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하늘과 땅은 편애(인자)하지 않습니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취급합니다. 성인도 편애(인자)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도덕경의 아름다운 문장, 철학적으로 심오한 의미, 백성을 사랑하는 심정, 진리를 향한 열정 기타 등등 인간의 가슴을 울리는 여러 표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일 문제로 삼는 것이 바로 이 표현이다.
이 문장은 '하늘과 성인은 인자(편애)하지 않기 때문에 만물과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짚으로 만든 개, 즉 추구芻狗는 고대 중국에서 제사 때 쓰고 버리던 물건이다.
내가 이 문장에서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천지와 성인, 짚으로 만든 개로 취급되는 만물과 백성'이 타당한 비유인가 하는 것이다.
우선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하늘과 땅은 편애(인자)하지 않습니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취급합니다'라는 글귀는 마치 다윈의 '잔인한 자연, 그리고 그 자연에 적응해야하는 생명체'를 연상시킨다.
모든 생명체는 자연에 적응하기도 하지만 자연을 자기가 이용하고 개조하여 변형시켜 보다 살기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도덕경이 주장하는 이른바 무위자연 사상과, 과학과 이성을 중시하는 유위有爲가 충돌함을 볼 수 있다. 무위 자연적인 생활을 찬양하는 가치관은 도덕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지만, 제 8장의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이 되는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에 이르면 극치가 된다.
자연은 인자하지도 않고 편애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관점에서 가치 중립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치 중립적인 자연을 인간은 역사이래 이용하여왔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물은 천지(자연)에게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짚으로 만든 개'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고, 천지에 대항하고 정복하고, 천지를 이용하는 매우 능동적인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 다음,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도 편애(인자)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라는 문장에는 고대 중국의 지배자에 대한 비판 내지는 사실진술이 들어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이란 일반적으로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성인, 즉 성스러운 인간일 가능성은 낮다. 만약 이 문장에서 '성인'을 성스러운 인간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초월적이어서 인간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로 밖에 새길 수 없다.
성인이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한다면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로 취급하는' 이 성인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이미 멸종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이 성인이 자연에서 음풍농월이나 하면서 삶을 여유 자적하는 속세 초월적 인간이라면, 그는 인간의 세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무가치한 인간일 뿐이다. 따라서 그가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로 취급'하든 말든 백성으로서는 하등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서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이 세상에는 지혜를 얻어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성인 따위란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로 취급하는' 성인 따위는 없다. 앞에서 우리는 버트런드 러셀, 칼 포퍼, 니체 그리고 장자의 글을 읽지 않았던가?
많은 사람들이 마치 무슨 신비로운 지혜를 찾기라도 하는 양, 종교적인 사람과 철학적인 사람에게서 의견을 구하고 그 말에 따라 행동하려고 한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Scott Peck은, "예수처럼 되겠다고 목수 직업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렇다, 이렇게 될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칼 포퍼의 말을 빌리면 "가짜 예언자false prophet"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도덕경 5장의 이 부분과 관련하여 상반된 의견을 들어보자:
엄격한 방법으로 발견된 작은 겸손한 진실을, 철학적 시대와 철학적 인간에 의하여 전해진 오류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 고급 문화의 특징이지만, 그 오류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해서 행복하게 만든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t is the mark of a higher culture to value the little
unpretentious truths which have been discovered by means of rigorous method more highly than the errors handed down by metaphysical ages and men, which blinds us and make us happy.
- F. Nietzsche, "Human, All Too Human" -
'자연에 따라 살고' 살고 싶다고? 오 고상한 스토아 철학자들이여, 거짓말! 터무니없이 낭비적이고, 무관심하며, 목적도 없고, 의지도 없이, 자비심과 정의도 없고, 생산적인가 하면 황폐하고 불안한 자연을 생각해보라. 자연의 무관심한 힘을 생각해보라. 어찌 그런 무관심한 힘에 따라 살 수 있는가? 산다는 것은 이 자연과 달라지기를 원하는 게 아닌가? 삶은 평가며, 선호며, 불의한 것이며, 제한되는 것이며,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설사 당신들이 촉구하는 '자연에 따라 살라'는 게 실제로는 '생명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어찌 내가 한 말과 다르게 살 수 있는가?
- 니체, "선악을 넘어" -
You want to live 'according to nature'? O you noble Stoics, what fraudulent words! Think of a being such as nature is, prodigal beyond measure, indifferent beyond measure, without aims and intentions, without mercy and justice, at once fruitful and barren and uncertain; think of indifference itself as a power - how could you live according to such indifference? To live - is that not precisely wanting to be other than this nature? Is living not valuating, preferring, being unjust, being limited, wanting to be different? And even if your imperative 'live according to nature' meant at bottom the same thing as 'live according to life' - how could you not do that?
