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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 66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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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 21만 5백 8호(1,052,540명)[1], [2], [3] |
성립 | 기원전 37년 |
멸망 | 668년 |
초대 군주 |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
최후 군주 | 보장왕 642년 ~ 668년 |
성립 이전 | 부여 |
해체 이후 | 발해, 신라 |
주석 | |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려(高麗)(기원전 37년 ~ 668년)는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장수왕 이후 정식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했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혼동되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의 구분 용이를 위하여 고구려로 지칭되고 있다.
고구려는 전성기 때 현재의 대한민국의 대부분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역, 중화인민공화국의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 일부[1], 러시아 일부(연해주의 일부) 까지 지배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80년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의 일부라 주장하여 논란이 있다.
목차[숨기기] |
한국의 역사 (연표) v • d • e • h | |||||||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
환인 환웅 | ||||||
시 대 구 분 ‥ 원 삼 국 | 삼 국 | 남 북 국 | 후 삼 국 |
고조선 | ||||||
진국 | |||||||
진 한 |
변 한 |
마 한 |
옥 저 |
동 예 |
부 여 | ||
가 야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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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 려 | |||||||
신라 | 발 해 | ||||||
후 백 제 |
태 봉 | ||||||
고려 | |||||||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
조선 | |||||||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
대한제국 |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 |||||||
군정기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초기 고구려는 부여 및 한군현(漢郡縣)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기원전 128년 예(濊)의 족장 남려가 한(漢)과 함께 창해군(滄海郡)을 만들어 고구려를 압박 했지만, 기원전 126년 끝내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또, 기원전 75년 한의 속현인 현도군을 압록강 유역에서 몰아내는 등 부족 연맹체를 굳히고 1세기 초부터 이미 왕호를 제정하였다.
고구려는 이후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서 건국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2]에 도읍했다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명왕이 넓고 진출하기 편한(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고구려는 발판을 탄탄히 하고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위협하는 국가들이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침공을 하고 복속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을 대소왕를 죽이고 돌아 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침공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도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
53년에 즉위한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옥저(沃沮)를 복속시키는 등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대왕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 옥저·동예(東濊)를 공격하고, 남으로는 살수(薩水)[3]에 미치고,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태조대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키고 한군현에 대한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 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4]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故國川王) 때의 명재상 을파소(乙巴素)는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후사 없이 죽어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상속제가 확고히되었다.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구련성(九連城) 지방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일로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의 침입을 받고 말았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결국,[5]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난을 가고 말았다. 다행히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을 패퇴시키고 피폐해진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4]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고구려의 정복 활동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진과 낙랑을 잇는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4년 낙랑군(樂浪郡), 314년대방군(帶方郡)을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지방의 흩어져있는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그 다음 왕인 고국원왕이 즉위하자 339년에서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표면상의 복속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겨우 선비와의 위기를 넘은 고구려는 잠시 회복의 시간을 가진 뒤 369년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의 평양성 침공으로 인해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게 되고,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조부를 죽인 원수 백제를 먼져 공략하였다. 392년백제의 대방땅을 수차례 공격하여 약화 시켰으며 396년 대대적으로 한성을 포위하였다. 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후연(後燕)은 이런 다급한 때에 고구려에게 책봉을 내리는 등 도발하였다. 그래도 광개토대왕은 백제왕의 전쟁이 다급하여 책봉을 받았다. 또,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까지 초토화시키어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시키었다.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와 북위의 공격으로 후연이 멸망하여(407년),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 또한 확보하였으며, 이어서 등장한 북연(北燕)을 괴뢰 정부화 하였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거란 비려(碑麗)를 복속시켰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들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6]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을 감행,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7]
결국,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는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각각 침공하기에 이른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도 떨어졌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본토로 퇴각하였다.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대장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 군사들과 백성들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살수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의 충격으로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도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침공했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그 때마다 연개소문이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자 고구려는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평양성을 공격한 나·당 연합군을 고구려 군민이 막아내었다.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5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淵男生)·연남건(淵男健)·연남산(淵男産) 형제는 막리지(莫離支) 자리를 둘러싸고 서로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劍牟岑), 안승(安勝)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복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 옛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大祚榮)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東牟山) 일대에서 발해(渤海)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편 10세기에 들어서 후고구려(後高句麗)와 고려(高麗)가 각각 고구려의 계승국 임을 자처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때에도 남아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인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며, 그것이 더욱 정비된 것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고구려의 중심 세력은 본래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왕은 부족 연맹장이 되었다. 왕은 선출에서 세습제로 변하였는데 초기는 소노부에서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
초기에는 국왕 밑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주부(主簿)·우대(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 등을 두었는데, 이 관계(官階)는 그 후 발전 과정을 통하여 427년 평양천도 이후에 재정비되었다. 관료의 등급은 대체로 12등급으로 분화·발달되었는데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대사자(大使者)·소형(小兄)·제형(諸兄)·선인(仙人) 등으로 나뉘었다. ‘형’은 연장자로, 가부장적(家夫長的) 족장의 뜻을 나타내며 부족 연맹에서 고대 국가로 전환하면서 여러 족장 세력을 이러한 관등에 흡수한 것 같다. ‘사자’가 붙은 것은 씨족원으로부터 등용된 것으로 공부(貢賦) 징수의 직역(職役)을 뜻하는 것 같다. 대대로와 막리지(莫離支)는 수상격인 고구려 최고의 관직으로 대대로가 평시 행정 담당의 수상이다. 막리지 밑에는 중외대부(中畏大夫)·대주부(大主簿)·고추대가(古雛大加) 등을 두었는데 각각 내정(內政)·외정(外政)·재정(財政)을 맡아보았다.
