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4 강 - 宣詔品- 2
簡이 曰, 師說不生不滅이 何異外道니이까 師曰, 外道所說不生不滅者는 將滅止生하고 以生顯滅이라 滅猶不滅이요 生說不生이어니와 我說不生不滅者는 本自無生이라 今亦不滅이니 所以不同外道니라 汝若欲知心要인댄 但一切善惡에 都無思量하면 自然得入淸淨心體하야 湛然常寂하되 妙用이 恒沙하리라
簡이 蒙指敎하고 豁然大悟하야 禮師歸闕하야 表秦師語한대 其年九月三日에 有詔, 獎諭師曰, 師辭老疾하사 爲朕修道하시니 國之福田이라 師若淨名의 托疾毘耶로 闡揚大乘하야 傳諸佛心하고 談不二法하사 薛簡이 傳師指授如來知見하니 朕이 積善餘慶과 宿種善根으로 値師出世하야 頓悟上乘일새 感荷師恩하야 頂戴無己하나이다하시고 幷奉磨衲袈裟及水晶鉢하고 勅韶州刺使하야 修飾寺宇하야 賜師舊居하고 爲國恩寺라하다
***********************************************************
설간 이라는 사람이 왕의 심부름꾼으로 와서, 그 때 측천무후하고 중종. 중종이 있어봤자 측천무후의 지시를 받고, 겨우 그저 형식적인 왕 노릇을 하던 때인데, 어쨌든 두 분의 이름으로 스님을 청 했는데, 육조 혜능대사를 왕궁으로 청해서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하는 내용과, 또 병을 핑계 삼아 안 가고, 몇 마디 말씀만 전하는 과정들. 그런 과정에서 설간 이라는 사람이 특사로 심부름을 와서 육조스님과 나누는 대화지요.
不生不滅(불생불멸)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상당히 중요한 불교의 대승교리.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가 지난 시간에 있었습니다. “大乘見解(대승견해)가 뭐냐?” 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대승견해” 라는 것은, 明(명)과 無明(무명)을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성품을 了達(요달)해서 잘 알기 때문에 둘로 보지 않는다. 둘 아닌 것. 그것이 진짜 참다운 성품이다. “실다운 성품.” “참다운 성품.” 이렇게 해서 대승불교 쪽에서는 “眞如(진여)”라고 하든지, “實性(실성)”이라고 하든지, 여기 경전의 말씀처럼 “性品(성품)”이라 하든지, “一心(일심)”이라고 하든지, “如來藏(여래장)”이라고 하든지, 그런 표현들을 하는 경우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조스님 말씀처럼 그런 것들이, 어떤 사물이 일정한 장소에 고정되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상당히 많은데,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대승불교의 바람직한 견해라는 것은, 특히 다른 사물도 똑 같지만, 특히 自性(자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小乘(소승)들의 비난을 받지를 않는데요.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一心”이 되었든 “眞性”이 됐든 “性品”이든, “眞如”든 “佛性”이든 “如來藏”이든 “菩提든 간에, 그것은 결국은 한 가지를 두고 하는 소리인데, 그것이 어떤 사물이 일정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있는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그 활동은 아주 정말 광범위 하고, 너무 활발발 하게 활동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있는 것은 또 아니라고요. 없으면서 그런 활동을 한다. 또 활동을 하되, 없는 것으로 상반되게 동시에 보는 것. 상반된 견해를 갖고 동시에 보는 것이,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바른 견해입니다.
그것이 “中道正見(중도정견)”이라고 몇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봐야 우리 일심을 제대로 보는 겁니다. 우리 일심이... 특히 禪門(선문)에는 “한 물건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꼬리도 없고 머리도 없고, 이런 식으로 쭉 설명을 해요. 그렇게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또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없다는 소리를 쭉 하면서도 어딘가 그래도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라.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 고 해서 一眞心(일진심) 한 마음의 존재에 대해서 확실하게 있는 것으로 설명한 그런 경향이 많다고요 보면...
