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현상은 육체에만 한정돼 일어나지는 않는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관장하는 뇌도 나이를 먹음에 따라 늙어가게 된다. 그 대표적 증상이 건망증과 치매다.
지난해 가을 83세의 전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다고 고백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레이건은 요즘 서류더미를 '나무'라고 말할 정도로 심한 치매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알츠하이머병이란 나이가 들면서 정신기능이 점점 쇠퇴해지는 '노인성 치매'를 일으키는 병으로, 1864년 태어나 1915년 세상을 떠난 독일의 신경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신경질환이다.
알츠하이머는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 이름은 덜 알려져 있다. 그는 뇌손상이나 정신병에 의해 생기는 다양한 정신기능장애를 뇌의 해부학적 변화로 설명하려고 일평생을 보낸 신경병리학의 선구자로서, 당대에는 오늘날의 에이즈(AIDS)와 같이 골치아픈 난치성 전염병이었던 신경매독을 깊이 연구하여 매독균에 의해 정신이 황폐화되는 병리학적 기전을 명쾌하게 규명했다.
어째서 이미 1백년 전에 살다간 의사에 의해 기술된 병이 오늘날 유행처럼 되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우선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연말연시에 모임에 나가서 어쩔 수 없이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고 하자. 아침에 깨어보니 제대로 방안에 누워 있기는 한데,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출근하여 알아보니 직장동료와 같이 택시를 타고 왔으며, 취한 와중에 아파트단지 들어가는 길, 동호수까지 정확히 지시해 줬다 한다. 어떻게 그런 것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냐고 자문하는 분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이처럼 의식의 공백은 우리를 당혹하게 하며 정신이 끊어지는 심장마비와 간질같은 병을 우리는 대단히 무서워한다.
1백년 전 의사 알츠하이머의 예지
일관된 정신과 주체성이 있는 의식작용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본전제임에 틀림없다. 반면 웬일인지 이처럼 귀중한 정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겨울아침 자동차에 시동을 걸려면 여간 힘들지 않다. 반면 우리 정신은 아침에 눈만 번쩍 뜨면 자동적으로 가동된다. 자동차에 계속 연료를 채우는 것에 비교하면 점심식사후 오는 졸음만 쫓으면 의식은 쉽게 유지된다. 언덕을 올라가려면 액셀을 밟아야 하지만, 속상한 일이 있을 때 특별히 화를 내기 위해 별다른 작업을 하지 않고도 그저 화를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너무도 매끄럽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 정신을 구동하는 기계적 장치에 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현대 신경과학의 중요한 결론은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결코 육체와는 독립적인 자유로운 실체가 아니며, 컴퓨터 프로그램이 실행되려면 급이 맞는 하드웨어가 필요하듯이, 두뇌라는 물리적 실체의 작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마치 자동차가 엔진 트랜스미션 배터리 구동바퀴들이 조립되어야 완제품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막연히 정신이라고 체험하는 것에도 여러 개의 구성성분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의식수준을 상승시키는 각성장치가 있어야 하며 외부세계를 감지하고 재구성하는 지각체계가 있어야 한다. 정보에 대한 가치판단과 감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정서체계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과거에서 현재까지를 지속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기억장치가 상호 융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심리학적 부속품들을 해부학적으로 접근하면 각성장치는 뇌간 망상체라는 부위에서, 지각과 인지체계는 대뇌피질에서, 정서체계는 변연계중 편도핵을 중심으로, 기억체계는 측두엽 깊은 곳의 해마라는 신경구조에서 그 기능들이 구동되며, 이 회로들이 상호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의식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구조들이 낡아지거나 특정 회로에 기능장애가 생기면, 낡은 자동차가 자주 말썽을 부리듯 여러 고장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츠하이머가 밤새도록 현미경에 매달려 치매환자의 뇌를 연구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브람스나 프로이트에 뒤지지 않는 탁월한 예지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미 1백년 전에 그는 평균수명이 70이 훨씬 넘는 현대인의 정신적 노화에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다. 뇌 역시 머리카락이나 피부처럼 나이에 민감하여 노화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연구를 수행했던 것이다. 단지 현대인들은 아직도 이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영원히 향락을 누리며 살 수 있으리리는 환상을 깨치지 못하며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
뇌의 PET 스캔 사진. 왼쪽은 정상노인, 오른쪽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것이다. 환자쪽이 검게나온 부분이 많은데, 그만큼 뇌가 손상됐다는 뜻이다.
