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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부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1) 교부철학 원시 기독교가 사도바울로 말미암아 체계를 갖춘 후 새로운 기독교적 철학이 발생하여 2세기경부터 7,8세기까지 계속된다. 이를 교부철학이라 부르는ㄷ 그 까닭은 교회에서 인정받은 철학적 교양이 풍부한 기독교 신도들이 당시 기독교에 박해를 가한 이교적 로마제국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교회를 육성하기 위하여, 또 기도꾜를 변호하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의미에서 받은 그들의 명예스러운 존칭에서 유례한다. 기독교 사상이 아직도 이 시대에 넘어오기 이전 즉 사도 바울 같은 순수한 신도들만이 퍼져 있었던 시대에는, 철학은 지상의 지혜라 하여 멸시되었고,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로서 가르쳐 주는 신앙이야말로 참된 진리라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ㄷㅗ들은 그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켜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열렬했던 그들의 신앙심에도 동요가 일고 신앙의 진리성에 대한 인간적인 회의와 반성 그리고 사변이 움트기 시작했다. 원래 기독교적 진리는 계시로 나타난 초자연적 진리로서 인간의 이성 능력이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교도의 나라 로마제국의 힘의 박해를 무자비하게 받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는 한편 그들의 진리와 신자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신앙의 변호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는 소위 변호서를 로마 황제에게 제출하게까지 되었다. 이것이 교부 철학의 발단이 된 것이다. 그들은 신앙의 진리를 단순히 계시를 통해서만 파악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도 파악해야 하였으며, 또 그러지 않고는 이미 변모한 시대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방편으로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스토아 철학도 부분적으로 흡수하였는데,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관은 가장 적절한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신플라톤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기에서 교부의 명칭은 후에 주교 또는 승려, 심지어는 평신도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전통을 지키면서 저술하는 교회에 의해서 승인받은 사람이면 다 교부라고 통칭하였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던 중세 사람들은 정신적 위안을 얻기 위해 기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게 되었다. 초기에는 로마의 왕들의 탄압이 심하였지만 4세기경 Constantinus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됨으로써 신학은 철학적 체계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교부철학은 신학이 스스로 체계를 이룩하여 철학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가는 시기의 사상적 흐름을 말한다. 철학적 사색이 기독교 신앙위에서 발전됨에 따라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의 참된 모습과 유한한 존재임을 깨우치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교부들은 플라톤 철학으로 알려진 플로티노스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엄격한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중세 초기의 교부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 철학을 신앙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신앙에 몰두하여 철학을 배격하였다. 유스티누스(Justinus 100~164) 같은 철학자는 기독교가 모든 시대가 안고 있는 철학적 문제에 해결을 줄 수 있으며, 기독교의 계시적 요소는 인류를 악마, 다신교, 부도덕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와 그리스도교 교리를 화해시키고자 하여 로고스는 신의 말씀이고, 이 로고스가 예수란 몸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3세기에 오면서 점차사라지고,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앙만을 순수하게 지니려는 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테르톨리아누스(Tertulianus160~220)는 기독교 사상의 탁월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고도 초월하는 신앙적 계시에 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초이성적이며 반이성적인 인식을 호소하기도 했다. “불합리 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그의 명제는 너무나 유명하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은 이질적인 세계이며, 아카데미와 교회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고 보아 신앙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여기서는 모든 철학을 배척하고 신앙으로 귀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3세기가 지나면서 신플라톤 철학에 의해서 교리를 체계화 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대표자로는 오리게네스(Origenes,185~253)가 있다. 오리게네스는 플로티누스의 일자(to hen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와 같은 개념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은 모든 존재를 초월한 영원 불변하는 존재이며 순수한 정신적 존재이다. 교부철학의 대표자인 Augustinus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죄인이므로 구원을 필요로 하고, 교회는 지상의 신국이므로 교회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교부철학에 있어서 교육사상의 핵심은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진리이고 선에 이르는 방법이라는 기독교적 신앙 위에서 교육을 이해한데 있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은 신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으며, 교육의 방법은 체벌 없이 학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공포와 체벌을 통한 엄격한 엄벌주의에 의거하여 행해졌다. 2)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354~430): 고대를 마무리하면서 중세를 연 인물 그의 마지막 시기에 어거스틴이 살았던 로마문화, 북아프리카 까지 북쪽에서 처들어오는 북의 야만족에게 몰락 당한다. 고대문명이 주저 않는 시기에 기독교는 유럽문화가 새로운 지경을 열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것을 불어 넣은 사람이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들이다. “신앙은 찾고 이성은 발견한다” “나는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믿는다” 신앙와 이성의 통합 그러나 어거스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플라톤주의를 선호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 “절대 진리”였기 때문이다. 