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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의 변혁성과 창작 방향
-오늘의 현대시조 이대로 좋은가
김 준
1. 현대시조의 변혁성 문제
시조가 시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현대시조의 발전적 의미에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가 시조이어야 한다는 논리적 부당성은 결국 시조가 갖는 형식상의 특성을 중시하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이 형식상의 특성이란 3장 6구 12음보라는 형태와 운율의 통제를 뜻하는 것으로 분명 자유시와는 구별이 되고, 시조가 자유시의 하위개념으로서가 아닌, 유(類)개념으로서의 상대적 현상에 놓인다. 따라서 현대시조의 변혁성 문제는 형식상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로서 존재할 수 있는 내용상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다각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간혹 양장시조니 절장시조니 하여 형태상의 변혁을 주장하는 경향이 오래전에 있었으나, 현대시조로서의 발전적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현대시조의 발전적 모색은 무엇보다도 시조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정형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그 그릇에 현대시정신을 수용하느냐 하는 창작상의 기법 문제가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주제의 심화, 소재의 광범성 내지 일상성, 시어의 참신성과 함축성, 경이적인 이미지를 통한 문학성을 탐구하는 일이다.
일찌기 가람은 시조의 혁신을 제창하면서 1) 실감실정(實感實情)을 찾자 2)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3) 용어의 수삼(數三) 4) 격조의 변화 5) 연작을 쓰자 6)쓰는 법 읽는 법을 주장하여 시조의 발전적 혁신을 꾀하였다. 이것은 시조가 시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실제 창작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인해 주고 있다. 일찌기 노산은 양장시조의 제창을, 이명길은 절장시조의 제창을 주장한 바 있다. 실제 이들의 주장이 논리적 제시를 통해 제창되고 있으나, 그 논리 자체가 타당성이 결여되고 즉흥적 발상에서 기인된 결과로 평가된다.
우선 양장시조 제창의 이론적 근거에서 본 문제점을 살펴보자. 노산은 양장시조 제창의 동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시조 창작에 있어서 어느 때는 3장의 형식도 생각을 담기에는 오히려 모자라지만 다시 어느 때는 3장도 도리어 긴 때가 있다. 옛사람들은 보통 형식보다 좀 더 여유있는 이른바 엇시조니 사설시조니 하는 긴 형식도 마련해 보았다. 아니 시조의 형식유래를 고려가사에서 발전해 진 것으로 본다면 긴 형식의 것이 차차 줄어지다가 지금 우리가 말하는 보통 시조의 형식에까지 와서 그쳐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일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미처 이 보통 형식의 시조보다 좀 더 짧은 형식을 구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장한 노산은 양장시조의 제창으로 성삼문의 고시조 <이 몸이 죽어가서 ....>를
다음과 같이 변형시도하고 있다. <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의 초장에 있어서 후구인 <무엇이 될꼬하니>는 전연 불필요한 허사(虛辭)라 할 수 있고, 또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의 중장에서도 전구인 <봉래산 제일봉에>는 불필요한 것으로서 곡진한 맛이 없어 떼어내고 <이 몸이 죽어가서 낙락장송 되었다가> 라는 한 장으로 족한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몸이 죽어가서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변조하여 양장시조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근거에는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엇시조 사설시조의 문제는 양장시조와는 달리 본래의 3장의 형태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한 구 또는 두 구 이상의 음수(또는 잣수,음보)를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二行 (두 줄)으로 되어 있는 양장시조를 주장한다면 4행 5행의 시조도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둘째, 선인들이 3장시조의 형태보다 좀 더 짧은 형식을 구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시조의 형태가 3장이어야 한다는 성립 조건의 필연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본시 동양철학의 기본원리는 우주의 생성과정이 天(.) 地(-) 人(l)의 삼원(三元)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3이라는 숫자는 동양인의 사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시경인 주자의 서(序)에서는 “시는 천지의 운행이 결국 사람의 감정을 감동케 하는데서 지어진다”고 말한 것이나 ,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모음의 제자 원리도 이 삼원을 바탕으로 삼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조의 3장 형식도 분명 동양철학의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라 말할 수가 있다. 