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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 수요예배 / 4월 2일 수요일.
+ 제 목 :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순종"
+ 본 문 : 빌립보서 2장 5절 - 11절 (신약 320쪽)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2025년 고난주일은 4월 13일이고, 부활주일은 4월 20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부활주일 전날까지 40일 동안의 사순절기는,
3월 5일부터 시작이 됐습니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순절기 다섯 번째 수요일입니다.
오늘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순종!” 이라는 설교제목으로 나누겠습니다.
+ 옆에 분들과 인사합시다. / “0 0 0 을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순종” - 여기서 ‘순종’ 은 참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믿음의 결단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순종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고통도 있고,
순종을 위해 자신을 비워야 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순종을 방해하는 시험도 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는 순종이라는 말 대신 ‘복종’ 이라는 말이 나와 있는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지신 십자가는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순종’ 이라는 영화에 이런 가사의 찬양이 나옵니다.
“빈손으로 왔습니다. 작은 사랑 가슴에 안고 순종하며 왔습니다. 가슴이 움직이는,
데로 이곳에 왔습니다. 나를 버리고 내려놓을 때 내 안에 넘치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작은 순종에 하늘 문을 여시는 그 사랑에 눈물 흘립니다. 나 이제 이곳에 살아갑니다.
당신의 사랑 나누며 한 줌의 흙이 되기를 이곳에 나를 묻고 내 생명 다할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순종합니다.“ - 구구절절히 울컥하게 만드는 찬양 가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제자의 삶’ 입니다.
이전에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을 부인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 내가 관계 맺고 싶은 사람들,
그런데 자신을 부인하고부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내가 무엇하기를 원하시는지.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렇게 세상을 보고 나니 순종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며 삽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략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부류는 ‘군중’ 들입니다. 그들은 좋은 것들을 보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이런 군중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 그냥 좋았고, 말씀이 그냥 좋았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좋았고, 그래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영생에 관심 가진 부자 청년,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 같은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제자’ 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 좋았고, 말씀이 그냥 좋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냥 좋아서 따르는 수많은 군중과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온갖 고통과 아픔이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꼭 순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순종을 원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7절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순종의 특징은 ‘자신을 비움’ 입니다.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비움이고 순종입니다. 여러분! 99% 순종은 불순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는 7인 중에,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
바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된 이기풍목사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하늘 보좌에서 낮고 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처럼,
이기풍 목사님은 자신을 부인한 삶을 통해, 선교사라는 순종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1907년은 우리 민족의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해입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사경회를 통해, 성령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그해 6월에는 장로회 신학교의 첫 번째 졸업식을 통해 7명의 목사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졸업생 중에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을 가장 먼저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지는 우리나라 최남단 제주도였고, 이기풍목사님을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이기풍 목사는 1865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조선은 ‘신미양요‘ 사건으로 인해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았던 때였고,
예수님을 믿기 전 깡패였다고 알려진 청년 이기풍은, 평양선교부를 마련하기 위해서,
평양에 땅을 사러왔던, 선교사 마포삼열목사님의 돌을 들어 턱뼈를 깨뜨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독교에 반감을 가졌던 이기풍이, 원산에서 스왈렌 선교사의 전도를 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통화자복하게 되었습니다.
스왈렌 선교사는 “예수님이 당신을 귀하게 쓰시려고, 당신의 죄를 다 사하여 주셨소.”
그렇게 회심한 이기풍은 신학을 공부한 후, 1907년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가 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나게 됩니다.
가족을 목포에 두고 홀로 제주를 향해 떠나, 1908년 봄에 제주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제주 선교는 수차례의 목숨을 위협하는 고난과 굶주림, 숙소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 현재의 제주성안교회와 서부교회의 전신인 성내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이후 금성, 모슬포, 조천, 성읍, 한림, 중문, 삼양, 세화 교회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선교의 열매들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한없이, 한없이 자신을 비우는 노력이 없이는 갈 수 없었던 ‘순종의 길’ 이었습니다.
