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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검月劍
김동원
그 밤 피가 내렸다, 시여!
천 년을 돌아서
내 분홍 여인을 지키기 위해,
비슬산 절벽 위에서
월검月劍을 잡았다
오오, 오오오, 피바람 속에
흩어져 떼로 몰려들던 귀鬼들!
그 어둠 속 뎅겅, 뎅겅, 뎅겅, 뎅겅,
수천의 목을 베었다
시여, 그 밤 피가 내렸다!
사물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사물은 ‘사라지고’, 그것의 은유적 대변체인 기호의 그물망 속에 인간을 위치하게 된다. 이것이 상징계로의 진입이 가져오는 사물의 타살과 기호적 중재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부터 인간은 사물과 직접적인 교류를 중단하고 기호와 기호, 혹은 시니피앙(기표記標)과 시니피앙이 엮어가는 의미의 연쇄고리 속에서 삶을 영위해간다. 라캉의 또다른 유명한 명제,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서 주체를 재현한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주체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기의記意)의 행복한 결합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시니피앙이 다른 시니피앙으로 은유적 대치를 이루는 시니피앙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라캉의 메타포 공식이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식화 과정의 결과로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의미 생성의 문제는 그대로 주체의 탄생과 직결된다. ― 박찬부『기호, 주체, 욕망』창비, 2007, 87~88쪽
지금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서정시에 질문’하고 있다. ‘바람을 시 행간 속에 흐르게 할 수는 없는 가’, ‘색채의 언어로 시를 그리면 어떤 느낌 일까’, ‘소리가 언어로 몸을 바꾸면 음악이 될까’, ‘시가 독시자讀詩者의 눈 속에 들어가 시인의 영혼이 된다면’ 등등의 엉뚱한 질문이다. 이런 관점은 언어 이전과 언어 이후의 경계이자, 동일성의 시학이다. 시는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저것에 가 있고, 저것을 말하는가 하면, 이미 그것 너머를 관통한다. 나에게 서정은 시간의 주름이자 감성의 지문이다. 혼의 부름이자 사물의 응답이다. 결국서정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주체와 객체의 영원한 환幻이다. 하여 나는 끊임없이 ‘현대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요체는 창조적 세계에 대한 시의 전복과 자각이다. 낯선 언어의 소통과 다양성, 통찰과 무의미, 그 사이쯤이다. 말의 궁극은 자유에 있다. 시는 수직의 시간과 수평의 공간을 언어로 무너뜨림으로써 부활한다. 밤낮 신선한 젊은 피를 나의 서정시에 수혈하는 과정은, 개성적 시어의 몰입뿐임을 알았다. 수준 높은 명시를 검열하여 음미하고, 혹독하게 숙련된 예술적 경지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느낌’으로서의 작품 읽기, ‘조룡雕龍’으로써의 언어 미학 탐색에 집중했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선, 통변과 시경의 비밀 앞에 나는 서 있다. 신선한 언어의 재료를 버무려 형태소의 맛, 향, 미각 등의 섬세한 자모의 성질에 대해 시어의 식감을 구별한다.
전 시대의 시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란 열쇠 하나만 갖고도, 세상의 귀들을 희한하게 잘 열었지만, 오늘날 미래시는 시인마다 언어의 문을 여는 비밀번호가 다르다. 아날로그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열 수 없는 디지털화된 기호이자 암호이다. 시인 이상(1910~1930년)의 시를 읽던 방식으로 현대 추상시를 해독할 수 없다. 하여, 주체와 객체를 바라보는 인식은 혁명적이어야 한다. 이상의 시가 개인적 자폐와 근대적 폐쇄성에서 머물렀다면, 미래시는 개체의 자의식이 파편에 숨어든 가면에 비유된다. 언제나 시대가 언어를 규정한다. 나름, 현대시에서 ‘전통’의 계승은 중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없지만, ‘실험’의 파격성이 기상천외한 예술로 진화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미래시파는 초현실주의에 뿌리를 박고 기존 서정시를 박차고 전혀 다른 차원의 예술적 시법을 건설했다. 물론 이런 미래시파는 크게 보면 현대시사의 한 유파이겠지만, 이성과 의식의 통제와 지배를 거부하며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마구 뿌려되는 수법이야말로 현대시의 진일보이다. 마치 표현추상주의 화가 잭슨 폴록이 우연히 ‘자신의 몸짓과 물감의 반복 운동’을 통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미美를 발견한 것처럼, 미래시파 역시 그들의 무의식(타자화)의 세계를 한국 현대시사에 마구잡이로 뿌려대고 있다. 이런 언어 실험은, 언어를 형태소의 최소 단위로 쪼개고, 단어와 기호를 혼합하고, 색채와 시선의 이미지를 분산하여, 수많은 점으로 찍어 놓은 ‘나’로 대체 되며, ‘시선’은 다초점으로 분열된다. 시「월검」은 새로운 서정시의 출현에 대한, 나의 강렬한 갈망의 표현이다.