면밀히 살피지 아니 하면 우리 한 마음이 확실하게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되어 있어요 설명이... 잘 읽어 보면 아니지만, 보통 우리가 대충 이해하면 “한 물건이 여기 있다.” 해서 오로지 그 한 물건에 대한 설명과 칭찬을 나열해 놓기가 일수거든요. 그래서 그런 경향으로 해서 있는 것으로 생각 하는데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요. 그렇다고 없는 거냐 하면 없는 것은 더욱 아니고요. 그래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하는 이런 세속적인 논리로는 말 같지 않은 말이지만, 깨달음의 안목으로 본 존재의 실상 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렇게 있는 겁니다.
사실은 그렇게 있는 것이지, 확실하게 없다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요. 아무것도 없고... 확실하게 있다는 것도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안목으로 본 어떤 모든 삼라만상. 우리 일심은 말할 것도 없고, 진여. 불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 삼라만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의 실상 이라고 하는 것. 바로 그 원칙이 있고, 불교도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되고, 일심의 문제도 그렇게 이해해야 되고 그렇습니다.
여기에도 보면, 그런 내용들이 있어서 중언부언 말씀을 드렸는데요. 다시 정리하면 그런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남방불교에서 緣起(연기). 空(공)과 緣起. 無我(무아). 이런 것들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승불교의 여래장의 존재. 진심의 존재 문제를 아주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여래장이라 했던 진심이라 했던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고 하는 그 이해만 가지고 비판을 하는데 그건 잘 모르고 비판. 뭐 탓 할 것은 아니지만, 잘못 이해하면 그런 비판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불교신문 지상을 통해서 더러 보셨겠지만, “금강경 결제”라 해서 남방불교를 공부해온 사람이 짚어 놓은데 보니까, 잘못 이해하는 것을 가지고 비판을 했더라고요.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비판을 해놓으면 참 거 할 말이 없지요. 예를 들어 불자들은 우상숭배도 아니 하는데, 우상숭배라고 설정을 해놓고 비판을 해놓으면 그걸 누가 말하겠어요. 어떻게 그걸 감당 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했더라고요 보니까... 교리상의 아주 큰 오류인데...
중도적으로 일심을 보는 것이지 꼭 어느 곳에 고정된 어떤 장소에 존재 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불교공부 좀 한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보는냥 해놓고 그것을 비판하는 그런 경향이 겨울에 나온 신문들 중에서 여러 번 있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우상숭배를 전혀 아니 하는데, “우상숭배 한다.”고 마음대로 정해놓고서 그걸 다시 비판하는 그런 식이 됐더라고요 보니까... 그래서 다른 어떤 사물을 보는 안목도 중도적으로 봐야 되고, 일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더 중도적인 소견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簡(간)이 曰(왈) 師說不生不滅(사설불생불멸)이 何異外道(하이외도)니이까→ 스님께서. 육조스님께서 설명 하시는 “不生不滅”은 외도들 하고 어떻게 다르냐? 불교 아닌 종교단체를 흔히 “外道”라고 불교에서는 그래요. “불교 밖의 도다.” 그렇게 봅니다.
師曰(사왈) 外道所說不生不滅者(외도소설불생불멸자)는→ 외도들이 말하는 “不生不滅”은 將滅止生(장멸지생)→ “滅” 소멸한 것을 갖고서 생을 그치게 한다. 그리고 또 以生顯滅(이생현멸)이라→ 생을 갖고도 또 멸 을 나타낸다. 그러면 멸 을 갖고 생을 멈춘다니까 이것도 역시 멸이고, 멸 을 갖고 멸 을 나타내는 것이 되지요. 또 생을 갖고서 또 멸 을 나타내는 것이 되고요. 생을 앞에는 멈춘다니까 멸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생으로서 멸 을 나타낸다고 하니까, 멸도 나타낸다고 표현했기 때문에 멸도 생하게 하는 것이지요. 멸도 있다고 만드는 것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모순이 많다는 것이지요. 말 자체에... 그래서
滅猶不滅(멸유불멸)이라→ 멸한다고 하면서 멸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고, 生說不生(생설불생)이라→ 생을 말 한다고 하지만, “不生”을 말하는 것이지요. 생을 “不生” 설명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안 맞다.”
我說不生不滅者(아설불생불멸자)는→ 내가 말하는 “不生不滅”이라는 것은, 本自無生(본자무생)이라→ 본래 “無生” 이라는 것이지요. 本來(본래)... “不生不滅”이라. 본래 “不生” 이고요. 생겼다고 하지만 본래 그것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멸할 것도 없는. 근본적으로 속성이 그렇게 돼있다. 모든 존재의 속성이 본래 “不生不滅”로 돼있다. 이것이 육조스님의 견해지요.