- F. Nietzsche, "Beyond Good and Evil" -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현실은 하나다라는 믿음이다. 신비주의자 중에서 가장 본질주의자들은 모두가 경계로 서로 분리된 많은 개별적인 물체 - 별, 혹성, 나무, 새, 집 우리 자신 - 를 포함하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보통 지각이 그릇된 지각인 망상이라고 믿는다. 우리들 대부분이 사실로 잘못 믿는 이 집단적 오해인 망상의 세계에게,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은 "마야"라는 말을 적용한다. 그들과 다른 신비주의자들은 진짜 현실은 자아 경계를 버리고 하나임을 경험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자신을 어떤 방식, 형태 또는 모양으로 우주의 나머지와 분리되어 구별 불가능한 개별적인 물체로서 계속해서 본다면 우주의 통합을 진실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는 그러므로, 자주 성인成人들은 알지 못하는 반면, 자아 경계발달 전의 유아는 현실을 안다고 주장한다. 어떤 교도는 심지어 현실이 하나임에 대한 계몽이나 지식을 향한 길은 우리가 뒤로 돌아가거나 우리 자신을 유아처럼 만들 것을 요구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어른의 책임을 지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어떤 청년과 젊은 성인成人에게는 위험스럽게 유혹적인 원칙이 될 수 있고, 그 책임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 놀랍고 압도적이며 강제적이다. 그러나, 이 상상에 의하여 행동함으로써 성인聖人 보다는 정신분열증이 생겨난다.
- 스콧 펙, "가지 않은 길" -
Mysticism is essentially a belief that reality is oneness. The most literal of mystics believe that our common perception of the universe as containing multitudes of discrete objects - stars, planets, trees, birds, houses, ourselves - all separated from one another by boundaries is a misperception, an illusion. To this consensual misperception, this world of illusion that most of us mistakenly believe to be real, Hindus and Buddhists apply the word "Maya." They and other mystics hold that true reality can be known only by experiencing the oneness through a giving up of ego boundaries.
It is impossible to really see the unity of the universe as long as one continues to see oneself as a discrete object, separate and distinguishable from the rest of the universe in any way, shape or form. Hindus and Buddhists frequently hold, therefore, that the infant before the development of ego boundaries knows reality, while adults do not. Some even suggest that the path toward enlightenment or knowledge of the oneness of reality requires that we regress or make ourselves like infants. This can be dangerously tempting doctrine for certain adolescents and young adults who are not prepared to assume adult responsibilities, which seem frightening and overwhelming and demanding beyond their capacities. Schizophrenia, however, rather than sainthood, is achieved by acting on this supposition.
- Scott Peck, "The Road Less Traveled" -
우리가 천국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때 우리는 영원히 추방되었다.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러분이 그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길은 천사와 불타는 칼에 의하여 차단되어 있다. 우리는 돌아 갈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유아기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자궁이나 유아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메마르고 황량한 땅을 지나 점점 더 깊은 의식의 수준으로 고통스럽게 가면서, 삶의 사막을 통과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마약 남용을 포함하여, 많은 인간의 병이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 스콧 펙, "가지 않은 길 후편" -
When we were banished from Paradise, we were banished forever. We can never go back to Eden. If you remember the story, the way is barred by cherubim and a flaming sword. we cannot go back. We can only go forward. To go back to Eden would be like trying to return to our mother's womb, to infancy. Since we cannot go back to the womb or infancy, we must grow up. We can only go forward through the desert of life, making our way painfully over parched and barren ground into increasingly deeper levels of consciousness. This is an extremely important truth because a great deal of human psychopathology, including the abuse of drugs, arises out of the attempt to get back to Eden.
- M. Scott Peck,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ed" -
우리는 사막을 통과하여 앞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 여행은 어렵고 의식은 자주 고통스럽다. 노망기는 생물학적 병일 뿐 아니라, 심리적 성장을 일생의 형태로 시작하는 어떤 사람에 의하여서도 예방될 수 있는 심리적 질병인,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일찍이 자기들 삶에서 배우기와 성장하기를 중단하고 변화하기를 중단하고 고착된 사람들은 때로는 그들의 “두 번째 아동기”라고 불리는 것 속으로 타락한다. 그들은 투덜거리고 고압적이며 자기 중심적이 된다. 우리, 정신과 의사들은 성인들같이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성인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정서적으로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안다.
- 스콧 펙, 상게서 -
We must go forward through the desert. But that journey is hard and consciousness often painful. Senility is not just a biological disorder. It can also be a manifestation of a refusal to grow up, a psychological disorder preventable by anyone who embarks on a lifetime pattern of psychological growth. Those who stop learning and growing early in their lives and stop changing and become fixed often lapse into what is sometimes called their "second childhood." They become whiny and demanding and self-centered. We psychotherapists know that most people who look like adults are actually emotional children walking around in adult's clothing.
- M. Scott Peck, ibid -
바지에 배설하거나 칫솔질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우리는 부자연스러움이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부자연스러움을 배운다. 인간 특성의 또 다른 면은 부자연스러운 짓을 하고, 초월해서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다.
