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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예술영재원유스오케스트라 원문보기 글쓴이: S-master
세계적 권위를 가진 일간지 <뉴욕 타임스>는 일전에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씨를 ‘신동’으로 극찬하며 몇 페이지에 걸쳐 대대적 특집을 실었다. 장영주 씨는 ‘신동’에 그치지 않고 ‘거장’을 향해 맹활약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장씨가 미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하지 않고 우리 나라에서 교육받았다면 그는 신동에서 그치고 말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장영주 씨의 성장 과정은 특별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나라적 시각에서 특별한 것일 뿐이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특별한 학생을 특별 대접하고, 부족한 학과 수업은 선생님이 방과 후에라도 학교에서 직접 지도한다. 또 이에 따른 특별 지도료도 받는다. 학교에 나오지 못할 사정이 있을 때에는 팩스를 주고 받으면서까지 선생님이 개별 지도를 해 나간다. 우리 기준으로는 모두 현직 교사의 불법 과외다. 장영주 씨의 아버지 어머니가 증언하는 미국의 초·중등 교육 제도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필자는 장영주 씨 어머니를 서울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아버지를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 카페 등지에서 직접 만나 교육법을 들어 보았다.
유료(有料) 과외받는 사라 장
1994년 6월 15일 장영주(당시 13세, 세례명 사라 장)가 일본 NHK홀에서 연주회를 끝냈을 때 호리 마사후미 NHK 교향악단 악장은 이런 말을 했다. “장영주는 한국 사람이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미국 사람도 아니다. 그는 단지 세계인일 뿐이다. 같은 바이올린 주자로 장양의 완벽한 연주를 들으니 음악도, 국적도, 나이도, 시대도 초월된다.” 장양 뒤에는 무대에 우뚝 선 오늘의 장양을 있게 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 여기에 미국 학교 선생님들의 사랑과 치열하고 엄격하며 동시에 자유스런 교육이 추가되었다. 사라 부모들의 교육 방법과 그들의 미국 교육 제도에 대한 증언은 우리 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장영주 양이 한국에서 나고 길러졌을 때도 오늘날의 사라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부모들은 1979년 서울서 결혼,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80년 사라를 낳았다. 사라의 부모들은 그를 처음부터 오늘날의 사라로 키우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 이명준(李明峻) 씨(스와스모 대학 작곡과 전임 강사)는 당시 가사를 꾸려가며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베이니아(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느라 힘이 들었 다. 엄마는 녹초가 된 몸으로 주말을 쉬지 못하고 매주 토요일 사라를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보내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2시간 반 이상을 운전하다 보면 밀려드는 졸음을 참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 엄마는 종종 ‘내가 왜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하며 회의에 빠진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한 번은 뉴욕으로 가던 중 고속도로에서 바이올린을 두고 온 것을 알았다. 차를 돌려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다가, 다시 뉴욕으로 향했다. 이날은 줄리어드로의 길이 정말 멀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이 날 ‘사라의 바이올린이고, 줄리어드 예비학교고 뭐고 다 그만둘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사라에게도 학교 생활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연주 여행이 많다보니 학교에 자주 빠지게 됐고, 사라는 호텔에서 숙제를 하고는 팩스를 통해 학교로 보내는 벅찬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어머니 이명준 씨는 말했다. “사라는 두 살 반부터 ‘세인트 메리 교회 유아원’에 다녔어요. 조기 교육을 위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우리 둘이 모두 박사 학위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탁아소 개념으로 보낸 것이 사실입니다. 유아원은 제가 다닌 펜실베이니아 대학 부설 유아원이 가장 좋았지만 비싸서 보낼 수가 없었죠.” 사라의 집 근처에는 유펜 부설 유아원 외에 두 개가 있었다. 한 곳은 아이들을 나이별로 나누어 분반 교육을 시키는 곳이었고, 세인트 메리 유아원은 두 살 반에서 다섯 살까지의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보호했다. 사라의 어머니는 이때 세인트 메리를 선택했다.
“사라를 길렀을 때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남동생 영진이가 태어났죠. 당시 동생이 없는 사라를 위해서는 여러 나이층의 아이들이 섞여서 생활하는 세인트 메리가 성격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6개월의 차이는 큽니다. 세인트 메리에서는 기저귀를 찬 아이들을 조금 큰 아이들이 돌봐주는 등 어수선한 가운데 휴머니티가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부모들은 모두 세인트 메리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은 나이별로 아이들을 공부시켜 준다는 이유였죠.”
세인트 메리 유아원의 남자 보모 로베르토 선생은 키가 크고 와일드한 재즈 드럼 주자였다. 그는 아이들이 원하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교육관을 가졌다.로베르토는 어느 날 훌라후프를 새로 사와 아이들에게 놀게 했다. 아이들은 서로 좋아하며 열심히 하다가는 곧 싫증을 내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사라는 하루종일 훌라후프만을 해 로베르토 선생이 억지로 데려다 점심을 먹였다. 로베르토는 유아원의 아이들이 다른 스케줄을 하는 동안 사라는 훌라후프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네 살의 사라는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유아원에 오면 훌라후프만 했고 3일 만에 드디어 10번을 돌렸다.
로베르토 선생은 사라의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라는 굉장히 투지가 좋은 아이입니다. 쟤가 좋아하는 것만 찾으면 사라는 무엇인가 해낼 겁니다.” 사라는 일곱 살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3년 뒤에 이 음악회에 찾아온 로베르토 선생님은 말했다. “거봐요. 내가 사라는 좋아하는 것만 시키면 무엇인가 해낼 것이라고 했죠.”
수도원같이 엄격한 ‘홀리 차일드 유치원’
다섯 살이 되자 사라는 ‘홀리 차일드(Holy Child) 유치원'에 보내졌다. 홀리 차일드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선생님은 모두 수녀들이었다. 이곳은 지금까지 사라가 다녔던 세인트 메리 유아원과 거의 반대되는 수도원 같은 분위기의 교육 기관이었다.