장수사회가 낳은 또 하나의 고민
그렇다면 나이가 들면 뇌에는 어떠한 변화가 오는 것일까? 딱딱한 두개골에 둘러싸여 잘 보호돼 있기는 하지만 30대에는 평균 1천4백g 정도 나가는 인간의 뇌를 50년간 사용하고 나서 80대에 다시 무게를 재 보면 평균 1천1백50g정도가 된다. 약 2백 50g 정도가 가벼워진 것이다. 마치 싱싱하던 토마토가 시들면 쭈그러지듯 육안으로도 뇌의 용적이 줄어들면서 표면의 주름들이 깊어진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뇌를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신경세포들이 가을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듯 서서히 죽어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억의 중추인 해마의 신경세포는 30% 가량 없어지고 운동이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도와주는 부위인 중뇌 흑질세포들은 35% 가량, 전두엽과 측두엽 대뇌피질을 이루는 6개의 세포층 가운데 제2, 제4 세포층 세포들은 50% 가까이 소실돼 버린다.
그뿐 아니라 신경세포 상호간의 접촉점은 하나의 신경세포당 1천개 가량되는데, 이 방대한 회로를 연결하는 축삭돌기와 수상돌기들이 가늘어지고 구불구불해지며 오래된 전기줄처럼 중간중간 끊어지고 실타래처럼 엉켜서 '노인반'이라는 것을 형성한다. 리포푸신이나 아밀로이드라는 불필요한 단백질덩어리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이곳저곳에 쌓이게 되며, 혈관들도 굳어지고 끝이 막히기도 해서 그때그때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을 원활히 공급해주지 못한다.
생리학적으로 측정해보면, 신경전달속도는 10% 이상 느려지고 뇌로 가는 피의 양이 30% 가까이 감소한다. 뇌파도 1초에 9회 이상 발진하던 것이 8회 이하로 주파수가 느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경 심리학적으로 노인들에게 지능검사를 해보면 나이가 들수록 성적이 감퇴되는 것이 증명된다. 우선 문제를 시작하기까지의 반응 속도가 느려지고 검사수행에 시간이 더 필요하며, 특히 숫자계산 공간지각 도형조합 등의 항목에서는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다.
실제 일상생활에서 노인들이 체험하는 문제는 기억능력 감퇴를 의미하는 '건망증'이다. 나이가 들수록 전화번호, 사람 이름, 약속 시간 등을 기억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며, 어떤 사건들을 체험하고 일정시간이 흐르면 그 세부적 내용들이 점점 희미해진다. 특히 아주 오랜 옛날 일들 보다도 최근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더 감퇴된다.
성격 역시 노화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타인을 이해하려는 융통성이 감소하고 소심해지며 자기중심적이 된다. 의욕이 줄고 염려와 걱정이 는다. 때로는 육체적 쇠약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이며 부산해지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정상적인 노화과정이다. 아무리 나이가 든다고 해도 일상적인 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정도로는 진행되지 않는다.
80세 이상 노인의 40%에 치매 발생
1백살이 넘도록 생존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겉보기보다는 훨씬 더 탁월한 인지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인간 두뇌는 신체의 다른 부위의 고장이 없는 한 1백년까지는 그럭저럭 잘 굴러갈 수 있다는 반가운 결론을 제시한다.
심각한 것은 상당수 노인들이 정상적인 노화보다 훨씬 심하여 일상생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하는 정신기능장애, 즉 건망증, 판단력감소, 성격변화 등의 심각한 병적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노인성 치매'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dementia'라고 하여 '정신이 나갔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용어다.
선진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통계연구에 의하면 치매는 65세 이상 노인의 10명중 1명 꼴, 80세 이상이면 10명중 4명꼴로 매우 흔하게 발생하는 질병인데, 이중 반 정도는 알츠하이머병이 차지한다. 따라서 80세가 넘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94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65세 이상의 노인인구는 2백45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6% 가까이 되는데, 2000년대가 되면 8%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 예상돼, 본격적인 고령화 시대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찍이 알츠하이머가 남다른 예지적 관심을 보였듯 우리 사회가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는 '노인성 치매'라는 커다란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겠다.
노인성 치매의 가장 중요한 증상은 건망증인데, 병원에서 환자를 진단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어떻게 정상적인 노화에 의한 기억장애와 치매에 의한 기억장애를 감별하느냐 하는 점이다.
통상적으로는 정상노화에서는 과거 사실에 대한 경험자체는 남아 있고 그 세부사항을 주로 기억하지 못하며 본인 스스로가 기억장애를 심각한 문제로 자각한다. 또 수년이 지나도 기억장애 이외의 다른 증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설사 건망증이 진행되더라도 그 빈도가 늘어날 뿐이지 양상은 변화가 없어야 한다.
