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을 다 읽고나면 왠지 뿌듯해지기도 하고 허망한 생각도 든다. 하루키라는 일본 작가를 알게 된건 전작인 ‘1Q84'를 읽으면서 부터이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84년에 조지오웰의 ’1984‘라는 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는데 (단지 1948년에 소설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미래를 뜻한다는 의미로 48을 84로 바꿔서 제목을 삼았다고 함) 이번엔 ’1Q84‘라니. 호기심에 읽었는데 상황을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특히 음악을 상황에 맞게, 마치 이 음악을 들으면서 읽으라는 듯이 삽입해 넣어서(하루키는 꽤 오랫동안 재즈카페를 직접 운영한 전력이 있다고 한다) 독서와 음악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나를 위한 책‘이라 생각되었었다.
‘1Q84’를 읽고나서 하루키의 전작들을 찾아 읽던 중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신간이 발행되었다. 상업적인 능력에서 하루키는 다른 작가들에게 가르침을 주듯이 차근차근 홍보를 해나간다. 벌써 1년 쯤 전에 각 언론에 하루키의 신작을 둘러싸고 우리나라 출판업계에서 백지수표를 내밀며 판권 경쟁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그러니 신작 출간을 앞두고 마치 애플의 ‘아이폰’ 신품을 기다리듯 많은 하루키의 팬들이 예약구매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출간 직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하루키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므로써 이런 상업성 만큼이나 예술성에서도 인정받고 있다.(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카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이 노벨상을 받아 하루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번 신간은 하루키 특유의 서술과 음악추천과 더불어 ‘그림과 화가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으니 그림에 빠져있는 나로서는 그 기대가 클 수 밖에 없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꽤 능력있는 화가인 ‘나’가 어느 날 갑자기 아내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으면서 혼란스런 8개월을 거쳐서 다시 아내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로 합의하면서 끝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유명 일본화가의 그림인 ‘기사단장 죽이기’를 우연히 찾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면서 ‘이데아’와 ‘메타포’라는 비실체적인 존재들이 등장한다, (1Q84에서는 항상 ‘두 개의 달’이 떠있었다)
‘기사단장’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존재이면서도 구덩이에서 방울을 울리며 자신을 구제해줄 존재를 찾는 비논리적이면서도 다소 코믹한 존재인데, 우리가 운명이란 걸 언듯 느낄 때 아마도 이런 느낌이 있을거라고 하루키는 묘사한 것 같다. ‘비논리적이며 다소 코믹한’ 운명. 우리는 그것에 얽매이기도 하고 그것과 타협도 하며 때로는 그것에 호소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게 허용되지 않을 때는 위협도 해보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데아를 상대로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가다가 이데아의 요구로 기사단장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데아를 사시미 칼로 살해하게 되면서 낮은 단계의 운명인 메타포(은유라 해석된다)를 앞세우고 無와 有가 공존하는 논리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글쎄 이런 소설의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리스 신화의 현대판 정도로 이해하자는 것.
“당신한테는 원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원할 만큼의 힘이 있어요”
손에 넣을 수 없는 걸 원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멘시키(‘색을 면하다’ 즉 탈색 이라는 뜻)의 입을 통해 하루키는 말한다. 여러번 생각해본다. 내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걸 얻을 수 있다면 성취감이 들테지만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걸 원하는 것 만으로도 나의 힘이라 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어린 소녀 마리에 에게 주면서 주고 받는 멘트가 참 멋지다.
“그림이 미완성이면 나 자신도 언제까지나 미완성 상태인 것 같으니까 멋지잖아요.” 마리에는 말했다.
“완성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모든 사람은 언제까지나 미완성이야.”
결국 하루키는 ‘이 세상’이란 공간과 ‘추상적이지만 실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지 몰라.”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어.”
그녀가 미소지었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책장을 덮으며 지난 며칠 간 손때를 묻혔던 책을 다시 만져보며 멀리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을 열면 깊은 산 속에 커다란 저택이 있고 맞은 편 작은 집에선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뜬금없이 60cm의 기사단장이 자신을 ‘이데아’라고 소개하며 나타나서 예언도 하고 상담도 해주는 곳에 ‘내’가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 끝
박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