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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예종 6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6월 27일(기묘) 5번째 기사
《금강경》과 《법화경》에 능하지 못한 자를 환속시킨다는 말을 듣고, 신미가 상소하다.
중[僧] 신미(信眉)가, 임금이 중들에게 《금강경(金剛經)》과 《법화경(法華經)》을 강(講)하여 시험해서 능하지 못한 자는 모두 환속(還俗)시키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언문(諺文)으로 글을 써서 비밀히 아뢰기를,
“중으로서 경(經)을 외는 자는 간혹 있으나, 만약에 강경(講經)을 하면 천 명이나 만 명 중에 겨우 한둘뿐일 것이니, 원컨대 다만 외는 것만으로 시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중사(中使)987) 를 보내어 묻기를,
“이 법은 아직 세우지 않았는데,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느냐? 내가 말한 자를 크게 징계하려고 한다.”
하니, 신미가 두려워하며 대답하기를,
“길에서 듣고 급히 아뢴 것이니, 노승(老僧)에게 실로 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신미를 졸(卒)한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집에 거처하게 하고, 병졸들로 하여금 문을 지키게 하여 사알(私謁)을 금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8책 392면
【분류】 *사법-법제(法制) / *사상-불교(佛敎)
[註 987]중사(中使) : 환관. ☞
52) 성종 8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10월 10일(갑인) 4번째 기사
안동 부사 김수화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형인 중 신미를 만나기를 청하다.
안동 부사(安東府使) 김수화(金守和)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이 임지(任地)로 갈 때에 길을 영동(永同)으로 취하여, 형(兄)인 중[僧] 신미(信眉)를 만나보고 가기를 원합니다.”
하니 원상(院相)에게 전지(傳旨)하기를,
“금년에 안동은 실농(失農)이 더욱 심한데, 김수화가 길을 영동으로 취하면 부임이 지체될 것이다. 본 고을의 구황(救荒)을 전관(前官)이 잘 조치해 놓았는가?”
하니 홍윤성(洪允成) 등이 아뢰기를,
“전관이 필시 마음껏 구황을 다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김수화로 하여금 부임해서 구황을 한 뒤에 신미를 보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옳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8책 53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구휼(救恤) / *농업-농작(農作)
53) 성종 12권, 2년(1471 신묘 / 명 성화(成化) 7년) 10월 27일(을미) 5번째 기사
야대에서 검토관 손비장 등이 전라도 조운(漕運)과 중 신미 등의 폐단을 아뢰다.
야대(夜對)에 나아가니, 검토관(檢討官) 손비장(孫比長)·채수(蔡壽)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요사이 모두 외방(外方)으로부터 돌아왔으니 수령(守令)의 불법(不法)과 민간의 질고(疾苦)를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각각 말하라.”
하니, 손비장이 대답하기를,
“궁벽한 시골 골짜기에는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나 신 등이 다 알 수 없고, 신의 들은 바로는 백성의 심한 병통이 되는 것은, 전라도의 조운(漕運)1679) 입니다. 처음에는 사선(私船)을 쓰고 관(官)에서 그 값을 주었기 때문에 조운에 폐단이 없고 사람들이 하기를 즐겼는데, 지금은 관선(官船)을 써서 수군(水軍)을 역사시켜 운반하여 창고에 들이는 즈음에 거개 모손(耗損)이 많으므로, 드디어 수군에게 징수하니, 수군은 대개 가난한 자이므로 가산(家産)을 다 팔아도 보상해 채우지 못하여, 이로 인해 도망하고 떠나는 자가 서로 잇따릅니다. 우리 나라 남쪽 지방에 변경의 근심이 없는 것은 수군이 있기 때문이니, 청컨대 예전대로 사선을 써서 조운하게 하소서. 만약 ‘관에서 그 값을 주면 그 비용이 실로 많다.’고 한다면, 저 사선을 쓰는 자도 우리 백성이니, 비록 값을 줄지라도 우리 백성이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좋으나, 다만 관선을 쓰는 것이 선왕(先王)의 법이니, 감히 갑자기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채수가 말하기를,
“중[僧] 신미(信眉)·학열(學悅)이 강원도에 있으면서 탐하고 요구하는 것이 만족함이 없는데, 감사(監司)도 선왕(先王)께서 소중히 여기시던 자들로 생각하고 지나치게 후히 대접하여 요구하는 것을 따르지 아니함이 없어, 여러 고을에 징수하여 그 청을 채우니, 이는 모두 백성의 고혈(膏血)입니다. 또 민력(民力)을 써서 운반하니, 먼 것은 7, 8일, 가까운 것은 3, 4일의 노정(路程)인데 여윈 소와 약한 말로 험한 산을 넘고 먼 길을 걸으니, 백성이 심히 괴로와하며, 또 그 무리가 매우 많은데 도내(道內)에 횡행(橫行)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갑니다. 청컨대 금지하고, 또 감사·수령(守令)에게 유시(諭示)하여 증유(贈遺)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의 병폐를 없애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8책 606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교통-수운(水運) / *군사-지방군(地方軍) / *사상-불교(佛敎)
[註 1679]조운(漕運) : 지방에서 받은 조세(租稅)를 강이나 바다를 통해 배로 서울의 경창(京倉)까지 운송하던 일. ☞
54) 성종 27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2월 22일(계미) 3번째 기사
서거정 등이 차자를 올려 청주 목사 김수경을 파직할 것을 청하다
서거정(徐居正) 등이 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이달 초7일의 비목(批目)을 보니, 김수경(金守經)을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제수(除授)하셨습니다. 김수경의 사람됨은 성품이 본디 집요한데다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전에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에 일하는 것이 오활하고 정사에 임해서 어쩔 줄 모르므로, 아전이 농간을 부리고 백성이 폐해를 받아서 온 고을이 괴로와하더니, 과연 하고(下考)2864) 를 받아 폐출(廢黜)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거의 70인데다가 아주 늙어 느리고 무디므로, 백성을 가까이 다스리는 직임에 다시 있기에 마땅하지 않은데, 더구나 청주는 충청도 안에서 큰 고을로서 사무가 많고 힘들므로, 결단하여 다스리고 잘 조처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직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으니, 김수경처럼 보잘것 없는 무리가 하루라도 있을 곳이 못됩니다. 대저 작록(爵祿)이란 임금이 사대부(士大夫)를 연마하는 도구이니, 한 사람을 써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했다고 하면 인재를 얻었다고 할 수 있고, 한 사람을 써서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뜻에 만족히 여기지 않으면 인재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정치에 임하셨을 때에는 정성을 기울여 잘 다스리고자 도모하여 마치 목마르듯이 어진 사람을 찾되 수령(守令)의 선택을 더욱 중하게 여기시어 조관(朝官) 6품 이상이 그 자격자를 천거하여, 전조(銓曹)2865) 에서 서판(書判)2866) 으로 그 재주를 시험하고, 승정원(承政院)에서 《목민심감(牧民心鑑)》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강(講)2867) 하여 그 능력을 살피며, 또 처음으로 6품에 오른 자에게는 수령을 제수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 외임(外任)의 중요함이 이와 같으므로 배사(拜辭)하는 날에는 전하께서 인견(引見)하여 칠사(七事)2868) 를 힘쓰도록 정녕하고 간절하게 이르셨으므로, 나라 안의 모든 사대부가 목을 늘이고 눈을 부비며 순리(循吏)2869) 의 정치를 기대하였는데, 특히 김수경은 문무(文武)의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자가 아닌데도 나이 많은 것을 불구하고 특별히 뽑아 서용(敍用)하여 70에 가까운 쇠약한 나이에 이 중임을 얻게 하시니, 성상(聖上)께서 어진 사람을 뽑아 쓰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시는 성심(聖心)이 아닌 듯합니다. 빨리 김수경을 파직하고 일 처리를 잘 해낼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대신하여 맡기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람은 한 번 내쳤다 하여 버릴 수는 없으니, 할 만한지를 시험할 따름이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수경은 녹사(錄事) 출신이며 다른 재능이 없는데, 그 형인 중[僧] 신미(信眉)가 총애받는 데에 기대서 지위가 당상(堂上)에 이르렀으니, 주목(州牧)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헌부(憲府)에서 그가 어리석고 용렬하다는 것을 알면서, 굳이 논집(論執)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아깝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10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사상-불교(佛敎) / *역사-사학(史學)