今亦不滅(금역불멸)이니→ 지금도 또한. 현재. 본래도 “不滅”이고, 지금 까지도 “不滅”이다 이겁니다. 그것이 “不生不滅”의 도리다. 所以不同外道(소이부동외도)니라→ 그러기 때문에 외도들과는 같지 않다. 汝若欲知心要(여약욕지심요)인댄→ 그대가 만약 “心要”를 알고자 할진댄, “心要”라는 말을 조사스님들은 잘 써요.
淸凉國師(청량국사)도 당나라 혜종 땐가 “心要法文(심요법문)”을 한 글이 남아 있는데요. 참 간단명료하고, 제목이 “心要”아닙니까? 마음이라고 해도 그렇지만 또 마음에 대한 요점. 참 요긴한 해석을 우리가 “心要”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이 “心要”라는 말을 써서, 대승불교의 핵심. 또는 선불교의 핵심을 이해하는 글이라든지 법회라든지, 그런 것이 많습니다. 보면 관리들이 선사들을 찾아와서 “心要”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마음의 요점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그대가 만약 “心要”를 알고자 할진댄, 但一切善惡(단일체선악)에 都無思量(도무사량)하라→ 一切善惡에 있어서 모두 다 생각하지 말라. 맨 처음에 육조스님의 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육조스님이 밤에 법을 이어 받아서, 가사하고 발우를 갖고 도망을 갔을 때, 도명상좌가 쫓아와서, 장군 출신인데 그 사람이 걸음이 빠르니까 뛰어와서 육조스님을 쫓아와서 발견하게 되지요. 그래 두 사람이 만나서 나중에 법력으로, 그 바위 위에다 얹어놓은 발우를 들려고 해도 붙어서 안 떨어지니까, 그 힘센 장사가 떼려고 해도 안 떨어지니까, 마음을 돌려서 내가 법을 구하려고 왔지, 의발을 찾으려고 온 것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법을 청하지요. 그랬을 때 육조스님의 첫 법문이지요.
첫 법문이 [不思善(불사선) 不思惡(불사악) 하라.]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 그대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다. 이것하고 똑 같은 법문입니다. 一切善惡에 있어서 모두 사량하지 아니하면, 선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것. 선과 악의 어떤 치우친 생각을 떠나 있을 때,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自然得入淸淨心體(자연득입청정심체)라→ 자연히 “淸淨心體”에 들어가게 된다. “淸淨心”이라는 것은 텅 빈 마음입니다. 우리의 좋다 나쁘다. 선이다 악이다. 이런 찌꺼기가 전혀 우리 마음에 남아있지 않은. 우리 나름의 어떤 가치판단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전혀 끼어있지 않은 마음상태. 그것이 “淸淨心體”지요. 그러니 但一切善惡(단일체선악)에 都無思量(도무사량) 해야만 그것이 “淸淨心體”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뜻이지요. 표현을 들어간다고 했지만, 밖에서 방으로 들어가듯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湛然常寂(담연상적)하되→ 그리되면 그 “淸淨心體”는 맑고, 늘 고요하다. 이것이지요. 맑고, 늘 고요하면서도 아주 大器大用(대기대용)입니다. 큰 작용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면서 妙用恒沙(묘용항사)라 그랬지요. “湛然常寂”은 없는 상태지요 사실은... 없는 상태는 우리 마음의 속성입니다.
妙用恒沙(묘용항사)라→ 묘용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 이 시간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 작용이 있었습니까? 보고 듣고 뭘 기억해내고, 온갖 설계하고 책을 읽고, 사람과 말하고 할 때, 한 번도 착오 없이 그대로 우리는 작용해 왔습니다. 그것을 “妙用”이라고 그래요. 미묘한 작용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다. 우리가 하루에 써 먹은 것만 해도, “恒沙”입니다.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아요. 우리 써 먹은 것만 해도요. 그렇게 많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본체는 어떻다고요? 湛然常寂(담연상적)이라. 그러니 우리 마음은 양면이 있다고요.
