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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지해회(蓮池海會) 원문보기 글쓴이: 박병규
나무아미타불
요해:
제이 변체 대승경개이실상위정체 오인현전일념심성 부재내 부재외 부재중간 비과거 비현재 비미래 비청황적백 장단방원 비향 비미 비촉 비법(第二 辨體 大乘經皆以實相爲正體 吾人現前一念心性 不在內 不在外 不在中間 非過去 非現在 非未來 非靑黃赤白 長短方圓 非香 非味 非觸 非法)
제2 경의 체에 대하여 논변함.
대승경전들은 모두 실상(實相)을 경의 정체(正體:바른 몸통)로 삼는다. 우리들의 지금 작용하는 한 생각 한 생각의 심성은 육체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과거,현재,미래에 속하여 있지도 않다.그리고 푸른 색도 아니며 노란색도 아니며 희색도 아니다. 또한 길거나 짧은 것도 아니며,모나거나 둥근 것도 아니다.그리고 냄새나거나 맛이 나는 것도 아니며 촉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따지고 헤아림(사량분별)도 아니다.
강의:
변체(辨體)라는 함은 이 경이 의지하고 있는 몸통(體)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을 말한다.{주:어떠한 경(經)의 체(體)는 당해 경에 시종일관되게 관철되어 있는 근본적인 가르침 내지는 정신을 말하는 것임}. 대승경전은 소승경전에 대비(對比)하여 불리는 명칭이며,승(乘)이라는 것은 수레(車)에 탄다는 말이며,이는 수레(車)에 무엇을 싣고 운전하여 간다는 뜻이다.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양이 끄는 수레(羊車),사슴이 끄는 수레(鹿車),소가 끄는 수레(牛車)의 비유가 있는 데,이것은 대중소 삼승(三乘 즉 성문,연각 및 보살)의 법에 비유한 것이고,그위에 다시 크고 흰 소가 끄는 수레(大白牛車)가 있는 데,이것은 바로 최상의 일승불법(一乘佛法)에 비유한 것이다. 양수레와 사슴수레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을 가리키는 것이고,이는 범성동거토에서 출발하여 방편유여토까지만 타고 갈 수 있을 뿐이고,보통의 소가 끄는 수레는 대승권교보살승(大乘權敎菩薩乘)을 가리키는 것이고,이는 앞의 범성동거토와 방편유여토에서 출발하여 실보장엄토(實報莊嚴土)까지만 타고 갈 수 있을 뿐이나,크고 흰 소(大白牛)가 끄는 수레는 일승실교보살승(一乘實敎菩薩乘)을 가리키며 이것에 의지하여야만 최후의 상적광정토(常寂光淨土)에 도착할 수 있다.
모든 대승경전에서 논하는 이치는 매우 깊고 광대하므로 모두 다 실상(實相)으로써 정체(正體)를 삼고 있다. 예를 들면 묘법연화경은 실상(實相)으로써 정체를 삼고,능엄경은 여래장(如來藏)으로써 체(體)를 삼고,화엄경은 일진법계(一眞法界)로써 체(體)를 삼는 등 그외 여러 경전들을 더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모든 대승경전이 정체로 삼고 있는 것의 이름은 실상,여래장,일진법계 등과 같이 명칭은 다르나 모두가 똑같은 실상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실상은,진실한 모습(眞實之相:참된 모습) 내지는 평등한 한가지 모습(平等一相)을 뜻한다. 실상이라는 몸통(實相之體)은 가장 깊고,가장 절박하고 중요하므로 나는 부득이 실상에 대하여 상세히 강의하여 이를 밝히고자 하니,(독자들은) 마음을 가라앉혀 자세히 살피고 들어보면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실상을 밝혀 깨닫는 것을 대승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먼저 무상의 실상(無相之實相) 즉 실상의 무상(無相)적인 면에 대하여 설명하자면,무상(無相)이라는 것은 모든 허망(虛妄)한 상(相:모습)을여임(離:떠남)을 말한다. 그리하여 <금강경>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相은 모두 허망하나니 만약 모든 相이 相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비상(非相)은 상(相)을 떠남을 의미하고(非相卽離相),이것은 만약 모든 허망한 相을 보더라도 그 허망한 相을 여일 수 있다면(그 허망한 상에서 물들지 않고 허공과 같이 볼 수 있다면) 이는 바로 진실된 모습(실상)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진실된 모습(眞實之相)은 곧 법신여래(法身如來)를 뜻하므로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상의 설명이 실상의 무상적인 측면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 무불상(無不相)의 실상(즉 상아님이 없는 실상)에 대하여 설명한다. 무불상(無不相)이라 함은 진실한 모습(실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존재가 비록 허망하나 그러한 허망한 가운데 참된 것(眞實)이 있고, 모든 존재가 생멸을 거듭하나 그러한 생멸가운데 낱낱이 생멸하지 않는 성(性)이 있으며,무릇 허망하게 생멸하는 것은 모두 차별된 모습이며,진실로 생멸하지 않는 것이 평등한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相아님이 없는 실상(無不相之實相)의 뜻이다.
두가지 실상은(二種實相)은 위에서 강의한 바와 같은 바,이제는 두가지 실상에 대하여 비유들어서 명확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지혜있는 사람은 비유를 들어서 중생을 깨닫게 한다고 하셨다. 비유(譬喩)라는 것은 알기 쉬운 외부적 사물의 형상이나 성질을, 이해하기 어려운 눈에 안보이는 이치나 성품에 비유하는 것을 말한다. 즉 비유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이해하기 쉽게 한다.
지금 여기서는 금과 금으로 만든 여러 기구들에 비유하여 상이 없는 실상과 상아님이 없는 실상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상은 종류마다 다르다. 마치 금으로 만든 기구들이 각각 그 모양과 상태가 다르며,만들어졌다가 다시 소멸되어 버리기도 하고,모든 금기구들을 고쳐서 다른 금기구로 만들 수도 있듯이 일체 세간의 모든 상(相)은 모두 허망하여 실답지 않다. 그래서 무상지실상(無相之實相)에서 무(無)자는 마땅히 떠날 이(離) 자(字)로 풀이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금으로 만든 기구들 즉 금병(金甁),금환(金環),금채(金釵:비녀),금천(金釧:팔찌)등의 허망한 겉모습을 떠난다면(여윈다면) 곧바로 하나인 금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진리를 들어{법(法)을 들어} 말하자면,세간의 모든 허망한 일체의 상(相)을 떠나면 곧바로 진여(眞如)의 실상(實相)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상이 없는 실상(無相實相)이라고 말한다.
또 모든 금기구들은 비록 천차만별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이러한 차별상중에는 평등한 한가지 모습이 없지 않다. 즉 금병,금환,금교,금침 등은 금이 차별되어 나타난 모습이고,그것들의 원료인 진금은 평등한 하나의 모습이다. 진금은 하나이고 이것으로 무한한 여러 모양과 상태의 금기구들을 만들 수 있다.무한한 여러 금기구들은 금이라는 원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즉 금에 의지하여 여러 금기구가 만들어지는 것이고,낱낱의 금기구들은 모두다 금이다. 여러 금기구들의 차별된 모습에 금이라는 평등한 모습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이치를 법(法)에 비유하자면,세상의 모든 차별된 허망한 상에는 진여평등의 진실한 모습(眞如平等眞實之相)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를 상아님이 없는(모든 상을 다 갖춘) 실상 즉 무불상실상(無不相實相)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은 모든 법 즉 모든 인연 존재가 의지하는 몸통이 되며(爲諸法所依之體),또한 모든 대승경전의 올바른 몸통이 된다(亦爲諸大乘經正體).