이기풍목사님의 아내 윤함애 사모의 유언은 막내 딸 이사례 권사에 의해 전해지는데,
“세상과 짝하여 살지 마라.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마라. 열심히 교회봉사를 하라.
주의 종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시다. 절대로 주의 종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마라.
목사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미리암과 같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네 인격을,
어떠한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짓밟고 천대와 멸시를 하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라.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 심판대에서 예수님께서,
판가름을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참으며, 네가 네 자신을 죽여라. 네가,
죽어지지 않을 때 남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할 때 예수님도,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를 제일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신자의 무기는 감사와 인내와 사랑과 겸손이다. 감사는 축복을 열고,
닫는 자물쇠이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겸손할 수가 없다. 겸손하지 못할 때,
성령님은 너를 외면하실 것이다. 제일 무서운 것은 신앙의 교만이다.“
다른 하나는, 순종의 십자가는 ‘자기를 비움’ 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비우지 못하는 것 때문에 순종의 십자가를 지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순종의 십자가’ 앞에서 살펴보아야 할 신앙의 장애물을 오늘 본문을 통해,
묵상했으면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기 위해 품으셨던 ‘순종’ 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첫째,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은, 모든 명예를 내려놓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라는 것은, 안락함을 포기하시겠다는 마음입니다.
셋째, 사람으로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육신의 고통을 감당하시겠다는 마음입니다.
사순절 다섯 째 주간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묵상하며,
우리가 가야할 순종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마 4:1-4)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아멘!
순종의 길을 가기 위해 우리 앞에 주어진 십자가는 ‘시험’ 인가요? ‘능력’ 인가요?
순종의 길에 늘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시험’ 은 능력 있는 순종으로 이끌어 줍니다.
시험이 능력인 것은, 시험을 통해 순종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흔들리지 않도록 권면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3절, 4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속는 이유는, 가짜와 진짜가 잘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험을 통해 어느 것이 진짜인지 드러나고, 드러나면 경쟁력을 가지게 됩니다.
순종의 십자가 역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짜 순종과 가짜 십자가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자기 비움과 죽기까지 복종하는 과정을 통해 순종의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순종의 십자가를 지게 하는 능력으로 인도하는 필수과정이 됩니다.
예수님의 광야시험의 시작이 ‘성령에 이끌리어’ 라는 구절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아멘! 아주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 금식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을, 광야의 시험으로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때가, 기도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40일 금식을 마친 후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로 작정을 했는데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 헌신을 결심하고, 순종의 길을 가기로 하는 순간 그 길을,
하나님이 인도하셔야 한다고, 시온의 대로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메시지는, 순종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가 겪어야 하고, 이겨내야 하는 시험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 시험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게 있어서, 40일 간의 광야는,
예수님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마귀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기 어렵게, 마귀의 시험이 성령님의 이끌림 가운데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인정될 때, 우리들 삶에서 많은 의문점들이 풀려지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펼쳐질 세계에 대해 기대합니다.
“그래, 이제 내 인생에서 고난은 끝났어, 이제 내 인생에 시온의 대로가 열리게 될 거야!”
그런데 참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은혜도 체험했고, 하나님 앞에 결단도 했고,
내가 그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했더니, 확신 가운데 말씀도 주셨는데,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사실 이 부분이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광야의 시험은, 이 부분에 있어서 아주 명확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의 시험으로 이끌어 내셨다!” -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가장 명확한 예수님의 사역이 드러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이라는 광야에서의 시험의 때에 주시는 사명이, 가장 명확해 지면,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성경을 보면, 정말 여러 곳에서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출애굽하며 첫 번떼 만난 시험이 홍해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며, 만방의 민족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홍해는 시험이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엘리야와 엘리사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그 시대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시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시험 가운데서 늘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 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도,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순간이,
광야에서 기도하던 때가 아니라,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다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도를 마치고 능력을 행하시는 일만 남아 있을 때,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 예수님이 감당해야 하는 시험 앞에 찾아올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하셨고, 그 시험을 통해 사단에게, 아니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
예수님이 감당해야 하는 이 세상에서의 십자가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시험은 우리들의 삶에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시험은,
오히려 우리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순종하기 위해 지어야 하는,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명확하게 알게 해 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우리에게 닥친 시험을 이기고 순종하려면,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탄의 시험은 아주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일은 끊임없는 자기 비움과 연관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인간의 욕망을 비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이미 예수님은 사십 일을 금식하며,
어려운 시간을 이겨냈고, 배고픔으로 인해 보상을 받아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끝까지 육신의 욕망을 비워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마태복음 4장 3절을 보세요.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아멘!