- 스콧 펙, "가지 않은 길" -
It is also natural to defecate in our pants and never brush our teeth. Yet we teach ourselves to do the unnatural until the unnatural becomes itself second nature. Another characteristic of human nature is our capacity to do the unnatural, to transcend and hence transform our own nature.
- M. Scott Peck, "The Road Less Traveled" -
인간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자연의 힘과 비교하여 단지 작은 일이다. 노예는 시간과 운명과 죽음을 숙명적으로 숭배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노예가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무엇보다도 더 중대하기 때문이며, 노예의 모든 생각을 그것들이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중대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것들의 열정 없는 위엄을 느끼는 것이 훨씬 더 중대하다. 모든 그런 사고는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든다; 우리는 더 이상 동양적 복종으로 운명 앞에 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을 흡수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투쟁을 버리는 것, 일시적 욕망에 대한 모든 열정을 내버리는 것, 영원한 것에 대하여 정열적으로 불타는 것 - 이것이 해방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인이 숭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방은 운명을 관조함으로써 이룩된다; 그 이유는 운명 자체는, 시간이라는 정화용 불에 의하여 제거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의하여 극복되기 때문이다.
- 버트런드 러셀, "신비주의와 논리" -
The life of Man, viewed outwardly, is but a small thing in comparison with the forces of Nature. The slave is doomed to worship Time and Fate and Death, because they are greater than anything he finds in himself, and because all his thoughts are of things which they devour. But, great as they are, to think of them, to feel their passionless splendour, is greater still. All such thought makes us free men; we no longer bow before the inevitable in Oriental subjection, but we absorb it, and make it a part of ourselves. To abandon the struggle for private happiness, to expel all eagerness of temporary desire, to burn with passion for eternal things - this is emancipation, and this is the free man's worship. And this liberation is effected by contemplation of Fate; for Fate itself is subdued by the mind which leaves nothing to be purged by the purifying fire of Time.
- Bertrand Russell, "Mysticism and Logic" -
살아가는 모든 것은 보다 나은 세상을 찾고 있다.
사람, 동물, 식물, 심지어 단세포 유기체도 끊임없이 활동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황을 개선하거나 적어도 그 상황의 악화를 피하려고 애쓰고 있다. 심지어 잠들어 있을 때도, 유기체는 잠의 상태를 능동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잠의 깊이(또는 달리 얕음)는 유기체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생성된 상태인데, 잠을 유지하거나 (혹은 달리 유기체를 경계하게 만든다). 모든 유기체는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몰두해 있다. 이 문제들은 자신의 상태와 자신의 환경에 대한 자기 자신의 평가에서 발생한다; 유기체가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상황.
시도된 해결책은 사물을 더 나쁘게 만들기 때문에 자주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다. 그리고 나서 해결에 대한 한 걸음 더 나아간 시도가 뒤따른다 - 한 걸음 더 나아간 시행착오 움직임.
우리는 삶이 - 심지어 단세포 유기체의 수준에서도 - 완전히 새로운 것, 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와 그것들을 해결하려는 능동적인 시도; 평가, 가치; 시행착오.
다윈의 자연 선택의 영향하에서 가장 빠른 진화를 경험하는 것은 가장 활동적인 문제 해결자,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형태의 삶을 구하는 자, 찾는 자, 발견자들이라고 상상될 수 있을 것이다.
각 유기체는 또한 자신 삶의 내부 상태를 안정시키고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 그 결과를 생물학자들이 '항상성恒常性'이라고 부르는 활동. 그러나 이것 또한 내부 고민, 내부 활동이다: 내부의 고민을 제한하려고 애쓰는 활동, 반성 활동, 오류 수정. 항상성은 불완전함이 틀림없다. 항상성은 자신을 제한해야 한다. 항상성이 완전히 성공적이라면, 그것은 유기체의 죽음이나, 최소한도 그 유기체의 모든 생명 기능의 일시적 중단을 의미한다. 활동, 고민, 탐구는 생명, 끊임없는 불안, 끊임없는 불완전; 끊임없는 추구, 희망, 평가, 찾기, 발견, 개선, 학습과 가치 창조를 위하여; 그러나 또한 끊임없는 오류, 부정적인 가치 창조를 위하여 필수적이다.
다윈의 이론은 유기체가 자연선택을 통하여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은 유기체들이 이 과정을 통하여 수동적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나에게는 유기체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그들이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환경을 발견하고, 발명하고 재구성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들은 둥지, 댐, 작은 언덕과 산을 건설한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중요한 창조는 아마도 산소를 풍요롭게 만듦으로써 땅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였을 것이다; 이 변화는, 나중에 태양광선은 먹힐 수 있다는 발견의 결과였다. 이 무궁무진한 음식공급과 광선을 잡는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의 발견은 식물왕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식물은 먹힐 수 있다는 발견은 동물왕국을 만들었다.