오인현전일념심성자(吾人現前一念心性者)는 우리들의 지금 염불하는 일념심성을 바로 가리킨다(此正指現前念佛之一念心性). 마음(心)은 신령스럽게 알고 깨닫는(靈知)의 작용(作用)이 있고,성품(性)은 변하지 않는 몸통(體)이어서 용은 체를 떠날 수 없으니 둘을 합하여 심성이라고 부른다. 다음 요해의 <내외중간 과현미래 >등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마땅히 깊이 연구하기를 통절(痛切)하게 하여 스스로 한번 한 소식을 얻어 헛되이 언구(言句)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참다운 도리를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지금 여기서는 두가지 뜻으로 요해의 위 말씀을 해석하고자 한다. 첫째는 본공의 의미(本空之義)이다. 즉 무상지실상(無相之實相)의 뜻으로 해석한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지금 작용하는 일념심성은 본래 스스로 공적하므로(本自空寂)하므로 내·외·중간(內·外·中間) 3곳(處)에 있지 않다. 이것은 다음의 실례로서 설명할 수 있다. 즉 신광(神光:중국 선종의 2조 혜가대사를 지칭함)이 초조(初祖) 달마(達摩)대사를 참방(參訪)하여 팔뚝을 잘라 바치면서 지극(至極)한 신(信)을 나타내고서 “저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케 하여 주십시요.”라고 간원하자, 달마대사는 손바닥을 펴 내밀면서 말씀하시되 “ 너의 불안한 마음을 갖고 오면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혜가는 즉시 회광반조{廻光返照:자신의 마음의 빛을 돌이켜 마음의 안쪽을 관조[內觀]하는 것을 말함}한 다음 말하기를 “불안한 마음을 찿으려 하여도 도저히 찿을 수가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달마대사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미 그대 마음을 편안케 하여 마쳤느니라.”라고 하셨다. 혜가(慧可)대사가 달마대사께 대답한 ‘불가득(不可得)’이라는 것은 바로 위에서 설명한 우리의 지금 작용하는 일념심성이 본래 스스로 공적(本自空寂)하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상주(영원히 존재함)의 의미(常住義)로 풀이한다. 즉 무불상(無不相)의 실상(實相)의 뜻으로 풀이한다. 우리들의 지금 작용하는 일념심성(一念心性)은 항상 본연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常住本然)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의 심성은 과거로 거슬러 가도 그 시작이 없으며 미래로 향해가도 그 끝이 없으며 어디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소멸되는 것도 아니므로 삼세(三世)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상주(常住)의 뜻으로 풀어본 심성의 의미이다. 유계대사(幽溪大師)는 《정토무생론(淨土生無生論)》에서 “(나의 본체인) 법계원융체(실상)가 나로 하여금 한 생각 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나니, 지금 나의 염불하는 이 마음 전체는 곧 법계(실상)이다(法界圓融體 作我一念心 我今念佛心 全體卽法界).”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치를 통달한 사람은 지명염불(持名念佛)을 닦음으로써 실상을 깨닫는다.(達此者 由持名念佛 而悟實相也)”.
요해의 〈비청황적백 장단방원 비향비미 비촉비법(非靑黃赤白 長短方圓 非香 非味 非觸 非法)〉이라는 말씀은 일체의 허망(虛妄)한 모습을 떠난 것을 말함이다. 《능엄경(楞嚴經)》에서 “공여래장(중생의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은 일체의 망령되이 오염된 법이 공한 것 바로 그것이다(空如來藏 空諸一切妄染之法是也)”라고 말씀하심과 같다. 그래서 고인(古人)께서는 오도(悟道)후 이르시기를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니 이러한 가운데 향미촉법에 즉(卽)하되(받아들이되) 향미촉법이 아니로구나. 또 말하라. 이 무슨 도리인가. 스스로 자세히 살필지니라.(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此中卽香味觸法 而非香味觸法 且道 是甚麽 試參看)”라고 하셨다.
요해:
멱지료불가득 (이)불가언기무 구조백계천여 (이)불가언기유{覓之了不可得 (而)不可言其無 具造百界千如 (而)不可言其有}
우리들의 지금 작용하는 심성(心性)은 찿아도 얻을 수 없으나,그렇다고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심성의 이(理)와 사(事)에 무한한 법계를 갖추고 만들지만(具造百界千如) 그렇다고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강의:
여기서 우익대사께서는 우리의 지금 작용하는 심성이 공·유(空·有)의 양극단(二邊)에 떨어지지 않고 전체가 중도(中道)로 돌아감을 설명하고 계신다. 위에서 우리의 지금 작용하는 심성이 내·외·중간 삼처(三處)와 과·현·미래 삼세(三世)에 속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이어 받아서 여기서는 아무리 찿아도 얻을 수 없다(覓之了不可得)고 말씀하고 계신다. 《금강경(金剛經)》에서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 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 不可得)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또한 고덕(古德)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팎을 둘러 찿아 보아도 도무지 찿을 수 없으나,안팎에 두루 펼쳐진 모든 것이 혼연(渾然)히 넓고 크게 꽉차 있구나.”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不可言其無)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空의 극단에 떨어지 않는 우리의 심성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구조백천여(具造百界千如)에 대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구(具)는 이구(理具) 즉 우리의 심성중에 본래 갖추어진 것(理中本具)을 의미하고,조(造)는 사조(事造) 즉 심적 외부적 현상계를 향하여 만들어 진 것(事上造作)을 의미한다. 이(理)는 심성의 변하지 않는 체(體)이고,사(事)는 심성이 인연따라 나타낸 작용(作用)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지금 작용하는 심성의 본체인 이(理)가운데 본래부터 백계천여(百界千如)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바닷물이 본디부터 백천의 파도물결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심성이 인연따라 나타낸 작용(作用)이라함은 심성이 외부세계를 향하여 백계와 천여시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하는 데 이것은 바닷물에 바람이 불어와 백천 파도와 물결(百千波浪)이 일어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비유로는 다 밝힐 수 없고,진리는 다 말하기 어렵다(喩中難明 法中未了).
그러면 무엇을 백계천여(百界千如)라고 하는가. 우리들의 일념은 십법계를 갖추고 있다. 즉 사종(四種) 성인법계(聖人法界) 즉 1.불법계(佛法界),2.보살법계(菩薩法界),3.연각법계(緣覺法界),4.성문법계(聲聞法界)에 다시 육종(六種) 범부법계(凡夫法界) 즉 1.천법계(天法界)(欲界,色界,無色界등 여러 하늘 법계),2.인법계(人法界)(4大部洲의 인법계),3.아수라법계(阿修羅法界),4.지옥법계(地獄法界),5.아귀법계(餓鬼法界),6.축생법계(畜生法界)등을 합하여 10법계라고 하고,하나의 법계마다 다시 십법계를 갖추고 있으니 100법계가 된다. 천여(千如)라 함은 1계당 다시 10여시(如是)를 갖추고 있으니 1,000여시(如是)가 된다는 말이다.부처님께서 《법화경》〈방편품〉에서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존재의 실상(諸法實相)을 사무쳐 남김없이 다 알고 계신 데,그 아는 내용이 바로 십여시(10如是)이다.]라고 하셨다. 10여시는 여시상(如是相:존재의 외적형상),여시성(如是性:존재의 본성),여시체(如是體:상과 성을 갖춘 존재의 자체),여시력(如是力:존재의 주체가 갖춘 능력),여시작(如是作:존재의 능력이 외적으로 나타난 것),여시인(如是因:직접원인),여시연(如是緣:간접원인),여시과(如是果:인과 연으로 생긴 결과),여시보(如是報:과보),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이상의 9여시는 결국 하나인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다시 가명(假名:현상의 임시적 존재 즉 色,受,想,行,識의 五蘊을 말함) 1천여시,정보(正報:중생이 나고난 신체) 1천여시 및 의보(依報:중생이 사는 국토) 1천여시를 합하여 3천여시가 있고,다시 본체(理具)상의 3천여시와 현상(事造)상의 3천여시가 있다.
그러나 고인(古人)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구(理具) 사조(事造)의 두가지 3천여시도 모두 우리의 일념심성중(一念心性中)에 있다고 하셨다. 요해에서 불가언기유(不可言其有)라 하신 것은 바로 100세계의 1,000여시의 가지 가지 차별도 결국은 오로지 하나의 우리들의 진여자성(일념심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자체는 독립된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역자: 3천여시 등도 진여자성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므로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은 공부하는 사람이 유변(有邊:모든 존재는 영원하다는 견해)에 떨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역자 주] 천태대사는,《마하지관》에서 자신의 철저한 깨달음의 경지를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하면서 중생의 한 순간의 일념에 우주만유가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 데,이를 후세에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라고 부르고 있고 이것이 후학에 의하여 다시 이구(理具) 사조(事造) 이중적 삼천설(兩重 三千說)로 까지 확대되었다.
아래에서는 먼저 감산대사의 《법화경통의(法華經通義)》에 설명된 10여시를 설명하고 이어서 우익대사의 《법화경회의(法華經會義)》에 설명된 10여시를 설명한다.