40일 금식이 끝났습니다. 이제 돌을 들어서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 뭐가 어떻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충분한 능력이 있고, 충분히 보상을 받을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유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제는 제가 누릴 만하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깊이 생각해 보세요. 왜 이 사단의 말이 예수님에게 유혹이 되었는지 말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사단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 정도 기적을 행하는 것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40일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유혹이 아니라,
마귀가 시키는 것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유혹입니다. 마귀의 말을 따르는 순간,
마귀의 부하가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유치한 말입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 이런 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친구가 갑자기 말합니다.
“야, 너 옷에 뭐 묻었어!” 그래서 옷에 뭐가 묻었는지를 보려고 고개를 숙이면 이렇게,
말합니다. “야, 너 나한테 인사했어. 지금부터 너는 내 부하야. 나는 대장, 너는 쫄병."
이 얼마나 유치한 놀이입니까? 예수님께서 돌로 떡을 만들었다고 마귀의 부하가 됩니까?
예수님은 이미 많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단이 예수님을 향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래서 시험이 된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십자가라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유혹입니다.
결국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육체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도, 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유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 “나는 하나님 영광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고통을 받으려고 왔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섬기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사단을 우리를 향해 속삭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너에게 능력이 있다며”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포기하고 살라고 유혹하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십자가를 포기하라는 유혹입니다.
사단은 아주 집요하게 예수님을 향하여 “넌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 을 취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지신 “순종의 십자가” 는 끝까지 쓸 수 있는 능력을 쓰지 않으시고 시험을 이기신,
아픔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기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고통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권리를 다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 다 버리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끊임없이 유혹하지 않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권력이 필요해, 더 많은 건강이 필요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해“ - 이 유혹에 넘어가면, 우리는 그것이 부족할 때마다,
나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 부족을 채우는 일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을 하며,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기 보다는 영광을 쫓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들에게 가장 명확한 도전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유혹가운데서 그 물결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세상 가운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버겁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키며, 우리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정말 버겁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 세상을 거스르려고 너무 힘쓰지 말고,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으십시오.
거스르기는 힘들어도,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그냥 버티고만 있으면,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서 물줄기가 갈라지게 할 것이며, 거기 길을 내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험가운데서 우리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며,
그 어떤 사탄의 유혹가운데서도, 우리의 사명을 잃지 않는 것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인인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사십니까?” 이 물음에 혹시 우리가 “예!” 라고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 나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왜 귀를 주셨습니까? 누군가 여러분들을 향해 비난하고 욕하는,
소리를 듣기만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라고 만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입을 만드셨습니까? 불평하고 욕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하나님 말씀과 비전을 선포하며,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사순절 기간을 지나가면서, 여러분들은 세상이라는 광야의 시험가운데서,
무엇을 담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들 속에 더러운 것들을 담아 두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세상에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그릇이 어떤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시험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그 시험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시험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힘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순절에 광야에 선 우리들을 향해, 여러분들에게 찾아온 유혹 앞에서,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버거워도,
그 자리에 굳게 버티고 서서 물결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 그 어떤 풍요로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주어진 길을,
가기로 결심한 사람들만이 순종의 십자가를 지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2025년 시순절기를 보내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순종의 십자가를 지고 복종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마무리기도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