그래서 있다고도 못하고 “湛然常寂”한 입장에서는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妙用恒沙(묘용항사)”라고 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없다고도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걸 동시에, 이런 상반된 속성을 동시에 보고, 거기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中道正見(중도정견)입니다. “중도적인 바른 견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湛然常寂”은 우리 마음이 텅 빈 입장. “妙用恒沙”는 우리 마음이 꽉 차서 그야말로 아주 부단한 작용을 일으키는 그런 입장. 그것을 이렇게 두 가지로 표현 했는데, 아주 짧은 글자 여덟 자이지만, 표현이 참 잘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텅 빈. 그러면서 항상 고요하고, 고요하다 보니까 “妙用” 작용하는 것이지, 안에 꽉 차있으면 우리가 하루 종일 그렇게 마음껏 쓸 수가 없습니다. 거 참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묘한 것이지요. “妙用恒沙”라.
簡(간)이 蒙指敎(몽지교)하고→ 설간이 그 가르침을 입고, 豁然大悟(활연대오)하야→ 활연히 대오했다. 크게 깨달았다. “豁然大悟” 마음이 확 열렸을 때, 불교에서는 그것을 “豁然大悟”라고 합니다. 크게 깨달음의 상태를 형용한 말이 “豁然”입니다. 시원하게. 크게 깨달았다.
그래서 禮師歸闕(예사귀궐)하야→ 스님에게 예배를 올리고 대궐로 돌아갔다 이것이지요. 그리고 表秦師語(표주사어)라→ 육조스님의 말씀을 표로 적어서 왕에게 올렸지요. 그것이 “表秦”지요. 其年九月三日(기년구월삼일)→ 올린 그 해 9월3일에 다시 조칙을 내려서 有詔(유조)→ 조칙을 두어서 獎諭(장유)→ 스님을, 참 잘하신다고 그렇게 권장하는 입장과, “諭”는 감사해서 이르는 입장. 그런 것들을 다... 그러면서 자기 뜻을 전하기도 하는 그런 내용의 글을 다시 설간 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스님에게 보내는 그런 내용이지요.
師曰(사왈)→ 사에게 가로대, 師辭老疾(사사노질)하사→ (올라오라 하니까 안 가고 설간에게 법문만 해주고 설간이 돌아가서 그 법문을 대신 전해주는 식으로... 그리고 육조스님은 대궐에 나가지를 않고 그랬지요.) 스님께서 늙고 병든 것으로 해서 사양하사,
爲朕修道(위짐수도)하시니→ 짐을 위해서 수도하시니,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까 거기까지 갈거 있소? 나는 당신을 위해서 도나 닦겠소. 하고 그것이 차라리 나라에 홍복이 아니겠소? 하는 그런 뜻으로 못가는 사유를 이야기 했으니까. 왕이 또 짐을 위해서 도를 닦으시니,
國之福田(국지복전)이라→ 스님은 스님대로 나라를 위해서 축원을 하고 기도를 하고, 자기 수행 잘하는 것이 나라에 복이에요. 어디 나가서 참례하고 활동하고, 그것이 꼭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 잘하는 그것이 제대로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칭찬을 하고 또 하시는 말이, 왕이 보낸 편지에 하는 말입니다.
師若淨名(사약정명)의→ 육조스님께서 “淨名” 유마거사지요. 유마거사가 托疾毘耶(탁질비야)→ 병을 稱託(칭탁)을 해서, 병을 핑계로 비야리에서 유마거사가 살던 바이샬리지요. 毘耶離城(비야리성). 유명한 곳입니다. 아쇼카왕 石柱(석주)도 제일 완벽하게 남아있는 데 입니다. 거기에서 유마경이 설해졌다고, 그것을 무대로 유마경을 편찬한 것이지요. 그 내용이 유마거사가 병이 들어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병문안을 보내는데, 그 십대 제자중 한 사람도 나는 유마거사에게 병문안 갈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그 외에 또 보살품이 나오는데 제자품에서 십대제자가 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또 십대제자들보다도 우수다고 하는 보살들을 하나하나 다... 그러면 당신이 가시오. 당신이 가시오 하니까. 유수한 보살들이 한 사람도 선뜻 나서서 가겠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못 가는 이유를 전부 밝히지요. 그런 내용이... 유마경은 참 좋은 경전입니다. 정말 꼭 공부 해볼만한 그런 내용의 경전인데요. 그 왜 못 가느냐? 부처님이 십대제자 하나하나에게 물어요.