즉 천지의 운행에 의한 자연섭리의 현상인 우주의 회전을 (계절의 순환 ,희노애락, 삶과 죽음, 사멸과 재생 등)을 초장 중장으로 삼았으며, 종장에서는 인으로서 상하 수직의 평행선을 유지하면서 마침내 감동되어진 그 감정을 표현하고 있음을 짐작케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시의 기법 그대로 초장 중장이 선경(先景)의 관점에서 종장이 후정(後情)의 위치에 놓이게 됨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셋째, 노산이 고시조의 변조를 통해 제시된 양장시조는 본래 3장으로된 성삼문의 시조보다도 문학성에 있어서나 기법면에서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초장의 후구인 <무엇이 될꼬하니> 는 노산의 지적대로 좀 더 곡진한 맛이 없는 허사가 아니라 분명 여기에는 자아분열을 통한 자의적 세계의 추구라는 의미가 내재하고 있다. 이는 자기와(의지적 자아) 자기 아닌 다른 자아(굴복적자아)와의 갈등과 상극 관계에서 본연의 순수한 자아를 지탱하면서 더 나아가 후세인에 대한 경각심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중장의 전구(前句)인 <봉래산 제일봉에>는 그 어떠한 간신들의 무서운 횡포도 결코 자신의 의지를 꺽을 수 없다는 충신 성삼문의 지조의 극치가 충일된 절규인 동시에 호소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 점 물욕이나 교만도 없이 다만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아로서 정의를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굳은 결의가 시정신으로 표방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논의 할 때 노산이 변조한 양장시조에서 초장 중장을 줄인 초장<이 몸이 죽어가서 낙락장송 되었다가>는 오히려 예술성보다는 설명적 진술로서 교만과 허세가 퍼뜩이고 있다.
다음은 이명길이 제창한 절장시조(종장 1장을 된 시조)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명길은 3장 시조에서 초장 중장을 제외한 종장 한 장만으로 된 이른바 절장시조를 충무공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를 변조하여 제창하고 있다. 그는 제창 동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시조계의 선배이신 노산님께서도 시조의 발전을 위한 나머지 그의 시작(詩作)으로서 양장시조를 읊어 오늘날 어엿이 하나의 위치를 점하고 있거니와 시조가 현대에 처한 위치와 상황과 가치를 답보하는 고전적 굴레가 아니고 ......(중략) 종장의 중요성으로 보아 능히 종장 한 장으로도 초장 중장을 대치 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순신의 고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를 변격적으로 개조하여 <한산섬 수루에 우는 저 호적 시름 더욱 애닯고 >로 절장시조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이 시도하고 있는 이명길은 그 이유를 이순신 장군하면 큰 칼은 절로 따라 온다. 피리나 호가를 심야에 불어 밤을 새운 사적을 찾기 어려우니 밝은 달은 호가(胡茄)에 비추어 없이 하여 혼자 이렇게 추려 본 것이라 하였다.
이미 앞에서 양장시조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으나 3장이라는 시조형태는 그 성립조건이 필연적인 사실에서 기인된 것이며, 또한 문학 장르상에 있어서도 정형시와 자유시를 구별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운동경기 종목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을 어길 땐 그것은 분명히 반칙으로 선언되고 선수로서 실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기 규칙상의 룰이 없다고 할 때, 과연 그런 운동 경기를 가리켜 어떤 종목의 경기 명칭이 성립될 수 없다는 이치와 같은 논리다.
이명길의 변형시도의 발상은 근본적으로 그 출발부터가 무서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서 시의 본질과 창작상의 기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가령 노산이 시도했으니 나도 시도했다는 말이나 종장 한 장만으로도 초장 중장을 대치 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이순신 장군하면 큰 칼은 절로 따라 온다든가 수루나 호가에 비추어 없이하였다는 논리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당혹감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결국 이런 지적들은 시가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되는가의 지극히 초보적인 단계에 드는 문제인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 볼 때 현대시조의 변혁성 문제는 가람의 경우, 본래의 3장을 고수하면서 현대 시정신을 수용하려는 발전적 모색이 시조창작의 기법면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더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현대시조의 발전이 곧 시조형태의 변형에서만이 능사인양 생각한 나머지 논리성이 결여된 제창 이론과 작품 시도는 무의미한 일인 동시에 마땅히 경계되어야 한다.