감산대사의 설명:
어떤 것을 일러 제법실상이라 하는가. 제법의 상(相)에 대하여 말한다면 상(相)에 즉하여 상이 없는 것(相卽無相)을 일러 상여시(相如是)라 하고,제법의 성품(性品)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 묘한 성품은 천연 그대로의 것(妙性天然)임을 성여시(性如是)라 하고,제법의 체에 대하여 말한다면 제법의 체는 본래 진실되고 변함이 없는 것(體自眞常)을 체여시(體如是)라 하고,제법의 힘(力)에 대하여 말한다면 제법의 힘과 공용(功用)이 진성(眞性)에 부합함을 역여시(力如是)라 하고,제법의 지음(作)에 대하여 말한다면 짓되 지음이 없는 것(作而無作)을 작여시(作如是)라 하고,제법의 직접적 원인(因)에 대하여 말하자면 제법은 생멸이 본래 없는 무생(生本無生)인 것을 인여시(因如是)라 하며,제법의 간접적 원인(緣)에 대하여 말하자면 중생의 성품은 본공(本空)하나 정염(淨染)의 인연따라 성인과 범부 및 복과 죄의 차별상을 이룸(性空成事)을 연여시(緣如是)라 하며,제법의 과(果)에 대하여 말하자면 과는 인을 떠나지 않음(果不離因)을 과여시(果如是)라 하며,제법의 보(報)에 대하여 말하자면 지은 업의 선악에 따라 과보가 분명한 것을 보여시(報如是)라 하며,제법의 처음과 끝(위 相여시부터 報여시까지)에 대하여 말하자면 시종(始終)토록 근본의 여일(如一)한 실상의 도리를 벗어나지 아니함을 일어 본말여시(本末如是)라 한다. 이상과 같이 제법은 낱낱이 10여시 그 자체의 존재이니 구경 평등(究竟 平等)하고 적멸(고요하고 일체 번뇌가 소멸됨)하여 둘이 아닌 것(寂滅無二)이다. 이것이 제법실상의 도리이다. 가히 믿어 이해할 수 있는 제법은 三乘(聲聞,緣覺,菩薩)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나,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 즉 제법을 여의지 않고 제법에 즉하여 실상의 이치를 밝히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능히 끝의 마지막 부분까지 구명할 수 있으니,이것은 二乘(聲聞,緣覺)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익대사의 설명:
십법계중 불법계(佛法界)의 입장에서 해석하자면,먼저 불법계는 제법의 상(相)이 없으나 상(相)이 없는 것도 아님을 여시상(如是相)이라 하며,이것은 만선인연(萬善因緣)을 가리키는 고로 《법화경》의 아래 경문에서는 이를 ‘온갖 보석으로 장엄함(衆寶莊校)’이라고 말씀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성(性)이 없으나 성(性)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여시성(如是性)이라 하며,이것은 지혜요인(智慧了因)을 가리키는 고로 《법화경》의 아래 경문에서는 이를 ‘희고 큰 소가 있음(有大白牛)’에 비유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체(體)가 없으나 체(體)가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여시체라고 하며,이것은 실상정인(實相正因)을 가리키는 고로 《법화경》에서는 수레가 ‘높고 광대함(其車高廣)’으로 비유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역용(力用)이 없으나 역용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여시력이라고 하며,이것은 ‘보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과 남을 기쁘게 하는 근력은 같음(菩提道心 慈善根力等)을 가리키는 고로 《경》에서는 ‘또 그 수레위에 장막과 일산을 둘러친다(又於其上張設幰蓋)’라고 비유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지음(作)이 없으나 지음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여시작이라고 하며,이는 ‘조작없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도(任運無功用道)’를 가리키는 고로 《경》에서는 ‘그것은 바람과 같이 빨리 달린다(其疾如風)’라고 비유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직접적 원인(因)이 없으나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여시인이라 하며,이는 수행의 41계위를 가리키는 고로 《경》에서 ‘이 보배 수레를 타고 사방을 노닐 며(乘是寶乘遊于四地方)’라고 비유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간접적 원인(緣)이 없으나 그것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여시연이라고 하며,이는 일체조도보리(一切助道菩提)를 가리키는 고로 《경》에서는 ‘이 수레에는 많은 종복이 있어 이를 지킨다(又多僕從而侍衛之)’라고 비유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과(果)가 없으나 그것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여시과라고 하며,이는 ‘묘각이 밝게 드러남은 원만한 원인에 의하여 이른 것임(妙覺朗然圓因所剋)’을 가리키는 고로 《경》에서 ‘바로 도량에 이름(直至道場)’이라고 비유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보(報)가 없으나 그것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를 여시보라고 하며,이는 대반열반(大般涅槃)을 가리키는 고로 《경》에서 ‘무량무루 청정한 과보(無量無漏淸淨之果報)’라고 비유하셨다. 불법계에서는 제법의 본말이 없으나 그것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를 본말이라 하며,본(本)은 불상(佛相)이요 말(末)은 불보(佛報)이니 이는 스스로 행하는 권(自行之權)이요,불법계에서는 제법의 상 (相)부터 보(報)까지 어떠한 것도 있지 않지만 그것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구경에 이르도록 같다고 말하는 것(故言究竟等)이니 이는 바로 실상(實相)을 가리키는 것이다(즉 본말 전체가 실상의 근본도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뜻임). 고로 이 장(章)의 표제(標題)를 실상이라고 하는 것이며,이는 스스로 행하는 실(自行之實)이다. 실(實)에 즉하여 권(權)을 나타내기 때문에 본말이라고 말하고(故言本末),권(權)에 즉하여 실(實)을 나타내니 같다고 말하는 것(故言爲等)이다.
요해:
이일체연려분별 어언문자상 이연려분별 어언문자(상) 비리차별유자성(離一切緣慮分別 語言文字相 而緣慮分別 語言文字(相) 非離此別有自性)
우리의 심성은 일체의 연려분별,언어문자상을 떠나 있으며,그러한 연려분별 등은 우리의 심성과 독립하여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연려분별 등은 우리의 심성에 의존하여서만 존재한다.).
강의:
위 앞의 2구절은 언어의 성(性)즉 실상이 망상(妄相)을 떠나 있음을 나타내고,그 아래 3구절은 언어의 상(相)이 언어의 성(性) 즉 실상을 떠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연려분별(緣慮分別)이라는 함은,우리의 8가지 심의식중 마음에 닿는 것을 현재적으로 생각하거나 사려분별하는 기능을 하는 제6식이 그러한 분별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또 이는 그러한 제6식이 물질,소리,냄새,맛,신체접촉,사량분별의 대상 등 육진경계(六塵境界)를 접촉(반연)하여 사려분별하는 것을 말하며,이러한 제6식은 명료의식(明了意識)과 독두의식(獨頭意識)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데,명료의식(明了意識)은 전오식(前五識 즉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이 오진경계를 인연하여 일어날 때 이와 함께 일어나므로 또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도 말한다.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함은 오직 법진(法塵:사량분별의 대상)만을 인연하여 이를 경계로 삼아 비추는 작용을 하며, 이는 안이비설신 오진(五塵)이 떨어져 나간(오진과는 관계없는) 가운데 작용하는 것(오로지 제6식 자체만의 활동)을 말한다. 한편 명료의식은 오진의 경계와 인연한 바를 마음가운데 저장한다. 이와 같은 이종의식(二種意識)은 모두 분별작용을 하며,그래서 일명 망상심(妄相心)이라고도 한다. 앞의 2구절(離一切緣慮分別 語言文字相)은 마명보살께서 《기신론(起信論)》에서 말씀하신 [중생의 찰라간 생멸하는 한생각 마음의 심진여는 본래부터 언설상,명자상 및 심연상을 떠나 있다.(從本以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와 같은 뜻이다. 즉 우리의 본래의 심성(기신론의 표현으로는 心眞如)은 본래부터 일체의 언설과 이름은 물론 사량분별을 떠나 있다.
요해의 뒤의 3구절(而緣慮分別 語言文字(相) 非離差別有自性)은,일체의 모든 상(즉 연려분별상,언어문자상 등)은 우리의 본원심성(즉 실상)을 떠날 수 없으며 그 자체의 독자적 주체성(自性)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비유하면,바다에 바람에 불지 않으면 본래 파도가 생길 수 없고 바람이 불어옴으로써 파도가 일어 나는 것인 데,파도는 바닷물을 떠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의 독자적 존재성(自性)은 없다.
요해:
요지 이일체상 즉일체법 이고무상 즉고무부상 부득이강명실상
(要之 離一切相 卽一切法 離故無相 卽故無不相 不得已强命實相)
요컨대 우리의 심성은 일체상을 떠나 있음과 동시에 일체법을 받아 들인다. 즉 일체상을 떠난 고로 무상(無相:상이 없음)이며,또한 일체법을 받아 들이므로 무불상(無不相:어떠한 상도 없지 아니함 즉 모든 상을 다 갖춤)이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의 심성에 대하여 부득이 억지로 실상(實相)이라고 이름 붙였다.
