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육조단경(六祖壇經)》-
앞서 신수(神秀)의 게偈)를 본 홍인(弘忍)의 제자들은 일제히 그를 칭찬했다. 사실 홍인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해 들은 혜능(慧能)은 "신수의 게는 진실을 노래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비평했다.
그러나 매일 벼를 찧고 있는 무식한 인간이 선심(禪心)같은 것을 어찌 이해할 것이냐고 아무도 상대를 하지 않는다.
그는 그날밤 자기 심경을 화운(和韻. 남이 지은 시의 운을 써서 시를 짓는 것)하여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써 달라 하고 신수의 게 옆에 붙여 놓았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보리는 본디 나무가 아니다. 明鏡亦非台 명경역비대 명경도 역시 대가 아니다.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본디 무일물인데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진애가 쌓이겠는가?
(보리라는 나무도 명경이란 마음도 없다. 보리도 없거니와 번뇌도 없다. 본디 무일물이다. 진애가 쌓일 곳이 없으므로 불식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것을 보고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선(禪)의 절대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인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아직 멀었다."고.
이 한마디로 문제는 해결을 본듯 했다.
그런데 실은 혜능에게 홍인의 정통 선법이 전해졌던 거다. 후에 혜능의 선풍(禪風)이 남방에서 성했으므로 남종선(南宗禪)이라 했고, 신수의 교풍(敎風)은 북방에 퍼졌으므로 북종선(北宗禪)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 두 게偈)에서 알 수 있듯, 북종선은 수행의 쌓아올림과 차례를 밟아 가는데 중점을 두므로 점오(漸悟) 라고 한다. 혜능의 남종선을 돈오(頓悟)라고 한다. 수행의 쌓아올림 위에 또 하나의 비약이 필요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신수나 혜능은 원래가 다 홍인의 제자다. 또 선 그 자체에 본질적인 차가 있는 셈도 아니다. 수행의 필요를 제창하는데 있어 두 사람이 다르지는 않다.
오직 실천면에서 번뇌와 깨달음의 대립적 존재를 가정하고 미혹을 서서히(점진적) 불식해서 본래의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점오(漸悟)다.
이 가설을 두지 않고 부처와 직결하라, 수행이 여물었을 때가 본래의 깨달음 그대로다, 라고 하는 것이 돈오(頓悟)다.
몸과 마음을 대응시켜 망집과 깨달음을 경쟁 상대로 삼고 진애와 불식을 분별하는 상대적 인식을 고차점(高次點)에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디 아무것도 없다.'라고 절대 부정했던 것이다.
모든 집착을 완전히 공(空)으로 돌린 순수한 인간성인 원점에 선 인식이다.
그러나 진실한 실감은 더욱 깊어 필설(筆舌)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실제로는 점(漸)을 따라 수행하는 신수의 과정을 몇 개나 쌓고 쌓아 도달한 정점에서 다시 비약하여 혜능이 얻은 선심을 획득하도록 선자는 수행하는 것이다.
출처 : 柳淞月 選解 <선명구이백선(禪名句二百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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