사설시조의 출현은 귀족문학에서 서민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실학사상의 대두와 함께 나타난 산문문학 형태다. 또한 운문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룩된 수필문학의 효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설시조의 효시를 송강의<장진주사>로 여기고 마치 사설시조가 제한된 시조형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다 폭 넓은 형식으로서의 전환이 시조 발전의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아시다시피 송강의 <장진주사>는 단시조의 형태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음주 후의 도도한 흥취를 그의 작품 <훈민가> 16수와 같은 정제된 형식에 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산문체의 형식을 통해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송강에 이르러서 사설시조의 작품으로는 <장진주사> 한 편만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작품 또한 내용면에서도 문학성의 결여와 함께 시적 성취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장진주사>에 힘을 얻어 실사구시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목적문학의 성격으로서 사설시조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동안 지속되다가 소멸되고 마는데는 필연적인 형태변화의 요인보다는 산문정신이라는 시대상에 따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송강의 <장진주사>와 같은 작품을 비판도 없이 맹목적으로 도입한 점, 정형시조의 이론이나 기본 원칙도 없이 서민층 사회에서 무조건 이것을 답습했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현대시조는 사설시조가 주종을 이룰만치 팽창하여 시조의 발전적 모색의 기수로서 판을 치고 있는 양상이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는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2. 오늘의 현대시조 이대로 좋은가
오늘날 시조문단에는 시조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많은 작품들이 시조의 기본형식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어 진정 우려의 목소리가 드세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무엇보다도 시조의 형식적 변용(한때 양장시조니 절장시조니 하는 시도)이나 운율의 파괴에서만이 보다 시조의 문학성과 현대시정신이 모색되어진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조의 저변확대를 위한 나머지 시조형식에 대한 시인의 올바른 숙련도를 고려하지 않고 등단시키는 추세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시조시인들은 자유시에 접근하려는 자기비하적 경향과 자기나름대로의 시험적인 변형의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시조 아닌 시조로 포장된 자유시가 판을 치고 있는 게 시조문단의 현실이다.
현대에 와서 다른 모든 분야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면서 발전되고 있듯이 우리 시조문학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이 다양한 변모를 띤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모양상은 형식과 운율의 파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제의 심화, 소재의 광범성, 시어의 참신성과 함축성 경이적인 이미지 묘사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창작되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이 중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현상은 표기법의 시각적 효과를 위한 다양화를 들 수가 있다. 과거 대부분 표기 형태인 장을 구별하여 표기하고 있는 장별배행 시조의 표기를 따르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구를 구분하여 표기하는 구별배행의 표기방식, 음보를 구분하여 표기하는 절별배행 표기 방식, 그리고 종장의 첫 구를 독립시켜 표기한다던가 시어나 운율에다 초점을 맞추어 시행을 잡는 경우가 있다. 또한 장과 장 사이를 무시하고 연속해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수(首)의 구별까지도 의식하지 않고 이어서 쓰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시조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많은 작품들이 어떻게 보면 종장 첫 구 3자만은 고수하고 있다. 어떤 시조인은 그 3음절마저도 띄어쓰기로 3음절만 되면 종장 첫 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예컨대 <마당 한 가운데 앉아><섬도 한 십년을 살다보면 >등의 작품이다. 이러한 파격의 작품을 들어 고루하다는 빈축을 일삼고 그들이 오히려 2000년대를 이끌어 갈 시조시인이라 추켜세우는 형세다.
이와 같은 잘못된 풍토가 하루 빨리 바꿔지지 않는 한 시조의 존립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이런 뜻에서 시조 전문지에 특집으로 전재되고 있는 작품 중에서 많은 작품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어 여기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이는 질책이라는 의미에서 보다는 올바른 발전적 모색이라는 큰 뜻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룬다는 솔직한 심정이다.
1>. 시조의 율격에 문제가 있는 작품의 예
금비늘 은비늘 빛살 좋은 봄날 어물전
좌판에 나앉아 호객하는 생선들 틈에서야 비릿한 냄새가 판치는 세상에서야....(생략)....