지방은 동·서·남·북·중의 5부(部)로 나누고, 5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부왕(副王)급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8]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 내부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하여야 했다. 원래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을 여러 성(170)은 고구려 왕국의 사적·행정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었고 또 부세(賦稅) 등 지방민에 대한 통치가 행해지기 마련이었다.
고구려에는 귀족 회의의 하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9], 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10], 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11]·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12]·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13]라 하였다.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8]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각 부 내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했다.
그 밑에 각 이원(吏員)이 있어 사무를 분장하였다. 문무의 구별이 체계화되지 못하였던 고구려는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던 여러 성을 행정적·군사적 단위로 편성하였던 것 같다.
5부를 중심으로 하여 기내(畿內)의 뜻인 듯한 내평(內評)과 기외(畿外)의 지방을 의미하는 외평(外評) 제도가 있었다. 또한 평양 천도 후에는 평양 이외에 국내성(國內城, 통구)과 한성(漢城, 재령)의 별경(別京)이 있어 삼경제(三京制)가 성립되었다.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서 국왕 자신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조직도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국내성·평양·한성(漢城 : 재령)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고,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맡았다. 또한 군사중에서는 서양의 기사와 같이 특수한 기병대가 있었는데 이 기병대는 개마무사(개마무사, 鎧馬武士)로 '갑옷으로 무장한 말을 탄 기병'이란 뜻이 있다. 개마무사는 온 몸을 철로 뒤덮고 있었다.
주요 발사 무기로는 고구려에서 국궁과 각궁을 사용했다 또한 석궁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성을 방어할때는 투석병이 있었다. 도끼창(미늘창으로도 불리며 창과 도끼가 결합된 형태의 무기로 폴암 또는 핼버드가 예로 든다.)은 기병이 사용했다. 고구려의 보병은 창과 칼 두 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첫번째는 짧은 양날 변형으로 생긴 창으로 대부분 던지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단일 양날 검으로 한나라의 영향력을 받은 칼자루 안에 있었다. 투구는 중앙 아시아 민족이 사용하는 날개 달린 가죽 및 말꼬리 장식과 유사했다. 갑옷은 미늘갑옷이라 군인들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신발은 밑에 뾰족하게 된 송곳들이 박혀있어 적을 밟을 때 사용했다.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은 12배를 물게 하였다. 고구려에서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남의 가축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는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제가회의를 통하여 처벌하였다. 이렇게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
고구려의 사회 계급은 귀족·평민·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또한 각기 넓은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일반 백성은 평민으로 대부분 자영 농민이었고, 토지 경작과 함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며, 토목공사에도 동원되었다. 고구려의 천민과 노비는 포로·죄인·채무자·귀화인 또는 몰락한 평민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신분 계급에 따라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다.
주로 생산 활동에 종사한 피지배층 하호는 고구려 본족(本族) 중의 범죄자·낙오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피정복민이었으며 전쟁 때 포로가 된 한족도 있었다.
이들 하호는 신분적으로 노예와 구별되었으나 사회 경제적 위치는 노예에 준(準)하는 예민(濊民)으로서 대부분 정복당한 원주지에 살면서 농경을 포함한 생산 활동을 거의 전담하였고, 일부는 고구려에 이주되어 토지의 개척과 농경 등에 사역(使役)되었다. 또 전시에는 지배자의 사병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영역 내의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라는 의미에서 토지 국유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 원칙에 입각하여 토지는 분배되었다. 왕실 직속령(直屬領)이었던 것은 물론 전쟁시의 뛰어난 훈공에 의해서 국왕으로부터의 상사(賞賜) 형식으로 수여되는 사전(賜田)이나 식읍(食邑)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의 원천이 되었다. 사전(賜田)은 세습적인 상속이 인정되었고, 식읍은 자손에게 상속될 수 없었으며, 이들 토지 수급자(受給者)는 국가에 조세(租稅)를 납부하였다. 귀족들에 의한 토지의 사적지배(사유화 과정)는 족장(귀족)·사원(寺院)을 중심으로 장원(莊園)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귀족들은 토지뿐 아니라 경작하는 예민(隸民)까지 마음대로 지배하였다.