[註 2864]하고(下考) : 근무 성적 평가의 하등을 말함. ☞
[註 2865]전조(銓曹) : 이조와 병조. ☞
[註 2866]서판(書判) : 당대(唐代)에 관리를 가려 뽑던 과목. 즉 서법(書法)에 우수한 자를 서(書), 문리(文理)에 우수한 자를 판(判)이라 하였음. ☞
[註 2867]강(講) : 강독 시험(講讀試驗). ☞
[註 2868]칠사(七事) : 새로 임명된 수령(守令)이 지켜야 할 일곱 가지 조목. 즉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奸猾息)임. ☞
[註 2869]순리(循吏) : 법에 따라 다스리는 선량한 관리. ☞
55) 성종 29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4월 15일(을해) 2번째 기사
병조에 전지하여 복천사에 내려간 중 신미와 학열에게 말을 주게 하다.
병조(兵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충청도 보은현(報恩縣) 복천사(福泉寺)에 내려간 중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에게 말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17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사상-불교(佛敎)
55) 성종 29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4월 19일(기묘) 4번째 기사
사간 박숭질 등이 신미·학열에게 말을 내린 것이 옳지 않음을 아뢰다.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박숭질(朴崇質)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치(傳置)2959) 를 설치한 것은 본래 사명(使命)을 상달하고 군정(軍情)을 보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두 중이 명목도 없이 역마(驛馬)를 타고 다니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내린 명령을 거두시어 깨끗하고 밝은 정치에 누(累)가 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공경히 대접하던 중인데, 역마를 주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17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교통-육운(陸運) / *사상-불교(佛敎)
[註 2959]전치(傳置) : 역참(驛站). ☞
56) 성종 32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7월 1일(경인) 3번째 기사
대사헌 서거정 등이 차자를 올려 김수화·최수지의 관직 제수가 옳지 못함을 말하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서거정(徐居正)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김수화(金守和)는 본래 성질이 용렬하고 경솔하며 또한 재행(才行)도 없는데, 무반(武班)에서 일어나 가는 곳마다 명성(名聲)과 공적(功績)이 전혀 없었습니다. 일찍이 강진(康津)의 수령(守令)이 되었을 때 죄에 연좌되어 도망해 숨었다가 틈을 엿보아 벼슬길에 나왔으니, 그 마음과 뜻이 간사하기가 그와 비할 자가 없었지만, 요행으로 인하여 함부로 당상(堂上)의 관직을 받았습니다. 지금 또 갑자기 전형(銓衡)3106) 의 자리에 있게 되니, 여러 사람의 물망(物望)에 합당하지 아니합니다.
최수지(崔水智)는 잔열(孱劣)하고 능력이 없어서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로서 전최(殿最)3107) 에서 중등의 성적에 있었으니, 그 사람이 수령의 직에 합당하지 아니한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현풍 현감(玄風縣監)에 임명되었으니 국가에서 수령을 중하게 여기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최수지의 청탁(請託)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이것은 전조(銓曹)3108) 에서 밝지 못한 때문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결단해 예단(睿斷)을 내리시어 김수화 등의 관직을 바꾸도록 명하신다면 심히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김수화는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바꾸는 것이 좋겠고, 최수지는 관직에 임명한 이유를 해당 조(曹)에 묻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화는 중[僧] 신미(信眉)의 아우였는데, 그 형을 빙자하여 당상관(堂上官)에 올라갈 수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그를 비루하게 여기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35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註 3106]전형(銓衡) : 사람의 재능을 시험하여 뽑음. 또는 그런 일을 맡은 관원. ☞
[註 3107]전최(殿最) : 전조(銓曹:이조와 병조)에서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할 때 각 관사의 장(長)이 관리의 근무 성적을 상·하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 한 데서 나온 말로,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음. ☞
[註 3108]전조(銓曹) : 이조와 병조. ☞
57) 성종 35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10월 2일(경신) 2번째 기사
대사간 정괄 등이 상소하여 불교·군사·의창·공역·언로·저화 등에 대해 논하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정괄(鄭佸)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상소는 이러하였다.
“신 등이 듣건대, 예로부터 수성(守成)3471) 의 세대(世代)에는 흔히 즐겁게 놀고 편함에 빠져서 옛 업적을 떨어뜨리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진실로 사람의 심정은 오래 평안한 데에 습관되면 평상 상태를 지키기에 편하여 인순(因循)3472) 하는 타성에 젖어서 고쳐 바꾸는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뛰어나게 특별히 분발하여 쓰러진 것을 일으키고 해진 것을 기우는 조처를 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에 이룩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고 학문이 날로 진취하시어 바야흐로 장차 당우(唐虞) 삼대(三代)3473) 로써 기대되는데, 그 초년의 정치에 있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신(人臣)의 의리로는 반드시 다스려지는 세상을 근심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 등이 언관(言官)에 몸담아 있으면서 매양 시위 소찬(尸位素餐)3474)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감히 시무(時務) 아홉 조목을 가지고 천청(天聽)을 우러러 더럽히니, 전하께서는 재결하여 채택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1. 불씨(佛氏)3475) 는 본래 오랑캐의 한 법으로,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倫理)를 알지 못하고, 농사 짓지 않고서 밥 먹고 누에 치지 않고서 옷 입으며, 그 인연(夤緣)3476) 의 말로써 세상 사람을 미혹(迷惑)하게 하여 속이니, 바로 나라를 좀먹는 해충(害蟲)이므로 반드시 물리쳐 없애버린 뒤에야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깊이 그 해독을 통촉하시어 사사(寺社)의 노비(奴婢)와 전지(田地)를 모두 혁파(革罷)하고, 요사하고 더러움을 금(禁)하고 바른 도(道)를 밝히어, 국가 만세(萬世)를 위하는 생각이 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승도(僧徒)들이 점점 성하여지면서 횡포함이 더욱 심하여, 부력(富力)은 경상(卿相)3477) 과 비등하고 세력은 능히 사람을 움직이는 자가 있으며, 저의 세력이 강함을 믿고 남의 제방[堤堰]을 빼앗는 자가 있으며, 민간에 드나들면서 음탕하고 방자하여 풍속을 어지럽게 하는 자가 있으며, 어물(魚物)과 소금을 팔아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으며, 남의 아내나 첩을 빼앗는 자가 있으며, 남의 소송[詞訟]을 대신 맡아서 받드시 이긴다고 스스로 기약하는 자가 있으며, 떼를 지어 몽둥이를 가지고 수령(守令)을 위협하는 자가 있어서, 무릇 일이 중에 관계되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감히 누구라고 말하지 못하니, 여기에 이르러 가위 마음이 아픕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옛 제왕(帝王)의 학문을 강구해 밝히시고 중정(中正)한 정치를 넓히시어 간사하고 망령된 무리가 저절로 사라져 없어졌으나, 그 해가 되는 것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아니한 것이 여덟 가지 있습니다. 근래에 연달아 흉년이 들어서 국용(國用)이 넉넉하지 못하여 무릇 급하지 아니한 비용은 거의 다 줄었는데, 원각사(圓覺寺)·내불당(內佛堂)·복세암(福世菴)에 공급하는 수용(需用)은 아직 있으니, 그 하나입니다.