어렁성저렁성 살아간들 또 어떠하랴
한물간 눈알 초점없는 세상에 어물쩍 눈빛 맞추는 시절에서야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xxx의 “가자미”)
이 작품은 신춘문예당선작으로서의 수준선상에 많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는 사설시조다. 작품의 문학성이나 완성도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고라도, 율격면에서 사설시조라 하더라도, 그 특성은 차치하고 종장의 첫 구 3음절로 고정되는 것이 규칙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 첫 구를 <한물간>으로 볼 경우 둘째 구는<눈알 초점 없는 세상에>가 되어 율격적 호흡이 맞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의 율격적 호흡은 <한물간 눈알/ 초점 없는 세상에>로 된 것이기 때문에 종장 첫째 구가 5음절이 되어 형식을 파괴하고 있다. 또 억지를 부려 <한물간>을 종장 첫 구로 볼 경우 둘째 구는 <눈알>로 2음절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둘째 구를 <눈 알 초점 없는 세상에> 로 보더라도 운율의 격이 맞지 않고 또 종장 셋째 구 <어물쩍 눈빛 맞추는>의 운율도 크게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사설시조라는 이름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종장 처리에 있어서도 율격에 맞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마구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직 사설시조의 장르적 위치와 그 형식에 대한 올바른 정체성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하에서 이제 갓 시인으로 등단하는 가장 화려한 무대에 이러한 파격 일변도의 작품을 내보인다는 것은 자칫 앞으로 자라나는 시조의 새싹들을 오도하고 시조의 정통성을 오염시킬까 적이 염려되기도 한다.
가난한 시인의 마음에 눈 내린다
이상하게 따뜻한 하얀눈이 내린다
추위를 녹이던 어린 소녀는 얼어 죽었다
오늘 이 가난한 시인의 마음에
내리는 눈송이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이리도 따스한 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xx시조 2000년 봄호 xxx시인의 “시인의 마음”)
이 시조는 문학지 2000년 봄호 `140인 대표시인`에 특집으로 게재된 작품인데 내용상 시조라기 보다는 자유시에 가깝다. 자유시에 가깝다는 것은 반드시 이런 식으로 시조가 변형이 되어야 시로서의 시조가 발전한다는 논리를 거부하면서 자유시로 보기도 어렵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물론 시인의 구체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조차 어렵게 하는 내용으로 서술된 작품이다. 시인은 첫째 수 종장을 <추위를/ 녹이던 어린/ 소녀는/ 얼어 죽었다>로 하여 3.5.3.5음절로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의 의미상으로 볼 때 <추위를 녹이던 /어린 소녀는/ 얼어 죽었다> 이루어지기 때문에 율격에 맞지 않고 또 <추위를 /녹이던 /어린소녀는/ 얼어죽었다>로 본다하더라도 율격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 둘째 수 종장의 둘째 구인 <따스한 지>의 표기나 <따스한 지 그> 의 표기도 파격이거나 정격에 맞추기 위하여 억지로 꿰맞추는 형식이 되었다. 이렇듯 정형시인의 시조의 기본형식이나 율격을 모르는 시인들을 가리켜 `새 천년을 여는 오늘의 대표시조시인`으로 추앙하고 있으니 시조문단의 앞날이 걱정스러워 답답할 뿐이다. 이 외에도 종장의 율격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빗금은 편의상 호흡 마디에 따라 갈음한 것임)
◎ 종장 첫 구가 기준음율(3음절)보다 많은 예
- 기인 목은/ 새 고장 찾아 /목마르는 /모습 일래
- 썩지도 못하는/영혼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 남 생각 할/ 겨를 없는/ 급하디 급한 볼 일
- 가고 또 온 /새 천년 품에 /덥석 안긴 이 몸이여
- 기늠키 힘든 /수심을 /거울처럼/밝혀 놓았네
- 잘려야 마땅한 /병든 가지는 /버젓하게 큰 소리친다
- 트라이앵글을/ 치며 /길 떠나고/ 있구나
- 마음 뿐 아닌/ 발길마다 /덩두럿이/ 새기리
신인은 물론이고 상당한 시작 경력을 가진 시조시인들조차 시조의 율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시작을 하고 있는 현실은 진정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2>. 종장 첫 구가 기준 음율 (3음절)보다 적은 예
- 그래,/ 너/ 사람을 움직이는/ 신이라 불러주마
- 아, 찔러/아픈 나날의 / 피흘리던/ 흰 손이여
쉼표의 사용은 작자의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함인데 기준음절 내에서 함부로 쉼표를 사용함으로써 작자 스스로 시조의 약속된 율격을 깨고 있다.