홀리 차일드는 질서를 중시했다. 유아원에서 자유롭게 크던 사라는 홀리 차일드의 교육 체제와 크게(번번이) 충돌했다.사라는 집에 와서 말했다. “엄마, 난 홀리 차일드가 싫어. 여기서는 수녀 선생님께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냥 말하면 안 된대. 먼저 가만히 뒤로 가서 수녀님 등 뒤에 손을 얹어 수녀님이 뒤돌아보면, 그때 하고 싶은 말을 해야 된대.” 세인트 메리 유아원에서 로베르토 선생님과 2살 반부터 4살까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하며 뛰놀던 사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같은 미국에서도 세인트 메리와 홀리 차일드는 전혀 상반된 교육 방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교육 제도는 이렇다’고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두 기관의 차이는 오히려 미국 교육 제도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라가 유치원을 너무 싫어하자 어머니 이명준 씨는 서울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 최안분(崔安分)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사라가 유치원이 싫대. 어떻게 할까?” 최안분 씨는 “네 딸이 너무 부산한 면이 있었는데 잘됐다. 그냥 다니게 해라”고 했다. 이명준 씨는 사라와 관련된 의사 결정에서 중요한 갈등이 생길 때면 자신의 어머니 최씨를 찾는다. 최씨는 여성으로는 국내 최초로 서울 공대(화공과)를 졸업했다. 최씨의 어머니도 평안북도 의주에서 치과 의사를 하셨던 신여성이었다. 사라는 외할머니의 예견대로 세인트 메리 유치원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부산하기만 하던 사라가 조금은 차분해졌다.
사라는 말하는 것이 느렸다. 두 살 반이 되어서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글씨를 알기 시작한 것은 세 살이 넘어서였다. 사라가 글을 알고부터 이명준 씨는 책을 많이 사다 주기 시작했고, 사라는 그것을 즐겨 읽었다. 하지만 이것은 공부하는 부모들을 가진 아이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일이다. 당시 아빠 엄마는 모두 박사학위 공부에 바빴다. 집에 와도 각자 책 읽는 시간이 많아, 사라는 구석에서 혼자 책을 보며 놀 수밖에 없었다.
사라는 역시 언어에 대한 감각보다 음(音)에 대한 감각이 빨랐다. 두 살 반이 돼 말을 막 시작하자 아빠 장민수(張敏洙) 씨의 바이올린 연습곡이 장조에서 단조로 바뀌면 사라는 “엄마, 아빠가 왜 지금 슬퍼?”라고 물어 타고난 음감(音感)을 보였다.
사라의 네번째 생일날, 아빠는 자신의 비싼 바이올린을 가지고 노는 딸을 달래기 위해 장난감 같은 1/9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사 주었다. 바이올린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 지 한두 달이 지났을까. 하루는 아빠가 친구들과 집에서 멘델스존 트리오를 연습했다. 아빠가 친구들을 바래다 주러 아파트 밑으로 내려갔을 때, 사라는 기성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멘델스존 트리오의 바이올린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명준 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 사라가 당신 없을 때 멘델스존을 연주했어요.”
최초로 찾아온 행운, 딜레이 교수와의 만남
사라 장에게 최초로 찾아온 행운, 그것은 딜레이 교수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었다.도로시 딜레이 교수는 잘 알려진 20세기 말 최대의 바이올린 교사. 중요한 제자만 해도 이차크 펄만, 미도리, 초량 린, 나디아 손넨버그, 나이젤 케네디 등 현존 최정상급 바이올린 주자들을 총출동시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라의 아버지 장민수 씨도 8년간 딜레이에게 배웠다. 아버지 장민수 씨와 어머니 이명준씨는 사라와 캐나다 여행을 다녀오다가 뉴욕에 들르게 됐다. 사라 가족은 뉴욕에 온 김에 딜레이 선생님에게 잠시 인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딜레이 교수는 인사 온 제자 옆의 사라를 보고 갑자기 “너도 바이올린 켤 줄 아니?” 하고 물었다. 여섯 살의 사라는 천진스럽게 여러 곡을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딜레이 교수는 “그럼 한번 내 앞에서 바이올린 켜 볼래?”라고 제의했다. 사라의 어머니는 주차 사정상 차를 줄리어드 학교 앞에 세워두고 운전대에 앉아 있었고, 바이올린은 차 트렁크에 있었다. 아빠가 바이올린을 가지고 오자, 그 순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라는 신이 나서 연주를 시작했다. 딜레이 교수는 흡족해 하며 몇 곡을 더 시켜 보고는 아빠에게 즉석에서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의 입학을 제의했다. 이렇게 사라는 뜻하지 않게 바이올린 연주가로의 입문을 하게 됐다.
줄리어드와 딜레이 교수와의 관계는 우리 나라의 경직된 교육 제도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딜레이 교수는 1999년 현재 81세로 우리 나라 같으면 16년 전에 은퇴해 뒤로 물러나야 할 나이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나라로 치면 교수 정년 65세가 넘어서 더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 교수는 능력이 있어도 65세가 넘으면 학교를 나와야 하고, 능력이 없어도 65세까지는 버틸 수 있다.
사라의 엄마는 딸에게 “자신은 주로 운이 좋고 찍기를 잘해 경기여고, 서울대 음대,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베이니아 박사 과정 등의 입학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얘기해 왔다. 엄마는 미국에 와서 딜레이 교수와의 만남도 큰 행운으로 감사하고 있다.
엄마 이명준 씨는 하루는 펜실베이니아 주 운전 면허를 갱신하는 필기 시험을 치러야 했다. 이씨는 스와스모 대학의 강사로 음악사, 화성학 등을 미국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 강의해야 하기 때문에 준비가 바빴다. 미국 운전 시험은 “포도주를 한 잔 먹고 한 시간 지났을 때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얼마냐?”는 식으로 생소했다. 엄마는 바빠서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시험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30~40분간을 황급히 예상 문제집을 넘겼다. 면허 시험은 6개 틀린 것부터 불합격이었는데 시험 결과는 5개로 합격이었다. 사라는 “엄마는 역시 항상 운이 좋아”라고 말했다. 이명준 씨는 이때 번쩍 정신이 들었다. 엄마로서 사라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해야 할 순간임을 감지한 것이다. “사라야, 엄마가 매번 시험을 운좋은 찍기로만 통과한 것은 아니야. 엄마는 평생 동안 무엇인가 읽은 것이 있었어. 그리고 짧은 시간이나마 최선을 다했어.”
아스펜 음악제의 신문팔이 사라 장
7세의 사라 장은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미국 ‘아스펜 음악제’에 갔다. 사라는 어머니에게 신문팔이를 해 보겠다고 졸랐다. 아버지 장민수 씨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어머니 이명준 씨는 달랐다. 어머니는 “하고 싶으면 해라. 못할 게 뭐 있니”라고 흔쾌히 허락했다. 사라는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우체국 골목하고 슈퍼 입구가 잘 팔릴 거야. 나는 우체국을 맡을게, 너는 슈퍼를 맡아.” 이렇게 해서 사라는 매주 목요일에 한 번 발간되는 조그만 지역 신문 <아스펜 타임스>의 가판원이 됐다.