군사는 본래 왕실(王室)을 호위하는 것인데, 경중(京中)의 모든 절에서 정병(正兵)으로써 문을 파수(把守)하여 궁금(宮禁)과 비슷하니, 그 둘입니다.
강원도 한 도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조세(租稅)의 수입이 매우 적어서 여러 고을의 군수곡(軍需穀)이 1백 석에 차지 못하여 진실로 우려될 만한데, 조세로 거둔 쌀을 모두 금강산(金剛山)의 여러 절에 운반하여 이름을 ‘세헌(歲獻)’이라고 하므로 이는 한 도(道) 백성의 고혈(膏血)을 쓸데 없는 중에게 버리는 것이니, 그 셋입니다.
경외(京外)의 사찰(寺刹)이 너무 많아서 있던 것을 더러 없앴는데, 요즈음 와서 절과 탑(塔)을 수리하거나 창건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어서 백성을 괴롭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키니, 그 넷입니다.
역기(驛騎)는 사명(使命)을 통하고 변보(邊報)를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승도(僧徒)들의 왕래에도 역마를 타는 것을 허락하여 역로(驛路)를 수고롭게 하니, 그 다섯입니다.
청정 과욕(淸淨寡欲)은 그들의 도(道)인데, 큰 절의 세력 있는 중이 미곡(米穀)을 식리(殖利)로 늘려서 세력을 이용하고 기세를 부리어 평민을 침탈(浸奪)하니, 그 여섯입니다.
근래에 군(軍)에서 도망하고 부역(賦役)을 피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자가 몇 천명 몇 만명이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군액(軍額)과 농민이 이로 인하여 감소하고 앉아서 먹는 자가 많으니, 그 일곱입니다.
중의 아우나 조카로 용렬하고 못난 무리가 요행을 인연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퍼져서, 수령으로는 반드시 큰 고을이나 부유한 고을을 점령하고, 경관(京官)으로는 반드시 육조(六曹)의 청관(淸官)이나 요직(要職)을 얻어가지고 이르는 곳마다 모두 직무는 게을리하고 백성을 못살게 하니, 그 여덟입니다.
무릇 이 여덟 가지 일은 모두 나라의 큰 폐단이니, 원컨대 이제부터 중에게 공급하는 비용을 없애고, 사찰에 문을 파수하는 군사를 없애며, 세헌(歲獻)하는 쌀을 없애고, 승족(僧族)의 벼슬을 파하며, 사찰을 창건하지 말고, 역마 타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중의 식화(殖貨)하는 것을 금하여, 모두 속공(屬公)시켜서 군수(軍需)에 보충하며, 나이가 40세 이하로서 도첩(度牒)3478) 이 없는 중은 다 환속(還俗)시켜서 군액(軍額)을 채우도록 하소서.
1. 벼슬로 상주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인데, 위에서는 아래에 공이 없는 것을 함부로 주어서는 안되며, 아래에서는 위에 역시 요행으로써 외발되게 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위에 있으면서 함부로 주거나 아래에 있으면서 외람되게 구하면, 정사가 날로 외람되게 되어 다시 구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근년 이래로 논상(論賞)하는 길이 한번 열리자, 비록 신하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인인데도 조금만 힘들여 이룬 것이 있으면 벼슬을 주고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으레 예삿일이 되어, 혹 제조(提調)가 낭청(郞廳)의 근로(勤勞)를 스스로 추천하여 상주기를 요구하니, 낭청에게 상이 있는데 제조에게만 상이 없겠습니까? 이에 무릇 별제(別祭)의 집사(執事)나 공작 감장(工作監掌) 등의 일에 분주히 앞을 다투어 권문(權門)에 구하고 청하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국휼(國恤)의 애통한 가운데에서도 모두 그렇지 아니함이 없어서 염치(廉恥)의 없어져감이 어느덧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의묘(懿廟)3479) 를 옮겨 모심에 당하여 비록 유식하다는 조관(朝官)마저도 천은(天恩)을 바라고, 집사(執事) 되기를 구하기에 온갖 짓을 다하여 기어코 얻은 뒤에야 그만두니, 선비 기풍(紀風)의 비루함이 어찌 이보다 심함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는 군공(軍功)이 특이한 자 이외에는 모두 벼슬로 상주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서, 외람된 것을 방지하여 선비의 기풍을 정(定)하도록 하소서.
1. 우리 태조(太祖)께서 고려(高麗)의 판탕(板蕩)3480) 된 뒤를 이어서 세상의 도리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서 《원육전(元六典)》3481) 을 창제하여 세우셨는데, 그 뒤에 세종(世宗)께서 오히려 절목(節目)의 미비함을 고려하여 또 《속육전(續六典)》을 지으셨습니다. 무릇 이 두 법전(法典)에 실린 대체의 강령(綱領)과 세소한 기율(紀律)이 지극히 자세하고 분명하니, 실로 만세에 바꾸지 못할 법전입니다. 세조(世祖)께서 중흥(中興)하여 일대(一代)의 제도를 크게 새롭게 하여 번거로운 것은 없애고 간략하게 하여서 요약(要約)하기에 힘써 이름을 《경국대전(經國大典)》이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나라를 경륜(經綸)하는 데에 지극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기(事機)는 끝이 없는데 과조(科條)는 한(限)이 있어서, 관리가 일을 만나 법을 상고하고자 하면 법에 의거할 데가 없고 일이 처단하기 어려울 경우가 있으니, 이에 새로 교조(敎條)3482) 를 세워서 한때 권도(權道)의 변통에 따르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법을 세우는 것이 점점 번거로와졌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 새로 세운 조목은 《원육전》과 《속육전》 두 법전에 실린 바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는데, 《원육전》과 《속육전》 두 법전을 속지고각(束之高閣)3483) 하니, 진실로 탄식할 만합니다. 신 등은 원컨대 항상 《대전(大典)》을 사용하여 세조께서 물려주신 좋은 계책을 준수하고, 그 《대전》에 없는 조문은 새로 세우지 말도록 하며, 《원육전》과 《속육전》 두 법전을 통용하여 선왕(先王)의 옛 법을 보존하여 분경(紛更)3484) 의 조짐을 없애도록 하소서.