절대 진리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었다. 그것이 가시계에는 없을 지라고 이 세상 넘어에는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 말년에는 플라톤 철학을 비판 가. 생애와 활동 초대 기독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교부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마니교도였으며 모친은 기독교 신자였다. 이 같은 가정환경이 그의 사상의 이원적 요소를 제공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절충과 종합의 대성자로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부친의 뜻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 위해 카르타고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수사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32세의 나이로 기독교에 개정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젊은 시절에 겪었던 그의 내면적 고민과 투쟁의 자취는 그의 <참회록>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28세때 사생아를 낳기도 하였고 인생문제로 고뇌하면서 한때 마니교를 숭배하기도 하였으며 회의론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 플라톤주의자였으며 밀라노의 사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만나게 되면서 기독교에 접근하게 되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중세 수도원의 전신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0세 때 북아프리카 히포(Hippo)에서 주교가 되었으며 그 이후 죽을 때 까지 40여 년 동안 목회자로 지내면서 많은 저술과 정통 교리의 옹호를 위한 논쟁에 생애를 바쳤다. 그의 수많은 저작과 설교집 그리고 서간문은 기독교 신앙과 사상의 풍요로운 원천으로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기독교 사상가로서 중세의 문을 연 사람이며 중세교육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참회록>과 <신국론>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미친 사상과 논쟁으로는 신플라톤주의, 마니교, 점성술과 회의주의, 도나투스 논쟁, 펠라기우스 논쟁이 있다. 특히 신플라톤주의의 금욕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강조,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등은 그의 사상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4주덕(지혜, 용기, 절제, 정의)과 크리스트교의 3원덕(믿음, 소망, 사랑)의 조화적인 결합을 주장하였다. 나. 교육사상 아우구스티누스의 세계관과 역사관은 그의 <신국론>에 잘 나타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그중의 하나는 신을 사랑하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신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 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육체나 세속세계의 권력과 부를 무시하며 핍박을 받는 반면, 자신을 신보다 더욱 사랑하는 자는 육체적인 삶과 세속적인 부와 권력에 매달려 현생에서 영광스런 삶을 산다. 그러나 전자는 택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도시의 시민이 될 것이고, 후자는 버림을 받은 자로서 지상나라의 시민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도시를 택하는가 지상도시를 택하는가는 그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 역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도시와 지상도시, 택함을 받은자와 버림을 받은 자의 대립 투쟁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의 역사를 하나님의 의지가 실현되는 과정으로 해석하였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연속이나 유물론적 인과율의 전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이 미리 계획한 목표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목표와 계획이란 아담이래로 지은 인간의 원죄를 구속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기독교로부터 유래된 최초의 역사철학이며, 두 개의 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그의 역사관은 중세는 물론이요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상사에 근본적인 기반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의 목적을 행복에 두면서 철학적으로 이것을 규명해 나갔다. 따라서 그의 교육사상은 행복론과 관련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다. 이런 부족함 때문에 우리 인간은 쉽사리 자기만족을 얻지 못한다. 우리 인간이 무엇을 욕구하고 원한다는 것은 자기의 어떤 결핍을 표시하는 것이며, 자기 안에는 없는 것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와 다른 것, 자기가 아닌것, 바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대상을 우리 인간이 획득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 대상을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무릇 행복을 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이 원하는 행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또한 진정한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 등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세상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흔히 추구하는 대상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런 것은 나와는 어떤 관계는 있지만, 나 아닌 그 무엇이다. 이를테면 재물, 권력, 지위, 아니면 인기, 명성, 건강, 미모, 진, 선, 미 등이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행복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행복하지는 않다는 데 또한 문제가 있다. 