 현대적 리얼리티(Reality)를 갖는
禪味의 空間을 추구하였다. 그 방법으로써 일 획으로 일체를 표현하거나 일체로써 허공에 일획을 긋는 일승법(一乘法)의
건축 혹은 실내 건축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앞으로의 작품 방향은 ‘덕산의 방망이’, ‘임제의 할‘이 아닌 ‘가섭의 미소‘와
같은 비어있음으로 일체의 본질인 진여를 만나고자 한다. 즉 한정된 모습과 고정된 실체로서의 건축과 공간이 아닌
변화하며 이어지는 생명의 실상인 空의 모습으로 무한 생명을 위한 무한 공간을 추구한다. 空은 객관적 실체가 따로 없는
것으로, 실체가 없음으로 무한한 실체를 만들어 내는 자리이다. 마치 텅빈 거울과 같이…註ㆍ덕산의 방망이와 임제의
할:덕산은 도를 묻는 자에게 방망이질을 자주 하였으며, 임제는 ‘할’이라고 큰소리로 말하였다는 고사註ㆍ가섭의
미소:부처가 연꽃을 들어보이자 가섭이 부처의 뜻을 알아 듣고 미소를 지었다는 고사
작가로서의 디자인 철학
禪建築은 禮로서의 禪, 禪으로서의 禮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근대 건축운동은 ‘기능을 향하여’,
‘LESS IS MORE’ 등의 가치로 역사 문화적 진보를 이룩하였으나, 다가오는 세기는 ‘인간과 환경의 본성을 향하여’
라는 가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과 환경의 본성은 일치한다는 생각으로, 물질 문명 혹은 기술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상도시란 존재하지 않는 꿈이며 오히려 인간과 환경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 전제될 때 서 있는 바로 이곳이 불국토(佛國土), 서 있는 바로 이곳이
금수강산 일만 이천봉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계의 원리에 지배받는 현상계의 원리는 변화하는 자연계의 원리와 일치함으로 그 생명의 지극함을 알게
되는 것.
중중무진(重重無盡: 해도 해도 다함이 없는) 무한생명으로서의 인간생명을 무한 공간으로서 발견하게 하는 空間, 무한
영역의 인간을 어찌 유한 영역의 건축으로 담을 수 있겠는가?즐거움을 주는 건축이 아닌 즐거움을 발견하게 하는 건축을
통해서 산을 넘어 내려가는 것.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은 편하고 시원한 바람이 부나,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서 산을
넘어 가야 하는 것. 이와 같이 건축에서 자유롭고 일체로부터 자유하자면 바로 보고, 바로 앎을 통해 건축의 건축이 아닌
건축에서 자유로운 건축을 통해 일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선건축(禪建築). 자유로움도 없어지는 것, 그것이
예건축(禮建築).힘찬 기세와 자유자재하는 유연함을 법도 삼아 무한의 질서와 함께 하는 질서가 아님으로(非秩序) 질서가
있고, 완성하지 않음으로(非完成) 완전한 것. 평정, 고요하면서 대지와 공간에 기가 돌아 능수능란하는 化와 動의 空間.
존재와 시간을 넘나드는 시간과 공간이 무한 운동을 하는 建築,
비어있음으로 일체와 함께 한다.
일체와 함께 자재무애하고 자유자재한다.
회사의 명칭을
‘이도건축(二圖建築)’이라고 한 이유
때로는 ‘一’이 되고
때로는 ‘二’가 되고
때로는 ‘道’가 되고
때로는 ‘圖’도 되어
때로는 부처의 모습 때로는 범부의 모습으로 나투다가,
둘이면서 하나되고 하나면서 둘이 되어
천지 일체에 스스로 가득한 무한 건축.
천지 일체에 아무 뜻 없이 ‘一’보다 ‘二’가 좋아,
재주가 덕을 넘지 않는 건축.
종교를 디자인에 반영시키는 사고의 전개과정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는 자연계의 원리는 현상계의 원리와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자도, 인식되는 대상도
본질로서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종교적 관심과 공간적 관심은 둘이 아닌
하나로서 동시에 발심하는 것이다. 나는 불교를 믿는 불자라기보다는 부처나 노자, 공자 등의 성현이 가르쳐준 길을 건축
혹은 공간의 길을 통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을 통해 우주의 원리와 공간의 원리를 바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환경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없이 진실하고 깊은 감동을 주는 空間을 디자인할 수 있겠는가?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 수석과 분재의 美와 같은 것.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있으나 감동을 생성시키는 격조와
창조력은 약한 것. 뿌리가 깊은 나무는 적당한 물과 햇빛 그리고 바람이 있으면 절로 저절로 푸른 것이다.
본인이 얘기하는 비어있음의 의미
내가 존재하기에 공간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공간은 나의 존재이며, 내가 일체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듯 일체와
함께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노자는 “천하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라고 하였다. 이것은 도의 창조적 一合
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도의 초월적 측면은 無이고, 내재적 측면은 有이며 창조는 무에서 유가 생기한다는 것’으로
그 무는 空으로서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질서도 없는 비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본성으로서 ‘명덕을 밝히고 사람을 새롭게 하고’, 지극한 禪에 머무르게 하는 것.
‘바위산에 마른 폭포 한 줄기, 검은 이끼 자욱마다 구름이 그윽하다.’
이와 같이 마른 폭포이나 어떤 때는 바위되고 폭포되고 어떤 때는 구름되고 건축이 되어 천지에 화육하는 것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
작품은 나의 존재의 한 모습일 뿐이며 그 존재는 빛과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形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작품보다는
오히려 존재 속의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으나, 8년 정도의 해외 생활 끝에 국내에서의 첫 작품인 ‘3D 빌딩’과
최근작인 ‘구할구’가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다
철학과 회화, 건축과 인테리어디자인의 함수 관계
철학과 시는 내게 냉철한 이성과 지성을 키워 주며 그림과 건축 실내건축은 마치 선수행과 같이 正見할 수 있는 직관력을
키워주며, 禪과 禮의 깊이를 알게 한다. 그러한 것들은 존재에 대한 앎의 깊이를 더해 나를 자유자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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