처음에 舍利弗(사리불) 보고 가라고 했거든요. 사리불은 참 뛰어난 제자 아닙니까? 정말 훌륭한 제자거든요. 그 사리불 보고 처음에 가라고 하니까, 사리불은 못 간다고 발뺌을 하면서 하는 말이, 제가 그전에 坐禪(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유마거사가 지나가다가 좌선 하는 제 모습을 보고 좌선에 대해서 저에게 묻고, 저는 거기에 대해서 답 하다가 제가 유마거사에게 혼이 난적이 있습니다. 이 좌선의 문제에 대해서 유마거사가 참 똑 떨어지게 알고 있는데, 저는 그때 감동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유마거사라면 겁이 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사리불은 못 간다 그러니까 그럼 目連尊者(목련존자)보고 그럼 자네가 한 번 가 보게 그러니까, 목련존자도 아이고부처님. 저도 못 갑니다. 유마거사에게 어쭙잖게 부처님 심부름으로 병문안 갔다가, 옛날에 제가 혼이 나듯이 또 혼이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저는 도저히 못갑니다. 왜 못가느냐고 하니까,
제가 그전에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유마거사가 지나가다가 설법 소리를 듣고는, 설법은 그런 것이 아니야. 설법은 이런이런 것이야 하고, 저에게다 대고 설법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그때 정말 많이 깨우친 바도 있고, 유마거사에게 배운 점도 많지만, 창피 당한 것을 생각하면 유마거사라면 오금이 저립니다. 하는 그런 표현을 한다고요.
그러니까 할 수없이 迦葉尊者(가섭존자) 보고 가라고 그래요. 가섭존자에게 가라고 하니까 가섭존자도 자기도 못 간다는 겁니다. 왜 못 가느냐? 저는 평소에 걸식을 하는데, 제 딴에는 가난한 사람들 복 지으라고 가난한 집에만 다니면서 걸식을 하다가, 아이, 부처님 제자가 돼가지고 왜 가난한 집에만 다니면서 걸식을 하느냐? 평등하게 해야지. 이렇게 해서 한참 설교를 들은 적이 있어서 저는 도저히 유마거사라면 겁이 납니다.
또 須菩提(수보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수보리도 걸식 문제로 유마거사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거든요. 수보리는 부잣집만 다니면서 걸식을 했거든요. 그것도 이치에 안 맞고, 가난한 집만 다녀도 이치에 안 맞고... 자기들 나름대로는 다 이유가 있지요. 가난한 집만 다닌 것은 복 지어 주려고 했고, 수보리처럼 부잣집만 다닌 것은, 가난한 집에는 자기들 먹을 것도 없는데, 그래도 좀 밥술이나 먹는 집에서 걸식을 해야지 생각을 한 것이, 유마거사에게는 크게 잘못된 입장으로 비춰진 것이지요. 그래서... 어쨌거나 이 두 분이 걸식 문제로 혼이 났어요. 그 다음에 다섯 번째
富樓那(부루나)보고 가라고 그래요. 부루나 說法第一(설법제일) 아닙니까? 부처님 제자 중에서 설법제일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설법을 하다가 또 역시 유마거사에게 들킨 겁니다. 그래 유마거사가 설법 소리를 가만히 듣고는 당치도 않은 설법을 하고 있으니까 부루나에게 설법이란 것이 그런게 아니야 하고는 아주 뛰어난 설법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당한 적이 있으니까 부루나도 못 간다. 그 다음에
迦旃延(가전연), 가전연은 論議第一(논의제일)이라 해서 어떤 설법의 주제를 놓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푸는 겁니다. 푸는 것을 제일 잘 한다고 그래요. 논의제일! 요즘 같으면 논강이라고나 할까? 연설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아주 뛰어나는데 그런 일을 하다가 또 유마거사를 만나서 혼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가전연도 못 간다.