1. 군사는 정예(精銳)함에 달려 있지 많은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옛적에는 한 집에서 종군(從軍)하고 일곱 집이 이를 받들었으니, 국가에서 조종(祖宗)으로부터 내려오면서 백성[生齒]을 보호해 기르고 오로지 농상(農桑)을 중히 하여, 집에는 남는 장정이 있고 백성은 남는 힘이 있어서 그 풍속이 여유가 있는 까닭에, 백성의 생활이 풍부하고 군사와 말들이 정예하고 굳세었습니다. 이때에는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의 갑사(甲士)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그 인원수[額數]도 그리 많지 아니하였는데 시위(侍衛)가 충족하고 사방(四方)이 잘 다스려져서 편안하였으니, 나라 일을 하는 방도가 이와 같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대신(大臣)들의 헌의(獻議)로 인하여 제도(諸道)의 군적(軍籍)을 만드는 데에 많이 넣으려고 힘써서, 한 집에 부자(父子)나 형제(兄弟)가 있을 때 아비가 정군(正軍)이 되면 아들은 봉족(奉足)3485) 이 되고 형이 정군(正軍)이 되면 동생이 봉족이 되며, 이 뿐만 아니라 만약 남은 장정이 있으면 빼앗아 다른 부역(賦役)으로 정하고, 아무리 노쇠(老衰)하거나 쇠잔(衰殘)한 사람일지라도 찾아 모아서 남김없이 모두 군적(軍籍)에 적어 넣고 기병(騎兵)·보병(步兵)의 정병(正兵)이라고 이르니, 그 군사의 많음이 예전에 비해 2갑절 5갑절뿐이 아닙니다. 이에 농민이 모두 병역에 입적(入籍)되어서 군사와 농사가 함께 곤란합니다. 전하께서 이 폐단을 깊이 통촉하시어 다시 감하고 없애는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 백성을 쉬게 하고 기르는 데에 지극하고 극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주(州)에서 몇 사람을 줄이고 아무 현(縣)에서 몇 사람을 줄이라고만 하고 그 여(旅)3486) 를 그대로 둔다면 그 여(旅)를 채우고 그 인원수를 갖추지 아니할 수 없으니, 명색으로는 줄인다고 할지라도 실상은 줄어지지 아니하여 폐단이 도로 전과 같을 것인데, 감군(減軍)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른바 기병(騎兵)이라는 것이 거개 타는 말이 없고 시위(侍衛)할 때에 이르러서야 남에게 빌어서 창졸간에 준비하는데, 구하지 못하면 걸어서 따릅니다. 정렬(庭列)3487) 하는 군사에 이르러서는 몸에 누더기를 입고 발에 짚신을 신어서 그 난잡하여 정돈되지 않음이 이렇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소위 보병(步兵)이란 것은 겨우 서울에 들어오면 모두 토목(土木)의 역사에 나아가고 한 사람도 시위(侍衛)하는 자가 없게 되니, 이름은 비록 군사라고 할지라도 실상은 역졸(役卒)입니다. 그 노고(勞苦)를 견디지 못하면 사람을 사서 대신하게 하므로 두어 번 번든 뒤에는 가산이 탕진하여 민간이 소연(蕭然)3488) 하게 되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조종조(祖宗朝)로부터 공작(工作)이 하나가 아니었으나 숙위병(宿衛兵)을 철수하여 역사를 시켰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 거꾸로 됨이 심합니다. 만약에 급한 사변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쓰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하건대, 정병(正兵)의 수를 줄이고 공역(工役)의 노고를 없애며, 장건하고 튼튼한 군사를 정예(精銳)하게 훈련시켜 시위병(侍衛兵)으로 삼고, 동거하는 부자나 형제는 서로 보(保)3489) 를 두지 말고 또 다른 역(役)을 허락하지 아니하면, 농사에 힘쓰는 자가 많아서 저절로 병사와 농사가 함께 충실해질 것입니다.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도 대단히 많고 정예하지 못한 폐단이 있으니, 아울러 도태(淘汰)하고 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신 등은 듣건대 공역(工役)을 일으키고 민력(民力)을 쓰는 것은 성인(聖人)이 중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러므로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무릇 민력을 쓴 것이 비록 그 시의(時義)에는 적당하였는데도 오히려 경서(經書)3490) 에 기록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중한 일임을 보였으니, 하물며 당연히 할 일이 아닌 데에 가볍게 민력(民力)을 쓰는 것이겠습니까? 근년에 산릉(山陵)과 침묘(寢廟)의 큰 역사가 잇따랐는데, 이런 일은 민력을 써도 부득이한 일이지마는, 그 밖에 그만둘 수가 있는 역사를 번갈아 일으켜서 그치지 아니하여, 5, 6년 사이에 공장(工匠)과 역졸(役卒)이 휴식할 때가 없고 처자(妻子)의 양육(養育)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되었으니, 진실로 가엾고 민망합니다. 근래에 수해와 한재가 연달아서 재앙과 변고가 여러 번 일어나고 흉작과 실농(失農)의 심함이 근년에 없는 바이니, 이는 마땅히 근심하고 걱정하여 두렵게 생각할 때입니다. 피로하여 여위고 굶주린 군사들이 일을 하면서 부르짖는 소리가 길에 끊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야흐로 이제 경비(經費)는 너무나 많은데 회계(會計)는 날로 줄어서 조세(租稅)의 수입이 전에 비해 적으니, 이는 마땅히 줄이고 덜어서 쓰는 것을 절약해야 할 때인데, 공장(工匠)의 삭료(朔料)·월봉(月俸)의 지급과 역사를 감독하는 관리의 공억(供億)하는 비용이 어지럽게 그치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은 듣건대,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한 몸에 비유하면 백성은 바로 맥(脈)인데, 맥이 한번 병들면 장차 다시 약으로 구제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원컨대 이제부터 무릇 급하지 아니한 역사는 끊고 다시 일으키지 말아서 백성의 힘을 회복시키어 나라의 맥을 튼튼하게 하소서.