누구나 바라고 원하는 행복은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정한 행복이지만, 우리 인간이 갈망하는 대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을 찾는 마당에서 추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소멸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 즉 영원불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언젠가는 없어지거나 우연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우리 인간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 사물들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변화와 소멸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이 세상 사물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과 필연적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신만이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영원불변한 존재이며 또한 만물의 창조자이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므로 우리 자신과 필연적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든지 신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아우구스티누수는 인간은 피조물로서 신의 은총속에서만 행복을 느끼도록 만들어 졌고 자유의지를 남용함으로써 원죄를 짓게 되었다는 원죄설과 원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과 사랑의 실천으로 신의 은총과 축복을 얻게 된다는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신의 소유에 있고, 신의 소유는 지혜의 보유에 있고, 지혜의 보유는 진리의 인식에 있다. 따라서 행복은 진리의 인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진리의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내적 경험, 즉 이성적 인식행위를 통해 진리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인간은 신의 선물인 이성적 인식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과 세계를 이해하며 나아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적 인식을 ‘지성적인 빛’이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조명설(照明說)을 주장하였다. 태양의 조명 없이는 자연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지성적인 빛의 조명 없이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우리 마음을 조명하는 지성적인 빛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치는 지성의 빛이 온갖 사물을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 마음의 본성은 이런 것이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우리의 관심을 지성적인 사물들에게 돌리게 되면, 창조자의 의향에 따라 마음은 지성적인 대상들을 형태는 없지만 어떤 독특한 영적인 빛 속에서 보게 된다. 신의 조명이 영원한 진리들을 우리 마음에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홀로 필연적이고 불변하며 또한 영원한 존재인 신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신은 태양과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조명하는 자이므로 우리 인간을 가르치는 유일한 스승이다. 신은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내심의 교사’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교육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내심의 교사인 이성에 의해 진리를 인식하고 신의 의지와 목표에 대한 통찰을 얻도록 돕는 일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사의 역할이다. 교사는 학생이 자신의 잠재된 인식을 논리적 과정을 통해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인 동시에 보조자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는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교사는 신만이 가능하며, 또한 완전한 교육은 신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 스콜라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육사상 1) 스콜라 철학 Augustinus이후는 별로 주목할 만한 사상이나 철학의 발전이 없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 시기는 사회적인 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학문적 분위기나 업적이 나타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중세의 사상을 지배하였으나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십자군 전쟁에 의한 동서문화의 교류가 원할 해짐에 따라 절대적 진리로 인식되고 있던 기독교 교리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자 이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스콜라 철학이다. 즉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의 신앙과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결합시켜 이것을 철학적으로 합리화시키자는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스콜라철학의 목적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찾는데 있다. 이성에 의해서 신앙을 지지하기 위해 이론으로 신앙을 변호하고 철학으로 교회를 옹호하며 논의와 합리적 논증으로써 교회의 교리를 지지하려고 하였다. J.S. Erigena가 845년경 파리의 궁정학교로 초청받은 일을 계기로 새로운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나, 다소 부진한 상태로 계속된 뒤에 전기 스콜라 철학의 내용이 문제로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시기가 바로 보편논쟁의 시기이다. 당시 근본 과제였던 신의 존재와 보편개념의 실재성등을 결부시킨 문제가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보편논쟁에서 실재론은 보편이 개물에 앞서 실재하며, 관념 또는 개념이 유일한 실체이고, 감각을 통하여 알게 되는 대상은 다만 관념의 모사에 불과하다고 본 사상이다. 유명론에서는 보편은 하등의 실재성이 없는 추상적인 명목일 뿐이며, 실재하는 것은 개체 뿐이라는 사상이다. 따라서 감각을 통하여 얻은 개개의 대상만이 진실한 본체이고 실재하는 것은 오직 개개의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 주장을 절충한 것이 Thomas Aquinas의 개념론인데 그는 본질자로서의 보편자는 개물안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초기 스콜라 철학의 대표사상가로 안셀무스(Anselmus)가 있다. Anselmus는 신앙이 인식에 앞서 존재한다고 보고 지식 또는 인식에 앞서 신앙이 존재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신의 존재를 논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신의 존재를 두 가지 면에서 증명하였다. 첫째는 우주론적 방법으로 만물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최고의 것으로 신이다. 둘째 삼단논법으로 신의 본체를 증명하였다. 즉 신은 완전한 것이다. 완전한 것은 존재라는 본질이 있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는 방법으로 설명하였다. 스콜라 철학 전성기의 대표사상가로는 Thomas Aquinas가 있다. 스콜라 철학은 후기 중세의 수도원 학교와 본산학교, 그리고 나중에 성립된 중세대학에 있어서 교육의 목적, 내용, 방법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교육의 목적은 단순한 믿음에서 지적인 훈련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고 내용은 종교 철학과 신학 및 토론에 필요한 변증법적 훈련을 부과했다. 