阿那律(아나율)은 天眼第一(천안제일)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당신은 천안이 그렇게 뛰어나다는데 얼마나 보시오? 유마거사가 물었어요. 그래 자기가 보는 것은 다 설명을 했다고요. 나는 이 정도로 천안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니까. 유마거사는 천안이 그 보다 백배 천배 뛰어나거든요? 그래서 혼난 적이 있고, 그래서 아나율도 못 간다.
優波離(우바리)는 持戒第一(지계제일) 아닙니까? 계율이 아주 청정 하거든요. 당신은 내가 그 전에 들었는데, 증도가에도 나오지요. 有二比丘犯淫殺(유이비구범음살) 波離螢光增罪結(파리형광증죄결)이라고... 두 비구가 한 사람은 음행을 범하고, 한 사람은 살인을 범했다고요. 그래서 우바리존자 한테 와서 律師(율사)이니까요.
거기 와서 참회를 드렸는데, 너희는 이제 不通懺悔(불통참회)다. 참회 도대체 안 된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완전히 逐出(축출) 당해서 불교로부터 떠나야 된다고 외곬으로 이야기 해준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그러면 마지막으로 부처님이나 다를 바 없는 유마거사에게 한번 가 보자 해서는 유마거사에게 가서 이야기를 하니까 維摩大士頓除疑(유마대사돈제의) 猶如赫日銷霜雪(유여혁일소상설)이라.
유마거사가 한 순간에 그 의혹을 싹 풀어준 것이 猶如赫日銷霜雪이라. 마치 아주 뜨거운 태양이 서리나 눈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는 것 같이, 그렇게 마음에 품었던 어떤 죄책감이랄까 이것을 삭 풀어준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계율에 대해서도 안목이 도대체 게임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유마거사라면 겁이 난다. 도저히 말만 들어도 지금 발이 안 떨어진다고, 이런 정도로 됐어요.
그 다음에 부처님아들 라훌라지요. 라훌라 보고 그럼 네가 가라 그러니까 아이, 부처님. 말씀도 마십시오. 저는 부처님 따라, 부처님 좋아서 출가 했다가, 니 뭣 때문에 출가 했느냐? 출가하면 그 출가에 대한 공덕이 어떤거냐? 이런 것을 한번 유마거사가 물어서 제가 혼이 난 적이 있어서, 유마거사라면 그만 겁이 나서 도저히 유마거사 앞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라훌라에게는 출가의 문제에 대해서, 그래서 불교의 중요한 문제를 그 제자들을 등장시켜 가면서 하나하나 아주 대승적인 안목으로 설파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뭐 꼭 그 제자들 하고의 관계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불교의 중요한 어떤 수행 이라든지, 교리라든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정말 대승의 안목으로 이렇다는 것을 천명하는 그런 내용이지요. 그 다음에
제일 마지막에 阿難尊者(아난존자)지요. 제자 품 에서는 아난존자가... 그럼 아난존자. 니라도 가라고 그러니까, 아이고 부처님. 저도 못갑니다. 왜 못 가느냐? 제가 그 전에 부처님 병이 나셔서 제가 侍者(시자)인데, 우유를 좀 얻어서 부처님께 먹여서 부처님 병을 간호 하려고, 우유를 탁발해 오다가 유마거사를 만나서는, 혼난 적이 있습니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유마경을 보면 참 아주, 정말 아주 극적인 그런 경전으로서는 제일이지요. 그리고는 그럼 내 제자는 집어치워라. 못가면... 그 다음에는 유명한 보살들을 등장시켜서 보살들을 통해서도 역시 그런 유명한 불교의 문제들을, 아주 중요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는 그런 이야기지요.
결국은 병이라고 하는 것이, 보살로서 병이 왜 나느냐? “중생이 아픔으로 보살이 아프다.” 하는 아주 유명한 말이지요. 어식에 평등하면 어법에 평등하다. 먹는 문제에 평등해야 법에 평등한 것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라든지. 아주 명구가 많습니다 유마경에는... 육신이 허망한 문제라는 것. 파초에 비유를 하기도 하고 별별 이야기가 많아요. 비유는 아주 뭐...
