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음악파일인 MP3 유통을 놓고 사이버 공간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소리바다’ 논쟁은 디지털 저작권의 인정을 놓고 보수와 진보, 과거와 현재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띠었다. 필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변화시킨 디지털 문화로 인해 사용자의 의식에 변화가 왔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그는 예술가야말로 디지털 문화에 따른 변화를 직시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켄터키에 거주하며 농부로, 또 수필가로 활동중인 웬델 베리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하퍼스(Harper’s)》라는 잡지에 <나는 컴퓨터가 필요없다>는 제목의 에세이를 게재했는데, 이 글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연필이나 펜, 종이로 글을 쓴다. 아내는 내가 쓴 글을 1956년에 사서 지금까지도 잘 쓰고 있는 로열 스탠더드 타자기로 타이핑해 준다. 타이핑을 하면서 그녀는 잘못된 것을 찾아내고 여백에 작은 표시를 해놓는다. 아내는 훌륭한 비평가로 내 습관적인 실수와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고, 또 무엇을 써야 할지 종종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아내는 즐겁게 일하는 문학적 가내수공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이 방식에서 잘못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이 컴퓨터를 사면 글 쓰는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나는 컴퓨터를 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전력회사가 돈 버는 일을 거들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컴퓨터를 갖지 않으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글을 쓰면 연필로 쓰는 것보다 쉽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주장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누군가가 컴퓨터로 작품을 써서 단테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썼고, 그것이 컴퓨터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걸 증명한다면, 그때는 컴퓨터에 대해 조금은 존경어린 어조로 말할 것이다. 그래도 컴퓨터를 사지는 않을 테지만….”
이 글은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손으로 쓴 한 묶음의 원고더미를 아내라는 장치에 집어넣으면 타이핑이 되는 동시에 편집까지 완성되는데 어떤 컴퓨터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비평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컴퓨터로 글을 쓰지 않겠다는 건 그저 개인의 취향일 뿐인데, 그걸 잘난 척하며 비난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전력회사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필자가 환경을 파괴하는 담배회사, 석유회사의 광고가 실리는 잡지에 글을 낸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다”라고 시니컬하게 반박한 글도 있다. 또 어떤 이는 “필자의 말처럼 컴퓨터로 쓴 글 중 단테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렇다면 1956년 타자기로 쓴 글 중 단테의 것보다 나은 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제시하라”며 논리의 빈틈을 공략하기도 했다.
굳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며 이 글을 쓴 이유는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 그중에서도 예술이나 창작 분야의 종사자들은 더 더욱 - ‘컴퓨터 없던 지난날이 좋았다’며 과거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베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베리는 과거를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보기 드물게 자신의 주장을 펴 나갔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다. 이 글은 과거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말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의지이며, 필자는 이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시대가 바뀌면서 빠른 속도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변하고 있으며, 창작을 사랑하고 즐기던 사람들도 바뀌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디지털 도구
세상은 바뀌고 있다. 아니, 이미 바뀌었다. 베리처럼 멋진 아내를 둔 사람이건, 아니건 바뀐 세상은 모두에게 변화를 기대한다. 원한다면 과거에 안주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현실 속에서, 바뀐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도구를 사용하며 인간은 발전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혁신적인 도구들이 우리 삶의 질을 바꿔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이, 그리고 일반인들이 공적을 인정하는 인류의 대표적인 발명품 다섯 가지는 불, 전기, TV,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디지털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이 가능하다. 어찌 보면 디지털은 가장 널리 사용되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은 단어가 아닐까.
아날로그 도구들은 변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완만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디지털 도구들은 ‘괜찮다’는 평가가 내려질 즈음이면 상당수의 지지세력을 확보할 만큼 급진적이다. 이런 지지세력을 나눠 보면, 이미 10대는 널리 사용하고 있고, 20대는 어느 정도 활용의 폭을 넓히고 있으며, 30대는 장점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다소 주저하고 있고, 그 이상의 세대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그 도구가 자리잡기까지 좀더 시간이 걸릴 거라고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디지털의 특징에 기인한 바 크다. 디지털 장비는 하나의 장비로 복합적인 기능을 제공하며, 디지털 콘텐츠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복제, 생산이 가능하고, 디지털 미디어는 이전보다 많은 정보를 거의 생산과 동시에 세계로 내보낼 수 있다. 이는 정말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로 사용자들은 순수한 사용자로 남는 대신, 약간의 노력과 투자만으로도 공급자, 생산자가 될 수 있기에 더욱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음악은 이런 양상의 대표적인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논쟁거리로 부각되었던 MP3 공유 사이트 ‘소리바다’건은 아직도 진행중이며 보수와 진보,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분수령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모름지기 음악이란, 지글지글 소리가 들리는 검정 LP판을 턴테이블에 놓고 들어야 제맛이라는 향수 어린 주장이 사라졌다는 게 아니다. 최후의 도구처럼 여겨졌던 거의 완전한 음질과 반영구적인 수명의 CD를 MP3가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사실 LP 애정론은 오히려 MP3를 사랑하는 신세대들에게 더욱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점은 상당한 아이러니라고 보인다.
