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먹은 봇짐장사가 군용차에 치여
증언자 : 전황금(남)
생년월일 : 1928.(당시 나이 52세)
직 업 : 봇짐장수(현재 봇짐장수)
조사일시 : 1988. 11
개 요
전황금 씨는 5월 21일 돌고개 부근에서 길을 건너다 후진하는 군용 트럭에 다리를 치었다. 적십자병원에 입원해 3개월 정도 치료받았으나 현재도 다리를 저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서러운 봇짐장수 생활
나는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에도 집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형제라고는 누나 한 명이 있는데, 누나도 일찍 시집을 가서 지금은 담양에서 살고 있다.
열서너 살 때부터 방림동에 있는 부자집에서 농사를 지어주면서 지냈다. 그 집에서 살던 중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소가 끄는 구루마에다 나락을 가득 싣고 가다가 수피아여고 부근의 내리막길에서 고삐가 풀리는 바람에 소가 마구 뛰어가 버렸다. 나는 소를 잡으러 달려가다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구루마에 치어 골반뼈를 다친 후 지금까지 오른쪽 다리를 똑바로 쓰지 못하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
22살 되던 해에 6·25가 터졌다. 다리를 절며 지팡이에 의지해 사는 나에게도 군대영장이 나왔다. 군산까지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거기에서 불합격판정을 받아 6개월간 영장이 나오지 않는다는 증명서를 받아들고 광주로 돌아왔다. 방림동 그 집에서 몇 년을 더 일하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봇짐장사를 시작했다.
광주가 고향이라 창피한 생각이 들어 광주에서는 장사를 못 하고 시골 5일장에 맞춰 수세미, 소독약, 기타 생활용품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광주 인근 지역으로 장사를 나가면 당일로 되돌아오고, 먼 곳으로 갈 때는 그곳 장터 등지에 있는 떠돌이 봇짐장수들을 위한 하숙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5일장이 서는 곳으로 찾아다니는 일을 되풀이했다. 물건이 잘 팔리면 그 돈으로 밥도 사먹고 방값도 지불했지만, 팔리지 않을 때에는 구걸해서 밥도 얻어먹고 몸만 의지할 곳 이 있으면 아무 데서나 하룻밤을 세우고 다음날 장이 열리는 곳으로 떠나곤 했다.
대나무나 소나무로 깎아서 만든 지팡이를 짚고 한쪽다리를 절면서 봇짐을 등에 지고 다니던 젊은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설움이 복받쳐온다. 봇짐장사를 하더라도 남들은 일찍부터 장가도 가고 아이도 낳고 사니까 지금은 손주들 재롱부리는 것 보면서 마누라가 해주는 밥 먹고 잘산다. 내 팔자는 어떻게 된 것인지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산 죄로 남의 집 머슴살이로 고생고생 하다가 결국 한쪽 다리마저 절룩이는 병신 신세가 되고 보니 젊어서나 늙어서나 시집오겠 다는 여자 하나 없었다. 주위에서도 서둘러주는 사람조차 없어 나이 육십이 되도록 가정이라는 따뜻함을 맛보지 못하고 지금껏 혼자 밥끓여 먹고 살고 있다.
군용 트럭에 치어 다리를 절고
5·18이 일어났던 그해에도 쌍촌동에 월세방을 얻어놓고 등봇짐을 지고 시골로 5일장을 찾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아 살고 있었다. 사고가 나던 5월 21일에는 장사를 나가지 않았다. 광주시내에 난리가 터져서 군인들이 학생들을 다 잡아간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별로 믿어지지 않아서 그날은 공원으로 혼자서 놀러 나갔다.
공원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광주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실감할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집으로 가려고 공원에서 출발하여 돌고개에 도착했을 때 군용 트럭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갔다. 길을 건너는데 앞으로 달려가던 군용 트럭이 갑자기 후진하다가 내 다리를 치어놓고 가버렸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으니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지프차를 탄 학생들이 나를 태워 요한병원에 내려놓고 갔다. 그날 밤 요한병원에서 응급처치만 한 후 다음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갔다. 적십자병원에는 총상환자들이 병실 가득 들끓었다. 나처럼 다리를 다친 사람은 경상환자로 취급되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며칠 동안 응급실에 방치돼 있었다.
여섯 명이 함께 쓰는 병실로 옮겨진 뒤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를 받았다. 나는 고통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쳤다. 어슴푸레 정신으로 들은 의사들의 말은 허벅지의 뼈 2개가 끊어졌는데 맞추기 힘들어서 아마 정상으로 되돌 아오기가 어렵겠다는 내용이었다. 육신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아픔보다 훨씬 진한 절망감에 빠졌다. 성했던 다리 한쪽마저 병신이 된다는 생각이 한없는 절망감을 갖게 했다.
같은 방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총상환자들이었다. 다리나 허리, 어깨, 허벅지에 관통상을 당한 시민들이었는데, 다들 들어올 때는 상처가 험하게 보이더니만 실상은 나보다 먼저 퇴원했다. 당시 동명동 통장을 하던 사람이 우리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자기 집 2층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다리를 맞고 입원했는데 우리 병실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늦게 퇴원했다.