콜로라도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아스펜은 우리 나라로 치면 강원도 용평과 같이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붐비는 미국의 이름난 휴양지. 이곳에는 1949년부터 매년 여름 미국 최대의 음악제가 열려 전세계로부터 세련된 관광객들과 젊은 음악도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1993년의 경우 총 참가 인원 925명 중 우리 나라 음악도들이 101명으로 밝혀져 아스펜 음악제는 이미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스펜은 오래 전부터 사라 가족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기도 하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스펜 음악제에 학생으로 등록해 매년 공부를 했기때문에 사라는 기저귀를 찰 때부터 2세 때까지 있었다. 3년의 공백기 이후 사라가 6세 때 아버지는 아스펜의 교수가 됐다. 아스펜 교수 자녀들에게는 자녀들의 무료 등록 특전이 부여된다. 따라서 사라는 엄마 따라온 코흘리개가 아니라 정식 학생으로 아스펜에 복귀하게 됐다.
7살짜리 무명의 아스펜 신문팔이는 일 년 후 소문을 듣고 오디션을 자청한 주빈 메타를 만난다. 메타는 자기 집으로 8살의 사라를 초청해 연주를 시켜 보고는 급히 이틀 뒤에 열릴 뉴욕 필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바꾸어 버린다. 메타는 사라를 독주자로 내세운 협주곡을 연주하기 전, 이례적으로 청중들에게 “하늘이 내려 준 음악 천사가 우리 곁에 왔다”고 소개했다. 청중들은 연주 후 10분간의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이 순간이 바로 사라와 가족들이 예상치 못한 삶을 살게 된 출발점이었다.
아스펜은 처음엔 어린 사라에게 아버지가 교수인 덕분에 무료로 즐길 수 있는 휴양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라는 벌써 이곳에 핀커스 주커만과 같은 바이올린의 대선배와 함께 협연하는 기성 음악인으로 섰다.
1994년 여름 아빠는 교수로서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사라 자신은 협연자로서 7월중 잠깐 들러 협연을 가질 뿐이었다. 이후에는 아빠를 아스펜에 두고 엄마와 함께 자신의 소문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하는 전세계 청중들을 위해 연주 여행에 나섰다. 아스펜은 더 이상 사라가 신문팔이하며 뛰놀 수 있는 휴양지가 아니다.
아스펜은 미국 전역에서도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 부호들의 별장들이 곳곳에 있다. 사라의 아스펜 친구들은 지역 토박이 아이들, 음악제 참가 어린이들, 별장집 아이들로 뒤섞여 있다. 신문팔이로 뭉쳐진 이들과의 우정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모나코 연주 여행에서도 아스펜에서 사귄 여자 친구가 호텔로 찾아와 밤새 떠들고 함께 자고 갔다. 한 번은 로스앤젤레스 연주가 끝나고 후원자가 베푸는 격식을 갖춘 디너가 있었다. 사라는 “아스펜 친구 니콜이랑 함께 갈 수 없다면 나 못 가는데”라고 엄마에게 약간의 협박을 했다. 엄마는 사라가 음악적으로는 성인의 세계에 근접해 있다 해도 파티에 가면 여전히 아무도 말할 상대가 없는 소녀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엄마는 황급히 주최측에 전화했다. “만찬 참석자 명단에 니콜이란 이름을 추가로 부탁해도 될까요?”
누워서 공부하는 저먼 타운 프렌즈 스쿨
사라 장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퀘이커 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 초등학교인 저먼 타운 프렌즈 스쿨(German Town Friends School)로 옮겼다. 이 학교는 12학년 과정까지 있다. 저먼 타운 프렌즈 스쿨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나라 초등학교와는 크게 다른 교육 원칙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 이명준 씨는 학교에서 학부형을 부르는 날에 여기에서와 같이 당연히 혼자 갔다. 가서 보니 저먼 스쿨은 양부모 동시 상담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다음 상담 시간에는 아버지도 갔다. 아이들은 마룻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오는 길에 장씨는 부인 이명준 씨에게 “오늘은 수업을 안하는 날이었나?”라고 물었다. 이씨는 “아뇨, 아까 본 광경이 수업 시간이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사라는 2학년 내내 아이들과 교실 바닥에서 같이 뒹굴며 지냈다. 학교에서 우리 나라식으로 무슨 공부를 시키고 있다는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공부한 이명준 씨는 ‘미국 초등학교가 도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방목하다시피 아이들을 내버려둘 것인가’가 답답하기도 했다.
개인별 책상은 3학년이 되어서야 할당이 된다. 그래도 공부는 별로 하는 것이 없다. 이때까지 대부분의 학부형들은 담임 선생님에게 수시로 불려가 “댁의 자녀는 아주 우수한 아이”라는 말만을 들어야 한다. 저먼 타운 프렌즈 스쿨은 느슨한 것 가운데서도 각 어린이들의 특성을 파악하려 신중을 기하고 있다. 5학년부터는 전문 정신 상담사를 동원해 성장에 따른 아동들의 심리 상태 변화에도 예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놀리기만 하는 것 같던 저먼 스쿨의 학과 공부도 4학년부터는 만만치 않아졌다. 개인별 과제가 있는가 하면, 여러 명이 하는 단체 과제도 있다. 사라는 필라델피아에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체 과제를 못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우리 나라 대학 보고서와 같이 여러 책을 뒤져야 하는 개별 과제만큼은 열심히 했다.
연주 여행 때문에 과제를 낼 수 없을 때는 비행기와 호텔에서 공부를 해, 결과물을 팩스로 보냈다. 하루는 아침에 호텔을 나가며 숙제를 마친 팩스를 보냈다. 연주를 마치고 밤에 호텔로 돌아와 보면 그날로 선생님의 답장 팩스가 날아와 있었다. 거기에는 곳곳에 숙제에 대한 자세한 지도 사항과 함께 “브라보 사라 장, 멋진 연주 여행이 되기를”이란 축하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 미국 선생님들의 철저함과 신속성에 놀랐다.
저먼 스쿨은 저학년 아이들을 놀리는 가운데서도 우수 학생을 선별, 상급 과정을 특별 지도했다. 사라는 2학년 때부터 다른 학생 한 명과 산수의 상급 과정을 특별 지도받았다. 지도비를 별도로 내는 상급 과정은 담임 선생님이 인정하는 극소수의 학생만 참여해 숙제가 많이 주어지는 등 부담이 크다. 사라는 6학년까지 내내 산수 상급 과정을 특별 지도받았다. 사라는 7학년 때도 특별 지도를 추천받았으나 사라의 어머니는 여기에 참여시키지 않기로 했다. 누워 뒹굴며 시작한 저먼 스쿨의 교육 내용이 해가 갈수록 방대해지고 심도를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준 씨는 ‘사람의 에너지는 똑같은데 사라가 수학도 잘하고, 바이올린도 잘할 수 없다. 이제는 사라에게도 쉴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판단했다.
