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기본 목표는, 이성의 사용을 통하여 철학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단순한 명제로 다가오는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데카르트가 겪었던 시대에는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철학은 중세의 '신'중심의 철학에 여전히 포섭되어 있다. 그런 데카르트를 왜 근대 철학의 시작으로 보는가. 그것은 바로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방법이 중세와 근대를 가르기 때문이다. 중세의 모든 사고 관념은 오로지 신에 의해서만 알 수 있고(인식론), 신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존재론), 신에 의해서만 참 될 수 있다(가치론). 바로 중세가 정의하는 세계관에 의해서 인간의 주체는 '신'이란 절대적 존재에 의해 개념이 지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런 '신'에 의해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틀 자체를 무너뜨린다. 바로 신의 의한 '존재의 질서'가 아닌 '발견의 질서'에 따르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발견의 질서에 따르게 되면 자기 자신의 현존이 신보다 더 앞선 것이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낡은 학문의 방법틀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학문의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새로운 방법은 기존의 권위가 아닌 오직 자신의 이성에만 의지해서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성에 의한 명증적인 확실한 진리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사용한다. 방법적 회의란 진리를 알기 위해 방법적으로 '회의'를 도입하는 것을 말한다. 우선 그는 감각적 사물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어떤 현상을 보고 느끼는 것은 정말 실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각적 현상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가끔씩 거짓된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구나 데카르트는 '꿈의 논증'을 빌어온다. 우리는 가끔씩 꿈 속에서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현상을 지각하기도 한다. 때문에 지금 내가 무엇을 생생하게 본다고 한들, 지금 이 것이 꿈인지 꿈이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하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감각적 현상들은 명증적인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 하여 거부된다. 그리고 그는 평소 절대적인 명증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수학적 진리까지도 회의한다. 바로 형이상학적인 가설을 도입한다면 수학의 명제조차도 회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악마의 가설'을 도입하여 '충분히 우리를 속일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어떤 탁월한 악마가 자신의 전력을 다해서 나를 속이고 있다고' 가정을 한다. 바로 내가 확실한 것이라고 믿는 것 역시 속임을 당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한 것이라고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인 확실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의 견해로는 이러한 추구의 첫 번째 단계로서 회의 가능한 모든 것을, 심지어는 이러한 회의의 가능성이 완전히 허구라고 하더라도 회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진리라고 여겨진 것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여 걸러냄으로써 그는 자신이 기본적인 진리, 즉 그것에 대한 회의가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 그는 자신의 현존을 의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된다. 그는 볼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의심하고 방법적으로 배제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의심의 대상으로 집어넣는다. 그는 의심한다. 내가 가진 신체들과 그리고 나의 정신까지도. 하지만 여기서 그는 발견하게 된다. 나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더라도 지금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고, 그래서 데카르트의 현존은 명증적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Cogito, ergo sum'(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 - 보통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고 알고는 있지만, 그것은 데카르트의 방법으로 볼 때, 추리에 의한 것이므로 명증적인 것이 아니란 비판이 있다). 여기서 근대 철학의 중심인 '나'라는 '주체'가 정초된다. 바로 '생각하는 나의 절대성'이 주장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나'는 사고하는 존재이다. 사고하는 존재는 '회의하고, 이해하고, 확인하고, 부인하고, 의욕하고, 반박하는 존재 그리고 상상하고, 느끼는 존재이다'. 바로 모든 것의 진리는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증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주체'는 신이 없이도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근대 철학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즉 '주체'가 정초되면서 필연적으로 '타자'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나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 다닌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면,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엇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 철학은 신에게서 인간을 분리 시켰지만, 다른 피조물들(자연) 역시 인간과 분리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체'는 이제 자연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위치를 가지게 된다. 그는 '주체'이고 대상(자연)은 객체이므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체'와 '타자'의 개념은 근대 철학이 정초한 이래 현재까지 우리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현실 사회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근대의 기획 속에서 '주체'와 '이성'의 위상이 급상승되어 인간의 존재성이 상승했다고 볼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타자'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는 것은 서구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이나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정당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여성에 대한 억압까지도 정당화하게 되었다.