우리 자신은 특별히 인간의 언어 발명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다윈이 말하는 바대로 (인간의 계보, 제 3장 1 부), 인간언어의 사용과 발달은 생각 자체에 반응했다'. 우리 언어의 진술은 어떤 일의 상태를 묘사할 수 있다, 그 진술들은 객관적으로 사실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 진실의 탐구가 시작될 수 있다 - 인간 지식의 습득. 진실 탐구는, 특히 자연과학에서, 틀림없이 생명이 보다 나은 세상을 오랫동안 찾는 동안에 만들어낸 가장 우수하고 위대한 일들 중의 하나로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자연과학으로 환경을 파괴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실수를 저지른다. 우리 행동의 모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미리 본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과학은 우리의 가장 큰 희망이다: 과학의 방법은 오류 수정이다.
- 칼 포퍼, "보다 나은 세상을 찾아서" -
All things living are in search of a better world.
Men, animals, plants, even unicellular organisms are constantly active. They are trying to improve their situation, or at least to avoid its deterioration. Even when asleep, the organism is actively maintaining the state of sleep: the depth (or else the shallowness) of sleep is a condition actively created by the organism, which sustains sleep (or else keeps the organism on the alert). Every organism is constantly preoccupied with the task of solving problems. These problems arise from its own assessments of its condition and of its environment; conditions which the organism seeks to improve.
An attempted solution often proves to be misguided, in that it makes things worse. Then follow further attempts at solutions - further trial and error movements.
We can see that life - even at the level of the unicellular organism - brings something completely new into the world, something that did not previously exist: problems and active attempts to solve them; assessments, values; trial and error.
It may be supposed that, under the influence of Darwin's natural selection, it is the most active problem solvers, the seekers and the finders, the discoverers of new worlds and new forms of life, that undergo the fastest evolution.
Each organism also strives to stabilize its internal conditions of life and to maintain its individuality - an activity whose results biologists call 'homoeostasis'. Yet this too is an internal agitation, an internal activity: an activity that attempts to restrict the internal agitation, a feedback mechanism, a correction of errors. The homoeostasis must be incomplete. It must restrict itself. Were it completely successful, it would mean the death of the organism, or, at the very least, the temporary cessation of all its vital functions. Activity, agitation, search are essential for life, for perpetual restlessness, perpetual imperfection; for perpetual seeking, hoping, evaluating, finding, discovering, improving, for learning and for the creation of values; but also for perpetual error, the creation of negative values.
Darwinism teaches that organisms become adapted to the environment through natural selection. And it teaches that they are passive throughout this process. But it seems to me far more important to stress that the organisms find, invent and reorganize new environments in the course of their search for a better world. They build nests, dams, little hills and mountains. But their most momentous creation has probably been the transformation of the atmosphere surrounding the earth by enriching it with oxygen; this transformation was, in turn, a consequence of the discovery that sunlight can be eaten. The discovery of this inexhaustible food supply
and of the countless ways of trapping the light created the kingdom of plants; and the discovery that plants can be eaten created the animal kingdom.
We ourselves have been created by the invention of a specifically human language. As Darwin says (The Descent of Man, part 1, chapter III), the use and development of the human language 'reacted on the mind itself'. The statements of our language can describe a state of affairs, they can be objectively true or false. So the search for objective truth can begin - the acquisition of human knowledge. The search for truth, particularly in the natural sciences, no doubt counts among the best and greatest things that life has created in the course of its long search for a better world.
But have we not destroyed the environment with our natural science? No! We have made great mistakes - all living creatures make mistakes. It is indeed impossible to foresee all the unintended consequences of our actions. Here science is our greatest hope: its method is the correction of error.
- Karl R. Popper, "In Search of a Better World" -
다윈의 이론은 보통 잔인한 철학으로 간주된다: 다윈의 이론은 '자연, 이빨과 발톱에서 붉은'을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이 우리와 일반적인 생명체에게 적대적인 위협을 주는 그림. 나의 주장은 이것이 다윈 이론의 편향된 견해이다라는 것인데, 그 견해는 다윈 이전에 존재했고 (맬더스, 테니슨, 스펜서) 다윈이론의 실제 이론적 내용과 거의 관계가 없는 이념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다윈의 이론이 소위 '자연선택'을 크게 강조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윈의 이론은 맬더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인구의 증가가, 식량의 부족과 연결되어, 잔인한 경쟁, 가장 강한 사람의 선택, 그리고 그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잔인한 파멸을 낳을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맬더스에 따르면 심지어 가장 강한 자들도 경쟁에 의하여 압력 하에 놓인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에너지를 쓰도록 강요당한다. 그러므로 이 해석으로써 경쟁은 결과적으로 자유의 제한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보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확대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다. 그래서 경쟁은 육체적으로 장애를 당한 사람들과 같은 그런 개별 인간을 위한 알맞은 직업을 포함하여 새로운 생태적 환경의 발견 및 건설과 함께 새로운 생활 방식의 발견과 그 발견으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분명히 간주될 수 있다.
이 가능성들은 대체적 결정, 증가된 선택의 자유와 보다 많은 자유 사이의 선택을 포함한다.