3>. 종장 둘째 구가 5음절보다 적은 예
- 친구여/쓰려거든/ 정말 잡설 대신 시를 쓰자
- 흘러간 / 그 나날이/ 춘궁처럼/ 아려온다
- 우리는/ 살과 살/ 뼈와 뼈/ 남김없이/사루어도
- 거 누구,/교외지도/ 한번/ 같이 안 갈라욧!
- 무수히 / 끓는 극점,/사는 건 / 퍼득거림 이라구요
이 둘째 구는 한 단어로 단숨에 읽어지거나 의미상 휴지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위의 예는 그러하지 못하다.
4>. 기타 시어나 제목을 외국어 그대로 표기한 사례
- “allegro로 흐르네” “dolce 선율 타고” “ forte로 치솟다가”
-제목을 영어로 표기한 사례 "Interism"
이 "Interism"이 무슨 뜻인지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고 작자가 밝히고 있지를 않아 독자를 혼란시킨다. 제목이나 시어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외국어로 할 수도 있겠으나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국문학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이미 관습화된 외래어 든 아직 생소한 오국어든 원어를 쓰되 표기는 우리 글로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은 변화의 시도라기 보다도 우리 시조를 어지럽히는 한 요인이 될 것이다.
오늘의 현대시조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으로 시조전문지의 특집으로 게재된 작품에서 뽑아 논의하였지만, 기타 다른 시조전문지나 개인 시조집에 발표된 작품에서 많이 보아 오는 현상이다. 시조의 기본 형식은 서슴없이 파괴하면서 창작하는 일이 시조의 현대화라고 고집한다면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이러한 파격젹 시도 행위가 우리 시조문단의 장래를 흐리게 한다는 징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정형시조로서의 시조는 운율적 형식이 올바르고 시로서의 정제미가 소홀히 되어서는 발전은 고사하고 존재가치가 소멸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시조는 시이어야 하지만 시는 시조이어야 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깊이 음미해야 할 일이다.
3. 현대시조의 창작 방향
누가 뭐라고 해도 시조는 시조이기 때문에 형식적 제한이 아니라 형식 자체가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것이며 ,형식과 내용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내용이고 내용이 곧 형식이라 말 할 수 있다.
현대시조의 창작 방향을 논할 때 다음과 같은 면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1>.시적인 경이로움과 소재의 일상성
시조가 시이어야 한다는 말은 금후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창작 방향을 단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말은 시조의 율격이나 3장이라는 형태적 정제미 속에 시상이 압축되어 그 단아함을 보여주어야 함을 물론 현대시정신을 표방 할 수 있는 주제의 심화를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조는 주제라는 의미적 요소와 율격이라는 형태적 요소가 적절히 융합되어 시적 경이로움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 만큼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시조의 창작 방향을 논의 할 때
① 소재의 관념성, 폐쇄성에서 탈피하여 일상적, 생활적 소재로 그 취재 범위를 확대하는 일
② 무의미한 3행의 구조나 잣수 맞추기 식의 3.4조의 율격이 아닌, 기복을 통한 효과적인 시상을 위한 3장 구조와 의미의 율격으로 배열하는 일
③ 소재 자체를 주제로 묘사하지 않고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주제를 심화시키는 일이다.
2>. 읽히는 시로서의 변모
읽히는 시로서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연유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꼭 이것이어야 한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① 자유시 쪽에서도 항상 거론되고 있는 일이지만, 정형시인 시조의 경우 시상 전개에 있어서 전체적인 짜임새 있는 조화가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다. 어떤 시상이 포착되었을 때 이를 초.중.종장의 3장 형식 속에 어떻게 도입 전개되고 효과적으로 마무리되는가 하는 제 2차적 공정이 요구되는 단계에 이르는 어려움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② 종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즉물적이고 즉흥적인 안일한 시작 태도에서 벗어나, 사변의 세계에 접근하려는 내용의 심화를 통한 선명한 주제의식의 예술적 탐구 정신을 보여 주는 데 있다.
③시어 선택에 있어서 상징적이고 함축성있는 언어로서 단순히 전달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게 하는 생명체로서의 내적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정서적 기능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적절히 구사하여야 한다.