2. 라캉의 무의식과 '주체' 비판
데카르트의 코기토 기획에 의해 생성된 근대적 '주체'는 프랑스 구조주의에 이르러 엄청난 비판을 받게된다. 특히 소쉬르의 언어학은 근대적 주체와 실존주의적 주체와는 다른 길을 열었다. 소쉬르가 언어학의 대상으로 정의하는 랑그(langue)는 개개인이 어떻게 말하고 발음하는가와 무관하게 기호를 사용하려면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규칙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약속되고 정의된 것이다. 때문에 의사소통은 물론 사고하고 판단하며 해석하는 일체의 의미작용이 모두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 모든 의미작용이나 판단은 언어의 규칙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의 의미는 기표들간의 관계에 의해(차이를 통해) 정해진다고 한다. 의미작용이나 판단이 그처럼 언어적인 것이며, 언어적 규칙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의미나 판단은 언어를 통해서 행할 수 밖에 없는데 의미가 언어들의 망 속에서 정의되고 있다면 결국 언어를 통한 어떠한 사고 역시 언어적인 의미체계 안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내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이전에 항상 -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 이미 존재하는 그 언어의 망 속으로 들어갈 뿐이며, 거기 이미 존재하는 기호를 거기 이미 존재하는 규칙에 따라 사용할 뿐이다.
이것은 근대적인 주체철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왜냐하면 의미란 어떤 식으로든 이미 주어진 '주체'가 갖거나 만드는 것이란 발상을 뒤집고, 반대로 의미란 이미 기호들의 망 속에 이미 주어진 것이고, 주체란 이 주어진 기호와 의미 속에서 판단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라캉은 언어체계가 갖는 이런 근본적 규정성을 무의식이란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라캉에게 가장 중심적인 모티브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규정되어 있다'는 명제에 응축되어 있다. 바로 라캉의 '무의식' 역시 언어에 의해 조직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영향을 받아 라캉은 기호가 대상과 어떤 상응관계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예컨대 '나무'라는 기호는 실제의 나무와 아무런 상응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기표(나무라고 표시되는 기호)와 기의(그 기호를 듣고 떠올리는 의미) 역시 서로 단절과 장벽이 있다고 한다. 일례로 라캉은 신경증이나 꿈 등을 무의식을 드러내는 징후요 기표라고 보는데, 이것을 통해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억압되고 변형되어 있어서 기의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꿈이나 증상이 보여 주는 다양한 기표들이 어떻게 조직되었나를 봄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의 기의에 고착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수를 셈할 때는 이런 기표들의 결합에서 기표의 의미를 알려면 그 것은 또다른 기표를 사용해야만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기표들의 연쇄만이 나타나며 기표는 기의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고 기표의 연쇄를 통해 기의를 알 수 있지만 그 것은 '기의'가 아닌 것이다. 이를 라캉은 '기표의 미끄러짐'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라캉의 무의식을 설명하면, 꿈에서 엄마의 형상과 애인의 형상, 누이의 형상 등 유사성을갖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을 '응축'(은유)라고 하고, 반면 성교가 출혈이나 사다리 오르기로 대체되어 나타나는 것을 '치환'(환유)라고 한다. 이런 효과를 통해 사용되는 기표 'S'는 기의 s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데 대한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힌다. 예컨대 성교나 성적 충동이 그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인접되어 있는 다른 기표로 계속 치환되는 것이 그렇다.
따라서 라캉이 보기에 꿈이란 이처럼 은유와 환유에 의해 다양한 이미지 -기표- 들이 만들어지고 조직된 텍스트이다. 그것은 의미작용을 만들어 내면서도 동시에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무의식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라캉은 아기가 어릴 때, 거울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전신을 보았을 때 어떤 완벽한 '자아'를 형성한다고 한다. 그것은 거울을 통해 생성되는 이상적 자아이며, 또한 거울의 '나'와 동일시를 하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안게 된다. 이 것을 상상계라고 한다.
