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표적 궁궐은?
경복궁¹은 조선 제1대 왕인 태조(1335~1408년)의 명에 따라 학자 정도전(1342~1398년)이 설계했지만, 왕위를 놓고 태조의 아들들 사이에서 왕자의 난(亂·난리)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은 좋지 않은 기억이 서려 있는 경복궁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어.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창덕궁을 짓고 그곳에서 왕으로 지낸 대부분의 기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창덕궁은 아름다운 정원인 후원과 함께 아기자기한 멋을 지니고 있어 왕들이 특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경복궁보다 더 오랜 기간 조선의 정식 궁궐 노릇을 했지요.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260년 넘게 버려진 채로 있다가 1868년 제26대 왕 고종(1852~1919년) 때 다시 지어졌습니다. 고종의 아버지로 정권을 잡고 세도 정치로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일으키기 위해 ‘흥선 대원군’²(1820~1898년)이 재건 했지요.
왕의 아버지로 ‘조선의 개혁가’란 평가를 받았지만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거부하는 일명 ‘쇄국정책(鎖國政策)’³을 고집해 조선의 발전을 늦췄다는 비판도 받고 있어요. .
- ▲ 일러스트=나소연 기자 sywithone@chosun.com
장남 두고 ‘열두 살 차남’ 왕으로 앉히다
19세기 중엽, 후기에 접어든 조선은 세도 정치<소년조선일보 2011년 12월 19일자 3면 참조>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관리들은 함부로 매관매직 부정부패를 일삼았지. 세금제도 역시 문란하기 짝이 없어 동학농민군들은 노비제도 철폐와 개혁을 외치며 난을 일으켰어요. 1863년, 철종(제25대 왕·1831~1863년)이 죽자, 이하응(흥선 대원군의 원래 이름)의 둘째 아들 재황⁴(본명은 이명복)이 열두 살 나이로 왕이 됐어요. 그가 바로 고종입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배경엔 흥선군의 치밀한 작전이 있었다고 해. 철종에겐 왕위를 이을 만한 아들이나 형제가 없었어. 이처럼 왕이 아들이나 친형제 없이 죽었을 경우엔 왕실의 친척 중 한 사람을 뽑아 왕위를 잇게 하던 풍습이 있었거든. 철종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흥선군은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헌종(제24대 왕·1827~1849년)의 어머니 신정왕후(조대비·1808~1890년)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해달라고 편지를 썼어. 실제로 영조(제21대 왕·1694∼1776년)의 후손이었던 재황은 왕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췄단다.
당시 세도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일가의 횡포로 종종 서러움을 당했던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제안을 받아들였어. 그리고 재황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지. 그런데 여기서 잠깐, 흥선군은 왜 큰아들이 아닌 둘째에게 왕위를 잇게 했을까? 사실 그의 결정엔 ‘나라를 내 손으로 다스려보고 싶다’는 계획이 숨어 있었단다.
당시 흥선군의 큰아들은 19세로 왕위에 오를 경우 직접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어. 하지만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되는 둘째가 직접 통치에 나서긴 어려웠지. 나이 어린 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 혹은 아버지가 대신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었거든. 이처럼 어린 국왕을 대신한 다른 누군가가 나라를 다스리는 형태를 어려운 말로 ‘섭정(攝政)’이라고 해. 흥선군은 ‘세도 가문을 몰아내고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일으키려면 내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첫째가 아닌 둘째에게 왕 자리를 주기로 결심한 거야.
‘망나니’ 수모 끝 마침내 최고 실세로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계획대로 그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히겠다고 발표했어. 약간의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이내 안동 김씨들은 안심했어. 왕의 나이가 어린 데다가 그간 흥선군의 행실을 봤을 때 자기들에게 위험한 존재는 아니라고 여겼던 거지. 사실 흥선군은 임금의 가까운 친척이면서도 그때까지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의 힘에 눌려 그들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 지내왔어. 안동 김씨들은 조금이라도 왕의 자질이 보이거나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왕족들을 끊임없이 견제해 왔거든. 심지어 반역을 꾀한다는 누명을 씌워 귀양 보내거나 죽이기도 했단다.
이 같은 상황에서 흥선군이 선택한 방법은 건달처럼 행세하는 것이었어. 일단 세도 가문 아래에서 목숨을 보존하며 때를 기다려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언젠가 되찾으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지. 흥선군의 계획대로 안동 김씨 세도가문은 흥선군을 ‘상갓집 개’, ‘망나니’ 등으로 부르며 대수롭잖게 여겼어. 하지만 이는 세도가문을 안심시키기 위한 흥선군의 작전이었지.
마침내 둘째 아들 고종을 왕위에 앉힌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대원군’으로 그 격이 한 단계 높아졌어. 왕위를 물려받은 새 왕의 친아버지를 대원군이라 부르는데 조선엔 총 네 명의 대원군이 있었단다. 선조(제14대 왕·1552~1608년)의 아버지 덕흥 대원군(1530~1559년), 인조(제16대 왕·1595~1649년)의 아버지 정원 대원군(1580~1619년), 철종의 아버지 전계 대원군(생몰연대 미상), 그리고 흥선 대원군이지. 하지만 이들 중 살아서 대원군이 된 사람은 흥선 대원군이 유일해.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대원군이라고 하면 흥선 대원군을 떠올린단다.
자, 망나니 취급 받던 흥선군이 드디어 대원군의 자리에 올랐구나. 세도정치로 어지러운 나라와 기울어가는 조선을 위해 그는 과연 어떤 활약을 펼쳐나갔을까?
+곁들여 읽기
1. 사진은 1890년대의 광화문입니다. 1865년 경복궁과 함께 흥선대원군 주도로 다시 지어진 모습이죠. 하지만 이후 일제에 의해 심하게 훼손됐고 지난 2010년 8월 복원공사 끝에야 현재의 모습을 갖췄답니다. ☞사진 출처: 조선일보 자료사진
2. 사진은 1890년대에 촬영한 흥선 대원군의 모습입니다. 제중원(현재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설립자인 호러스 알렌 박사(1858~1932년)가 직접 찍은 것이라고 해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모욕을 참고 견뎠던 오기와 고집이 느껴지는 듯하죠? ☞사진 출처: 조선일보 자료사진
3. 쇄국정책은 다른 나라와의 통상과 교역을 금지하는 정책을 말합니다. 국가적 이익이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문호를 완전히 닫는 것이죠. 한 나라가 쇄국정책을 고집하려면 독자적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요.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엔 이런 정책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구촌’으로 불리는 오늘날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나라는 거의 없답니다.
4. 훗날 고종이 된 재황의 계보도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버지의 야심 때문에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인물’ 이재면은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한일병합을 주장하는 일진회(一進會)에 동조하고 한일병합조약 당시 황족 대표로 참석, 가결하는 등 친일 행적으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퀴즈]
흥선 대원군이 살았던 이 집은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 대원군은 이곳을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해 정치 활동을 펼쳤다. 이곳의 이름은?
①경복궁 ②창덕궁 ③덕수궁 ④운현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