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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헌금 원리를 따르는 개혁교회의 헌금
고린도전서 16장 1-4절 / 1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교회생활(신앙생활)의 원리를 볼 수 있는 교회 섬김과 헌금에 대해서 설명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성경적 헌금 원리를 따르는 개혁교회의 헌금에 대해서 봅니다. 앞서의 글에서 교회 섬김과 그 교회 섬김에 있는 헌금을 설명드렸으며, 이제 역사적 전통을 잇는 개혁교회는 교회생활의 원리를 따르는 교회 섬김과 헌금을 어떻게 해 왔는지를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으로 먼저 교회 섬김에 있는 헌금이 드려지는 돈(재물)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가 가져온 이해를 봅니다.
의식주를 위한 소유(돈/재물)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성경
돈이란 화폐가 등장하기 전에는 돈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1)자연의 이용과 수렵으로 의식주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그 후에는 물물교환을 하여 의식주에 필요한 것으로 채워나갔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곡물, 말린 대구를 비롯한 생선, 생가죽을 비롯한 의복, 소금, 담배, 설탕 등에 의한 물물교환은 화폐의 기능과 역할을 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기에 의하면, 링컨이 학교에 다녔을 때 등록금을 햄과 옥수수로 지급했다고 나옵니다. 가축이 통용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3)그리고 자연물을 이용하여 화폐를 대신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별보배조개를 화폐로 사용한 적이 있고, 태평양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조개껍질이나 돌을 화폐로 쓰는 경우가 흔히 발견됩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에 속하는 야프(Yap) 섬은 돌 화폐로 유명한데, 가운데에 구멍을 뚫은 둥그런 형태인데 크기는 최대 4m에 이르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그것보다 작습니다. 이 돌 화폐의 가치는 단순히 크기만 따지는 게 아니고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리고 얻는 데 얼마나 어려움이 따랐는지에 따라서도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4)이후 금속화폐가 등장합니다. 한반도에서도 고조선 때부터 명도전, 오수전을 비롯한 중국화폐가 어느 정도 통용되거나 건원중보, 삼한통보, 저화같은 화폐가 발행되었으며 상평통보의 발행으로 화폐의 대중화를 이루었습니다. (5)그리고 화폐 중에서 으뜸은 금, 은, 동이었습니다. 이 금과 은과 동은 화폐로 주조되어 발행되기에 이릅니다. (6)그러다가 오늘날에 이르는 지폐의 발행이 있었으며, 신용카드의 발행으로, 또한 신용카드의 기능을 실은 핸드폰의 사용으로 화폐 지급과 수납을 대신하기까지 되었습니다. (8)앞으로도 더 화폐의 발달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러한 화폐와 그 발달을 언급하는 것은 이것이 왜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서입니다. 그것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 라는 말씀을 주신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인 사람은 살아가는 데는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는 먹거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신체가 지닌 오장육부가 제 기능과 역할을 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음료를 마시지 않고는 사람은 죽어가며 마침내 죽음에 이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에서의 경우에서나 이번에 튀르키예 지진에 의한 건물 붕괴에서 무너진 건물의 생존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을 구조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을 3일에 해당하는 72시간이라고 합니다. 그 이상 시간이 지났는데도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살아있다”며 놀라워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산상설교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생존해 나가는데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재물(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의식주(衣食住)와 관련이 있습니다. 돈을 사용해서 먹고 마시며 입고 거주하는 집을 얻기 때문에, 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의식주(衣食住)를 가져나가는데 사용되는 필요한 돈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의 생명을 보존해 가시는 방편으로 주신 자비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 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17:28)라는 말씀에도 분명하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해서, ‘돈’이라고 하는 재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는 방편(수단)이나, 이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기업으로 약속해 주시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해서는 그 땅을 열 두 부족에게 분배하여 그 땅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열 한 지파에게는 땅 분배로, 그리고 한 지파인 레위지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 세운 성막에서 일하는 것의 보수로 열 한 지파가 분배 받은 땅에서 수확하여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그들이 받을 분배의 몫이 되게 하여 양식으로 삼게 하는 것에서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1, 24).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의해서 그들의 생명이 유지되게 하였기에 자신들이 소유한 땅과 그 땅에서 주어진 것에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땅은 하나님의 것인 까닭에 땅과 그 땅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땅의 주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그 땅으로부터 얻은 소득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창 3:17-18) 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평생에 얼굴에 땀을 흘리는 수고에 있어 그 소산을 먹음에 있으나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땅의 관리인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는 자기의 몸에 대한 생각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해서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인간이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양식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인 - 세상 사람 - 들이 살아가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반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과는 달리 땅이 자기 것인줄 알고 땅의 소산을 자기 것으로 삼아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남의 소유하고 있는 것을 거짓 증언, 해꼬지와 살인을 하여 강탈해서라도 자기 소유화하려고 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분한 마음에 자기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돈에 대한 바른 정립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과 우리들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하고 있는 돈에 대하여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그 돈을 맡기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선용하면서 살아갈 마음과 생각을 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들은 의식주와 그에 필요한 돈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것과 관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같이 자기 자녀들을 돌보시는 은혜에 깊은 감사의 정신을 갖고서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배우고 이를 몸으로 익혀 자신들 또한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의지함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위해 자신을 드려 섬김에 있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헌금 정신이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후12:14) 라고 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주께 가진 믿음에 있는 우리 자신이며, 그러한 우리를 받으심에서 또한 우리의 헌금도 받으심에 있습니다. 이를 아벨의 제물에서 배웁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3-4).