고구려의 산업은 농업을 위주로 했으며, 국가에서는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농사를 담당한 것은 피지배계급인 일반 농민이었다.
고구려의 세제(稅制)는 세(稅)와 조(組)가 있었는데, 인두세(人頭稅)에 해당하는 세로 포목 5필에 곡식 5섬을 받았고, 조는 민호(民戶)를 3등급으로 나누어 상호가 1섬, 중호가 7말, 하호는 5말을 내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 졸본에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사람들은 절할 때에도 한쪽 다리를 꿇고 다른 쪽은 펴서 몸을 일으키기 쉬운 자세를 취하였고, 걸을 때도 뛰는 듯이 행동을 빨리 하였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가 있었다. 평민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결혼했는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만약 신부 집에서 재물을 받은 경우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14]
《삼국지》〈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동맹 때에는 “나라 동쪽에 큰 수혈(隧穴)이 있어,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수신(隧神)을 제사지내며,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모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신은 주몽의 어머니로 민족적인 신앙의 대상이며, 목수는 나무로 만든 곡신(穀神)을 의미한다. 전 부족적인 제례(祭禮)였던 이 의식에서는 부족원이 무리를 지어 연일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3월 삼짇날은 수렵대회를 열어 상무(尙武) 정신을 길렀다.
고구려의 문화는 고구려인의 강건한 기질을 잘 나타낸다.
지배층의 복식은 한나라(漢)·흉노에서 수입한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되었고, 전사(戰士)들은 머리에 쓴 적(관(冠))에다 깃털을 꽂는 이른바 절풍(折風)을 썼는데 많이 꽂혀있을수록 높은신분을 나타낸다 고구려인은 또한 거대한 분묘와 석총(石塚)을 만들었고, 많은 물건을 시체와 함께 부장하였다.
한자와 한문학은 삼국 중에서 가장 빠르게 들여왔으며, 372년(소수림왕 2년)에는 이미 국가에서 유학(儒學)의 교육 기관으로 "태학"(太學)을 세웠고,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의 자제들에게 독서(讀書)와 궁술(弓術)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인들 사이에는 유교의 경전(經典)이나, 사기(史記)·한서(漢書) 등의 사서(史書)가 읽혀졌다. 옥편(玉篇)·자통(字統)과 같은 사전류(辭典類)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文選)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한자의 사용에 따라서 국가적인 사서(史書)의 편찬도 일찍부터 행하여졌다. 그리하여 일찍이《유기(留記)》100권이 편찬되었으며, 이것을 600년(영양왕 11년)에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간략히 하여 《신집(新集)》5권을 편찬케 하였다. 한자 사용의 근거는 통구의 모두루 묘지(牟頭婁墓誌 : 414년)의 비문(碑文)과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약 1,800자(字)의 비문으로 능히 알 수 있고, 특히 광개토왕의 비문은 중요한 사료(史料)가 되고 그 고굴(告掘)한 예서(隸書)의 자체(字體)는 서예(書藝)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의 시가로는 유리왕(瑠璃王)이 지은 〈황조가(黃鳥歌)〉와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등이 한시(漢詩)로서 전하고, 그 밖에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등이 가명(歌名)만 《고려사》〈악지〉(樂志)에 전한다.
고구려의 종교는 원시 신앙과 불교·도교로 대별할 수 있는데 원시 신앙으로는 자연물 숭배, 천신(天神)·지신(地神)·조상신(祖上神)의 3신(三神) 숭배와 샤머니즘(shamanism)적 신앙이 있었고, 특히 나라에서는 부여신(河伯女)과 고등신(高登神 : 주몽)을 시조신(始祖神)으로 해마다 4회 제사를 지냈다.
불교의 전래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에서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佛像)과 불경을 전래한 것이 그 시초이며, 그 2년 뒤에는 다시 동진(晋)에서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여 위의 두 불승(佛僧)을 거주케 함으로써 국가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를 왕실에서 이와 같이 환영하였던 까닭은 불교가 때마침 국민에 대한 사상 통일의 요구에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녔던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왕실에 크게 영합되었기 때문이다.