강의:
이 단락에서는 원융중도(圓融中道)의 실상묘리(實相妙理)를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신다. 요컨대 실상은 일체 모든 법의 상(相)을 떠나(離) 있기도 하지만, 일체 모든 법의 상(相)에 즉(卽)하여 있기도 한다(일체 제법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떠났다 것(離)은 소위 진제진공(眞諦 眞空)에 의하면, (실상이) 일체의 환상(幻相:헛깨비 같은 모습)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상의 실상(無相之實相)이 된다. 즉(卽)하였다는 것은 속제묘유(俗諦 妙有)에 의하면 (실상이) 일체법에 즉하여 있다(받아 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무불상의 실상(無不相之實相)이 된다. 그래서 진공무상(眞空無相)을 정확히 파악한 사람은 속제의 묘유를 허물지 않고 진공에 즉하되 속제에 구애되지 않으며,속제묘유(俗諦妙有)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은 진제의 진공을 허물지 않으며 묘유에 즉하면서도 진공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眞)과 속(俗)은 원융(圓融)하여 서로 장애가 되지 않으며 원래 이름도 지을 길 없으나 부득이 억지로 실상(實相)이라고 이름지어 부를 뿐이다.
[역자 주]보살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되(相卽) 한 중생도 제도한 바 없어야 한다(無相)는 것,보살은 마땅히 어떤 고정관념이나 집착에 머무르지 말고(無相) 그 마음을 내라(相卽)는 취지의《금강경(金剛經)》의 법문과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물질 그대로 텅빈 그대로의 마음 거울이며,텅빈 마음 거울 그대로 일체의 형형색색의 물질이며,수상행식도 마찬가지이다.)라는 취지의《반야심경(般若心經)》의 경문은 모두 실상에 관한 서로 다른 표현의 설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대승기신론》(실차난타 번역)의 ‘심진여(心眞如)’에 대한 아래 법문과 이에 대한 우익대사의 《대승기신론열망소(大乘起信論裂網疏)》의 해당부분을 인용한다. 우리 심성의 참모습(실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바랍니다.
《기신론》 한역본(실차난타 번역):
심진여자 즉시 일법계대총상법문체 이심본성 불생불멸상 일체제법 개유망념이유차별 약리망념 즉무경계차별지상 시고제법종본이래 성리어언 일체문자 불능현설 이심반연 무유제상 구경평등 영무변이 불가파괴 유시일심 설명진여고(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 以心本性 不生不滅相 一切諸法 皆由妄念而有差別 若離妄念 則無境界差別之相 是故諸法從本以來 性離語言 一切文字 不能顯說 離心攀緣 無有諸相 究竟平等 永無變異 不可破壞 唯是一心 說名眞如故)
번역:심진여란 일법계대총상법문체이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본성은 불생불멸의 모습이며 일체 모든 법은 모두 망념(妄念:망령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게 되나니 만약 망념을 떠나면 곧 일체 경계의 차별적인 모습도 없다. 이와 같기 때문에 일체 모든 법도 본래부터 그 성이 일체의 언어의 모습을 떠났고 어떠한 문자로도 표현할 길이 없으며 마음의 반연도 떠났으며 어떠한 모습(相)도 없고 영원토록 성인과 범부간에 아무런 차등이 없이 평등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금강과 같이 괴멸될 수 없어 오로지 하나인 마음일 뿐이니 이를 일러 진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우익대사의 《기신론 열망소》:
心。即指眾生現前介爾之心。真。謂其性不妄。以非肉團。亦非緣影。非有內外中間過現未來分劑方隅等妄相故。如。謂其性不異。無生無滅。無垢無淨。無增無減。無別異故。蓋真如不變隨緣。舉體而為眾生現前介爾之心。此心隨緣不變。仍即真如法界全體。故云即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也。從來無二。強名為一。諸法本源。強名法界。絕待無外。強名曰大。一相無相。無差別相。強名總相。可軌可持。強名為法。無所不通。強名為門。譬如大海。舉體成漚。研此一漚。別無自體。唯攬大海濕性為體。只此一漚濕性。便是大海全體濕性。更非有二性。更非有別相故。又如日光。舉體入隙。研此隙光。別無自體。唯攬日輪光明為體。只此一隙明性。便是日輪全體明性。更非有二性。更非有別相故。以心本性下。釋成此義。謂以眾生現前介爾心之本性。前無始。故不生。後無終。故不滅。譬如虛空。非是暫有。非可暫無。而亦不同虛空對色所顯之相。故不得已強名之為不生不滅相也。此中應有問曰。經中每言心生法生。心滅法滅。今現見一切諸法。種種生滅差別。豈非即是心之生滅。胡云不生不滅相耶。故今釋曰。一切諸法。皆由妄念而有差別。譬如翳目。妄見空華。若離妄念。則無境界差別之相。譬如翳病既除。則無空華起滅相也。是故心之真如。即是諸法真如。諸法真如。即心真如。心既從本已來。性離語言。一切文字。不能顯說。離心攀緣。無有諸相。究竟平等。永無變異。不可破壞。所以諸法亦即從本已來。性離語言。乃至不可破壞也。是則一切諸佛。一切眾生。一切假實國土。究竟唯一淨心為體。一心之外。更無餘法。故不得已。說名為真如也。
심(心)은 바로 중생들의 지금 작용하는 찰라간의 한생각 한 생각의 마음을 말하고,진(眞)은 그 찰라간 한생각 마음의 성품이 망령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바,이는 육체(肉體)의 심장(心臟)을 말함이 아님은 물론 연려분별심(제6식)의 분별하는 작용도 아니며 공간적으로 안이나 바깥 중간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며 시간적으로 과,현,미래 어디에 속하지도 않으며 잘라서 나눌 수 있거나 반듯한 모양이거나 모난 모양 등 일체의 허망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如)라 함은 찰라간 일어났다 꺼지는 중생의 한 생각 마음의 본성이 변이(變異)하지 않는 것(其性不異)을 말하는 바,이는 심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감소하는 것도 아니며 특별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이 심진여(心眞如)는 불변이되 인연을 따라 그 전체(全體)가 중생의 지금 작용하는 찰라간 생멸하는 마음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심진여는 인연을 따르되 항상 변하지 않으므로 진여법계전체(眞如法界全體)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심진여는 바로 일법계대총상법문체이다.라고 말한다.
심진여는 본래 대립이 없고 둘(二)이 아닌 참마음이므로 억지로 하나(一)라고 말하며,심진여는 모든 존재(諸法)를 발생시키는 본원(本源) 내지는 종자(種子)이므로 억지로 법계(法界)라고 말하며,심진여는 일체의 상대가 끊어지고 바깥이 없이 광대무변하여 온 우주를 다 포함하고도 남음이 있으므로 억지로 크다(大)고 하며,심진여는 하나(一)라는 상도 없으며 성인과 범부등 현상적 차별에 따라 다른 모습이 아니므로 (심진여는 그안에 모든 성인범부,원인결과 및 의보정보(환경과 신체) 등을 총체적으로 포함하고 이를 산출하는 모체이므로)(위 괄호 부분은 감산대사의 《기신론직해》아래 부분을 참고한 것임) 억지로 총체적인 모습(總相)이라고 하며,심진여는 가히 열차의 궤도와 같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므로 억지로 법(法)이라고 하며,심진여는 언제 어디서 어느 누구에게라도 통(通)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억지로 문(門)이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대해수 전체가 움직여 거품을 내지만 이 거품 하나를 분석하더라도 (대해수와 다른) 독자적인 체(體)는 없다. 즉 대해수가 습성(濕性:젖는 성질)을 본체로 한다는 것을 딱 집어서 관찰한다면 이 거품 하나의 습성(濕性)도 그대로 대해수의 습성 바로 그것이며 다시 대해수와 다른 성질(性質)이 있는 것이 아니며,별 다른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햇볕이 비쳐 그 빛이 어떤 틈바구니로 비쳐 들었다고 하면 그 틈바구니로 비쳐든 그 빛을 분석하더라도 본래 모체의 햇빛과 다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햇볕은 빛나는 것을 본체로 한다는 것만을 딱 잡아서 관찰한다면 이 틈새 빛의 빛남은 결국 전체 모체의 햇빛의 빛 그대로 이므로 다시 모체의 햇빛과 다른 두 가지 성질이나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기신론》 원문의 이심본성(以心本性)이하의 법문은 이러한 뜻을 풀이한 것이다.