1. 요사이 호조(戶曹)의 수교(受敎)에, ‘의창(義倉)3491) 의 지난해에 수납하지 못한 곡식을 수령이 기한을 지나도 수납을 마치지 못한 자는 그 푼수(分數)3492) 에 따라 혹은 1자급(資級), 혹은 2자급을 낮춘다.’고 하시었으니, 무릇 수납의 기한을 설정하고 벌(罰)을 논하는 등급을 세워서 관리를 제어하는 것은 족히 영(令)이 행하여지고 일이 이루어질 것 같으나, 그러나 위에서는 아래에 구구(區區)하게 벌을 논하는 것으로써 일을 처리하는 바탕으로 삼고, 아래에서는 위에 규규(規規)하게 벌을 면하는 것으로써 고식지계(姑息之計)3493) 를 삼으니, 이는 상하(上下)에서 이(利)로써 서로 대우하는 것이므로 실로 염치(廉恥)를 장려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만일 연약하고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국가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여 회계(會計)를 손실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쫓아내어도 좋고 죄를 주어도 좋을 것인데, 하필이면 먼저 이 벼슬을 빼앗는 법을 마련하여 두려워서 동요하게 할 것입니까? 심히 선비를 대접하는 체통이 아닙니다. 무릇 잔혹(殘酷)한 관리는 비록 기한을 정하는 명령이 없을지라도 백성에게서 빼앗고 소란하게 하여 하지 못하는 바가 없을 것인데, 하물며 그 길을 열어서 인도하는 것이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에게 1분(分)을 너그럽게 하면 백성은 1분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처음 정치에 더욱이 백성에게 너그럽게 하는 것을 급무로 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신 등은 원컨대 수납(收納)의 기한을 없애고 자급을 낮추는 법을 혁파하여 민생(民生)을 넉넉하게 하소서.
1. 전제 별감(田制別監)은 본래 양전(量田)3494) 을 위한 것이므로, 일이 있으면 두고 일이 없으면 파하여 영구히 상설(常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 도(道)의 양전(量田)은 이미 끝났는데, 강원도(江原道)·영안도(永安道)·평안도(平安道)의 세 도만은 연달아 흉년이 들기 때문에 〈양전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풍년이 들 해를 미리 기약하기는 어려운데 별감을 그대로 두고 혁파하지 아니하니, 그 인원이 많아서 무려 1백여 명입니다. 그러므로 대개 일하는 사무가 없고, 또 상시로 출근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 자기 집에 편히 앉아 있거나 혹은 자신이 외방(外方)에 있으면서 공부(公簿)3495) 에 거짓 서명(署名)하여 사만(仕滿)이 되면 계급을 더하여 유품(流品)3496) 과 다름이 없어서, 자궁(資窮)3497) 에 이른 자가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니, 그 외람됨이 어찌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양전(量田)하는 해를 기다려서 임시(臨時)로 임명하여 보내어도 늦지 않을 것인데, 어찌 그대로 상설(常設)로 두어서 폐단을 끼치게 할 것입니까?
신 등은 원컨대 전제 별감(田制別監)을 혁파하고 외람되게 받은 계급을 추탈(追奪)하여 간사하고 거짓된 풍습을 방지하도록 하소서.
1. 우리 조정에서 저폐(楮幣)3498) 를 마련한 것은 본래 저폐 한 장(張)을 쌀 한 되[升]에 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여서 재물을 유통(流通)시키려고 한 것인데, 법을 세운 지 오래되어 사용 가치가 점점 천해져서 비록 2, 30장(張)이라도 쌀 한 되를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에, 매매할 때에 일체 서로 쓰지 아니하니, 그것이 폐지되어 회복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근자에 다시 쓸 길을 열고자 하여 모든 속죄(贖罪)에 일체 이것으로 징수(徵收)하게 하였으나, 저화의 값을 계산하면 장형(杖刑) 80대의 속(贖)이 면포(綿布) 한 필에 지나지 아니하여 속죄하기가 쉽게 되었으므로, 호활(豪猾)한 무리가 법을 범하는 것을 더욱 가볍게 여겨서 심한 자는 고의로 범하기도 하니, 옥송(獄訟)의 번거로움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게 되는 것이며, 저화는 마침내 사용되지도 못하면서 폐단만 다시 더 심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백성이 쓰려고 하지 않는데 억지로 할 수 없고, 또 공사(公私)간에 유익함이 없으니, 폐하여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형벌을 엄하게 하여 반드시 사용하도록 기할 것이지 어찌 그대로 두고 구차하게 백성들의 자유에 맡길 수 있는가?’라고 합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저화(楮貨)를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으며, 법이란 것은 인정(人情)에서 인연하여 절제(節制)하는 것인데 반드시 형벌의 말단(末端)을 취하여 그 하고자 아니 하는 것을 강제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저 지금의 저화는 고대의 전폐(錢幣)인데, 옛적에 유한(劉漢)3499) 에서 일찍이 전폐(錢幣)를 통행하는 화폐로 삼았습니다. 그 처음에는 협전(莢錢)을 주조(鑄造)하였고, 고후(高后)3500) 때에 팔수전(八銖錢)을 통행하였으며, 문제(文帝) 때에 사수전(四銖錢)을 통행하다가, 그 뒤로부터 혹은 가볍게 하여 삼수(三銖)로 하고 혹은 무겁게 하여 반냥(半兩)으로 하였으니, 여러 번 고치기를 좋아하여서 한 것이 아니라, 모두 백성이 싫어함으로 인하여 행할 수 있는 방도를 만들어 한때의 편의를 임시 변통한 것입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저화(楮貨)를 고쳐 만들되 새로운 체제(體制)를 정하여 옛모양과 섞이지 않도록 하고, 그 찍어내는 숫자를 되도록 적게 하여 저화가 천해지지 않도록 하며, 무릇 경외(京外)의 수속(收贖)·징궐(徵闕), 노비(奴婢)의 신공(身貢), 반록(頒祿), 거가(車價) 및 일체 공사(公私)간에 매매할 때에 예전대로 쓰게 하고, 또 검찰하는 법을 엄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반드시 영구히 따르고 더욱 신용하도록 하면, 복구하여 통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언로(言路)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바로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기틀입니다. 옛일을 상고하면, 요(堯)임금은 비방목(誹謗木)3501) 을 세우고 진선정(進善旌)3502) 을 세워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말을 다하게 하였고, 순(舜)임금은 사방으로 견식(見識)을 넓히고 견문(見聞)을 넓혀서 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뜻을 얻지 못함이 없게 하고 한 마디 착한 말이라도 혹시 빠뜨림이 없게 하였으니, 이것이 당우(唐虞)3503) 태평[泰和]의 정치를 이루게 한 것으로서, 만대에 칭송하는 바가 된 것입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착한 말을 받아들이기를 고리[環]가 돌 듯하고 간하는 말에 따르기를 못미칠 것 같이 하였으니, 모두 족히 한 시대의 다스림을 이룩한 것입니다. 영진(嬴秦)3504) 은 위엄으로 육합(六合)3505) 을 제압하여,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비방한다고 이르고 깊은 계책을 말하는 자를 요망한 말이라고 하여 학문하는 선비들을 갱살(坑殺)3506) 하고, 간함을 받아 들이지 않고 스스로 현명하다고 하여 천하의 입을 다물게 하였으므로, 이에 천하가 벌벌 떨면서 말하는 것을 꺼리고 숨기더니 2세(世)에 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자취를 가히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선(善)을 좋아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시고 간하는 말에 따르기를 물 흐르듯 하시니, 도(道)를 논하는 신하는 아는 대로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을 말하는 관리는 감히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여, 좌우의 충성스럽고 간사함과 외정(外庭)3507) 의 옳고 그름과 정령(政令)의 좋고 좋지 아니함과 생민(生民)의 이롭고 해로운 것을 모두 앞에서 진술하면, 전하께서 그 말 가운데 옳은 것을 골라서 그대로 따르시고 또 따라서 상을 주어 말하기를 인도하시므로, 융성한 태평 시대의 다스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언관(言官)으로서 혹은 말을 한 일로써 좌천(左遷)된 일이 있고, 혹은 탄핵을 입은 자의 송사함으로 인하여 벼슬이 떨어진 일도 있으며, 요즈음 또 중 설준(雪俊)의 불법(不法)한 일을 논하자, 전하께서 그 말에 따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천둥같은 위엄을 보여서 말하는 자로 하여금 말을 다하지 못하도록 하신 일이 있으니, 신 등은 전하께서 착하고자 하는 마음이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한 듯합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간(諫)하는 말에 따르고 곧 행하시어 더욱 언로(言路)를 열어서 지극히 잘 다스려지는 데에 이르게 하소서.”