한편 치매에 의한 기억장애의 경우는 과거에 어떤 사건을 경험했다는 그 자체를 모두 망각하며 본인 스스로 기억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력뿐아니라 단어 상식 기본적인 생활지식도 상실하게 되며 추상적 사고력, 판단력, 언어능력, 충동자재력 등이 연이어 장애를 일으켜 심한 성격변화까지 생기게 된다.
5년 이상 지나 말기에 도달하면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대화가 안되며 식사나 배변같은 기본행동도 가리지 못하다가 서서히 촛불이 타서 꺼지듯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안타까운 질병이 노인성 치매다. 치매는 본인은 물론 가족과 사회에도 커다란 부담과 고통을 안겨 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치매가 알츠하이머병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 동맥경화증 같은 흔한 성인병들도 치매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이러한 경우는 주로 뇌혈관을 침범하여 점진적인 폐쇄와 순환장애에 의해 다양한 증상이 발생하므로 '혈관성 치매'라 부른다.
드물지만 호르몬 결핍이나 대사장애, 약물 부작용, 신경계 감염증 등도 치매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인식되어온 '노망'이라는 개념은 아마도 심한 성격장애와 이상행동을 유발하는 '진행된 후반기 치매현상'을 주로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알츠하이머병이든 혈관성 치매이든 간에 근본적으로는 생명의 노화에 그 원인이 담겨 있기 때문에 뚜렷한 예방법이나 치료방법이 아직 개발돼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지난 10여년간 가장 주목을 끌었던 주제는 인간의 학습획득에 꼭 필요한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서 그 농도가 현저히 감소돼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감퇴한 아세틸콜린을 뇌 속으로 넣어주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콜린성 약물을 대상으로 한 임상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고작 6개월 가량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을 뿐이고 다른 획기적인 성과는 얻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알츠하이머 환자를 진단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하버드대 의료진. 이들은 안과에서 진료전에 사용하는 동공확대용 안약을 이용. 아직 발병하지않은 알츠하이머 환자까지 다른 정신신경 질환자와 구분해낼 수 있다.
궁극적 치유방법 없어
치매의 발생이나 진행을 근본적으로 예방 하거나 차단하는 치료법은 아직은 요원하며 아마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젊어서부터 흡연이나 음주 등의 고질적인 습관을 절제하고 장년기에 접어 들면 여러가지 성인병의 조기진단 및 치료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편안하고 스트레스 없이 향락적으로만 사는 것보다는 적절한 긴장과 도전을 하며 능동적으로 부딪히고 해결해나가야 뇌가 늙는 것을 다소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매일 일기를 쓰고, 가급적이면 전화보다는 편지를 이용하며, 책이나 영화를 본 후에는 가끔 줄거리를 돌이켜본다든지 하는 방법이 있다. 즉흥적인 쾌감을 주기보다는 논리적인 요소가 가미된 취미를 개발하는 등 인지적 생활습관을 키우는 것이 노년까지 건강하게 정신을 유지하는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늙기만 하는 것일까. 역사는 위대한 정치가 예술가 철학자들의 업적 대부분은 노년기에 완성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은 70이 넘어서였다. 베르디가 오페라 '오텔로'를 작곡한 것은 73세때였고 피카소는 90이 넘어서도 걸작품을 많이 그렸다.
우리의 삶은 논리적 인지적 요소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며 인간의 두뇌는 연구소의 컴퓨터처럼 정확한 계산만을 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결코 아니다. IQ검사가 우리의 정신능력을 그대로 드러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인간의 직관, 결단력, 윤리의식, 양심, 창조력 같은 것은 나이에 관계가 없고 도리어 나이가 들면서 증가하는 경우도 많다.
단지 이 애매하고 불투명한 개념들을 심리학자들은 연구하기가 까다롭다고 하여 기피하고 있을 따름이다. 신경과학의 언어 역시 이러한 개념들을 꿰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현대과학의 연구에 의하면 뇌의 노화는 정신기능 감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돼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메커니즘들이 있어서 미지의 기능들은 계속 상승발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뇌의 노화는 손실의 계산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이나 밸런스의 결산서는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은 현대과학이 노화의 과정에서 대답해야 될 장벽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노화의 연구가 우리에게 남기는 여운은, 우리의 삶이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것, 그래서 나의 한순간 한순간을 귀중하게 그리고 의미있게 꽉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과학 이전의 진리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