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걸린 피라미가시/오병섭
아침부터 장대가 줄곧 내렸다. 오늘은 광주 추월(廣州 草月)에 있는 S산업의 심사일이다. 여느때나 다름없이 반사적으로 일찍부터 서둘렀다. 답답한 도시생활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홀가분한 마음, 아니 어린 시절 어머니 손목 잡고 장터 구경가던 그런 설레임 일지도 모른다.
비는 계속 퍼부어 좁은 계곡마다 하얀 폭포수를 마냥 토해낸다. 모여 흐르는 개울물은 제법 눈에 띄도록 차올라 허리춤은 족히 넘을 것 같다. 지난번 한 차례 왔다간 곳이지만 맑으면 맑은 대로, 비오는 날은 또 그 나름대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다. 새들은 둥지처럼 온화하게 감싸인 이 마을. 오늘따라 개구리 형제들은 종일토록 목청을 높여 합창을 한다.
오후 녘이 되었다. 여름 홍수를 방불케 하는 황톳물이 다리 상판 밑자락까지 닿을락 말락 한다. 여기저기 고기잡이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차창 너머로 스치는 풍경은 갱구장이처럼 고기몰이 좋아하고 물놀이 즐기던 어린시절 생각에 잠기게 한다.
삼계(三溪), 이는 내 고향땅 이름이다. 시냇물 세 줄기가 하나로 모여 제법 큰 강의 원천을 이루는 곳, 섬진강 원류가 되는 곳이다. 발 담그기가 겸연쩍도록 맑은 물에는 은어, 피라미, 붕어, 버들가지, 모래무지, 쏘가리, 매기들이 우리들의 동무가 되었다. 반짝이며 오르내리는 잽싼 피라미들은 빨강, 파랑, 하얀 줄무늬의 색동저고리를 입었기에 더욱 친근한 우리들의 동무였다. 물고기를 잡고 또 잡아도 석양녘 햇빛이 비치는 물결 사이로 뛰노는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많아 보였다.
그 시절에도 낚시, 어항, 반두, 투망이 있었다. 대로는 은어잡이를 갔다. 서너 명이 동시에 깊은 곳에 있는 은어떼를 얕은 모래밭으로 유인한 후 휘청한 긴 회초리로 내려치면 빠르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은어도 어김없이 기절을 했다. 은어 몰이의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은어 몰이 후 꽁보리 밥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시냇가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어머님 젖줄같이 언제나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삶의 늪에 찌들린 찌꺼기를 수정알처럼 씻어 뜨거운 온정을 그곳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난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훌쩍 벗어 던지고 고기잡이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곁에 동승한 사장은 “고기잡이 좋아하세요? 다음에 한번 오세요. 같이 천렵이나 한번 하시지요.” 하고 권한다. 그 사장도 농촌 출신으로 회사 명칭을 아들 이름 그대로 정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분이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차편을 보냈으니 무조건 내려 오라는 것이다. 워낙 고기잡이, 물고기 요리를 좋아하니 그리 싫지는 않았다. 도착하니 어둑한 저녁 무렵이었다.
큼직한 냄비에 보골보골 끓고 있는 매운탕은 피라미, 쏘가리, 미꾸라지, 모래무지 등 잡탕이었다. 군침 당기는 구수한 냄새며, 물소리, 새소리, 하물며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까지도 옛날 그 정취다. 둘러앉아 끓기를 기다리며 담소하는 시간은 기나긴 인생 역정 속에서 즐거움만 농축한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
이제 추억을 더듬으며 향취에 젖어 맛을 음미해야 할 순서였다. 그 맛을 음미하는 것도 잠시 뿐. 좋아하는 만큼 허겁지겁 먹다 보니 목에 가시가 걸렸다. 그러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아무탈 없겠지 하고 쉼 없이 거의 먹어 치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법 밤이 깊어졌다. 농촌의 무게 있는 산뜻함과 개구리 울음소리를 멀리하고 서울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목에 걸린 피라미 가시가 불편하다. 수박, 토마토를 먹어보고 상추로 싸서 먹어본들 넘어 가지도 넘어오지도 않는다. 헛구역질을 해보고 물구나무도 서보고 소리를 질러봐도 별 효험이 없다. 자정이 넘으니 약국도 문을 닫았다. 아내는 김치에 밥을 싸서 먹으면 넘어갈 수도 있다며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그렇게 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젠 병원에 가는 수밖에 없다. 병원에 이르렀다. 이 늦은 시간에 응급환자도 많다. 겨우 순서가 되어 의사선생님을 만나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웬걸! 보이지 않아 뺄 수가 없으니 전문의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그 길로 E대학 부속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에서 응급환자인 양 응석을 떨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당직 이비인후과 의사를 깨워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고생의 씨름이 시작된다. 젊은 여의사는 잠이 덜 깬 듯 엑스레이 필름을 훑어본 다음 아무런 물체도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얼 드셨다고요?”
“피라미 매운탕…….”
“피라미가 뭐에요?”
혀가 목구멍을 막으니 도저히 힘이 든 모양이다. 또 마취제를 몇번째 칙칙 뿌린다.
“아저씨 나 못 빼겠어요.”
“의사선생님이 못 빼면 누가 해요?”하며 의사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아내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비웠고, 그러는 사이 40여 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의사선생님은 기진맥진한 나의 목구멍을 들여다 보며 계속 치료를 한다. 짜증을 부리니 아저씨 같은 엄살은 처음이라고 했다. 목에 걸린 피라미 가시소동은 이렇게 해서 막을 내렸고, 시간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돌아오면서 이번 일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별빛이 총총한 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안히 잠들어 있을 테지만, 응급실에는 생사의 기로에 선 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고통 받는 어려운 사람들과 이들의 고통을 분담하는 분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며 모든 이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피라미 가시를 빼준 의사선생님께 감사하고, 내가 괴로울 때마다 곁에 있어 주는 아내에게도, 또한 피라미 가시에게도.
이번에 갔던 냇가가 내년에도 후년에도 내내 지금처럼 물고기가 활기차게 살 수 있는 맑은 냇가로 오래오래 곁에 있어 주었으면. 그곳이 언제 누가 찾아가도 무수히 반짝이는 별을 세며, 하룻밤 쉴 수 있다면 우리 모두의 고향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