줄리어드의 기계체조 선수, 사라 장
6세의 사라 장이 처음부터 줄리어드 음악원을 좋아했던 이유는 바이올린 때문만이 아니라 자판기 때문이었다. 줄리어드 음악원 로비는 온갖 종류의 자판기로 가득 찬 자판기 천국.사라는 어머니 이명준 씨가 호주머니에 두둑히 넣어 주는 동전을 가지고 기분 내키는 자판기를 골라 꺼내 먹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이씨는 “미국 부모들은 아이들이 코카 콜라 마시면 큰일나는 줄 알고 못 먹게 난리죠. 하지만 저는 사라가 크게 잘못 나가는 일 외에는, 대개는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라며 “제가 억지로 콜라 먹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현재 사라 나이쯤 되면 친구들과 함께 다이어트니 뭐니 하면서 스스로들 콜라를 안 먹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콜라를 들이키고 난 사라는 레슨 시간을 기다리며 줄리어드의 카펫이 깔린 로비에서 갖가지 기계체조를 시작한다. 사라는 기계체조팀의 일원으로 5세 때 영국 BBC TV에 출연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손가락이 생명인 음악도들에게 부상 위험이 따르는 체조란 양립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라가 4살부터 체조교실에 보내진 것은 부모들이 딸을 바이올리니스트로 키울 것을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사라는 체조 이외에도 수영, 승마, 롤러 블레이드 등 운동에는 만능에 가깝다. 연주 여행 때 묵고 있는 호텔의 수영장 방문은 생략하기 힘든 과정이다.
사라의 음악적 재능이 템플 대학 바이올린 교수인 아버지 장민수 씨와 스와스모 대학 작곡 전임강사인 어머니 이명준 씨로부터 이어진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라가 운동을 좋아하는 것도 내력이다. 사라의 어머니는 여고 시절 수영선수로 활약했고 스키, 수상 스키, 농구 등을 즐겼다. 아버지 장민수 씨도 수영과 탁구는 선수급이다. 장씨는 프로 야구 보는 것도 좋아한다. 사라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야구 중계를 보며 딸의 바이올린을 가르치곤 했다. 필라델피아 팀이 지는 날이면 아버지는 귀가 예민해져 딸의 음악에 대해 지적이 많아졌고, 연습 시간은 길어지게 마련이었다. 필라 팀이 이길 때면 아버지는 사라에게 ‘좋았어’를 연발하며 연습은 금방 끝났다.
사라의 남동생 영진(永辰)이는 동네 야구선수다. 사라는 유니폼을 입고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동생 영진의 사진을 자신의 ‘과르네리 델 제수’ 바이올린 케이스에 붙여 가지고 다닌다. 1994년 4월 5일은 사라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이날 사라는 영국 런던에서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하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고, 연주 후 앤 공주가 초청하는 리셉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날 더 중요한 일이 터졌다. 동생 영진이 클럽 대항 야구대회에서 자신의 1호 홈런을 날린 것이다. 사라는 연주 때문에 동생의 홈런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
1994년 6월 10일 서울 연주를 끝낸 장영주 양은 일본에서 연주 여행을 계속했다. 일본에서의 밀려드는 인터뷰는 NHK TV, 요미우리, 아사히, 닛케이 등으로 엄선됐다. 필자는 몇 시간 동안 차례로 계속된 일본 인터뷰 과정을 사라의 보호자인 양 함께 참여했다. 요즘도 기계체조를 계속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옆에서 “기계체조를 하면 손에 굳은 살이 생기고 둔해져 그만두었다”고 답했다. 이때 사라는 “아빠가 보지 않을 때는 지금도 가끔 기계체조를 즐긴답니다”라고 말해 좌중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사라 장의 과외 공부-선생님은 빨간 스포츠카를 모는 유펜 치과대학생
사라 장은 1993년 여름 방학 동안 1994년 일 년간의 수학 진도를 미리 공부했다. 선생님으로는 유니버스티 오브 펜실베이니아(유펜) 치과대학을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이 초빙됐다.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오는 그는 키가 크고 세련된 멋쟁이였다. 사라의 어머니 이명준 씨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때 등 중요한 고비마다 과외를 통해 공부를 보충한 경험이 있다.
이씨가 보기에는 미국 선생님들의 공부 진도 나가는 것이 너무 답답해 일부러 한국인 유학생을 택했다. 이씨는 유펜의 치과대학생에게 “사라가 필라델피아에 있을 수 있는 기간은 2주일입니다. 이 기간 동안 매일 오든 이틀에 한 번 오든 선생님 판단대로 하셔서 수학책 한 권만 미리 공부시켜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유펜의 유학생은 한국식 과외 방식대로 초고속으로 사라를 집중 지도했다. 이후로 사라는 연주 때문에 학교를 빠지게 되어도 수학만큼은 큰 어려움 없이 진도를 쫓아갈 수 있었고, 학교측에서는 수학 우수 학생을 위한 특별 과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할 정도가 됐다.
사라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무한히 놀리는 미국 교육 제도에 찬성하면서도, 한국식 과외 공부에 대해 긍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라는 또 프랑스어를 개인 지도받았다. 사라를 특별히 사랑해 주는 뉴욕 필의 쿠르트 마주어는 사라에게 독일어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사라의 어머니는 프랑스 선생님을 찾기 위해 필라델피아 알리앙스에 전화를 했다. 개인 지도를 요청한다고 했더니 전화받은 사람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을 잘 안다며 한 선생님을 소개해 주었다. 그 선생님은 사라의 집 근처 미국 아이들에게 이미 프랑스어를 그룹 출장 지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미국내 유대인계 가정에서도 관심 있는 부모들은 과외 지도에 열심이었다.
사라의 아버지 장민수 씨도 과외 세대에 속한다. 장씨는 서울에서 어려서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그림, 웅변 등을 개별 지도받았다. 초등 학교 때는 박목월(朴木月) 시인에게 직접 작문을 지도받기도 했다. 템플대 교수로 있는 장민수 씨에게는 학교, 학생들, 서울의 친지, 세계 각국의 지휘자, 오케스트라, 사라의 매니지먼트 회사 ICM, 레코드 전속 회사 EMI 등으로부터 수많은 편지와 팩스가 날아온다. 밀려드는 편지에 시간 때문에 일일이 답장을 쓰지 못하면 이명준 씨는 “대시인(大詩人)에게 작문까지 배운 사람이 편지 한 장 못 쓰느냐”고 슬쩍 놀려댄다.