곧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한편, 도교(道敎)는 고구려 말기인 624년(영류왕 7년)에 당 고조(唐高組)가 양국 간의 친선정책으로 도사(道士)를 보내와 전한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고구려 사신도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 도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건축·미술에서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는데, 대부분의 유적들이 통구와 평양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궁실(宮室)이나 사찰(寺刹) 등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분의 구조를 통하여 당시의 귀족 계급의 호화로운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으로는 석총(石塚)과 토총(土塚)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석재(石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將軍塚)은 통구 지방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석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관(棺)을 안치한 큰 석실(石室)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덮은 토총 형식의 대표적인 것은 평양 부근의 쌍영총(雙楹塚)이다. 이와 같은 석실(石室)의 구조와 벽화(壁畵)에 의해서 고구려인의 건축술과 미술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곧 쌍영총의 현실(玄室)과 전실(前室) 사이에 세워진 각(角)의 두 석주(石柱)와 투팔천정(鬪八天井), 또 그림으로 나타낸 천정의 장식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엿보게 한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인의 신앙·사상이나 풍속·복식(服飾) 등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삼국시대 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쌍영총의 섬세·화려한 필치로 그려진 인물화나 무용총(舞踊塚)의 무인(舞人)·가인(歌人)의 그림은 고구려인의 풍속·복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청룡(靑龍)·백호(白虎) 등이 그려진 강서대묘(大墓)의 사신도(四神圖)는 강건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잘 나타낸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 수렵총(狩獵塚)·각저총(角抵塚)·수산리 고분·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가 건축·미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의 불교 미술은 중국의 북위(北魏)풍의 영향으로 불상이나 불화(佛畵) 또는 탑파(塔婆) 등의 미술품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족이나 유물은 극히 드물다. 다만 평양 근처에서 발견된 소형의 이불(泥佛)과 연가(延嘉) 7년이 새겨진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15]이 당대(當代)의 양식을 잘 나타낸 불상조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 최고(最古)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금동 불상은 문자명왕(文咨明王 : 491~519)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2년 충청북도 유성군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 문화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구려의 화공(畵工)·학승(學僧)이 일본으로 가서 불교문화를 전하는 데 공현하였다. 특히 승려이자 화가인 담징(曇徵)이 그린 벽화는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
고구려인들은 가무(歌舞)를 즐겼으나 더 이상의 문헌적 고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양원왕때의 국상인 왕산악(王山岳)이 진(晋)의 칠현금(七鉉琴)을 개량(改良)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 하고 100여 곡(曲)의 악곡(樂曲)을 지었다고 전한다.
중국의 북조 및 북방 초원의 여러 민족과 교섭, 바다를 통해 남조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불교를 전파했으며, 고구려의 승려인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파하고, 호류 사 벽화를 남겨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 고구려 등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작위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도 고구려의 역사의 계승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하였으나, 2006년에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 역사재단에 통합되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주몽, 연개소문 등 고구려를 주제로 한 여러 역사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하였다.
허나, 유무형의 문화적 유물들, 생활 습관, 국호 등 고구려와 후대 한반도 왕조들, 또 현대의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부인할 수 없는 연속성이 명명백백함에 따라 200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의 화살은 고구려에서 빗겨난 발해사에 집중되었다.
현재는 발굴 유물, 유적지 훼손부터 사료 조작에까지 완전히 발해사에 대한 공정이 마무리되어, 현행 중국 역사교과서에는 발해 왕조를 중국의 소수민족 왕조로 소개되고 있으며 현재 중국 전역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발해사를 자국의 소수민족사로 배우고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한국어 독음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라는 의견이 있다.[16] 이는 麗의 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발음된다는 음운 법칙에서 비롯되었다.[17][18][19][20]
그러나 조선시대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라 나타나고[21]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22]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23][24][25]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한편 장수왕 3년(414년), 69년(481년)에 각각 설치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고려태왕(高麗太王),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을 근거로 고구려에선 왕들을 '태왕'이라고 칭했다는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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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명성왕--2.유리왕----3.대무신왕----5.모본왕 | |---4.민중왕 | |----고재사------6.태조왕 | |--7.차대왕 | 8.고국천왕 | |--10.산상왕--11.동천왕--12.중천왕--13.서천왕----14.봉상왕 | |--고돌고----15.미천왕----16.고국원왕----17.소수림왕 | |--18.고국양왕---19.광개토왕---20.장수왕--고조다--21.문자명왕----22.안장왕 | |--23.안원왕---24.양원왕---25.평원왕----26.영양왕 | |--27.영류왕 | |----고태양--28.보장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