스콜라 철학의 교육 내용은 과목에 대한 지식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비판, 검토, 토론, 분석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교육적 방법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스콜라 철학의 강의방법은 교사가 교재에 대해 주석을 달고 용어를 해독하면서 읽는 방법으로 학생들은 그 내용을 바르게 필사하였다. 또 다른 교육방법은 하나의 논리적 접근의 방법이며 대체로 다음의 네 단계를 거친다. 하나의 이론이 제시되면, 그 이론에 대한 증거가 주어지며, 그 이론에 대한 반대의견이 제시되고, 동시에 제시된 반대 의견도 반박 분석되며, 권위있는 대답이나 해결에 대해 가능한 반대 의견을 생각해서 그것에 대한 해답과 반박의 근거를 생각하는 것 등의 논리적으로 조직된 순서에 따라 전개하며 동시에 사고의 정밀성과 해결책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의 방법은 학생들에게 연역적 사고, 3단논법을 포함한 변증법적 훈련을 시켜 중세에 있어서 지적인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 밖의 스콜라 철학의 교육사적 공헌은 도덕적, 정서적 도야 위주의 교육에서 스콜라주의의 지적 도야로 교육을 전환시켰으며 중세 대학의 성립과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 후기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증으로 인하여 문예부흥기의 인문주의와 17세기의 실학사상을 제기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이 13세기 말엽부터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 하나는 마지막 스콜라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스코투스(Scotus)가 종교에 있어서 지적 요소보다는 감정적, 실질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이성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적 신뢰가 없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 신앙의 지적인 증명의 가능성을 거부한 의미를 가지며, 신앙은 그 때부터 전적으로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전적인 부정을 하든가 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이 쇠퇴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유명론의 인기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유명론의 대표자는 오캄(Occam)이었는데 유명론자들의 주장은 스콜라 철학을 쇠퇴하게 만들었지만 르네상스의 과학적 발전과 종교개혁의 기초를 세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를 수용하면서 스콜라 철학을 대성시킨 학자이다. 그의 학문적 주된 관심사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였다.아퀴나스는 진리를 두 개의 범주로 구분하였는데, 하나는 이성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으로 그 진리의 범위를 밝힐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아퀴나스에 의하면 진리에는 이성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가 있는데, 신앙적 계시가 이성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성이 신앙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계시란 이성을 보강하고 완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양자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당시의 기독교 사회에 적용시킨 아퀴나스는 인간의 진정한 목적이 지상에서의 행복한 상태를 도달하는데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목적이 그것에 그치지 않고 신의 세계를 인식하는 보다 높은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성의 최고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내세에서의 인간 구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인 덕의 실천만이 아니라, 신앙과 자애라는 기독교적 덕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아퀴나스는 또한 국가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하고, 국가권력의 형태도 자연과 인간의 필요에 대한 합리적인 성찰로써 결정될 문제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지상에서의 행복만 추구한다면 국가만으로 족하겠지만, 인간에게는 내세에서의 생활이라는 보다 초자연적인 목적이 있고, 교회는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인간을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하여 당대의 모든 중요한 문제를 지적으로 검토하면서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가. 생애와 활동 중세 스콜라철학의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퀴나스는 5세 되던 해 몬테카지시의 베네딕트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9년 동안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15세 때는 당시 새로 설립되었던 나폴리 대학에서 7자유학과를 공부하면서 도미니크 교단의 수도사가 되었으며,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권위자였던 신학자 마그누스(A. Magnus)에게 3년 동안 신학을 배웠으며, 32세에 신학으로 학위 및 교수 자격을 받았다. 이 때 그는 이미 설교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그의 위대한 대 저작들이 집필되고 있었다. 그는 교회의 높은 직위를 사양하고 수도사로서 로마와 나폴리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신학교육 및 저작생활에 전념하였다.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아퀴나스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아퀴나스의 저서들은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정치학>, <형이상학>, <니코마스 윤리학>등에 관한 많은 주해서를 남겼다. 둘째는 <이교도를 논박하는 대전>인데 4부 464개의 논문으로 구성된 것이다. 셋째는 그의 주저인 <신학대전>으로 3부 500개의 논문으로 구성된 것인데 미완성의 것이다. <신학 대전>은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진리를 포괄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책이다. 아퀴나스는 기독교의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대성한 중세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기독교 신학에 도입하여 기독교 교리와 합치시켰다. 그의 사상은 카톨릭 교회의 지적 생활에 큰 영향력을 미쳐 왔으며, 1879년 레오 13세에 의해 카톨릭 교회의 정통사상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사상은 토미즘(Thomism)으로 불리고 있으며, 토미즘은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합리주의 사상을 불신하고 보다 확고한 정신을 추구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네오 토미즘(neo-Thomism)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교육사조에 있어서도 현대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불변의 지식을 강조하는 항존주의(perennialism)의 철학적 배경이 되어 현대교육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 교육사상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활용하여 우주의 체계와 인간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연계와 은총계, 국가와 교회, 육체와 영혼, 세속적인 덕과 종교적인 덕, 감각과 이성, 이성과 신앙은 각기 질료와 형상, 수단과 목적, 하위와 상위의 관계를 갖는다. 