사라네 집은 아파트에서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집을 팔고 나간 사람은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한 아이스하키 선수. 사라는 아이스하키 선수에게 “언제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하면서부터 걸상에 의지해 가면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하키 선수도 사라에게 “너는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사라는 “4세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둘은 서로 깔깔대며 웃었다. 이러한 질문은 두 사람이 그간의 수많은 인터뷰에서 가장 바보스런 질문으로 생각했던 것이고, 대답하기에 가장 짜증스런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특별한 사람의 대화는 특별한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그 길에 들어서서 특별한 지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장영주의 바이올린 공부와 스승들
장영주 양의 바이올린 공부 과정은 일반인이나 음악도들에게 ‘놀라움의 대상’일 뿐 ‘모방의 대상’이 되기는 힘들다. 영주의 바이올린 공부는 4세 생일 때부터 시작된다. 영주에게 최초 최대의 스승인 아버지 장민수 씨는 ‘스즈키 교본’을 사용했다. 영주는 통상 한 권 공부에 2~6개월 걸리는 ‘스즈키 교본’을 몇 주 또는 며칠 만에 해치우는 경우가 많았다. 4세의 영주는 연습곡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되면 장조의 곡을 단조로 바꿔 가며 연주함으로써 아빠의 귀를 의심케 했다.
6세가 되자 영주는 줄리어드 음악원 예비학교에 보내졌다. 영주는 딜레이 교수가 내주는 과제곡을 그것이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건, 바르톡의 ‘바이올린 협주곡’이건 다음 토요일이면 언제나 암보로 준비해 갔다. 영주가 8세에 뉴욕 필과 협연한 이후부터 영주에게 스승은 아버지와 딜레이 교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영주가 세계를 다니며 만나게 되는 뛰어난 음악가들이 모두 영주의 스승 역할을 하고 있다.
첼리스트 요요 마는 영주와의 협연 연습을 위해 영주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영주와 한두 번 협연곡을 맞추어 본 요요 마는 무엇이 통했는지 신이 나서는 서재에서 온갖 악보를 꺼내 왔다. 요요 마는 영주에게 ‘이 곡도 해보자, 저 곡도 해보자’ 하며 영주와의 음악 행위 자체를 즐겼다. 지휘자 콜린 데이비스는 1993년 1월 영주의 두번째 음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영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오랜 시간에 걸쳐 차이코프스키를 분석해 주었다.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는 1994년 3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영주와 협연을 가진 후, 영주의 관광 가이드로 나섰다. 마주어는 영주를 데리고 바흐가 수백 곡의 칸타타를 만들고 지휘했던 토마스 교회를 구경시켰다. 마주어는 또 멘델스존이 살던 집에 데리고 가서는 일반인은 접근 금지된 멘델스존이 쓰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마음껏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같은 시간은 마주어가 라이프치히 관광을 시켜 준 것이 아니라, 영주에게 서양 음악사의 뿌리와 배경을 확인시켜 준 진정한 음악 교육의 순간들이었다.
영주는 이제 서로가 정상의 음악가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대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무한히 확대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음악적으로는 이미 거인이 돼, 부모의 품을 떠나 버린 듯한 장영주씨는 지금도 연주회가 끝나면 어머니 이명준 씨에게 “오늘 연주 어땠어?”라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고 있는 어머니는 언제나 “영주야, 너무 잘했어”라고 격려해 준다. 영주는 “엄마 귀는 엉터리야. 들은 대로 말해 줘야지 매일 잘했다고만 하면 어떻게 해”라고 따진다. 영주가 아무리 투정을 부려도 어머니의 귀에 영주의 연주는 언제나 아름답고 대견할 뿐이다.
장영주의 유창한 한국어의 뿌리는 할아버지
장영주 씨가 한국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는 곳. 그곳은 바로 경기도 용인의 할아버지 묘소이다. 사라 가족은 출국 직전에도 다시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난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라가 유창한 한국어를 말하고,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유지(遺志) 때문이다. 농수산부 차관을 지낸 할아버지 장덕희(張德熙) 씨는 아들 장민수 씨에게 일렀다. “네가 미국에서 자식 낳고 기른다고 영주가 우리말 쓰지 못하면 한국에 와서 나 찾을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는 손녀에게 ‘우주(宇宙)에서 영원(永遠)히 빛나리라’는 뜻의 이름 영주(永宙)를 지어 주셨다. 아들과 손녀는 한국말을 쓰는 것과 이름을 빛내는 것 모두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잘 지켰다. 그래서 입출국 때마다 모든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용인을 찾는 발걸음이 가볍다.
장영주의 미국 이름은 Sarah Chang. 사라는 천주교 세례명이다. 장민수 씨는 영주가 9세에 처음 음반을 낼 때 Young Joo Chang이란 이름을 주장했다. EMI 사장은 8세에 뉴욕 필과의 협연 이후 이미 Sarah Chang이란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영주 장’을 쓰면 새로운 음악가로 혼동해 안 된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장민수 씨는 당시 ‘영주 장’을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봐 EMI 음반에서 Sarah Chang 이라는 이름 대신 Young Joo Sarah Chang으로 바꿀 계획이다. 장씨가 이처럼 고집스럽게 한국 이름에 집착하는 것은 영주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한국인으로의 뿌리 교육 때문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버지의 보수성은 사라의 귀고리 사건에서 다시 한 번 증명된다. 미국에서 사라 나이 또래는 진작부터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고 다니고 있다. 사라는 아버지의 반대로 귀고리를 할 수 없었다. 어머니 이명준 씨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딸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딸 편이다. 그러나 함부로 가장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영주 친가와 외가의 가풍(家風)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고급 공무원을 역임한 할아버지 장덕희 씨는 유교적 전통 위에 외아들 장민수 씨를 엄하게 교육시켰다. 반면 외할아버지인 서울대 건축과 명예 교수 이광로(李光魯) 씨는 명준 씨를 포함해 딸 다섯을 모두 예술 계통을 전공시킬 정도로 자유롭게 키웠다. 사라 외가는 단체로 청평 호수를 여러 번 헤엄쳐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운동 가족. 명준 씨 동생 양준(良峻, 첼로), 화준(和峻, 바이올린), 옥준(沃峻, 조각가) 씨는 차례로 서울대 여자 스키부 주장을 지냈다. 예술 실기보다 공부를 좋아했던 막내 경준(京峻) 씨는 홍익대 건축과를 졸업했으며, 역시 운동에 만능. 사라의 귀고리 착용 관철을 위해 외가가 총동원됐다.
1993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머니가 영주와 함께 보석상에 갔다. 외할머니가 먼저 외손녀를 위해 60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귀를 뚫었다. 다음은 사라. 이명준 씨는 가장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 그냥 왔다. 귀를 뚫고 돌아온 딸을 보며 아버지의 얼굴은 편치 않았다. 하지만 어른 공경이 몸에 밴 교육을 받은 사위는 장인, 장모 앞에서 함부로 감정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보수’에 대한 ‘혁신’의 우회 침투 전략은 성공으로 끝났다.