입원한 지 3개월 만인 8월 16일에 퇴원한 후로도 일주일 간격으로 적어도 여섯 번 이상을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하고 약을 받으러 다녔다. 퇴원하기 전에 주민등 록등본을 1부 끊어오라고 하더니 퇴원하던 날 20만 원을 위로금이라고 하면서 줬다.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던 총상환자들에게는 당시 백만 원이나 이백만 원씩의 보상금을 주었다.
부상자회에 가입
금년 1월에 부상자동지회에서 사진 1장과 2만 원의 회비를 지참하고 구시청 옆 어느 가정집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 참석하여 부상자동지회의 회원으로 가입해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곳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8월엔가는 회원들이 5-6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서울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서 시위를 하다가 저지당하자 평민당사로 자리를 옮겨 김대중 씨의 연설을 들은 일도 있다. 올 10월에는 부산에 있는 어떤 협회에서 우리 회원들을 초청해서 그곳 구경을 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부상자회에서는 주로 보상금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한다.
1979년에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왔다. 동네가 너무 외진 곳에 있어 교통이 불편하지만 다른 곳에 비해 방값이 싸기 때문에 참고 산다. 수도가 없어 추운 겨울에도 지팡이를 짚고 공동우물까지 나가서 물을 길어다 밥해 먹고 살면서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로 피눈물이 난다. 이곳에 수도시설을 한 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전에는 이 높은 지대까지 다리를 끌면서 오르락거리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쌍촌동으로 이사한 후 통장을 찾아가 내 생활에 대해 설명하면서 극빈자카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극빈자카드를 발급받아 한 달에 쌀 20킬로그램짜리 1포와 연탄값으로 2만 원의 돈을 동사무소에 가서 받는다. 그러나 이것도 못 해 먹을 노릇이다. 해마다 큰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진단서를 끊어다 제출해야만 하고, 다달이 쌀하고 2만 원의 배급을 주면서 내가 봇짐장사라도 나가면 "활동할 수 있으면서 배급받아 먹는다"고 손가락질한다. 생각하면 치사하지만 그래도 먹고살기가 힘드니까 꾹 참고 받는다. 조금이라도 몸이 성할 때 반찬값이라도 벌어야 살지 쌀만 먹고살 수는 없는데도 유별나게 생색을 낸다. 올해도 뻔히 다리 절룩거리며 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진단서를 가져오라 해서 하도 화가 치밀어 작년에 찍은 엑스레이와 진단서를 가져다 제출했다.
올해 9월 16일날 시청에서 보상금 관계로 연락이 와서 광주은행에다 통장을 만들었는데, 정해진 날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시청으로 가봤다. 그곳은 나와 같은 용건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회의중이라고 하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누군가가 나와서 다시 광주은행으로 가보라고 했다. 호남대학 근처에 있는 광주은행으로 갔더니 3백만 원을 줬다.
다달이 일정액의 보상금이 나왔으면
날씨가 추워지면 차에 치인 다리의 상처부위가 너무나 시리고 아파서 장사하러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쉰다. 춥지 않은 날이라 해도 요즘은 힘에 겨워 현지에서 자지 않고 당일날 되돌아온다. 장사를 나가면 하루에 못 해도 만 원씩은 벌어 오는데 나이가 먹을수록 건강이 나빠져서 지금은 자주 나갈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몸이 성할 때 부지런히 벌어서 보상금으로 받은 돈과 합쳐서 전세방으로 이사하는 것이 소망인데 쉽지가 않다. 전세방이라도 하나 생기게 되면 혼자서 살기 지긋지긋하니까 아플 때 물이라도 떠주고 죽이라도 끓여줄 사람 있으면 데려다 같이 살고 싶다.
5·18 때 다쳐서 이렇게 다리 병신된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지만 내가 복이 없어서 당한 것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억울한 심정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일단 접어두고 산다. 전두환 일가는 물도 먹이지 말고 굶겨죽여서 광주시내를 끌고 다녀야 분이 풀리겠다. 평생 다리 병신을 만들어놓고 기껏 3백만 원 던져주고, 그것이 어찌 보상금이 될 수 있겠는가! 앞으로는 다리야 이미 병신 됐으니 하는 수 없고 급수를 나눠서 다달이 일정액의 보상금을 주면 아픈 다리를 이끌고 무리하면서까지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
5·18 당시 다친 다리는 뼈가 비뚤어졌기 때문에 다리를 절고 또 무척 아프지만 요즘은 그 상처로 인해 병원에 가지는 않는다. 당시 다친 왼쪽 다리는 도저히 고칠 수 없으니까 그냥 두고라도 어렸을때 다친 오른 다리라도 고쳐서 양반 다리 하고 앉아보는 것이 소원이다. 보상금이라도 타게 되면 내년쯤에 수술을 해서 절뚝거리지 않고 걸어봐야겠다.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