아퀴나스는 외계는 실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이성을 통해 인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 인간이 감각을 통해 외계의 사물을 수용하게 되고 다시 이성을 통해 내적인 사고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지식이 성립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는 부분적인 진리만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의 본질은 인간의 이성의 힘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궁극적 진리는 다만 영원한 신성이 나타내는 은총의 빛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본래 진리를 비추는 두 개의 빛이 있다. 하나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빛이고 또 하나는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의 빛이다. 이성의 빛으로 인간은 우주의 생성, 변화, 소멸에 대한 여러 법칙, 즉 자연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 은총의 빛으로는 삼위일체설, 신인설(神人說), 연옥, 부활 등 신비에 속하는 초자연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독자적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닐 수 없게 된다. 자연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이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한계 이상으로는 나아갈 수 없으며, 확실한 진리의 인식이 이루어지려면 계시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신앙은 계시에 의존하며 철학은 이성에 속한다. 그에 의하면 신의 본질은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인식될 수 없으나 신의 존재, 영원성, 창조적 능력, 섭리 등은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 이 둘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필연적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구현해야 할 덕목을 신학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신학적 덕목으로 신앙, 희망, 사랑을, 그리고 자연적 덕목으로 정의, 용기, 지혜, 절제 등을 열거하였다. 아퀴나스의 교육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인간육성이며 그의 저서 <진리에 관하여> 제 11장 ‘교사론’에서 “인간도 교사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신만이 가르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을 활용하여 진리를 가능태의 진리와 현실태의 진리로 구분하였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진리는 완전한 형태로 영혼 속에 내재해 있는 것도 아니며 후천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가능태로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다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의 힘에 의해 현실태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가능태의 형태로 잠재해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는 모든 사물의 본질과 원리에 대한 인식이 일반적이고 불분명한 상태로 인간의 지성 안에 내재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태의 불분명한 이해는 지식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개별적이고 분명한 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립되는 개개의 사물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곧 지식의 현실태인 것이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넘어가는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발견(discovery)의 방법이다. 이것은 외부의 도움 없이 자기의 선천적인 이성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둘째는 교수(instruction)의 방법이다. 이것은 선천적인 이성의 작용 외에 외부로부터 교사가 격려와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인간이 교사역할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학생은 다만 가능태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교사는 가르치려는 주제에 대해 이미 현실태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사가 현실태로 지니고 있는 지식을 개념, 원리, 상징, 언어 등의 적절한 방식으로 학생에게 제시하면 학생은 그것을 받아 들여 자신이 막연하게 가졌던 인식을 분명한 인식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교사는 외적교수에 의해서 학습자의 내적 교수를 도와야하며 교사의 임무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지식을 현실태로 이행시키는 것이다. 또한 교사는 인식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넘어가는데 적극적 기여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사는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과목에 확실한 지식을 가진 자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교사론이다. 이와 같은 교수의 방법을 통해 신뿐만 아니라 인간도 타인의 교사가 되어 교육을 행할 수 있다고 아퀴나스는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교육에 관하여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에 의한 교육보다는 신에 의한 교육이 우월하다는 점이다. 신만이 내적으로 가장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 점에서 볼 때 교사의 역할에 관한 아퀴나스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은 중세를 대표하는 말이다. 중세 철학 전체를 꿰뚫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이다. 넓게 보면 중세 초기에는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었다. 중기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가 추구되었고, 말기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앙과 이성이 분리됨으로써 르네상스와 근대 철학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지도교수: 희소 탁영진교육학 저자의 강의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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