에필로그
장영주 씨가 한국에서 나고 길러졌을 때도 그는 오늘날의 Sarah Chang이 될 수 있었을까. 영주 부모들은 1979년 서울서 결혼,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80년 영주를 낳았다. 그의 가족들을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만나 해답을 찾아본 결과, 긍정적 결론을 얻기 어려웠다. 영주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 본 한국과 미국의 교육 제도 차이는 크다.
미국 교육 제도는 근본적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간의 능력 차이를 인정하고 능력에 맞게 특별히 교육시키는 것으로 출발하고 있다. 우리 제도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 같은 학습 능력을 갖춘 학생으로 간주해 교육시킨다. 그 후 대학 입시라는 단 한 번의 관문을 통해 한 책상에서 공부했던 짝과 내가 전혀 다른 학습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음을 확인시킨다.
영주는 우리 교육 제도에 따르면 불법에 가까운 특혜를 누리며 저먼 타운 프렌즈 스쿨을 다녔다. 하지만 이것은 영주와 유사한 사정이 있는 학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 학교로서는 원칙이다. 영주가 해외 연주를 다녀오면 선생님들은 과목별로 방과 후 특별 과외를 시켜 준다. 학교 당국과 협의 후에 실시되고 있는 이 과외는 유료. 영주의 특별 과외는 우리의 경직적 교육 제도로는 인정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의 교육 제도는 장려하는 일보다는 금지하는 일에 익숙해 있다. 계속된 금지 속에 특수성, 개성, 천재성은 발견될 수도, 발전될 수도 없다.
영주는 홀리 차일드 유치원 때도 우수생으로 특별 독서 지도를 받았다. 저먼 타운 프렌즈 스쿨은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우수 학생들을 담임 선생이 찾아내 방과 후 무료 특별 수업을 한다. 중 1 과정부터는 과목별로 각자 수준에 맞는 고급 또는 보통반을 신청해 각자 헤어져 수업을 듣는다.
영주가 줄리어드에서 딜레이 교수에게 배우고 있는 방식도 한국적 교육 기준으로는 이해되기 힘들다. 딜레이 교수는 나이가 81세로 한국의 교수 정년을 한참 넘긴 나이임에도, 정년 이전보다 이후 나이에 더 많은 우수한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가 크다. 딜레이 교수의 지도 방식도 파격적이다. 딜레이 교수는 점심을 먹고 줄리어드로 출근해 새벽 2~3시까지 레슨을 계속한다. 영주의 아버지 장민수 씨는 새벽 4시에 지도받은 적도 있다. 우리 실정이라면 신분이 교수라 해도 자정이 되기 전에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쫓겨 나와야 되는 것이 보통이다. 더욱이 자정을 넘겨 수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미국은 특별한 학생은 특별하게 키우는 강한 탄력성을 가졌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가진 강력한 힘의 원천 중의 하나다.
대학 입시 문제는 제도 철폐로 풀어야 한다
대학 문제는 역대 교육부 장관의 재임 시기를 결정하는 핵심 사안이다. 대학 입시를 비롯해 교육의 큰 틀을 야심적으로 바꾸려 했던 장관일수록 단명했다. 김대중 정권의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해찬 씨는 순수하고 열정적 인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기존 교단과 학부모 양쪽 모두의 거센 반대에 직면해 장수 장관의 대열에 끼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대학 입시 문제를 제도 개혁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해찬 장관이 가장 불만을 가졌던 사항 중의 하나가 ‘대학 교육 문제를 곧 대학 입시 제도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장관이 대학 입시를 앞둔 당사자, 대학, 고교들이 겪어야만 했던 구체적 어려움에 대해서는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학 입시 문제는 제도 개혁으로 해결해서는 힘들다. 제도 철폐로 풀어야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공무원 규제 완화를 외쳐 왔지만 현장에서는 오히려 규제가 강화되었다고 아우성이다. 이때 필요한 정책은 규제완화가 아니라 규제 철폐인 것이다. 교육부와 청와대 비서실 교육팀이 대학에 대한 정책을 내놓지 않을수록 우리 대학은 발전할 수 있다.
먼저 사립 대학부터 모든 면에서 교육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학생 선발, 학과별 정원, 학과 개설 및 폐지, 졸업 사정, 수업료, 교수 임용 등 사립 대학의 모든 문제는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교육부는 국·공립 대학에 대해서만 신경쓰면 된다. 교육부에 고등 교육 지원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조직이 있다. 대학원 지원과, 대학 행정 지원과, 대학 학사 제도과, 대학 재정과 등을 밑에 두고 있는 사실상의 대학국이다. 교육부 전체가 2실 3국의 조직이니 대학국은 교육부 전체의 약 5분의 1의 기능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학 교육은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임에 틀림없으나 대학국이 작아져야 오히려 대학 교육이 바로 선다. 대학국은 대학과나 대학 담당계 정도로 축소돼야 한다. 교육부가 대학 입시 관리를 비롯해 대학의 설립 및 학과 개설, 학생수까지 전부 통제하고 있으니 이런 큰 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경원대학교의 급성장 과정 실화. 경원대 설립자는 큰 부자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어렵게 온 가족이 동원돼 중·고등학교 운영을 시작했다. 이 설립자는 뛰어난 외교 수단으로 대학까지 열게 되었다. 당시 수도권 대학은 대부분 학생 총정원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으나, 경원대학만큼은 계속 입학 정원이 늘며 교세가 확장됐다. 교육부 관계자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던 설립자의 개인적 능력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대학 진학 희망자가 넘쳐나 수도권 대학들은 학과 불문하고 높은 경쟁률을 보일 때였다. 이 설립자는 기존 학과들의 정원이 동결되자 새로운 학과 개설 정책을 폈다. 이것도 물론 교육부의 인허가 사항이다. 이 설립자는 전세계에 유일 무이한 ‘민방위학과’ 개설까지 신청했다. 이러한 넌센스가 지속되는 이유는 교육부가 대학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고 있으며, 그 지위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와 수요자가 해당 대학의 권위를 조사하게 하라
석사학위증, 박사학위증에 교육부 장관의 직인 날인이 왜 필요한가. 교육부 행정력의 낭비이자, 국민 세금의 낭비이다. 교육부가 전국에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을 일일이 확인하고 번호를 부여하고 학위증에 도장까지 찍어 줄 필요는 전혀 없다. 대학에서 학위받는 사람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도장이나 찍을 교육부 직원을 증원해야 하는 불합리한 사태 가 진행중인 것이다.
미국에는 가짜 대학, 가짜 박사가 많다고 한다. 미국 가짜 박사 학위로 국내에서 교수에 임용되었다가 들통난 사례들이 종종 보도된 시절이 있었다. 자연스런 일이다.