임금이 명하여 사간원에 묻기를,
“부(富)가 경상(卿相)과 같으면서 남의 제방을 빼앗은 자가 누구이며, 여염(閭閻)에 드나들면서 음탕하고 방자한 자가 누구이며,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고 물고기와 소금을 파는 자가 누구이며, 서울 안 여러 절 가운데 문을 파수(把守)하는 것이 어느 절이며, 이른바 역마를 탄다는 자가 누구이며, 아우나 조카가 관직에 벌여 있다는 자가 누구인가? 그것을 말하라.”
하니 정언(正言) 이계통(李季通)이 대답하기를,
“문을 파수하는 절은 원각사(圓覺寺)·내불당(內佛堂)이고, 역마를 타고 다니는 자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이며, 중외(中外)에 벌여 있다는 것은 김수경(金守經)·김수화(金守和)·김민(金旼)·김영추(金永錘)의 무리입니다. 그밖에 부(富)가 재상과 같다는 등의 일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인데, 다만 옛 폐단을 일일이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절의 문을 파수하는 것은 선왕조(先王朝)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던 것이고 이제 시작된 것이 아니며, 만일 맡겨서 부릴 일이 있으면 비록 승도(僧徒)일지라도 역마를 타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아우나 조카가 만일 어질다면 어찌 중의 친족이라고 쓰지 아니할 것인가? 부(富)가 재상과 같다는 등의 일은 비록 이왕에 있었던 일이라 할지라도 임금 앞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일일이 써 가지고 오도록 하라.”
하니 이계통이 대답하기를,
“학열(學悅)이 지난날에 강릉(江陵)의 제방을 점령하여 고을 백성들의 소송을 일으겼으니, 이것은 남의 제방을 빼앗은 것입니다. 신미(信眉)·학열(學悅)·정심(正心)·설준(雪俊)의 무리가 거만(巨萬)의 재물을 축적하였고 여러 큰 절의 호승(豪僧)이 대개 이와 같으니, 이는 부유함이 재상과 같은 것입니다. 음탕하고 물고기·소금을 판매하는 중은 예전에 많이 있었는데, 이제 낱낱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예전에 있었던 것이어서 이제 낱낱이 들 수 없단 말인가? 말하지 아니함은 잘못이다. 제방은 세조께서 하사한 것이고 학열이 스스로 점령한 것이 아니다.”
하고, 명하여 술을 먹여서 보내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64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역(軍役) / *금융-화폐(貨幣)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상-불교(佛敎) / *농업-수리(水利) / *구휼(救恤) / *교통-육운(陸運) / *출판-서책(書冊)
[註 3471]수성(守成) : 창업(創業)한 뒤를 이어받아 지킴. ☞
[註 3472]인순(因循) : 구습에 따라 행함. ☞
[註 3473]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3474]시위 소찬(尸位素餐) :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에 나오는 말로, 재덕이나 공로가 없어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한갖 자리만 차지하고 녹(祿)만 받아먹음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 ☞
[註 3475]불씨(佛氏) : 불교. ☞
[註 3476]인연(夤緣) : 인과(因果). ☞
[註 3477]경상(卿相) : 대신. ☞
[註 3478]도첩(度牒) : 조선조 초기의 억불 정책(抑佛政策)으로, 나라에서 중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신분 증명서. ☞
[註 3479]의묘(懿廟) : 성종의 부(父)인 의경 세자의 묘. ☞
[註 3480]판탕(板蕩) :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짐. ☞
[註 3481]《원육전(元六典)》 : 《경제육전(經濟六典)》. ☞
[註 3482]교조(敎條) : 교시의 조목. ☞
[註 3483]속지고각(束之高閣) : 오래 사용하지 않음. ☞
[註 3484]분경(紛更) : 어지럽게 고침. ☞
[註 3485]봉족(奉足) : 조선조 때 정군(正軍)의 집에 주던 조호(助戶). 정군 1명에 대하여 봉족(奉足) 한두 사람을 지급하여 정군을 돕게 하고, 정군이 출역(出役)하였을 경우에는 그 집안 일을 돕게 한 급보 제도(給保制度). ☞
[註 3486]여(旅) : 군제의 한 편대. ☞
[註 3487]정렬(庭列) : 뜰에 줄지어 섬. ☞
[註 3488]소연(蕭然) : 쓸쓸한 모습. ☞
[註 3489]보(保) : 봉족(奉足). ☞
[註 3490]경서(經書) : 곧 《춘추》를 말함. ☞
[註 3491]의창(義倉) : 흉년(凶年)에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평년에 백성들로부터 곡류(穀類)의 여분(餘分)을 거두어 들여 보관하던 창고. 춘궁기(春窮期)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철에 다시 거두었음. ☞
[註 3492]푼수(分數) : 과거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서 성적의 점수를 매기던 것. 첫째를 대통(大通), 그 다음을 통(通), 그 다음을 약통(略通), 그 다음을 조통(粗通)이라 하였음. ☞
[註 3493]고식지계(姑息之計) : 당장에 편한 것만을 취하는 계책. ☞
[註 3494]양전(量田) : 조선조 때 토지의 넓이를 측량하던 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어 20년에 한 번씩 측량하고, 양안(量案)을 새로 작성하여 호조(戶曹)·도(道)·군(郡)에 비치하였음. ☞
[註 3495]공부(公簿) : 관리가 관아(官衙)에 출근할 때 그 이름을 적던 장부. 제조(提調)가 날마다 점검하여 이유 없이 출사(出仕)하지 않는 자는 그 이름 밑에 동그라미[圈]를 쳤는데, 이를 기준으로 관리의 근태(勤怠)를 평가하였음. 공좌부(公座簿). ☞
[註 3496]유품(流品) : 정1품에서 종9품 사이에 들어가던 모든 품계를 통칭하는 말임. ☞
[註 3497]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가 다시 더 올라갈 자리가 없이 됨. ☞
[註 3498]저폐(楮幣) : 고려 공양왕 4년(1392)부터 조선조 현종 8년(1667)까지 국가에서 받들어 통용된 지폐임. 저화(楮貨). ☞
[註 3499]유한(劉漢) :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 전한(前漢). ☞
[註 3500]고후(高后) : 여후(呂后). ☞
[註 3501]비방목(誹謗木) : 요(堯)임금 때에 나무를 교량(橋梁) 위에 세워서, 백성들에게 정치(政治)의 과실(過失)을 쓰게 하여, 임금이 스스로 반성하였다고 함. ☞
[註 3502]진선정(進善旌) : 요(堯)임금 때 정기(旌旗)를 오달(五達)의 길에 세워놓고, 선언(善言)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밑에서 말하게 하였음. ☞
[註 3506]갱살(坑殺) : 중국의 진 시황(秦始皇)이 즉위 34년에 학자들의 정치 비평을 금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의약(醫藥)·복서(卜筮)·종수(種樹)에 관한 책만을 제외하고 모든 서적을 모아서 불살라 버리고, 이듬해 함양(咸陽)에서 수백(數百) 사람의 유생(儒生)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일. ☞