즉 이른바 중생들의 지금 찰라간 생멸하는 마음의 본성은 앞(前)이라 해도 시작이 없으므로 불생(不生)이며 나중(後)이라 해도 끝이 없으므로 불멸(不滅)이라고 한다. 우리의 심성을 허공에 비유하자면 허공은 잠깐 있기도 하거나 잠깐 없기도 한 것이 아니며 또한 허공은 물체가 나타내는 모습과 같지 않은 것과 같다(물체가 나타내는 모습은 無에서 나왔다가 언젠가는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억지로 우리의 심성을 불생불멸상(不生不滅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질문(質問)이 있을 수 있다. 즉 경(經) 가운데서 수 없이 [마음이 생긴 즉 일체 법이 생기고 마음이 소멸한 즉 일체 법이 소멸한다.]고 말씀하셨고 지금에 나타나 보이는 일체 모든 존재의 수 만가지의 생멸과 차별적인 모습은 어찌 마음의 생멸의 나타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기신론에서는 [마음의 불생불멸상]을 말씀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점을 명확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즉 일체 모든 법은 모두 중생의 망령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무한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눈에 티끌같은 것이 들어가면 원래 허공에 없었던 꽂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만약에 이러한 망령된 생각을 버린다면 곧 경계의 차별적인 모습은 사라질 것이다. 비유하자면 눈에서 티끌이 제거되어 눈병이 깨끗하게 나아버리면 본래 없던 허공꽃이 안보이고 깨끗한 허공만이 눈에 들어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렇게 일체의 망념을 떠난 마음의 진여는 바로 모든 존재(一切法)의 진여 그 자체이며, 모든 존재의 진여 또한 마음의 진여 바로 그것이다.(是故心之眞如 卽是諸法眞如 諸法眞如 卽心眞如). 이와 같이 마음(心)은 이미 본래로 언어상을 떠나 있으며 일체의 문자로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마음의 반연(攀緣:마음이 외부 경계에 이끌려 헤메이는 것)도 떠나 있고, 일체의 상도 떠나 있으며,영원토록 성인과 범부에 따라 하등의 차이가 없이 평등(平等)하고,생주이멸(生住移滅)하지 않으므로 영원히 변하거나 달라지지 아니하며(永無變異),파괴되는 유위법(有爲法)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괴멸될 수 없다(不可破壞). 이런 까닭에 일체의 모든 존재(一切諸法)도 역시 본래로 그 성(性)이 언어문자상을 떠났다고 하는 등으로부터 가히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들(正報) 및 우주의 방편토(方便土)와 실보토(實報土)(이상 依報)는 필경 오직 하나인 청정한 마음을 체(體)로 하며(究竟唯一淨心爲體),이 한마음외에 다시 다른 법이 없으므로(一心之外 更無餘法) 부득이 그 마음을 진여(眞如)라고 부를 뿐이다.(이상 우익대사 법어)
감산대사(憨山大師)의 《기신론소(起信論直解》:
何以名真如耶?謂即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一法界者-即無二真心,為萬法之所因依。界者-因也!總相法門體者-即一切聖凡依正因果之總相皆依此心而為其體,然此心體本不生滅,所謂常住真心也!既云一真,元無差別之相,而今有差別者,唯依妄念而有返顯,若無妄念則湛寂一心,了無差別境界之相矣!雖則萬法差別,法法皆真,是故一切法從本已來言思路絕,心行,處滅,故一切言說、名字、分別皆不可得,故皆云離也!由是染淨不能異,故云畢竟平等。四相所不遷,故無變異。不屬有為,故不可破壞。唯是一心更無別法,以不妄不變,故名真如。
어찌하여 ‘진여’라고 이름붙였는가? 말하자면 심진여는 곧 일법계대총상법문체이기 때문이다. 일법계(一法界)라 함은 둘이 아닌 참마음은 만법의 원인과 의지처라는 뜻이며,계(界)라 함은 원인이라는 뜻이다. 총상법문체(總相法門體)라 말함은 곧 일체 성인과 범부의 의보(국토)․정보(신체) 및 인과(因果)의 총체적인 모습은 모두가 이 진심(眞心:참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고 이 진심(眞心)을 그 자체(自體)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진심의 본체는 (성인․범부,의보․정보의 인과(因果) 및 정염(淨染)등의 현상적 전개에 불구하고) 전혀 생멸(生滅)이나 변이(變異)가 없다. 이른바 상주진심(常住眞心:영원히 변치 않는 참마음)이라고 한다. 이미 일진(一眞:하나인 참마음)이라고 말함은 곧 원래부터 차별이 없다는 것인데,지금 다시 차별이 있다고 말함은 바로 오직 망념 때문에 도리어 갖가지 차별이 나타남을 뜻한다. 만약 망념이 없는 즉 일심(一心)이 그윽히 맑고 고요하여 차별적인 경계의 모습은 처음부터 없다. 그런즉 만법의 차별은 법마다 모두 참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어와 생각의 길이 끊어졌고 마음의 갈 곳이 끊어 졌다.그러므로 일체의 언설,명자,분별을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모두 떠났다고 말씀한 것이다. 이와 같기 때문에 범부의 오염과 성인의 청정한 인연에 따라 일체법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필경평등(畢竟平等)’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일체법에는 생(生),주(住),이(移),멸(滅)의 4가지 모습에 따른 변천도 없다. 그러므로 ‘무변이(無變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체법은 유위(有爲)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파괴(不可破壞)’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오직 一心뿐이요 다시 다른 법이 없다. 즉 망령됨과 변이(變異)가 없으므로 진여라고 이름붙였다.
요해:
실상지체 비적비요 이부적이항조 조이항적(實相之體 非寂非照 而復寂而恒照 照而恒寂)
실상의 체(體)는 적(寂:고요함)도 아니며,조(照:비춤)도 아니나, 다시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추며, 비추면서도 항상 고요하다.
강의:
실상의 체는 두가지 극단(極端)에 떨어지지 않는다. 적(寂)은 공(空:텅 비었음)의 뜻이고,조(照)는 유(有:있음)의 뜻이다. 그래서 비적비조(非寂非照)는 공도 아니요 유도 아님을 의미하고 이는 실상(實相)이 공유(空有) 두가지 극단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 적(寂)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고,조(照)는 인연을 따른다는 뜻이다. 이부적이항조(而復寂而恒照)는,[그러나 실상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인연을 따른다]는 뜻이고,조이항적(照而恒寂)은 [실상은 인연을 따르되 항상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해:
조이적 강명상적광토 적이조 강명청정법신(照而寂 强名常寂光土 寂而照 强名淸淨法身)
비추되 고요함을 억지로 상적광토(常寂光土)라고 말하고,고요하되 비춤을 억지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고 말한다.
강의:
위 4구절은 우리들의 염불하는 일념심성(一念心性)이 곧 여래(如來)의 신체(身體) 및 여래께서 항상 머무시는 국토(常住國土)임을 밝히고 계신다. 조이상적(照而常寂) 구절에서는 적(寂) 자(字)자가 중요한 데, 적(寂)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不動之義)이므로 억지로(부득이) 여래의 머무는 곳(住處)를 상적광토(常寂光土)라고 부르며, 또 국토는 '움직이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적이상조(寂而常照) 구절에서는 조(照) 자(字)가 중요한 데,조(照)는 인연을 따른다는 뜻(隨緣之義)이므로 억지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고 부르고,또 청정법신에는 인연을 따른다는 뜻도 있다.
상적광토는 4토(범성동거토,방편유여토,실보장엄토,상적광정토)중의 하나로서 전3토(前3土)는 상적광정토를 떠나지 않는다. 상(常)은 법신(法身)의 덕(德)을 말하고,이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영원히 존재하여 소멸되지 않음)을 뜻한다. 적(寂)은 해탈(解脫)의 덕(德)을 말하고,이것은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음을 뜻한다. 광(光)은 반야(般若)의 덕(德)을 말하고,이것은 광명이 온 우주법계에 두루 비침을 뜻한다. 청정법신(淸淨法身)에는 온 우주의 일체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는 자성청정법신(自性淸淨法身)과 시방제불께서만 홀로 증득하시고 털끝만큼의 때도 없고 묘하기가 극에 이른 이구묘극청정법신(離垢妙極法身)이 있다.
요해:
우 조적강명법신 적조강명보신(又 照寂强名法身 寂照强名報身)
또 (우리의 염불하는 심성이) 비추는 작용을 하되 항상 고요하여 변치 않는 것을 억지로 법신(法身)이라고 부르고, 고요하고 변하지 않되 항상 비추는 작용을 하는 것을 억지로 보신(報身)이라고 부른다.
강의:
여기의 2구절은 우리들의 염불하는 일념심성(一念心性)이 또한 바로 여래(如來)의 법신․보신과 같음을 밝히고 계신다. 법신(法身)은 청정하고 움직임이 없으므로 이는 적(寂)의 뜻과 합치되고, 보신(報身)의 광명은 온 우주에 두루 미치므로 이는 비친다(照)는 듯과 합치된다.