아기는 엄마를 자기와 일체라고 생각을 하는 데, 가끔씩 엄마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 것은 아기에게 '외상'(trauma)를 주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라캉은 이 외상적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실패'를 침대 밑에 던졌다가 그 실을 잡아당기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 것은 자신의 '외상'을 반복을 통해 충격을 재현하는 것인데, 이 때 아기는 그 실패를 자기의 신체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이 때 아기는 엄마와 구분 안되기에 거의 동일). 아기는 이런 작업을 통해 자기 극복을 하고 신체의 분리와 합체등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상상 속에서 자신이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고, 무의식을 형성시켜 일반적으로 삶을 행할 때, 자신은 항상 결핍 상태에 있지만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즉 스스로 의미망을 구축할 수 있다라고 착각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그러나 결코 현재화될 수 없으며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라고 보았다. 라캉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에게서보다 훨씬 더 중심적인 자리에 차지한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모체로부터 독립하여 하나의 주체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며, 인간의 자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며, 인간의 자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문턱이다(레비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지). 라캉은 바로 이것을 통해 무의식은 형성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어린아이의 발달과정에 오이디푸스 기라는 시기를 설정하며, 그것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관계. 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이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의 모든 것이 되고자 하며, 아이는 어머니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인 남근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아이는 상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어머니와의 상상적인 이자관계 속에 존재한다.
둘째, 오이디푸스를 통한 상징계로의 진입.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 아버지가 개입하고 아버지는 아이에게 거세위협을 하고 아이를 어머니와 분리시킨다. 아이의 어머니의 남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런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욕망은 의식으로 표면에 떠오르지 못하고,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독립한다. 그리고 더 이상 어머니의 남근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상징적인 거세가 일어난 것이다.
셋째, 그러나 남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표면에 떠오르진 못한다해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아이는 이제 어머니가 인정하는 남근인 아버지에 대해 동일시를 하게 된다.
라캉은 욕망을 결핍으로 정의한다. 욕망은 무의식에 갇히지만 결코 소멸하지 않으며, 반대로 금지된 것을 대신하는 다른 대상에 대한 욕망이 발생한다. '거세가 결정됨으로써 결핍이 발생하고, 이 결핍을 통해서 욕망이 발생한다'
여기서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그리고 타자도 존재하지 않고 '타자'는 개별 주체의 구상물이다. 거세된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의 대상으로서 인정을 받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욕망'이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의 대상이란 사실 근원적 결핍으로 인해 발생하는 욕망을 대신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근원적 결핍의 기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주체 (a)는 근원적 기표인 동시에, 그것을 메우려는, 그러나 결코 메울 수 없는 욕망의 기표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욕망의 기표 역시 상징적 질서가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만 표시되고 선택될 수 있다. 따라서 욕망은 결코 남근이라는 근원적인 결핍을 메울 수 없고 이 욕망의 대상은 영원히 머물 지점을 찾지 못한다. 오로지 치환만이 일어날 뿐이다. 때문에 욕망은 충족될 수 없고 욕망에는 끝이 없다.
무수한 기표들의 의미망이 존재하는 실재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망하지만, 그 것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우리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욕망을 행할 뿐이다.
'나'의 '리얼'은 상징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의미작용 속에서 살아갈 때는 나의 존재(진짜)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다. 따라서 그 존재는 '무'다. '진실'은 비일관적 / 모순된 '나'와 '세계'이다. 근데 그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the Other'이고, 이 것이 나의 판타지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분열된 점을 메꾸어 주는 것이 'the Other'이지만 그 것은 '나'가 만든 허구에 불고하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모순된 존재(결핍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결코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타자를 공격하는 주체가 되거나,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결국 결핍되고 모순된 '나'와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길은 내가 모순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가능하며 그것은 '나'와 '타자'와의 성숙된 관계를 매개할 수 있다.
라캉은 바로 근대적 주체가 설정한 자기 이기적인 인간, 자기 만족적 인간이 불러일으킨 잘못된 행위들 또는 사회체제(예를들어 파시즘, 나치즘)등을 비판한 것과도 같다. 근대적 주체는 존재하지 않고, 완벽한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말을 한다.
■참고 도서
탈현대 사회사상의 궤적 한국 산업사회 연구회 편, 새길
현대 비판사회이론의 흐름 김호기 엮음, 한울
합리론 F. 코플스턴, 서광사
철학과 굴뚝 청소부 이진경, 새길
첫댓글 탈현대 사회사상의 궤적, 이란 책이 이해하기 쉽더군요... 라캉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학자임에는 틀림이 없네요. 위 글은 요약,발췌의 정리에 불과합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