그냥 한 가지 비유를 들면 쫙~ 물 쏟아 붓듯이 나오는 그런 내용이라든지, 결국 궁극에 가서는 不二法門(불이법문). 둘이 아닌 도리를 이야기합니다. 여기도 “불이”가 나오지요. 談不二法(담불이법). 그런 내용으로서. 그런 형식으로 아주 극적인 요소가 너무 뛰어나지요. “유마경”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면서 사이사이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대한 올바른 안목. 수행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일깨워 주는 내용이 유마경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왕이 아주 유마경을 좋아 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 대목을 여기서 한번 빌리지요.
“毘耶(비야)”라고 하는 말은, 바로 유마경이 설해진 장소. “托疾(탁질)”이라고 하는 것은, 유마거사가 병이 나서 위문을 보내게 되는 그런 연유들. 이런 것들을 여기서... 병을 핑계 삼아 비야리에서 闡揚大乘(천양대승)이라→ 대승의 이치를 “闡揚” 하며 또 傳諸佛心(전제불심)이라→ “諸佛”의 마음을 전하고,
談不二法(담불이법)이라→ 불이 법 말씀하신. 둘이 아닌 도리. 모든 것이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도리. 일체가 둘로 돼있지요. 상대적으로 되어 있지요. 그러나 또 어떤 한 차원에서 보면,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유마경을 빌어서 육조스님을 그렇게 칭찬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 그렇게 스님이 오시지를 않고, 설간 을 통해서 나에게 그런 좋은 법문을 대신 들려주게 하고서, 그렇게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유마거사가 병을 칭탁하는 것과, 또 스님이 병을 칭탁해서 왕궁에, 대궐에 나오시지 아니 하면서 법문만 전해주는 그런 내용이 그와 같다고, 아주 왕도 매우 유식하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薛簡(설간)이 傳師指授如來知見(전사지수여래지견)하니→ 스님이 指授한. 가르쳐준 “如來知見” 부처님의 지견을 전하니, (그렇게 법문을 전했거든요.) 설간이 그렇게 나한테 전해주니 朕(짐)이 積善餘慶(적선여경)과 宿種善根(숙종선근)으로→ 積善餘慶. 선을 쌓은 여벌의 경사. 나머지의 경사. 그런데 그 선한 일 그 자체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왕 노릇을 하고, 자기 나름의 좋은 일을 하는데, 거기서 선을 많이 쌓는 그 일이 또, 말하자면 보너스로 돌아오는 그런 경사스런 일입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餘慶”이란 말은요.
그리고 “宿種” 숙세에 선근을 심은 것으로서, 値師出世(치사출세)하야→ 스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만나게 됐다. 육조스님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가 積善餘慶과 宿種善根으로 스님을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頓悟上乘(돈오상승)이라→ 上乘. 상승의 이치를 몰록 깨달았음일새. 感荷師恩(감하사은)하야→ 스님의 은혜를 느끼고 짊어져서 頂戴無己(정대무이)하나이다→ 이마에 받들기를 끝날 줄을 모르겠습니다. 끝낼 수가 없습니다. 끝없이 이마에 받든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己= 기 가아니고 “이”라고 해야 되지요. 말이자 “無己(무이)”. 그렇게 하시고 그리고는
幷奉(병봉)→ 아울러서 받들었다. 무엇을? 磨衲袈裟(마납가사)→ 이것은 왕궁에서 구할 수 있는 아주 최고의 천을 사지고, 가사를 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及水晶鉢(급수정발)→ 수정으로 발우를 만들었어요. 보통 나무 발우거든요. 나무 발우인데 좋은 수정을 구해서, 육조스님이 쓸 수 있도록 발우떼를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서 육조스님께 은혜로서 磨衲袈裟하고 水晶鉢을 보내고,
勅韶州刺使(칙소주자사)→ 소주 자사에게 칙명을 내려서, 修飾寺宇(수식사우)라→ 절을 수리할 것은 수리하고, 더 지어야할 것은 더 짓고 그렇게 해서는, 賜師舊居(사사구거)라→ 스님이 오래도록 살도록, 그전에 살던 곳을 그렇게 잘 수리하고 새로 짓고, 절을 전부 보수를 일신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스님에게 드리고 이름을, 爲國恩寺(위국은사)라 하다→ 국은사 라고 했다.