질문:위 대목에서는 법신이 비침(照)의 뜻에 합치된다고 설명하였는 데,이 대목에서는 법신이 고요(寂)의 뜻에 합치된다고 설명하고 있어서 서로 모순되는데 무슨 연유인가? 답:법신에는 수연(隨緣:인연을 따름)과 무상(無相:고요하고 움직임이 없음)의 두가지 뜻이 있는 데, 위 대목에서는 여래의 신체와 국토를 대비(對比)하여 논하였으므로 거기서는 법신이 수연(隨緣)의 뜻으로 사용되었기에 비침(照)의 뜻에 합치되었고,적광(寂光)의 토(土)는 변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는 마땅히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음에 속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을 대비하여 거론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법신은 무상(無相)의 뜻을 가지고 있어 적(寂)의 뜻과 합치되며,보신은 유상(有相)의 뜻이 있으므로 이는 마땅히 조(照)에 속한다. 이상의 설명과 같이 위 대목과 본 대목의 설명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요해:
우 성덕적조 명법신 수덕조적 명보신(又 性德寂照 名法身 修德照寂 名報身)
또 성덕(性德:우리의 지금 염불하는 일념심성에 본래 갖추어진 덕)이 적조(寂照)한 것(고요하되 비추는 것)을 억지로 법신(法身)이라고 칭하고,수덕(修德:수행하여 얻은 덕)이 조적(照寂)한 것(비추되 고요한 것)을 억지로 보신(報身)이라고 칭한다.
강의:
성덕(性德)은 우리의 심성에 갖추어진 덕체(德體)에 속하는 데,비유하면 이는 광석(鑛石)에 함재된 금(金)이라고 할 수 있다. 수덕(修德)은 수행해서 이룬 덕의 모습(德相)에 속하는 데,비유하면 이는 광석을 제련하여 추출한 금이라고 할 수 있다. 법신은 우리의 자성에 본래 갖추어진 것으로서 수행의 공(功)을 입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므로 성덕(性德)이 적조(寂照)한 것(고요하되 비추는 것)을 법신(法身)이라 칭하고,보신(報身)은 닦아야만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미혹(迷惑)이 정화(淨化)되어야만 비로소 지혜가 원만(圓滿)히 드러나므로 수덕(修德)이 조적(照寂)한 것(비추되 고요한 것)을 보신(報身)이라고 칭한다.
요해:
우 수덕조적 명수용신 수덕적조 명응화신(又 修德照寂 名受用身 修德)寂照 名應化身)
또한 수덕(修德)이 조적(照寂)한 것(비추되 고요한 것)을 이름하여 수용신(受用身:법락을 받아 쓰는 몸)이라고 칭하며,수덕(修德)이 적조(寂照)한 것(고요하되 비추는 것)을 이름하여 응화신(應化身)이라고 칭한다.
강의:
또한 수덕조적(修德照寂)에서 조(照)는 지(智)에 속하고 적(寂)은 이(理)에 속하므로 시각(始覺)의 지(智)를 사용하여 본각(本覺)의 이(理)를 비추어(用始覺智 照本覺理),그 비춤이 마음의 근원을 꿰뚫어(照徹心源) 근본지(根本智)를 얻는 데,그 근본지는 달리 이지(理智) 또는 실지(實智)라고 하며 이는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을 이룬다. 이렇게 근본지에 의거하여 후득지(後得智)가 일어나는 데 후득지를 사지(事智) 또는 권지(權智)라고 하며 이는 타수용보신(他受用報身)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조적(照寂)은 지(智)로써 이(理)에 계합(契合:깨닫는다는 뜻)하여 시각과 본각이 하나가 된 것(始本合一)을 말하며 이는 법신(法身)에 의거하여 보신(報身)이 내려지므로(依法垂報) 수용신(受用身)이라고 한다.
수덕적조(修德寂照)는 응화신(應化身)이라고 칭해지는 데,여기의 적조(寂照)라는 것은 세존께서 여래의 고요하며 움직임없는 도량에 그대로 계시면서도 그대로 녹야원에 노닐면서 장육의 비구상을 나타내 보이시고 소승의 제자들을 위하여 사제(四諦)의 진리를 설하시니 이러한 부처님의 몸을 이름하여 응화신이라고 칭한다.
[역자 주]타수용보신(他受用報身)이란 깨달음의 결과인 법락을 부처님 혼자만 수용하며 다른 보살들이 볼 수 없는 보신을 의미하는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에 대한 용어로서,이는 깨달음의 결과인 법락을 초지(初地)이상의 보살에게 보여 주시고 부처님이 누리는 법락을 그러한 보살들에게도 누리게 하시는 보신을 말함.
요해:
적조불이 신토불이 성수불이 진응불이 무비실상 실상무이 역무불이(寂照不二 身土不二 性修不二 眞應不二 無非實相 實相無二 亦無不二)
우리심성의 실상의 고요함(본체)과 비춤(작용)은 둘이 아니고,정보(신체)와 의보(세계)가 둘이 아니며,성덕과 수덕이 둘이 아니고,법신과 응화신도 둘이 아니며,일체가 실상 아님이 없고,실상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것도 아니다.
강의:
먼저 거시한 적조(寂照),신토(身土),성수(性修),진응(眞應),이구사조(理具事造) 등이 모두 둘이 아니라 함은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우리의 일념심성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무비실상(無非實相)이라 한 것은 《능엄경》(제2권 無是見 無非見 부분)에서 [이 견(見(8식 견분)과 연(緣:8식 상분,7식,6식,6근 및 6진을 말함)은 원래 보리(菩提)의 미묘(微妙)하고 청정(淸淨)하고 광명충만(光明充滿)한 자체(自體)이다(此見及緣元是菩提妙淨明體)]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역자:여기의 보리묘정명체는 바로 우리의 현전심성의 實相體을 가리킨다.)
그 다음 실상무이(實相無二) 즉 실상은 둘이 아니라 함은 실상의 이(理) 즉 우리들의 심성의 본체는 성인이라 하여 더 크지 않고 범부라 하여 더 작지도 않은 범성평등(凡聖平等)한 본래 부처인 하나의 상(相)이므로 실상무이(實相無二)라고 말하는 것이며,《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서 [오직 일불승(一佛乘)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이승(二乘:성문,연각) 삼승(三乘:성문,연각,보살)은 모두 다 진실이 아니다(唯此一事實 餘二則非眞).]라고 하신 것과 같다.
역무불이(亦無不二)라 함은, 모든 사(事)는 오로지 이(理)를 쫒아서 일어나지만 그렇게 나타난 사(事)에는 무량(無量)한 차별이 있다(從理起事 事應無量)는 뜻이다. 그러므로 또한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역자:이 부분은, 理는 凡聖平等이지만 事는 수행에 의하여 얼마나 정화되었는 지,願行이 얼마나 광대한 지에 따라 무량한 차별이 있다는 것을 드러냄}.
위 앞부분(實相無二)은 이(理)의 측면에서 우리 중생의 일념심성을 설명한 것이고,뒷부분(亦無不二)은 사(事)의 측면에서 일념심성을 설명한 것이다.
요해:
시고거체작의작정 작법작보 작자작타 내지능설소설 능도소도 능신소신 능원소원 능지소지 능생소생 능찬소찬 무비실상정인지소인야(是故擧體作依作正 作法作報 作自作他 乃至能說所說 能度所度 能信所信 能願所願 能持所持 能生所生 能讚所讚 無非實相正印之所印也)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심성의 실상 전체가 의보(국토)와 정보(신체),법신과 보신,자신과 남을 나타내며 내지는 중생구제를 위한 설법의 주체(석가모니불)와 그 설법의 대상인 부처(아미타불)가 되기도 하고,제도의 주체인 부처와 제도의 대상인 중생,신심을 일으키는 심념과 그 신심의 대상인 법문,극락에 왕생하고자 하는 발원과 그 발원의 목표인 극락,능동적으로 지니는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과 그 삼업의 대상인 아미타불의 명호,능동적인 신원행(信願行)의 삼자량(三資糧:3가지 노자와 식량)과 삼자량의 성취정도에 따라 왕생하는 4종 정토(4種 淨土),찬탄의 주체인 석가모니불 및 시방제불과 찬탄의 대상인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과 무량한 보살대중 및 최승(最勝) 지미지묘(至美至妙)한 극락국토의 환경조건 이 모두는 다 실상정인(實相正印)을 도장찍어 나타난 것(실상의 표현인 것)이 아님이 없다.