성경적 헌금 원리에 의해 개혁교회가 가져온 교회 섬김에 있은 헌금(연보)
이제 개혁교회가 가져온 교회 섬김에 있은 헌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져 온 헌금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에서 각각 보는 공유와 통용의 원리에 의해 ‘위로의 아들’로 불리는 바나바에게서 보는 바인 재산의 기증, 그리고 신자의 헌금에 의해서 있어 왔습니다. 재산의 기증은 부요한 자들에게서 있어왔으나 극히 간헐적으로 있었고, 신자들이 매주 드리는 헌금이 교회재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헌금은 부자의 책임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의무였습니다. 교회의 감독들은 헌금에 의한 예측 가능한 수입을 기초로 빈민과 궁핍한 자들을 비롯한 구제의 봉사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회의 헌금이 여기에 나타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외형과 세(勢)를 과시하는 방편으로 전락함으로, 중세교회에서는 십일조를 중심으로 헌금이 더욱 다양하게 분화되어 나타났습니다. 서원모교수의 ‘교회 재정과 헌금의 역사’에 의하면, (1) 상업 활동에 의한 소득의 십일조인 대인십일조, (2) 농업생산물에 의한 소득의 십일조인 대물십일조가 행해졌습니다. 대물십일조는 (a)다시 주요 곡물과 포도주, 건초와 여울에 부과되는 십일조는 큰 십일조라고 불렸으며, (b) 과일, 너트, 콩, 완두콩, 채소, 양귀비 등에 부과되는 십일조는 작은 십일조라 일컬어졌습니다. 그리고 대물십일조에서 가축에 대하여 십일조를 할 경우는 모든 짐승, 소와 양부터 가금과 거위에 부과되는데, (a′)뿔이 있는 짐승에 부과되는 십일조는 큰 십일조로, (b′) 양, 염소, 돼지는 작은 십일조로 적용되었으며 기름의 십일조도 포함했습니다. 이 십일조는 오직 새로 태어난 짐승에게만 적용되었으며, 농장에서 나오는 모든 짐승의 소산물, 즉 우유, 꿀, 양모도 피의 십일조에 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일조는 사실상 예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라고 화를 선언하며 질책하신 외식에 의해 행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십일조’를 그대로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중세교회에서의 헌금은 이 외에도 다양한 헌금이 행해졌습니다.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이 십일조 제도를 악용하여 부담을 가중시키는 일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는 십일조 이외에도 ‘구일조’(nona)를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빌려준 재산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제외한 10분의 9에다 9분의 1을 구일조로 부과하여 결국 교회는 모든 수입의 5분의 1을 거두어들였다.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부과하는 ‘교황의 십일조’는 대표적인 십일조 제도의 남용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밖에도 교황이 부과하는 베드로의 은전, 서품사례(Servitien), 영대비(Palliengelder), 첫해사례(Annaten), 문서세(Kanzelgeb(Œhren), 면제세금(TaxenfŒr Dispense), 보호세(Schutzabgaben), 감독이 부과하는 성당세(Cathedraticum), 교회회의세(Synodaticum), 목회구 차원의 절기 헌물(Reichnisse), 목회사례(StolgebŒhren) 등이 있었다. 교회재정과 관련되어 가장 큰 폐해 사례로 등장한 헌금은 면죄부를 위한 참회의 헌금(참회금)입니다.
종교개혁 후 개혁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교회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헌금은 그 예배에서 한 순서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설교에서 증거되는 말씀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기도, 말씀과 함께 하는 찬송, 말씀과 함께 하는 성례, 그리고 말씀과 함께 하는 헌금입니다.
그런데 예배에서의 헌금은 두 가지 형태로 행해졌습니다. 하나는, 예배 의식에 의해서 하는 헌금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이라고도 하고, 구제를 위한 헌금이라고도 하며, 자비 사역을 위한 헌금이라고도 하는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배 순서에 의한 정해진 헌금 시간에서 헌금하는 것이 아닌 성도들이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8문에서 제4계명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이런 내용의 답이 있습니다. “주의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를 사용하며, 공적으로 주께 간구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예물을 드리며....”.