카메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이 늘면서 필름을 사용하는 보급형 자동카메라의 상당수는 디지털 카메라로 급속히 대체되고 있는 중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값, 현상/인화비용이 아까워 일 년에 몇 차례만 사용하던 습관을 바꾸며 언제 어디서든 휴대할 수 있는 장비로 변신하고 있다. LP 애정론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골동품이 된 구형 카메라들이 인터넷에 동호회를 만들고, 명품으로 부각되는 것 역시 눈여겨볼 일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최근에 등장한 각종 첨단 도구들은 이제까지 찾아보기 힘든 큰 혼란의 시기를 동반하며 세상을 바꿔 나가고 있다. 물론 진행방식이나 여파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분모를 찾아본다면 ‘많은 사람이 선택하고 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진 사용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 장비는 밖으로 드러나는 변화일 뿐이다. 디지털 휴대폰은 그저 음성만 주고받던 과거의 전화에 벨소리를 다운받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무선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는 영역으로 기능을 확장시키며 등장했다. 그러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통신의 자유를 얻지 못했던 10대들이 디지털 휴대폰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물론 통신비의 한도 내에서겠지만 말이다). 집에 전화가 한 대밖에 없던 시절, 늦은 밤 걸려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자 눈치를 본 기억이 있는 분이라면 이게 얼마나 큰 자유이며 변화인지를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미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플란다스의 개》에 등장하는 네로는 그림을 보고자 성당을 기웃거려야 했지만, 그보다 상황이 조금 나은 사람들이라도 박물관, 미술관에 가거나 상당한 비용을 들여 도록을 봐야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은 앉아서 세계 각지를 둘러볼 수 있게 했으며 3차원 기술은 직접 전시장을 거니는 것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똑같은 느낌을 준다는 말은 아니다. 작품에 대한 정보, 어떤 작품이 있는지에 대해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저렴한 창구가 열렸다는 점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점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인터넷의 등장은 전문가의 일방적인 해설을 읽고 받아들이던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게 했고, 활발한 토론은 또 다른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일반 사용자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절실할 수 있는 ‘지망생’에게 디지털의 보급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광들이 DVD에 매달리는 모습은 이런 맥락에서 다가온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감독이 찍었다 최종편집에서 누락시킨 장면들을 따로 모아 보면서 왜 이 장면이 빠졌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며, 감독과 주연배우가 영화를 보면서 두런두런 나누는 해설들은 - 그게 비록 잡담일망정 - 영화를 이해하고 공부하려는 지망생들에게는 천국의 목소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전시장을 얻지 못한 신인 작가들이 모여서 주차장 공동전을 펼쳤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홍보비를 마련하지 못해 관람객 확보가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에 이들의 취지를 밝히고, 몇몇 작품을 올려 두어 홍보한 결과, 최소의 비용으로 색다른 예술을 감상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관객을 불러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출신학교나 기성작가의 추천 같은 전통적인 방식 없이도 갤러리들은 신진을 발굴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등용문이 되고 있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국내에서는 《퇴마록》을 시작으로, 이전까지는 찾아보기 힘든 판타지 소설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온라인에서 히트한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은 소재를 찾는 영화계에 통신문학을 알리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이렇듯 디지털이 가져온 변화는 제한된 소수나 집단만이 가지고 있던 기존 정보의 장벽을 허물고, 능동적인 사용자들에게 새로움을 선사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디지털이라는 변화의 방향에 열려 있어야
물론 긍정적인 면만 존재한다면 디지털은 더 빨리 퍼져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이 가져온 수많은 변화는 신생기업의 위상을 높여 주기도 했지만, 기득권 계층을 재빨리 허물며 불안감을 파급시키고 있다. 음반산업계의 이야기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반면 영화업계는 DVD의 성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법적인 영화 유통을 막고자, 메이저 배급사들이 역량을 합쳐 새로운 온라인 배급의 기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중예술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디지털에 대한 반응은 미비하기만 하며 이렇다 할 대응이 없는 분야도 많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며, 기존의 도구에 익숙하다는 걸 뭐라 할 수 없다. 도구에 연연하느라 달라진 환경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예술세계를 어느 한곳으로 제한해 버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글 앞부분에 인용한 웬델 베리의 글은 사실 10년 전에 쓰인 것이지만, 지금 읽더라도 그리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얼마 전 국내에 번역판이 출시되기도 했다). 만약 우리가 10년 전 이런 토론을 거쳤다면 어땠을까. 디지털에 적응하기가 훨씬 더 용이하지 않았을까. 새로운 도구에 익숙한 일반인들이 늘어나고, 변화의 길목에 서 있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가끔 고개를 들어 변화의 방향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용자들은 이미 건너편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