강의:
시고(是故) 두자는 위의 설명을 이어서 아래말과 연결하는 접속부사인데,바로 위에서 설명한 역무불이(亦無不二)를 이어서 설명한다는 뜻이다. 즉 실상 전체(全體)가 인연을 따라(實相擧體隨緣), 시방국토(依報)와 그 국토상에 10계의 범부 및 성인의 신체상(正報)을 나타내고,법신과 보신을 나타내며,자타(自他)의 모든 상(相)을 짓는다. 내지(乃至)라는 말은 여타의 다른 것은 생략한다는 말인데,이것은 본경과 관련이 없는 것은 여기서 설명하지 아니하시겠다는 취지이다.
(본경에서는) 설법주체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설법의 대상인 아미타부처님,제도하시는 부처님과 제도를 받는 중생,능동적으로 신심을 일으키는 심념(心念)과 그 심념의 대상인 법문(法門),극락에 왕생하고자 하는 발원과 그 발원의 목표인 극락,능동적으로 지니는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과 그 삼업의 대상인 아미타불의 명호,능동적인 신원행(信願行)의 삼자량(三資糧:여행을 위하여 필요한 식량과 돈)과 삼자량의 성취정도에 따라 생을 받아 나는 4종 정토(4種 淨土),찬탄의 주체인 석가모니불 및 시방제불과 찬탄의 대상인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과 무량한 보살중 및 최승(最勝) 지미지묘(至美至妙)한 극락국토의 환경조건 이 모두는 다 실상정인(實相正印)을 도장찍어 나타난 인영(印影)이 아님이 없다. 즉 실상정인(實相正印)의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작(作) 자(字)는 마땅히 모든 법(諸法)의 밑바닥까지 일관되게 적용되는 말이다. 즉 비유컨대 금으로 모든 금기구들을 만든다(作)고 할 때의 만든다는 것과 같다. 금으로 모든 금기구들을 만들므로 모든 금기구들은 하나의 금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一金能作衆器 衆器不出一金). 비유컨대 실상이 인연을 따라 의보 정보등 일체 제법을 짓되 이러한 제법은 실상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법은 모두다 실상정인을 도장 찍어 나타난 인영(印影) 아님이 없다(無非實相正印之所印也)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단락에서 우익대사께서 설명하신 이치는 모든 대승경전에 나타난 이치와 같다. 즉 《화엄경》에서는 ‘마땅히 법계의 성은 오직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드는 것임을 관할 지니라(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고 말씀하셨고,《능엄경(楞嚴經)》에서는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의 나타남이다(諸法所生 唯心所現)’이라 말씀하셨으며,《법화경》의 방편품(方便品)에서는,‘여래께서 모든 중생을 일불승에 들게 하기 위하여 설하신 모든 법은 본래 상주진심 일진법계(常住眞心 一眞法界)의 실상(實相)에 머물러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일체 세간의 모든 현상존재의 모습 그대로 일진법계 실상이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라고 말씀하셨다. 고덕(古德)께서 말씀하시되, ‘삼라만상이 모두 일법(一法 즉 眞如實相)을 도장찍어 나타난 것이니라(森羅及萬象 一法之所印).’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모두 위 경전들에서의 부처님 말씀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어떤 한가지 법(法)을 들더라도 그 몸(體)은 곧 법계(法界:實相의 다른 명칭)이다(隨拈一法 體卽法界).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현전심성 즉 실상이 지니는) 한구절 아미타불(一句阿彌陀佛)의 명호(名號) 역시 그 몸이 그대로 법계(體卽法界)이며 또한 (우리의 현전심성이 지송하는) 이 경(佛說阿彌陀經) 역시 그 몸이 그대로 법계(體卽法界)인 것임을 자연히 알게 된다. 그런고로 실상(實相)은 이경의 바른 몸통(正體)이다.
[역자 주]참고로 이경의 정체(正體)를 논함에 있어서,중화민국의 빈종법사(斌宗法師)는 이경에는 실상,일진법계,여래장등 실상의 별칭으로 볼만한 명문의 표현이 없다면서,실상을 이경의 정체로 보는 고덕(古德)들의 견해를 존중하면서도 이와는 달리 열반사덕(涅槃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이경의 정체로 보면서 극락세계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 두가지 측면에서 열반사덕을 설명하고 계신 데,법사의 고견(高見)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사료되기에 여기서 간단히 소개한다.
1.극락세계의 의보(依報)에 의한 사덕(四德)
①상(常)---극락국토는 영원하여 성주괴공의 4가지 변천상이 없다.
②락(樂)---극락국토에는 4가지 보배로 이루어진 7중의 난간,라망,항수와 칠보로 이루어진 연못에 팔공덕수가 충만하고,사방에 칠보로 된 계단과 칠보 누각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갖가지 장엄이 갖추어져 기쁨만이 충만하다.
③아(我)---극락세계의 수숭한 장엄은 그곳 중생이 원하는 대로 음식,옷,공양구등이 주어지고,공간이동도 원하는 대로 무량하게 먼 곳의 부처님 처소까지 순식간 이동이 가능하여 자유자재하다.
④정(淨)---극락세계의 땅은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고,칠보의 연못에는 공덕수가 충만하여 항상 칠보연못에 목욕하여 번뇌의 때를 씻을 수 있으며 그외 모든 장엄들도 너무나 청정하여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2.극락세계의 정보(正報)에 의한 사덕(四德)
①상(常)---극락세계의 아미타불과 그곳에 왕생한 모든 중생들의 수명은 무량하여 끝이 없다.
②락(樂)---그곳에 왕생하는 일체의 중생들은 왕생함과 동시에 신심이 적열(適悅)하여지고 일체의 번뇌를 쉬게 된다.
③아(我)---그곳에 한번 왕생하기만 하면 이제는 영원히 오주(五住)의 일체 번뇌를 끊고 생사고를 떠나며 대자유를 얻게 된다.
④정(淨)---염불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중생들은 청정미묘한 연화(蓮華)에 화(化)하여 몸을 받으므로 그 몸은 수승하고 청묘(淸妙)하며 상호(相好)가 장엄하여 사바세계에서 육체의 태(胎)를 통하여 더러운 사대(四大:지수화풍)가 임시로 화합하여 받는 몸과는 비교할 수 없다.
또 여기 명체(明體) 부분에서 역자가 한가지 보충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위 요해와 강의에서는 우리들의 현전심성 즉 실상의 본체(심성의 본체 즉 性)와 작용(심성의 작용 作用 즉 心)에 대하여 주로 설명하셨고 실상이 갖춘 체상(體相)에 대하여는 명시적인 설명이 부족한 듯하기에 여기서 마명보살의 《대승기신론》에 설명된 우리들 심성에 갖추어진 체상의 6가지 중요한 뜻에 대하여 간단히 보충하고자 합니다. 《기신론》에 의하면,중생심(衆生心) 즉 우리들의 지금 작용하는 찰라의 마음을 법(法)이라 칭하시고 그 중생심에는 체․상․용(體․相․用)의 3대 의미가 있다고 하시면서,중생심 즉 현전심성의 상대(相大)이란 우리의 현전심성(중의 여래장 즉 진여실상)이 갖추고 있는 무량성공덕(無量性功德)을 말한다고 하셨고,그 무량성공덕의 구체적인 내용은 대지혜광명의(大智慧光明義),변조법계의(徧照法界義),진실식지의(眞實識知義),자성청정의(自性淸淨義),상락아정의(常樂我淨義),청량불변자재의(淸凉不變自在義)의 6가지를 뜻한다고 한다. 우리들 현전심성의 본체는 우주대광명 법신불 비로자나 부처님같이 무량의 지혜와 무량의 광명을 갖추고 있어서 온 우주를 걸림없이 널리 비추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大智慧光明義,徧照法界義),다시 심성의 본체는 이렇게 무한 지혜인지라 출세간 세간을 불문하고 모르는 것이 없이 진실로 완벽하게 아는 능력이 있으며(眞實識知義),그러한 심성의 본체는 항상 청정하여 무엇에든 물들지 아니하며(自性淸淨義),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이며 일체의 번뇌가 소진되어 무궁한 법락을 수용하며 무엇에든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전우주보다 더 큰 주체로서 청정한 덕을 갖추고 있으며(常樂我淨義),일체의 번뇌의 열기가 소진되어 항상 쾌적하고 시원하며 어떠한 번뇌에도 시달리지 않아 자유자재한 덕상을 갖추고 있다는 뜻(淸凉不變自在義)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현전심성이 이렇게 위대한 존재임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왕중왕(王中王) 부처님이 아니시면 누가 이런 결정설(決定說)을 설파(說破)하시겠습니까?