성도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통해 그분과 하나 된 몸을 이룸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또한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의 실천을 하나님의 백성을 돌봄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 교회의 지체인 성도를 섬김에 있습니다. 이 헌금은 정해진 헌금에 의해서 가져나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기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바친 것을 모은 대로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산에 의해서 집행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헌금이 다름 아닌 ‘주일 헌금’입니다. 주일 헌금은 언제나 목적이 있는 대내 대외 구제를 위한 것입니다. 곧 집사들의 자비의 사역을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바울은 '봉사의 직무'라고 했습니다. 이 헌금은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 15:26)과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라고 하는 것에서 보는 바인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행한 것이며,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요구한 것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1-2). 개혁교회에서는 이 헌금을 ‘자비의 직무’라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보통 예배시간 중에 행해지는 이 헌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과, 그리스도의 연민과 자선이 집사를 통해 보일 수 있는 가치 있는 다른 곳들을 위한 것이므로, 헌금으로 모여진 그 돈은 절대 교회 건물을 유지하는 데에나, 목사의 생활비나, 난방비를 위한 것에나, 연합회의 회비 등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비 사역을 위해서만 성도의 헌금이 필요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운영 - 교회 예배당의 사용에 따른 운영비를 비롯한 목회 사역과 목사의 사례 등 - 을 위해서도 재원의 확보를 위한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일년의 예산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산이 세워진 만큼 헌금이 요청되므로 성도의 책임 있는 의무가 따릅니다. 해서, 이 헌금은 성도들의 자원하는 정액 헌금으로 행해집니다. 개혁교회에서는 이 헌금은 교회 운영위 앞으로 바로 보내져 관리됩니다.
개혁 교회에서는 이 외에도 교회 입구에 여러 헌금함이 있습니다. 그 모두는 교회를 존재해 나가게 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교회와 관련된 것으로 학교, 선교, 신학생 등을 위한 것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교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내는 것들로 주일에 드리는 헌금과 구별됩니다.
개혁교회에서는 가난한 자를 돕는 자선과 관련된 일들은 ‘집사회’에서 하고, 교회의 건물 유지비나 기타 운영비용과 관련된 일들은 ‘운영위원회’에서 담당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구제하는 일은 성경이 명하는 일이므로 직분자가 감당하는 중요한 일이고, 교회를 운영하는 일은 단순히 필요에 의한 일이기 때문에 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성경에 기초한 직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편, 박윤선 목사는 헌법 해설 헌금 항목에서 헌금은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 “교역자를 위한 헌금”, “주님의 일을 위한 헌금”으로 나눠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적 헌금의 본질은 “자의적 헌납”임을 소개합니다. 이 자의적 헌신을 토대로 신자로서 의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참여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십일조는 헌금의 최소 기준이며 은혜 받은 대로 더 많이 하도록 훈련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헌금에 대해서 예배모범에 말하기를, “목사마다 자기 교회가 감심으로 헌금하도록 습성을 배양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도마다 다소를 물론하고 자기 힘 있는 대로 바치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18장 4).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규정입니다.
이렇게 성경적 헌금 원리를 따라서 개혁교회가 해 온 헌금을 참조하여 교회가 행하여 나갈 헌금을 어떻게 가져나갈 것인지를 잘 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신앙에 의해 교회 섬김에 있는 헌금을 해 나가는 교회로 잘 서나가야하겠습니다.
그에 대한 실태를 알기 위해서 역사적 전통의 개혁교회가 가져온 헌금의 실상을, 그리고 현재에 개혁교회란 이름에 있는 교회들이 예배에서 말씀과 함께 헌금에 참여하고 있는 실상을 알 필요를 갖습니다. 개혁교회란 이름을 가지고서 존재하는 각 교회의 신앙과 교회 섬김을 어떻게 가져나가고 있는지를 앎으로써 헌금의 올바른 이해와 함께 그 실재에 있어 가야 할 유익을 얻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하의 한국교회가 보이고 있는 교회 섬김과 헌금의 부정적인 어두움을 잘 알기에 그 필요성은 더욱 큽니다. (*)
*2023년 3월 12-26일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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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의 작성에는 (1) 서원모 교수, "교회 재정과 헌금의 역사" (2) 허순길 교수, "개혁 교회의 언약적 예배" (3) W. L. Bredenhof(윤석준 역), "개혁교회를 위한 가이드" (4) 다음 까페 대한에스라성서연구원, "개혁파 교회의 성경적 헌금 원리(십일조 헌금의 역사 자료)"②를 비롯한 여러 글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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