어떤 특정인이 졸업한 대학이 어떤 학교이고 그가 받은 학위가 진짜인가의 여부는 그 정보가 필요한 사람이나 조직이 직접 확인하게 하면 된다. 특정 대학이 석·박사를 양산한다고 할 때 교육부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곧 양산된 그 대학 석·박사 품질을 믿지 않게 되고, 학생들은 비싼 학비와 시간을 투자해 그 대학에서 석·박사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교육부가 석사, 박사 인력을 직접 관리할 필요가 없다. 학사 인력도 마찬가지다. 각 대학이 무슨 학과에서 몇 명을 뽑아 졸업장을 주건 말건 그것은 전적으로 각 대학의 권리이자 정책이다. 한 대학이 인기 있는 학과 정원을 몇 배 늘려 지나치게 많은 인력을 배출할 때 사회는 곧 해당 대학 해당 학과 출신의 신뢰성을 의심하게 된다. 또 각 대학이 해당 학과의 정원을 늘리고 줄이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수요에 즉시 대응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다.
필자가 조선일보사의 의뢰로 지난 1994년 <주간조선>에 썼던 글 “떠나야 산다”를 전재함으로써 아직 전혀 개선되고 있지 않은 우리의 교육 현실을 비춰 보고자 한다.
장한나와 장영주의 조국 탈출 성공 사례
‘떠나야 산다’. 지존파 사건, 증인 보복 사건에 이어 성수 대교 붕괴로 생존 자체에 대한 총체적 위협을 받자 흩어진 민심은 ‘이 땅을 떠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자조적 화두(話頭)를 유행시키고 있다.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조기(早期) 조국 탈출’로 성공한 두 명의 음악가가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양(미국명 사라 장)과 첼리스트 장한나 양. 이들이 한국에 계속 머물렀거나 여기서 태어났으면 성공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특히 지난 10월 15일 세계적 권위의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첼로 콩쿠르’에서 초등학교 재학생으로 기라성 같은 성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단독 우승을 차지해 세계 음악계를 경악케 한 장한나 양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세계 첼로계의 거성 로스트로포비치는 11세의 장한나 양이 자신의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자 “믿을 수 없다. 이것은 세계적 센세이션이다”라며 매니저로 직접 나서 향후 장양의 모든 연주 일정과 미래를 책임질 것을 공표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 등 여러 신문들도 새로운 천재의 탄생을 대서 특필했다.
이런 낭보 가운데서 언제부터인지 우리 나라는 엑소더스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장한나 양 부모들은 낭비적 해외 유학 방지와 음악 영재들의 조기 교육을 위해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세워진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존재는 한나에게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국가는 왜 국민의 세금으로 이 학교의 새로운 건물을 짖고 투자를 계속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장한나 양과 장영주 양의 조국 탈출 성공 사례를 통해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을 돌아본다.
영주와 한나,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은 크게 다르다. 장한나 양의 경우에는 성공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조국 탈출이었고, 장영주 양의 경우에는 한국 명문가의 유학생 부모 밑에서 미국에서 태어나 여유 있는 출발을 했다.
장한나 - 노력 끝에 찾아온 행운
먼저 장한나 양의 경우. 한나는 한양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어머니의 기준으로는 수원 매탄초등학교 재학 시절 이미 또래의 경쟁자들에 비해 월등했다. 한나는 1991년 ‘월간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했고, 서울시향이나 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 등의 공개 오디션에 나가 협연자로 뽑혀 무대에 섰다. 잘 나가던 한나는 1992년 ‘이화 경향 콩쿠르’에 나가 3등을 했다. 이 사실은 한나의 가족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결과를 승복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1991년에도 ‘월간 음악 콩쿠르’ 1등 수상자에게 주어지던 일본 방문 연주회를 비용 부담 때문에 갈 수 없었던 것이 가슴 아프게 새로이 기억됐다.
한나의 부모들은 딸의 엄청난 잠재력을 믿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 땅에서는 결코 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한나 아버지는 숙고 끝에 직장과 한국에서의 모든 기반을 포기하고 원점에서 출발한다는 각오를 했다.
한나의 가족은 1993년 1월 조국을 떠나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타국에서는 계속 나서는 독지가들의 후원 속에 오늘과 같은 성공을 얻어냈다.
왜 우리 나라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인가. 사실 한나의 아버지 장용훈(張龍勳) 씨도 우리 사회의 든든한 한 구성원이었다. 외국어대 불어과와 서강대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한 장씨는 한국갤럽연구소 시장조사팀의 유능한 책임자였다. 그는 딸의 공부를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한다며 38세의 나이에 유학생 비자로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왔다. 그의 미국 입국 목적이 유학이 아닌 것은 처음부터 분명하다. 그는 아직까지 미국 체류 문제부터 딸에게 너무나 절실한 악기 구입 문제, 비싼 주거비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런 고난의 앞날이 뻔히 예견됨에도 왜 한나 부모들은 조국을 떠나야 했나. 이유는 외동딸 한나가 첼로를 너무나 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국의 품은 딸의 재능을 받아 줄 만큼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한나 양의 오늘에는 역시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우리 나라의 전형적 어머니도 있었다. 음악을 공부한 어머니 서혜연(徐慧姸) 씨는 일찍부터 딸에게 첼로를 시키려 계획을 세웠다.
한나 가족은 국내에 있을 때 크고 작은 모든 첼로 연주회를 들으러 다녔다. 동아, 중앙 콩쿠르 등도 빠짐없이 들었다. 여기서 성인 경쟁자들과 싸워도 결코 크게 뒤질 실력이 아님을 확인한 것은 뒷날 줄리어드 예비학교의 지도교수가 성인 콩쿠르 출전을 반대하는 데도 나가,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우승하게 되는 먼 계기가 됐다.