두 가지 해석은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 번째는 염세적이다: 자유의 제한. 두 번째는 낙관적이다: 자유의 확대. 양쪽 모두 물론 지나친 단순화이지만, 양쪽은 진실의 충분한 근접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는 그들 중 하나가 더 나은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쟁사회의 위대한 성공과 그것이 유발한 자유의 커다란 확대는 단지 낙관적 설명에 의해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그것은 보다 나은 해석이다. 그것은 진실에 더 가깝다, 그것은 더 많이 설명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개인적인 자발적 행동, 내부로부터의 압력,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자유 추구, 그리고 이 가능성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활동은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 그것은 보다 약한 개인의 제거와 자유의 감축, 심지어 가장 강한 자들의 감축을 초래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이다.
이 견해들을 통하여 나는 인구의 증가에 의하여 발생하는 압력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이제, 자연선택을 통하여 다윈의 진화 이론을 해석하는 문제는 나에게 맬더스의 이론을 해석하는 문제와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인다.
오래되고, 비관적이며 여전히 수용되는 견해는 이것이다: 적응에서 유기체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역할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그들은 매우 이질적인 무리를 구성하는데, 그 무리로부터 생존투쟁, 경쟁이 다른 개체들을 제거함으로써 (대체로) 가장 잘 적응한 개체들을 선택한다. 선택 압력은 외부에서 온다.
대체로, 모든 진화현상, 특히 적응 현상은 단지 이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을 참조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크게 강조된다. 변종, (유전인자-모둠)의 변화 가능성을 제외하고 어떤 것도 내부로부터 온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의 새로운 낙관적 해석은 (베르그송이 그러한 것처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의 활동을 강조한다. 모든 유기체는 문제-해결에 완전히 몰두해 있다. 그들의 첫 번째 문제는 생존이다. 그러나 가장 다양한 환경에서 출현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구체적이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보다 나은 생활 환경을 탐색하는 것이다: 더 큰 자유 탐구; 보다 나은 세상 탐구.
이 내부로부터의 압력은 적합한 환경의 선택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서, 생활방식과 환경의 선택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태도의 형태로. 이것은 친구의 선택, 공생共生,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배우자의 선택; 그리고 어떤 종류의 음식물 선호, 특히 태양광선을 포함한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부의 선택 압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낙관적 해석은 이 내부로부터의 선택 압력을 적어도 외부로부터의 선택 압력만큼 그렇게 중요하다고 간주한다: 유기체는 심지어 자신들이 유기체적 변화를 겪지 않고도 새로운 환경을 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외부 압력의 결과, 자신들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선택된 환경의 선택 압력의 결과로 변화한다.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선택 압력과 내부로부터의 그것 사이에 원, 또는 더 정확히 상호 행동의 나선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두 개의 해석에 의하여 다르게 대답해지는 문제는: 이 원 또는 나선형 안의 어느 고리가 능동적이고 어느 것이 수동적이냐?이다. 옛 이론은 활동을 외부로부터의 선택 압력에 둔다; 새로운 이론은 내부로부터의 선택
압력에: 선택하는 것, 능동적인 것은 유기체이다. 두 개의 해석은 이념, 같은 객관적 내용에 대한 이념적 해석이라고 일컬어질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두 개 중 다른 것보다 하나에 의하여 더 잘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간단하게 생명체 자신의 무생명인 환경에 대한 승리로서 묘사하고 싶다. 본질적인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우리들 대부분이 상상하는데 - 가설적으로, 물론 - 모든 생명체가 점차 발달한 태초의 세포가 있었다. 다윈의 진화 생물학에 따르면 이것는 자연이 필사적으로 잔인한 정으로 생명체에게 작업을 했다는 가설에 의하여 가장 잘 설명되는데, 그것은 그 다음에 우리가 보고 놀라는 모든 생명체의 적응을 쪼아낸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견해에 반대하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할런지 모르겠다: 그 태초의 세포는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는 모두 태초의 세포다. 그것은 생각 속의 그림도 아니고 은유도 아니고 더 정확히는 문자 그대로 진실이다.
나는 이것에 대하여 단지 매우 짧은 설명을 하고 싶다. 세포에게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번 째는 죽음이요, 두번 째는 세포분열이다; 세번 째는 융합이다: 연합, 또다른 세포와의 합류인데, 그것은 거의 항상 분열을 낳는다. 분열이나 연합은 그것이 재생산적 과정, 살아있는 한 세포가 실제로 똑같은 두 개의 살아있는ㅡ세포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 양쪽 모두 최초 세포의 살아있는 연속이다. 태초의 세포는 수십 억 년 전에 존재하게 되었고, 태초의 세포는 수조의 세포 형태로 살아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지금 살아있는 모든 각 하나에 계속해서 산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 살았던 적이 있는 모든 것과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것은 태초의 세포의 분열 결과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태초의 세포로 구성이 되어있고, 그 태초의 세포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것들은 어떤 생물학자도 반대할 수 없고 어떤 생물학자도 반대하지 못할 문제이다. 우리는 아마도 나의 현재 몸의 한 개 원자도 그때 나의 몸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가 30년 전처럼 지금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매우 유사한 의미(유전인자 동일성)에서 모두 태초의 세포이다.