58) 성종 44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윤6월 24일(정미) 2번째 기사
간통을 범하고 선상노의 면포를 사취한 김민을 체포하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형조 좌랑(刑曹左郞) 김민(金旼)은 공혜 왕후(恭惠王后)4146) 의 초상(初喪)을 당하여 기생 소설오(笑雪烏)를 간통하여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며, 또 선상 노자(選上奴子) 33명을 거두어 면포 각 13필(匹)씩을 사사로이 사용하다가 본부(本府)에 피수(被囚)되었는데, 신장(訊仗)4147) 1차에 병을 칭탁하고 보방(保放)4148) 되었다가 바로 도망하였습니다. 청컨대 경외(京外)를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민(金旼)은 중 신미(信眉)의 종자(從子)이다. 탐학하고 방종하며 경박하여 신미(信眉)의 형세를 끼고 조사(朝士)를 멸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한결같이 미워하더니, 이에 이르러 중한 죄를 범하고 옥사가 이루어지자, 도망하고 말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123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역사-사학(史學)
[註 4146]공혜 왕후(恭惠王后) : 성종의 비(妃)인 한씨(韓氏). ☞
[註 4147]신장(訊仗) : 고신(拷訊)에 사용하는 형장(刑杖). ☞
[註 4148]보방(保放) : 죄수에게 보증을 세우고 방면함. ☞
59) 성종 55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5월 12일(경신) 3번째 기사
인수 왕대비 위차와 궁을 중수할 때 화려한 문제 등에 관한 안팽명 등의 상소.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안팽명(安彭命)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이 전지(傳旨)를 보건대 ‘위로 하늘의 견책을 삼가고 아래로 백성의 고통을 돌보아,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책망하고 곧은 말을 듣고자, 직위에 있는 신료(臣僚)로 하여금 각각 현시의 폐단을 말하게 한다.’ 하셨습니다. 신 등은 사관(史官)의 자리를 승핍(承乏)하여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데, 말이 미쳤는데도 숨기는 것은 성은(聖恩)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영예(英睿)한 자질과 관인(寬仁)한 기량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시어, 성기(聲伎)를 좋아하거나 사냥을 즐기시는 일이 없고, 한 번 호령을 하거나 한 가지 일을 행할 때에도 반드시 전례(典禮)를 지키시며, 재견(災譴)을 만날 때마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이고 노심초사하시며, 억울하고 지체된 옥사(獄事)를 심리하고 뭇 제사를 두루 거행하시니, 하늘이 감동하여 좋은 응답을 받으셔야 마땅한데, 근년 이래로 큰 물과 가뭄이 잇달아 일어나고 이제 또 크게 가무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전에 초(楚)나라 장왕(莊王) 때에는 재앙이 없었으나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다하였고, 노(魯)나라 애공(哀公) 때에는 화난(禍難)이 컸으나 하늘이 꾸중을 내리지 않았으니, 지금의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어찌 하늘이 우리 전하를 사랑하여 재삼 견고(譴告)해서 성심(聖心)을 더욱 굳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들은 바에 따라 감히 어리석은 말을 아뢰겠습니다.
국가에서 의지(懿旨)를 받들어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5200) 의 위차(位次)를 왕대비(王大妃)의 위에 있게 하셨으나, 신 등은 삼가 적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노(魯)나라에서 희공(僖公)을 승부(升祔)한 일을 《춘추(春秋)》에서 비평하였는데,5201) 대개 민공(閔公)과 희공이 친속(親屬)으로는 형제이나 존비(尊卑)로는 군신(君臣)인데 형제의 의리를 군신의 의리보다 앞세우지 않는 것이 예(禮)이며, 군자(君子)는 친속을 친애(親愛)하기 위하여 존귀(尊貴)를 존숭(尊崇)하는 일을 손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고 고금의 통의(通義)이기 때문입니다.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인수 왕대비에게 명하여 예종(睿宗)을 보호하게 하셨고, 또 장유(長幼)의 차서가 있으므로, 그 위차를 왕대비의 위에 있게 하였다.’ 하셨으나, 신 등은 알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군신의 존비(尊卑)는 천지(天地)가 이루어진 것과 같아서 보호하는 은혜와 장유(長幼)의 차서 때문에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모든 거조(擧措)에 있어서 으레 옛 제도를 지키시는데, 이 한 가지 일만은 국가의 체모에 관계되어 의리에 미안한 데가 있고, 전하께서 부모가 살아계실 때 예(禮)로써 섬기는 효도에도 미진한 데가 있으니, 전하께서 계청(啓請)하여 개정하시기 바랍니다.
《춘추》에서 무릇 민력(民力)을 쓴 것이 비록 때가 합당하고 의리에 맞더라도 반드시 기록한 까닭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경회루(慶會樓)는 선왕(先王)께서 창건(創建)하신 것인데 장차 무너질 형세이고, 경복궁(景福宮)도 오래 비워서 점점 허물어지고 새어 가니, 영선(營繕)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경회루의 돌기둥을 보니 꽃과 용(龍)을 새겼고 용마루와 처마가 궁륭(穹隆)5202) 하고 구리로 망새[鷲頭]를 만들었으며, 또 근정전(勤政殿)에는 철망을 둘렀는데 선왕의 옛 제도가 아닌 듯하니, 후세에 보일 수 없습니다. 예전에 소하(蕭何)5203) 가 미앙궁(未央宮)을 짓되, 그 제도를 장려하게 하고 〈한(漢)나라 고조(高祖)에게〉 말하기를, ‘후세에서 이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뒤에 백량대(柏梁臺)와 건장궁(建章宮)을 미앙궁보다 몇 곱인지 모를 만큼 장려하게 지었으니, 전하께서 오늘날의 영선(營繕)을 조종(祖宗)의 제도보다 더하게 하신다면, 오늘의 제도보다 더하게 할 자손이 없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 말해보았댔자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수리 도감(修理都監)은 임시로 설치한 지 이미 오래되므로 백성을 매우 많이 부리고 재물을 적지않이 썼으며, 이제 경회루가 이미 이루어지고 수선이 거의 끝나가는데, 그 밖의 자질구레한 보수는 본래 맡은 관사(官司)가 있으니, 청컨대 빨리 혁파(革罷)하여 하늘의 꾸중에 응답하소서.