마이스키의 1992년 예술의 전당 내한(來韓) 연주회에서는 딸과 엄마는 발매 즉시 구입한 표로 1층 맨 앞의 비싼 좌석에 앉았고, 아버지는 따로 3층 맨 뒤 가장 싼 좌석에 앉았다.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세계 첼로계를 호령하고 있는 마이스키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나의 가족이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후 아버지는 유학생 신분에 의한 취업 제한 문제로, 한나는 줄리어드에서 지도교수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미국에서 처음 이사 간 집에서는 첼로를 밤 12시까지 연습해도 좋다고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다. 실제로 한나가 밤낮 없이 연습을 하자 주인집 아들은 음악을 크게 틀어 연습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미국에 온 것을 후회도 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최초의 은인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미샤 마이스키였다. 1993년 여름 이탈리아에서 시에나 페스티벌을 주도하던 마이스키는 테이프 오디션을 통해 한나를 참가자로 받아 주었다. 이탈리아로 간 한나의 실제 연주를 듣고 마이스키는 깜짝 놀라 “너의 바하 ‘무반주 첼로 조곡’ 연주는 완벽해 손댈 곳이 없다. 너는 반드시 위대한 첼리스트가 된다”며 페스티벌 참가비를 돌려주었다. 이후 마이스키는 한나가 유럽에 온다는 소식만 있으면 직접 차를 몰고 비행장을 나갔고, 벨기에 호숫가의 그림 같은 자기 집에서 재우며 가르쳐 이번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우승할 때까지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뉴욕의 한 유대인 악기상도 한나 같은 연주자라면 자격이 있다며 20만 달러짜리 7/8 크기의 첼로를 한 달간 빌려 주기도 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한나의 콩쿠르 우승 이후 한나 미래의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장영주 - 특수성을 인정하는 미국의 교육 과정
한편 장영주의 경우에는 출발부터 순탄했다. 한나의 경우가 자신과 가족의 노력 끝에 행운이 찾아오기 시작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장영주 양의 할아버지 장덕희(張德熙) 씨는 전 농수산부 차관. 외할아버지 이광로(李光魯) 씨는 서울대 공대 건축과 명예 교수이자 국회 의사당을 설계한 한국 건축계의 대부. 영주의 아버지 장민수 씨는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서 바이올린을 전공, 동아 콩쿠르 대상을 받았으며 KBS 교향악단 악장을 맡기도 했다. 어머니 이명준 씨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 출신으로 스키, 수영 등 운동에 만능. 두 사람은 결혼 후 미국 유학을 떠나 영주를 낳았다. 영주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바이올린 음악을 듣고 자랐고, 일찍 천재성을 보였다.
영주는 현재 EMI 레코드사의 간판 연주자로서 1997년까지 연주 일정이 꽉 찬 상태에서 전세계 정상급 지휘자들과 교향악단들이 앞다투어 협연하기를 원하는 음악가가 됐다. 영주의 성공 과정을 돌이켜보면 미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은 특별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특혜를 베풀어 그 특징을 살리게 했다. 또 그 교육제도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을 위한 예외적인 것이기에 한국 기준으로는 모두 불법에 가까운 것이었다.
영주는 유치원 때부터 선생님들의 우수생 특별 지도를 받았다. 연주 여행 때문에 바쁜 초등학교 시절에는 필라델피아 저먼 타운 스쿨에 돌아오면 선생님들이 남아서 특별 과외를 해 주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선생님이 학생에게 학교 교실에서 돈을 받고 개인 지도하는 것은 고발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연주 여행지의 호텔에서 팩스로 보내면 당일 오후에 자세한 지도 사항이 곁들인 팩스가 다시 호텔방에 도착해 있어 영주와 부모님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주는 학교 성적에서도 언제나 최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주의 스승이자 이자크 펄만, 미도리 등을 길러낸 줄리어드의 명조련사 도로시 딜레이도 한국 같으면 진작 학교를 떠나 은퇴 교수로 전락해야 했다. 딜레이 교수는 현재 76세로 한국 기준의 교수 정년을 한참 넘긴 나이이다. 한국은 65세가 넘으면 능력이 있어도 밀려나고, 능력이 없어도 이때까지는 버틸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안정된 직장 중의 하나인 교수직은 종종 수천만 원, 수억 원대에 거래된다는 뒷이야기가 들린다.
딜레이 교수의 파격은 레슨 시간에서도 이어진다. 점심을 먹고 출근한 딜레이 교수는 새벽 2`~3시까지 레슨을 계속한다. 영주의 아버지 장민수 씨는 새벽 4시까지도 지도받은 일이 있다. 한국에서 어떤 교수가 새벽 4시까지의 강의를 시도해 본 적이 있을까. 또 어떤 교수가 그런 시도를 했을 때 한국의 학교 당국과 건물 관리인들은 이것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었을까.
미국은 강한 나라다. 미국이 계속 강할 수 있는 이유는 영주와 한나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는 탄력성을 통해 잘 증명되고 있다. 우리 나라는 다른 사람은 각기 달리 교육되고 대접받아야 하는데도 교육부는 위화감 등을 운운하며 획일적 틀을 강요하고 있다. 대학 정원, 사설 학원 운영 규칙 등의 각종 엄격한 틀은 공무원들을 위해선 천국적 제도이다. 그들은 각종 규범을 임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한국의 기형적 틀을 향유하며 때로는 불법적 치부를 함으 로써 종종 형사 입건되고 있다.
한국이 장한나와 같은 인재들의 ‘조국 탈출의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혁신적 제도 개선과 여유 계층의 넉넉한 가슴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교육부의 ‘보편성’ 고집
세계인에게 충격을 준 1999년 봄 미국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교육 시스템의 붕괴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사건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1999년 6월 20일 내한 독주회를 가진 첼리스트 장한나 양은 또 다른 모습의 미국 교육 틀 속에서 성공을 거두며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한나는 중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고교 1학년 전과목 학과 성적이 ‘A’. 그것도 한나가 시노폴리, 메타, 마젤 등 특급 지휘자들과 대륙을 오가는 연간 30여 회의 연주를 소화해 내며 얻어낸 결과다. 한나 어머니 서혜연 씨는 “미국 사립 중·고교는 각 학생들의 특수성과 예외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한나가 공부와 연주를 양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나가 다니는 뉴욕 콩거스 로크랜드 컨트리 데이 스쿨은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있는 초·중·고등 과정 복합 학교로 사립이다. 연간 수업료는 1만 5,000달러 수준. 한나는 예외적으로 전액 장학생이다. 선생님은 학생 3명당 한 명. 한나가 연주 여행으로 수업에 빠졌다 돌아오면 학교 점심 시간에 선생님과 샌드위치를 먹어가며 예외적으로 보충 수업을 받는다. 물론 점심 시간 보충 수업료는 무료. 한나는 고교 졸업 후 하버드대로 진학, 문학을 전공할 계획이다. 미국에는 콩거스 스쿨과 같은 명문 사립 중·고교들이 도시마다 널려 있다. 이들은 또 하버드 등 아이비 리그 진학을 위한 핵심 코스이기도 하다.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이 일부 붕괴 조짐이 있다 해도 ‘예외성’을 인정하는 엘리트 사립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건재한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엘리트 교육 코스로 만든 과학고등학교마저 ‘보편성’의 원칙 속에 황폐화시키고 있다. 중학교 성적 1% 내에 든 수재들이 진학하고 있는 과학고도 대학 입시 내신 성적에서 예외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에 대해 사회와 교육부 당국자들은 대책도 고민도 없다. 미국이 ‘예외성’을 인정하고 엘리트를 키우는 시스템을 가진 나라라면 우리는 ‘보편성’을 고집하며 엘리트를 중우(衆愚)로 만드는 시스템을 가진 나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