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그랬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다고... 이게 꿈이면 세상은 허상이야."
"불교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은 허상이야."
------영화 <스테이>(2005년) 중에서-----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 샘(이완 맥그리거 분)은 대학생 환자 헨리(21살 생일날에 세상을 등지겠노라 공언한)의 자살 결행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헨리)의 모친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집 반려견에게 물려 병원에 가서 광견병 예방주사까지 맞는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신이 만난 그녀(헨리의 모친)는 이미 죽은 사람이며, 자신의 팔을 물었던 개 역시 (헨리가 어렸을 때 키우다가) 이미 죽은 지 오랜 강아지였다.
망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오래 전에 이미 죽은 개에게 실제로 물리기까지 한 것이다. 화면은 뭉개진 해당 장면을 반복해 보여준다.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현실인지, 누가 진짜 의산지 환자인지... 무척 난해하고 혼란스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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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영혼의 신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더라만....맞는 소리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처럼 날마다 가련하게 죽어나간 짐승들 뒷처리나 하다 보면 육체따위, 신전은커녕 그저 너저분한 폐가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리고 그런 궁상맞은 용기에 욱여넣어진 영혼 그 자체에 점점 신뢰를 잃게 된단 말이지. 그까짓거, 사체와 함께 유채기름을 끼얹어 확 불살라버리면 되지 않나 싶을 때도 있어. 어차피 살아서 고통받는 재주 말고는 없으니. 어때, 내 생각이 틀렸나?"(127, 문지기의 대사)
"결국 나와 너, 둘이서 여름 한철을 들여 만든 상상 속 가상의 도시에 지나지 않으니까"(151, 여기서 '너'는 벽으로 둘러쳐진 그 도시 속의 소녀가 아니라 17살의 내가 만났던 그 '너'다.)
"사실 당신이 이 도시를 만든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이 이 도시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상상력이라는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 왔어요."
"분명 처음에 이 도시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태어났을 거야."(174. '우리'는 17/16살 당시의 나/너)
벽은 자유자재로 모양과 위치를 바꿀 수 있다. 견고한 벽, 자유자재한 벽. 벽은 말했다
"너의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206)
머리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이 격렬히 싸우며 뒤엉켰다. 나는 바야흐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경계에 와 있다. 이곳은 의식과 비의식의 얇은 접면이고,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할지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한다.(209, 벽으로 둘러쳐진 도시의 도서관에서, 그림자 없이 오래된 꿈을 읽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와 함께 바깥 세계로 탈출할 것인가, 갈등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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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읽고 말았다.
하루키는 늪이다.
이걸 768쪽이나 길게 써야 할 얘기란 말인가?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등등... 언제나처럼 투덜대며 불만을 꾹꾹 눌러가며 또 빠져들고, 완독하게 되고 만다. 그리고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정말로 있었어." "너는 그걸 믿는 게 좋아"라는 하루키의 속삭임이 귓가에서 들리는 듯하다.("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어." "너는 그걸 믿는 게 좋아."__《기사단장 죽이기》2권 에필로그)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새신작이 나오면, 선인세를 지불해가며 국내에서 즉시 번역출판하고(때로는 거의 동시에), 서점에는 오픈런이 이어질 정도로 국내에도 두터운 매니아 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 왜 사람들이 하루키를 열광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읽기 시작한 하루키... 하도 언론에서 띄워주고 베스트셀러 롱런을 하고 있다기에 막상 읽어 보면 '뭐 별거 없잖아'...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끌려들어가 읽게 되는 하루키 마법의 불가해함...
이 책《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街とその不確かな壁)》 또한 어디서 읽었던 듯한, 낯설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내가 알고 있던 그 인물이 이 인물이 맞는가, 확인하는 심정으로 읽어가게 된다. .
17살의 고3인 '나(僕)'는 한 살 아래 소녀 '너(君)'를 알게 된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풋풋한 사랑을 이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너'와의 연락이 두절되고...
도쿄의 사립대학으로 유학하고... 대학을 나와 '나'는 회사원으로, 출판 유통업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어느 순간 40대의 '나'는, 자신의 그림자를 스스로 떼어내고 눈까지 상한 채(자해?) 그 도시(街), 8미터나 되는 높고 견고한, 그러나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그곳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古い夢)을 읽는(夢読み) 일을 하고 있다.
도서관 직원은 딱 한 사람, 16살 그대로의 '너(君)'가 있다.
그러나 '너'는 도시 바깥 세계의 그 '너'는 아니다. '너'는 '나(僕)'를 못 알아본다.
여차즉 저차즉해서 그림자만 탈출시키고, 남았던 그 벽 안의 도시에 남기로 하고 제1부가 끝난다.
그리고 제2부에서 '나(私)'는 회사를 그만두고 후쿠시마의 z**라는 지역의 마을도서관장 일을 하게 되는데... 면접시험을 거쳐 채용하고, 이후 도서관 업무에 대해 상의하고 조언하는 이는 전임 관장 코야스(子易)씨다
그런데 그 코야스는, 알고 보니 이미 작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망자(亡者)인 코야스가 출현하는 장면은 전편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団長殺し)>>(2017)의 현현(顯現)하는 이데아나 메타포를 연상시킨다.
3부에서는 다시 벽으로 둘러쳐진 도시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고 있고...
일본어판에서는 벽 안 도시의 나(僕)와 벽 바깥 현실세계의 나(私)를 분리 묘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또한 경계가 불분명해져 혼동스럽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라고, 작가후기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하루키 작품을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어쩌면, 그 낯익음과 익숙함에 또 끌려들어가게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10대에 만나 막 사랑에 눈뜨려하는 순간, 영문도 모른 채 상실하여 마음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버린)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일단락 짓고 말겠다는, 결의의 산물은 아닐까?
1980년에 중편으로 발표했던 작품, < 街と,その不確かな壁 >을 40년 만에 다시 썼는데(改作?) 3년이 걸렸단다.
앞선 중편에서는 '너(君)'의 부재는 너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쉼표를 떼어낸 이 개작 장편 《街とその不確かな壁 》(2023)에서는 그렇게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드는 생각은, ('문지기'의 말대로 육체따위라고는 하지만) 사랑했던 그녀를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유채기름으로 훨훨 태워 처리해야 할 한낱 폐기물로) 영원히 잃고 싶지 않은 마음, 꿈속이든 벽으로 둘러쳐진 가상의 공간이든... 세상에, 아니면 세상에 없는 그 어디라도 좋으니 그녀가 '그곳'에 있어서 만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염원하는 작가의 간절한 마음이 읽힌다고나 할까.
* 일본 화엄종 중흥조인 묘에(明惠,1173-1232)스님은 꿈일기《夢記/ゆめのき》를 19살부터 시작해서 열반하기 전해까지 무려 40년 간 썼다고 한다.
묘에스님과 《몽기》관련해서는 우리 카페에 여러 꼭지의 글이 있는데, 김호성 선생의 故이연숙 선생 추모시를 다시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루키가 40년 만에 이 작품을 수정증보판으로 다시 썼다고 할 때 묘에 스님이 떠올라 '하루키의 夢記?'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