④ 표기 문제에 있어서 장별배행이나 구별배행의 획일성을 피하고, 구나 절이 지니는 의미나, 운율, 이미지의 기능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시각적, 기복적 표기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3> 시인의 성실성과 감동
시에 있어서 성실성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시인 자신이 자기다운 글을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쓰는 일을 뜻한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새로운 해석, 의미 부여를 통한 주제의 심화, 적절한 시어의 구사 , 상황이나 본질에 따른 정확한 비유, 음수율이나 음성율을 통한 운율의 효과적 배치 등에 있어서 남다른 고심과 노력이 돋보일 때 성실성은 평가 되는 것이다. 시조를 짓는 행위에 있어서 이 성실성은 꼭 써야할 것에 대한 내면세계의 인식에 접근하여 시인이 실제로 생각하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성실성이 소홀히 된 시조에서는 대상에 대한 속성이나 사물이 갖는 일반적인 상태를 즉물적이고 직감적 관점에서 글자 수나 맞추는 식의 시작 태도에 머물고 있다. 즉 성실성이 결여될 때 자기가 실제로 생각하는 것을 형상화하기 보다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는 것을 형상화 하는 것이다.
시조에 있어서 성실성은 무엇보다도 시를 대하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통해 시적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인은 즐거운 감동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단순히 읽는 시조가 아니라, 마땅히 읽어야 하는 작품의 형상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요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작품 발표 무대가 넓어졌고, 시조시인의 인구도 많아 소외되고 외롭지 않지만, 이제야 말로 작품의 양보다 질을 택할 때가 되었다. 월간지나 계간지를 통해 많이 발표되고 있는 작품 가운데서 우리의 눈을 끌고 있는 성실한 의상으로 단장된 옷차림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데 대한 관심이 모아져야 한다.
4. 사실 접근에 머무는 시조에서 탈피
시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확언하게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매슈 아놀드(Matthew Arnord, 1822-1888)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어느 정도 해명이 되어지고 있다고 본다.
“위대한 시인의 우수한 특질은 시적 미와 시적 진실의 법칙에 의하여 정해진 조건 하에 `인간 자연 및 인간 생활레 대하여` 시인이 자기 힘으로 얻은 관념을 취재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삶의 진실이 곧 시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음으로는 왜 시를 쓰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란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세계에 대해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통해 접근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대체로 생명의 근원적인 것에 대한 탐구 정신과 사회적 상황이나 인간의 삶의 진실을 반영하려는 시대정신이 시로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동기 또한 이러한 두가지 측면, 즉 순수심미적 경향과현실적 참여 경향 중 시인 나름대로 대상을 포착하여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구체적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한 편의 시를 놓고 감상할 때, 시인이든 일반 독자든 간에 그 시속에 담겨져 있는 주제에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시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 즐거움을 갖기도 하며, 이미지,리듬, 은유와 같은 시적 기법에 감탄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시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사실적 접근에 머물고마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할 때,시인의 시작 태도는 필연적으로 진지성이 요구되며, 자신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적 진실의 탐구에 전력 투구해야만 한다.
현대시조도 여기에서 예외 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작품 중에는 3장 6구의 형식에다 그저 잣수맞추기에 연연한 나머지, 시적 심리상태인 시정신의 주제가 선명하게 승화되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조시인들을 위한 시조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유시쪽의 평을 받기도 한다. 다행한 일은 많은 시조시인들 중에는 이에 대한 자성에 의해 기성복에 자기 몸을 맞추는 식을 지양하고, 시정신이 시조의 형식을 결정하는 입장에서 시조를 창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5.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착상
우리가 좋은 작품의 여부를 논할 때 시조도 예외없이 무엇을 어떻게 썻느냐를 따져 말한다. 항용 무엇이 강조되면서 어떻게가 소홀히 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도 시조 창작에 있어서 필요하고 좋은 조건일 수는 없다. 결국 무엇이라는 내용의 충실과 어떻게라는 표현기교가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요사이 많은 신인들에 의해 작품의 양상이 새롭게 변모되면서 시조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종래와는 달리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하는 정신의 새로움과 어떻게 쓸것인가에 대한 기법의 새로움을 부단히 모색하는 데서 기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우리 시조는 과거의 시작태도에서 용감하게 벗어나야만 한다. 시조시인 스스로가 무엇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새로움의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시조는 현대시조로서의 중후한 멋을 지니면서 독자들의 마음에 감동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