아미타불께서는 일체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서원을 세우시고 무수겁의 수행으로 이러한 실상본체의 6가지 덕상(德相)을 구경궁극에 이르기까지 구현하시고 48대원을 모두 이루어 성불하신 후 영원토록 우리들을 구제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본래 갖춘 덕상을 크게 발현하여 성불하도록 앞에서 극락으로 이끄시는 우주 대도사이시며,석존께서는 오탁의 생사고해에서 헤매이는 우리들을 가엽게 여기시어 우리들이 가장 신속하게 고해를 벗어나서 성불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극락으로 어서 가도록 뒤에서 밀어 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지금 작용하는 심성이 갖춘 3대(大)중 맨마지막의 용대(用大)을 빼 놓을 수 없으니,우익대사의 《기신론 열망소(裂網疏)》의 해당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역자의 拙見으로는,기신론의 體大는 無相의 實相을,相大는 無相無不相의 實相을,用大는 無不相의 實相과 같은 의미를 각각 갖고 있는 사료됨. 또한 無相의 實相은 능엄경의 空如來藏妙眞如性과,無不相의 實相은 능엄경의 不空如來藏妙眞如性과,無相無不相의 實相은 능엄경의 空不空來藏妙眞如性과 그 뜻이 각각 같은 것으로 사료됨.)
기신론 한역본:
삼자용대 능생일체세출세간선인과고(三者用大 能生一切世出世間善因果故)
번역:
세번째는 용대인데,이는 중생심이 능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선(善)한 원인과 결과를 낳게 하기 때문이다.
우익대사 《기신론열망소》 원문:
只此眾生現前介爾之心。無法不具。無法不造。所謂隨於染淨緣。具造十法界。遍能出生十界因果。但約九界言之。則三塗等諸惡因果。雖亦此心之用。如以金作穢器。利刀割泥。無上寶珠而作彈丸。不名用大。人天有漏因果。雖亦此心之用。如以摩尼僅貿一衣一食。不名用大。二乘無漏因果。雖亦此心之用。如空守閻浮檀金。不生息利。不名用大。權乘菩薩五通因果。雖有自利利他之用。如以閻浮檀金而作商賈貿易。未能統御自在。亦不名用大。雖又希心極果。如以閻浮檀金作王寶冠。未能拔宅飛昇。亦不名用大。唯有佛乘種性。知此現前介爾之心。體即真如。具無邊德。便能觀察一切妄念無相。自愍愍他。發大誓願。稱性修習。滅無始無明。證本法身。任運起於不思議業。種種自在作用差別。周遍法界。與真如等。譬如以閻浮金。煉作仙丹。便能拔宅飛昇。遊戲自在。故名用大也。問。果中用大。垂形九界。有時示現三塗。亦應生惡因果。如何但言善因果耶。答。為度眾生。示作惡因。本無迷染。即無漏善。為度眾生。示受惡果。亦無苦受。如三禪樂。是故但名善因果也。又所言能生一切善因果者。謂果中大用。遍與眾生作增上緣。令生世出世間諸善因果。非謂既成佛已。自生世出世間善因果也。以諸佛所有一切變現。皆是真如自在甚深之用。皆合涅槃清淨妙德。不可喚作實因果故。問。用大既約佛果。何名此心生滅因緣相耶。答。若無眾生心。則無大乘體相。若無大乘體相。何處有大乘用。問。既云真如甚深用。何故不屬真如。乃屬生滅因緣。答。若非生滅因緣。則真如之名。尚自不立。何得辨用大耶。夫眾生現前介爾生滅之心。體即真如。相即如來藏。用即能生一切因果。而日用不知。是謂理即大乘。若能知此一心體大相大用大。是謂名字即大乘。若能觀察妄念無相。是謂觀行即大乘。若粗垢先落。六根清淨。是謂相似即大乘。此論名之為相似覺。若能親證此體相用。任運增進。是謂分證即大乘。此論名之為隨分覺。若至心根本性常住現前。是謂究竟即大乘。此論名之為究竟覺。六而常即。始終平等。即此心真如門也。即而常六。昇沉碩異。即此心生滅門也。故立一切眾生心為有法。
다만 중생의 지금 작용하는 찰라간 생멸하는 극미한 마음이라도 일체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고 또한 이를 지어내는 것이니, 이는 이른 바 중생의 현전심성이 더럽고 깨끗한 인연을 따라 십법계를 지어 널리 십법계의 인과를 짓고 받음을 말한다. 구법계(九法界)를 기준으로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지옥,아귀,축생 삼악도의 인과도 이 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인데, 이는 마치 예리한 칼(마음의 진여에 갖춘 무한지혜를 의미함)로 진흙을 베는 것과 같이 아무 이득없이 칼날만 무디어 지는 것과 같은 것이며,또한 위없는 보배구슬(마음의 진여에 갖춘 무한불성을 의미함)을 녹여 탄환을 만드는 일과 같으니 이를 일러 용대(用大)라 할 수 없다. 또한 인간과 하늘세계의 유루인과(有漏因果)도 역시 이 마음의 작용에 의하는 것인데, 이는 마치 귀중한 마니구슬(마음에 갖춘 불성을 의미함)로 옷한벌 밥한끼와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또한 용대(用大)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문 연각의 무루인과(無漏因果)도 역시 이 마음의 작용에 의하는 것인데, 이는 마치 귀중한 염부단금(이 역시 우리 마음의 불성 여래장을 말함)을 다만 지키고만 있을 뿐 이를 가지고 아무런 이로운 작용에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 또한 용대(用大)라 할 수 없다. 다시 권교보살의 오통인과(五通因果:천안통,천이통,타심통,숙명통,신족통과 그것을 이루는 수행을 말함)도 이 마음의 작용에 의하는 것이고 이로 인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공능(功能)이 있기는 하나 이는 마치 귀중한 염부단금으로 큰규모의 장사를 하는 것과 같으니 이로써는 완벽한 자재(自在)를 얻을 수 없으니 이 또한 용대(用大)라 할 수 없다. 역시 또한 대승의 별교보살이 지극한 과보[佛果]를 얻기 위하여 대발심하여 무수겁의 수행을 이어감도 역시 이 마음의 작용이나 이는 마치 귀중한 염부단금으로 왕관을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로써는 역시 삼계내외의 고통의 집을 완전히 벗어나기 불가능하니 이 또한 용대(用大)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一佛乘(모든 중생이 부처된다는 가르침)에 있어서만 중생의 지금 작용하는 찰라간 생멸하는 극미한 마음이라도 그 체(體)는 그대로 진여 그자체로서 무한한 공덕을 구비하고 있음을 알고 중생의 일체망념이 본래로 그 자체의 상(相)이 없음을 관찰하고,번뇌업장에 허우적거리는 자기 자신과 모든 타인을 불쌍히 여겨 자타를 모두 구제하리라는 크나큰 서원을 세우고 법성에 맞는 수행을 닦아 무시이래의 무명을 끊고 근본 법신(法身)을 증득하고 부사의업(不思議業)을 자유자재로 운용하여 가지 가지 자재한 작용과 차별을 나타내며 이를 법계에 두루 미치도록 함으로써 마음 자체의 진여(眞如)와 같게 한다. 비유하자면 염부단금으로 신선의 환약을 만들어서 그 환약을 복용함으로써 삼계내외의 화택을 완전히 벗어나 유희자재(遊戱自在)하므로 이를 용대(用大)라 한다.(이상 우익대사의 법문)
역자의 의견: 위 용대(用大)법문을 정토법문과 관련지어 말하자면,우리의 현전 심성이 4홍서원을 일으켜 지극 정성으로 ‘나무아미타불’의 지명수행을 닦으면,그 과보로 극락에 왕생하여 늘 불법계에 머물러 다른 9계의 법계로 이탈되지 않게 되고 삼계내외의 일체 고통을 벗어나 점차 불지(佛智)를 향해 나아가게 되며 동시에 다른 9법계의 일체중생을 널리 제도함이 법계에 두루하여 자신의 심진여(心眞如)에 갖춘 무한 공덕상과 같아지게 될 것인바,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전 심성에 갖춘 용대(用大)의 진정한 의미라 할 것이다. 결국 요해에서 말씀하신 심성의 작용인 이구(理具) 사조(事造)의 이중적(二重的) 3천여시(千如是)중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용대(用大)를 온전히 타고 닦아 나아가야만 심진여(心眞如)의 구경(究竟)에 도달한다고 할 것이다.
원공법계제중생 동입미타대원해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