나라에서 육조스님에게 은혜를 갚는. 은혜를 보답하는 절이다. 그래서 報國寺(보국사). 報恩寺(보은사). 또 우리 조선시대에 서울에 있던 사찰들. 고려말에 있던 사찰들. 뭐지요? 興國寺(흥국사). 報國寺(보국사). 이처럼 국자가 들어간 것은 전부... 나라에 운이 터지라고 開運寺(개운사). 나라를 흥왕 시키라고 興國寺(흥국사). 나라에 은혜를 보답 한다고 또는 報國寺(보국사). 이런 이름들이 서울 주변에는 많아요. 지방에는 그런 이름 하나도 없는데, 서울 주변에는 어쨌든 그런 이름들이 많습니다. 대개 그래서 內佛外儒(내불외유)라. 왕궁 쪽에서는 불교를 신앙하고, 밖으로는 유교를 신앙하는 그런 풍조가 있었지요.
어쨌든 선지식이 자기가 쌓은 어떤 공덕과 자기가 터득한 법을 제대로 펴려면 다섯 가지 인연이 있어야 된다고 그래요. 다섯 가지 인연이 있어야 된다는 그 가운데 하나가 外護緣(외호연)입니다. 외호연. 밖으로 이렇게 도와줘야 됩니다. 보호를 해줘야 됩니다. 이렇게 왕이 보호 해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 최소한도 도지사 정도라도 지켜주고 보호 해주고, 행정적으로 봐 줘야지 안 그러면, 절 하나라도 제대로 못 지어요. 제대로 포교를 할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 외호연이 아주 중요한 연입니다.
또 하나는 檀越緣(단월연)이라 해서, 외호만 잘 하면 뭐합니까? 신도가 있어야지요. 신도가 있어야 된다고요. 그러면 관료들이 물론 단월이 될 수도 있지만 대개 외호 쪽이고, 단월은 그래도 재벌가들이 단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단월들이 있어야 된다. 그럼 정치적으로 외호 잘 해주고, 단월들이 막 그냥. 신도들이 시주도 많이 하고, 그래서 절도 번창하고 그러는데, 그 다음에
제자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그래서 衲子緣(납자연)이라 해서 제자들이 또 많이 들어와야 됩니다. 많이 들끓어야 된다고요. 그 다음에 또 土地緣(토지연)이 있어요. 토지연. 어떤 사람이 어느 장소에 와서 일을 좀 하려면, 정말 불사를 좀 제대로 하려면 자기가 그 지역과 토지 인연이 맞아야 됩니다. 이사 가는데도 토지 인연이 맞아야 됩니다. 그것이 안 맞으면 동티가 나요. 함부로 가지지도 않아요 또... 가려고 해도 안 가 져요. 인연이 없으면 안 됩니다.
억지로. 억지로 가도 얼마 못 살아요. 안 맞는데 가 놓으면, 안 좋은 일도 있고 그래요. 토지연이라고 그래요. 옛날 도통한 사람들이 내놓은 말입니다 그것이... 조건이 다섯 가지 조건 土地緣. 그 다음에 제일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 제자들도 많이 들어오고, 토지연도 맞고, 外護緣도 있고, 단월들이 막 시주도 많이 하고 그러는데,
자신이 도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어요. 道緣(도연)이 있어야 됩니다. 본인이 도가 있어야지, 도 없으면... 무슨 큰 그룹이나 같지요. 무슨 주식회사나 그룹이나 똑 같지요. 아무 것도 아니지요. 사람만 들끓고... 무슨 경제적으로 큰 손하고 절만 크면 큰 그룹이지 무슨... 도가 없으면 그런 거나 다를 바 없지요. 그래서 도연이 있어야 된다고요.
그것이 正信(정신)이지요. 중요한 正信. 불교에는 역사가 깊고 또 뛰어난 분들이 이 불교에 몸을 담고, 그냥 빈둥빈둥 노는 것이 아니라, 정말 피나는 노력을 백방으로 경주하고 한 세계가 되다 보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별별 이야기들이 다 있고, 다 짚어 놨어요. 지금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놓은 것이 없느냐? 우리가 못 찾아서 그렇지 전부 다 짚어 놨습니다. 일일이 옳은 조건으로도, 가서 절 짓고 싶다고 함부로 가서 절 짓는 것이 아닙니다. 도가 있어야 절을 짓고, 그 다음에 절 지을 때 다른 여러 가지 조건들도 갖추어야 된다는 내용이 됩니다.
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