그 봄날 비슬산 대견봉(1,083m) 능선에서 본 진달래 꽃불은, 전혀 다른 미학의 차원을 열어주었다. 낙동강 휘어진 강물에 겹쳐 붉게 물든 가야산 노을은 절경이었다. 팔각정 너머로 이어진 30만평의 분홍 꽃빛은, 턱 턱 숨이 막혔다. 어떤 시공에 다시 태어나 이렇게 기막힌 이승의 꽃 잔치를 볼 것인가. 벗 백산과 함께 달이 떠오를 때까지 비슬산 그 붉은 석양의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월검」을 쓸 무렵, 나는 줄곧 전통 가락의 계승을 현대시 속에 ‘어떻게 세련시킬 것인가’를 모색하였다. 7,5조 3음보의 기본 율격을 간직한 채, 민요조의 그 아름다운 리듬을 ‘어떤 방식으로 가져다 쓸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백제의「정읍사」, 신라의「망부석」, 근대 소월의「진달래꽃」, 미당의「신부」, 조지훈의「석문」, 박재삼의「춘향이 마음」, 이성복의「또 비가 오면」속의 한恨과 비견되는, 시적 깊이를 확장하고 싶었다. 민족정신의 숨결과 율조를 계승한 시조의, 흘러내리고(流), 한 바퀴 감아 돌고(曲), 힘을 주는 마디(節)를 지어서, 다시 풀어내는(解), 그 멋진 고저장단을「월검」속에 흡수하고 싶었다.「월검」은 전통적 한의 정서를 현대적 비극 이미지로 변주한 시이다. 하여 나는“그 어둠 속 뎅겅, 뎅겅, 뎅겅, 뎅겅,” 기존 서정 언어의 습濕을 잘랐다. ‘잇는다’와 ‘새롭다’ 사이에서 헤맨 4년간의 나의 시작詩作은, 두렵고 짜릿한 과정이었다. 몸속에 살던 옛 시를 완전히 부수고 행간 속에 참신한 신서정의 이미지를 세우는 작업은, 골수를 바꾸는 일이었다. 뚫어지게 대상을 성찰했으며‘추상어, 관념어의 배제’, ‘치열한 언어의 조탁과 나만의 감각’에 대해 숙고하였다. 하여 불현듯 “그 밤 피가 내렸다, 시여!”로 승화되었다. 현대적 이미지의 압축 혹은 형상화의 미학을 ‘전혀 다른 낯선 리듬’으로 바꾸는 시법은 고행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오, 오오오, 피바람 속에”, “흩어져 떼로 몰려들던” 시의 귀鬼를 불러내었다.「월검」은‘행과 연의 지나친 단절과 비약’을 금기했으며, 모호성의 시법을 통해 접신된 흐름을 시도하였다. 수미쌍관의 반복과 리듬의 도치는 이 시를 읽는, 또 하나의 오묘한 방식이다.