우리를 '이빨과 발톱'으로 공격하는 환경의 그림 대신에, 나는 매우 작은 보잘것없는 생명체가 수십 억 년 동안 생존하는데 그리고 자신의 세상을 정복하고 개선하는데 성공한 환경을 본다. 그러므로, 생명체와 환경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그렇다면 생명체가 승리했다. 나는 이 다소 수정된 다윈 이론의 개념이 옛 이념의 관점과 완전히 다른 관점, 즉 우리는 생명체의 활동과 그 보다 나은 세상의 탐색 덕분에 생명체에게 점점 더 쾌적하고 점점 더 호의적인 세상에 살고있다는 견해를 낳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수용하고 싶어할까?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세상과 '사회'의 완전한 사악함에 대한 설득력 있는 신화를 믿는다; 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모든 사람이 하이데거와 히틀러, 그리고 전쟁을 신뢰했듯이. 그러나 사악함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그 자체가 사악하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용기를 꺾고 그들을 의심과 절망, 그리고 심지어 폭력으로 잘못 인도한다. 이 잘못된 믿음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일지라도, 다윈 이론의 옛 해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기여했다.
매우 중대한 주장이 비관적 이념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데, 즉 생명체의 환경적응과 이 모든 (내 생각에는 훌륭한) 수십 년에 걸친 생명체의 발명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아직도 실험실에서 재생할 수 없는데, 전혀 발명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의 소산물이다라는 것이다. 생명체는 어떤 것도 전혀 발명하지 못했고, 그것 모두가 순전히 우연한 변이와 자연선택의 작용이다; 생명체의 내부압력은 자기 생식 이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된다. 다른 모든 것은 우리의 서로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 투쟁, 정말로 맹목적인 투쟁을 통하여 발생한다. 그리고 태양광선을 음식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내 생각으로는 멋진 것들) 것들은 우연의 결과이다.
나는 이것이 다시 한번 단지 이념, 그리고 진실로 옛 이념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념에, 그런데, 이기적인 유전인자의 신화 (유전인자들은 협력에 의해서 작동하고 생존할 따름이기 때문에)와 현재 신품이고 순진하게도 결정론적인 '사회생물학'으로 제시되고 있는 부활된 사회적 다윈의 이론이 속한다.
- 칼 포퍼, 상게서 -
Darwinism is usually regarded as a cruel philosophy: it depicts 'Nature, red in tooth and claw'; that is, a picture in which nature poses a hostile threat to us and to life in general. My claim is that this is a prejudiced view of Darwinism, which has been influenced by an ideology that existed before Darwin (Malthus, Tennyson, Spencer) and has almost nothing to do with the actual theoretical content of Darwinism. It is true that Darwinism places great emphasis upon what we call 'natural selection'; but this too can be interpreted in a quite different manner.
As we know, Darwinism was influenced by Malthus, who tried to demonstrate that the increase in population, combined with a shortage of food, would lead to cruel competition, to selection of the strongest and to the cruel annihilation of those who are not as strong. But according to Malthus, even the strongest are put under pressure by the competition: they are forced into exerting all their energies. Hence, on this interpretation, the competition results in the limitation of freedom.
But this can be seen in another way. Men seek to extend their freedom: they are in search of new possibilities. Thus competition can clearly be regarded as a process that favours the discovery of new ways of making a living and with them new possibilities of life, together with the discovery and the construction of new ecological niches, including niches for such individual human beings as physically handicapped people.
These possibilities entail choice between alternative decisions, increased freedom of choice and more freedom.
The two interpretations are therefore fundamentally different. The first is pessimistic: limitation of freedom. The second is optimistic: extension of freedom. Both are, of course, oversimplifications, but both can be regarded as good approximations to the truth. Can we claim that one of them is the better interpretation?
I think that we can. The great success of the competitive society and the great extension of freedom to which it has led can be explained only by the optimistic interpretation. It is the better interpretation. It is closer to the truth, it explains more.
If this is the case, then the individual initiative, pressure from within, the search for new possibilities, for new liberties, and the activity that seeks to realize these possibilities, is more effective than the selection pressure from without, which results in the elimination of the weaker individuals and in the curtailment of freedom, even of the strongest.
Throughout these remarks I am taking for granted the pressure that is caused by the increase in population.
Now, the problem of interpreting Darwin's theory of evolution through natural selection seems to me to be quite like the problem of interpreting Malthus's theory.
The old, pessimistic and still accepted view is this: the role played by the organisms in adaptation is purely passive. They constitute a very heterogeneous population, from which the struggle for existence, the competition, selects those (on the whole) best-adapted individuals, by eliminating the others. The selection pressure comes from without.