황진이
율문 형식은 모든 시의 바탕 자질이다. 그 속에서 시는 살아 있고, 살아 있으므로 더욱 완벽한 형식을 꿈꾼다. 이는 시의 본디 성격이 구속과 기율, 그리고 자기통제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모든 시 형식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전형을 지향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대개 정형시의 모습으로 수렴된다. 그런 관점에서 정형시는 시 형식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어느 나라건 오랜 역사를 가진 시는 예외 없이 정형의 틀을 갖추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정형시의 미학에는 그 민족의 기질과 습속은 물론, 그 언어의 호흡과 생리까지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 시문학사의 맥락에서 역사의 엄존성을 담지한 정형 미학의 실현은 시조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시조는 즈믄 해를 이어온 시이자, 이 땅 오늘의 시로 엄연하다. ― 박기섭「시조, 그 낯익고 낯선 풍경의 안과 밖」중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이다. 조선의 남성 위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그녀는 여성의 평등과 차이를 자각한 최초의 기녀였다. 그녀의 시는 사랑의 불길에 타오르는 절규가 들린다. 시편마다 체와體 용用을 무화시킨다. 정격을 치받아 파격이 된다. ‘빔’과 ‘창조’는 그녀 시가 추구한 율려이자 여백이다. 놀라운 비약과 함의로 시의 묘처를 얻었다. 그녀의 행간은 무위하다. 굳은 성리학 체제에 신선한 자유의 시풍을 불어넣는다. 그녀는 시대를 박차고 뚫고 나온 파천황이다. 하여, 나는 늘 황진이(黃眞伊, 조선 중기 1506~1567년 추정)의, 그 서늘한 비극적 시의 인식을 흠모하였다. 양반놈들의 가면을 벗겨내 치마 속에 휘잡아 들인, 그 희롱과 무희舞姬의 멋을 찬양하였다. 사랑의 불길에 휘감긴 그 열렬함에 매료되었다. 그녀가 6년간 계약 동거한 이사종과의 사랑을 읊은「동짓날 기나긴 밤」은, 조선 시조 미학의 절창이다.
冬至 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 니불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시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낸다는 언어 감각은 심플하다. ‘버혀’낸다는 그 언어의 재단 방식은 진이만의 독창적 예술이다. 그 긴 시간의 길이는,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외로움의 통로이다. 그녀 시의 행과 행 사이, 장章과 장章 사이엔 만단정회萬端情懷가 비친다. 그녀는 사물과 몸을 언제나 동일시 한다. 고독한 겨울밤을 봄날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너헛다가”, 임이 오시는 날 “구뷔구뷔” 펴겠다는 그 애틋함은, 왠지 서늘하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임의 부재를 예견한 것처럼, ‘접다’와 ‘펴다’의 반복은 애절하다. 진이의 시어는 바람의 언어다. 관능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가 보인다. 모호하나 잡히고, 외로우나 넘어선, 그 접接의 미학이 깊다. 그녀의 시는 아픈 멍울이 잡힌다. 이별 속에 잠깐 스쳐 간 사대부 놈들은, 모두 페르소나(가면)이다. 진이는 불혹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언대로 개성 어느 길가에 묻혔다. 훗날 임제(조선 1549 ~ 1587)가 평안도 평사(評事; 정6품의 무관)로 부임해 가는 길에,그녀 무덤에 술잔을 올린다.
靑草 우거진 골에 자ᄂᆞᆫ다 누엇 ᄂᆞᆫ다
紅顔을 어듸 두고 白骨만 무쳣 ᄂᆞᆫ이
盞 잡고 勸ᄒᆞ 리 업스리 그를 슬허 ᄒᆞ노라
임제의 풍류가 없었다면, 조선의 멋은 참 초라할 뻔했다.「청초 우거진 골에」는 생의 허무가 짙다. “자ᄂᆞᆫ다 누엇 ᄂᆞᆫ다” 고어의 의문형 어미는 리힐리즘의 극치다. 들풀 속에 묻힌 진이의 백골은 무상하다. “청초”와 “홍안”, “백골”의 색체 이미지는 비현실적이다. 임제는 부임에 도착하자마자 이 시를 지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사건은 성리학 체제의 허실虛失을 여실히 증거 한다.