Great emphasis is usually put on the fact that all evolutionary phenomena, especially the phenomena of adaptation, can be explained only by reference to this selection pressure from without. Nothing is thought to come from within except the mutations, the variability (of the gene-pool).
My new optimistic interpretation stresses (as does Bergson) the activity of all living creatures. All organisms are fully occupied with problem-solving. Their first problem is survival. But there are countless concrete problems that arise in the most diverse situations.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problems is the search for better living conditions: for greater freedom; for a better world.
According to this optimistic interpretation, it is through natural selection and (we may suppose) through an external selection pressure that a strong internal selection pressure comes into being at a very early stage; a selection pressure exerted by the organisms upon their environment. This selection pressure manifests itself as a kind of behaviour that we may interpret as searching for a new ecological niche. Sometimes it is even the construction of a new ecological niche.
This pressure from within results in a choice of niches; that is, in forms of behaviours that may be regarded as a choice of lifestyles and of surroundings. This must be taken to include choice of friends, symbiosis, and above all, perhaps most importantly from a biological point of view, the choice of a mate; and the preference for certain kinds of food, especially sunlight.
So we have an internal selection pressure; and the optimistic interpretation regards this selection pressure from within as at least as important as the
selection pressure from without: the organisms seek new niches, even without having undergone any organic change themselves; and they mutate later as a result of the external selection pressure, the selection pressure of the niche that was actively chosen by them.
We might say that there is a circle, or rather a spiral of interactions between the selection pressure from without and that from within. The question that is answered differently by the two interpretations is: which loop in this circle or spiral is active and which is passive? The old theory locates the activity in the selection pressure from without; the new in the selection pressure from within: it is the organism that chooses, that is active. It may be said that both interpretations are ideologies, ideological interpretations of the same objective content. But we can ask: is there
anything that can be better explained by one of two interpretations than by the other?
I think that there is. I would describe it briefly as the victory of life over its inanimate surroundings. The essential fact is as follows: there was, so most of us suppose - hypothetically, of course - a primordial cell from which all life gradually developed. According to Darwinian evolutionary biology this is best explained by the hypothesis that nature worked on life with a desperately cruel chisel, which then chiselled out every living adaptation at which we marvel.
However, we may point to one fact that contradicts this view: the primordial cell is still alive. We are all the primordial cell. That is not an image, nor a metaphor, but rather the literal truth.
I want to give only a very brief explanation of this. There are three possibilities for a cell; the first is death, the second is cell division; the third is fusion: a union, a merging with another cell, which almost always causes a division. Neither division nor union means it is a reproductive process, the changing of one living cell into two living cells that are virtually the same. They are both the living continuations of the original cell. The primordial cell came into being billions of years ago, and the
primordial cell has survived in the form of trillions of cells. And it lives on still in every single one of all the cells alive now. And all life, everything that has ever lived and everything that is alive today, is the result of divisions of the primordial cell. It is therefore composed of the primordial cell, which is still alive. These are matters that no biologist can dispute and that no biologist will dispute. We are all the primordial cell, in a very similar sense (genidentity) to that in which I am the same person now as I was thirty years ago, even though perhaps not one atom of my present body existed in my body in those days.
In place of a picture of the environment that attacks us with 'tooth and claw', I see an environment in which a tiny little living creature has succeeded in surviving for billions of years and in conquering and improving its world. If, therefore, there is a struggle between life and the environment, then life has triumphed. I believe that this somewhat revised conception of Darwinism leads to a completely different view from that of the old ideology, namely to the view that we inhabit a world that has become more and more agreeable and more and more favourable to life, thanks to the activity of life and its search for a better world.
But who wants to admit this? Today everyone believes in the persuasive myth of the total maliciousness of the world and of 'society'; just as formerly everyone in Germany and Austria believed in Heidegger and Hitler, and in war. But the mistaken belief in maliciousness is itself malicious: it disheartens young people and leads them astray into doubts and into despair, and even into violence. Although this mistaken belief is essentially political, the old interpretation of Darwinism had nevertheless contributed to it.
A very important thesis forms part of the pessimistic ideology, namely, that the adaptation of life to the environment and all these (to my mind wonderful) inventions of life over billions of years, which we are not yet able to recreate in the laboratory today, are not inventions at all, but the product of sheer chance. It is claimed that life has invented nothing at all, it is all the mechanism of purely chance mutations and of natural selection; the internal pressure of life is nothing more than self-reproduction. Everything else comes about through our struggle, indeed blind struggle, against each other and against nature. And things (in my view, wonderful things) like the use of sunlight as food are the result of chance.
I maintain that this is once again just an ideology, and indeed a part of the old ideology. To this ideology, by the way, belong the myth of the selfish gene (for genes can only function and survive by co-operating), and the revived social Darwinism that is currently being presented as a brand-new and naively deterministic 'sociobiology'.
- Karl R. Popper, ibid -
예수의 행동거지는 종교개혁전까지는 특급비밀이었습니다.유태인들은 율법을 어기는 일은 곧 사망이죠.비밀은 알려지기땜에 비밀이죠.하나님도 율법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 그자체는 예수가 유일무이합니다.내가 아는 진리는,인정하는 진리는 지금까지 부처나 예수외에는 발견치 못햇습니다. 비움으로 행하며 자유를얻는....