나는 늘 진이에게 시의 빚을 느꼈다. 때가 되면 멋진 풍류로 그녀와 술상을 마주하고, 한바탕 신명을 풀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봄날 비슬산 대견봉(1,083m) 능선에서 30만 평의 진달래 분홍을 보자마자, 홀연히「황진이」에 접신 된다.
진이,
그대는 가야금 침향무를 뜯게
나는 그대의
치마폭 위에 분홍 진달래꽃을 치겠네
노을로 번진 눈물을 치겠네
흔들리는 그 바람의 무늬를 치겠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피어 노는
저 비슬산 꽃의 한 생生 다 떨어지기 전,
진이,
그대는 침향무를 뜯게
나는 엉망진창 술에 취해
대견봉 그 둥근 달빛에 붓을 적셔
그대 치마폭 위에
분홍, 분홍, 분홍, 분홍, 그렇게 번지겠네
―김동원,「황진이」전문
갑자기 치고 나온 시가 나는 좋았다. 대견봉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그 진달래 꽃빛은, 진이의 치마폭 같았다. 그녀는 “가야금 침향무를” 뜯고, 나는 그 “치마폭 위에 분홍 진달래꽃”을 쳤다. 노을 속에 번진 그 바람의 무늬를 쳤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 피어 노는” 꽃들이 다 떨어질 때까지, 비슬산 보름달 아래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엉망진창 술에 취해” 붓을 들고, 진이의 치마폭에 “분홍, 분홍, 분홍, 분홍” 그렇게 번지고 싶었다.시「황진이」는 훗날, 낭송가 이지희의 유니크한 목소리로 예술기획〈진진아트〉에서 영상시로 제작돼 유튜브에 올려졌다. 수천만 개의 꽃잎이 바람에 날려가는 장면은 압권이다. 가야금과 대금 국악에 맞춰, 이지희의 젖은 목소리는 흐드러진다. 꽃길과 능선 사이, 바람과 구름 사이, 황진이와 어우러져 노는 도포 차림의 그 풍류객의 부채춤은 멋지다.
어쩌면 현대시는 시각적 언어 예술을 벗어날 때, 새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시낭송은 청각 예술이다. 시가 시인의 오감을 통해 인간의 생로병사를 언어로 길어 올린 장르라면, 시낭송은 시낭송가의 목소리를 통해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소리 예술이다. 시는 원래 가락에 맞춘 노래여서 시와 낭송은 불가분의 관계다. 한 편의 시로 천 갈래의 시낭송이 가능하다. 각양각색 시낭송가의 목소리는 듣는 관객을 매료시킨다. 낭독(朗소리낼 랑, 讀읽을 독)이란 텍스트에 얽매여 전달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지만, 낭송(朗소리낼 랑, 誦욀 송)은 시 작품을 자기화하여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임무이며, 제2의 시 창작 행위이다. 시가 직관을 통해 영감을 포착한다면, 낭송은 소리 파동을 통해 청자에게 시를 감동 에너지로 전환한다. 즉, 시 속에 들어앉은 시인의 영혼을 불러내어 관객들의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시낭송의 본질이다. 시가 문자 매체로 영원성 · 연속성을 띤다면, 시낭송은 음성 매체로 순간성 · 현장성을 띤다. 시의 의미 함축이 때때로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 때, 시낭송은 소리와 감정으로 그 의미를 풀어내어 쉽게 전달한다. 시인이 시 창작자라면, 시낭송가는 시 전파자이다. 시인과 시낭송가는 이란성 쌍둥이 역할로 새로운 시 문화 예술을 발전시킬 동반자다. 시낭송의 궁극적 목적은 시 작품 속 다채롭게 채색된 언어 감정을 관객들에게 직접 전달해, 관객으로 하여금 마음속 엉긴 상처를 현장에서 씻어주는 정화 작용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시가 있어도, 세상에 걸어 나와 사람과 소통하지 않으면 무덤 속 진주에 지나지 않는다. 영상 미학이야말로, 21세기 새로운 시 예술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문화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