시금치님 언제 시간 있으면 이 윤진님의 글 전 부터 올린거 있잖아여? 오리엔탈리즘인가 에구 용어도 까먹었당 그것 부터 시작해서 도덕경까지 한 장으로 핵심만 정리 해서 여기나 자유 게시판에 함 올려 주세여^^ 매일 들어와서 두 줄 읽고 말고 하니깡 앞부분은 수십번 읽고 뒷부분은 평생 못 읽네여...시금치님 부탁드릴
오디님께, 버트런드 러셀이나 칼 포퍼가 유명한 이유는 그 논리가 명백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론은 비판을 정확히 할 수 있지요. 그들의 명확한 논리를 포퍼는 지성인의 솔직함(intellectual honesty)라고 부른답니다. 그들 두 분의 철학을 모르고 어떤 학문을 한다거나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칼포커의 이지적인 얼굴 이 아니어도 그의 글을 접한 사람이면 홀딱 빠지고 말아요. 전 세계적으로 천재가 1%도 되지 않죠. 에디슨이나 빌게이츠 등을포함해서 칼 포커도 그 1%에 포함되는 사람,,,,,요즘 칼포커 추측과논박 1,2권 나왔던데 저 요즘 이거 읽느라 진을 뺍니다.,
첫댓글 왔다리갔다리 혼란스럽게 만들어야징~정신없지여^^ 최후의 만찬에 막바지에 제자의 발을 씻어주며 예수 말씀하신 최고의 심플한 말,"사랑하라" 요거이 "진리"죠.십자가에 못박히기전 총독 왈"진리란 무엇이냐?"예수 왈"...." 진리는 설명치 못합니다."내가 진리다"라는 말씀이 목구멍에서 간질거렸겠죠.
창세기부터 내려오는 구약까지 나도 믿을수없고 황당하지여.기록한 글쟁이들의 농간이 농후하지요.이것 역시 종교와 학문이 진리를 망가뜨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여.예수는 그당시 철학자들 눈에는 돈키호테며 이단이며 천한것이었죠.하지만 심오한 착각이엇죠.그는 진리며 곧 자유였습니다.
예수의 행동거지는 종교개혁전까지는 특급비밀이었습니다.유태인들은 율법을 어기는 일은 곧 사망이죠.비밀은 알려지기땜에 비밀이죠.하나님도 율법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 그자체는 예수가 유일무이합니다.내가 아는 진리는,인정하는 진리는 지금까지 부처나 예수외에는 발견치 못햇습니다. 비움으로 행하며 자유를얻는....
어디 더 말씀해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약간의 흥분시작. 전세가 시금치쪽으로 슬슬 기우는 조짐입니다..에헤라디야~~~아니지,이럴수록 긴장해야지..^^
시금치님 언제 시간 있으면 이 윤진님의 글 전 부터 올린거 있잖아여? 오리엔탈리즘인가 에구 용어도 까먹었당 그것 부터 시작해서 도덕경까지 한 장으로 핵심만 정리 해서 여기나 자유 게시판에 함 올려 주세여^^ 매일 들어와서 두 줄 읽고 말고 하니깡 앞부분은 수십번 읽고 뒷부분은 평생 못 읽네여...시금치님 부탁드릴
흥분이라꼬예? 흐흐흐
오디님께, 버트런드 러셀이나 칼 포퍼가 유명한 이유는 그 논리가 명백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론은 비판을 정확히 할 수 있지요. 그들의 명확한 논리를 포퍼는 지성인의 솔직함(intellectual honesty)라고 부른답니다. 그들 두 분의 철학을 모르고 어떤 학문을 한다거나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본을 모르고 대드는 꼴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류가 지나온 역사의 과정을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면 저나 다른 분들이 이 고생을 하겠습니까? 하하하
칼포커의 이지적인 얼굴 이 아니어도 그의 글을 접한 사람이면 홀딱 빠지고 말아요. 전 세계적으로 천재가 1%도 되지 않죠. 에디슨이나 빌게이츠 등을포함해서 칼 포커도 그 1%에 포함되는 사람,,,,,요즘 칼포커 추측과논박 1,2권 나왔던데 저 요즘 이거 읽느라 진을 뺍니다.,
추측과 논박? 황후님 대단하시군요. 그 책 정말 좋은 책이지만 정말 어렵지요.
오디님, 황후님 말씀처럼 포퍼의 얼굴 좀 보세요. 정말 볼만해요. 아인슈타인과 과학에 대한 논쟁을 했는데 제가 보기로 과학이론에서 포퍼가 이겼어요. 포퍼의 얼굴, 정말 멋있어요. 제가 더 늙으면... 히히 제가 구할 수 있으며 게시판에 올릴게요.
저기 위에 포퍼경의 모습 올려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