전(傳)5204) 에 이르기를, ‘밝고 밝게 인의(仁義)를 찾되 늘 백성을 교화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경대부(卿大夫)의 뜻이고, 황황하게 재리(財利)를 찾되 늘 가난할까 염려하는 것은 서인(庶人)의 일이다.’ 하였습니다. 대저 꾸어 주었다가 받아들이면서 이식을 취하는 것은 본래 백성들이 재화를 불리는 짓인데, 근자에는 경(卿)·사대부(士大夫)가 다 그러합니다. 그 호강(豪强)한 하인이 관위(官位)와 세력으로써 방자하여 여염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힘으로 주군(州郡)을 꺾는데, 심한 자는 적은 것을 많다 하고 있는 것을 없다 하며 묶어다가 매를 치고 살을 벗기고 때리기까지 하니, 백성의 억울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대부(大夫)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과 이토록 극심하게 이익을 다투니, 텃밭의 아욱을 뽑고 길쌈하는 아내를 내친 일5205) 에 비하면 모두 어찌 그리 현격합니까? 전하께서 이미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를 혁파하여 공공(公共)의 관사(官司)에 붙이셨으므로, 이른바 위에서 몸소 가르치어 백관(百官)을 바루고 만민(萬民)을 바루는 때이니, 재상(宰相)의 장리는 당연히 금지해야 합니다. 더구나 석씨(釋氏)가 깨끗하고 욕심이 없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았다면 그 무리는 반드시 몸이 마르고 산중에 숨어 살아야 불교를 잘 배우는 자라고 할 것인데, 지금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은 존자(尊者)라고도 하고 입선(入禪)이라고도 하여 중의 영수(領袖)가 되는 자들인데도 재화를 불리기에 마음을 쓰고 털끝만한 이익이라도 헤아리며, 높은 창고에 크게 쌓아 놓은 것이 주·군에 두루 찼으니, 그 밖의 것은 알만합니다. 이러한 자는 국은(國恩)을 저버렸을 뿐이 아니라 또한 불문(佛門)의 죄인이기도 하니, 중들의 장리(長利)도 금지해야 합니다. 만약에 ‘중들이 이것에 의지하여 수륙재(水陸齋)5206) 의 경비를 만드니, 없앨 수 없다.’고 한다면, 국가에서 도리어 간사한 중이 원망을 사는 물건에 힘입어서 선왕(先王)·선후(先后)의 명복(冥福)을 빈다는 말입니까?
《서경(書經)》5207) 에 ‘영(令)을 내리면 오직 시행할 뿐이지 돌이켜서는 안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법을 세운 것이 상세히 갖추어져 있으나 폐기하고 봉행(奉行)하지 않는 관리가 자못 많은데, 그 중에서 우선 중요하고도 긴급한 것을 말하자면 재상·공신(功臣)의 반인(伴人)입니다. 근자에 국가에서 모점(冒占)5208) 의 폐단을 잘 알아서 조리(條理)를 거듭 밝혀 구전(口傳)5209) 한 차첩(差牒)5210) 이 없는 자는 모두 신역(身役)을 정하게 하였으나, 관리가 권세를 두려워하여 잘 봉행하지 못하므로, 반인(伴人)을 모점(冒占)하고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전에 대간(臺諫)이 말하고 윤대(輪對)한 자도 말하였으므로 전하께서 익히 들으셨는데도 이제까지 모두 고쳐지지 않았으니, 신 등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재상과 공신이 예전보다 많은데, 집안이 부유한 장정(壯丁)이라도 실상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공(公)을 여위게 하고 사(私)를 살찌게 하니, 이러한 조짐을 커지게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조관(朝官)을 가려서 어사(御史)의 직을 겸대(兼帶)시켜 보내어 원래 수효 이외의 반인(伴人)은 모두 쇄출(刷出)하여 군액(軍額)을 채우게 하소서.
전(傳)5211) 에 이르기를, ‘검소는 덕(德)의 공통된 것이고, 사치는 악(惡)의 큰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사치를 믿고 의리를 잊는 것은 상(商)나라의 교만하고 음란한 풍속이고, 경대부(卿大夫)가 결백하고 검소한 것[羔羊素絲]은 주(周)나라의 아름다운 교화입니다. 이제 사대부의 집을 보면 날마다 사치를 일삼고 서로 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그 중에서 심한 것을 말하자면, 크고 작은 연회(宴會)에 그림을 그린 그릇이 아니면 쓰지 않고 부녀자의 복식(服飾)에 초구(貂裘)가 없으면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이것으로 보면 풍속의 퇴폐를 더욱 알만합니다. 대저 그림을 그린 그릇은 중국에서 나는 것이므로 실어 날라 오기가 어려운데도 집집마다 있습니다. 사신(使臣)의 행차 때에 금령(禁令)이 엄하기는 하나 이처럼 법을 어기므로, 평안도의 백성이 이 때문에 고달파서 살아갈 수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초피(貂皮)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하나 야인(野人)에게서 얻는 것이 대부분인데, 마소[牛馬]로나 철물(鐵物)로나 무슨 짓이고 다해서 저들에게 사므로, 국가에서 이미 그 폐단을 알고 공물(貢物)을 줄여 주었는데도 폐단이 다시 전과 같으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초피의 장식은 3품까지로 한정되어 있으나 모든 은대(銀帶)5212) 를 하는 자가 거의 다 혼란하게 장식하여 금지하기 어려우므로, 초피의 값이 올라가게 되어 적(敵)에게 이익을 주게 되니, 역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그림 그린 그릇을 쓰는 일을 일체 금지하고, 당상관(堂上官)이라야 초피를 쓰고 4품이라야 서피(鼠皮)를 쓸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도 이와 같이 한정하며, 부인의 복식도 지아비를 따르게 하소서. 그러면 모피(毛皮)의 값이 싸져서 폐단이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살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소(疏)를 원상(院相)에게 보이고 말하기를,
“세조께서 일찍이 인수 왕비(仁粹王妃)를 우대(優待)하시고 예종(睿宗)에게 ‘어머니처럼 섬기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왕대비(王大妃)가 인수 왕비에게 굳이 사양하고 윗자리를 차지하지 않기에, 내가 세조의 유의(遺意)에 따라 왕대비가 바라는 대로 특별히 인수 왕비를 왕대비의 위에 자리하게 하였더니, 인수 왕비도 굳이 사양하였으나, 내 명을 거듭 어기다가 드디어 자리에 나아갔던 것이다. 이 일은 실로 내가 명한 것이고 주상(主上)의 본의가 아닌데, 도리어 주상의 과실이라 하니, 주상의 뜻이 편안하겠는가? 이미 시행한 일을 말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것은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하니, 원상 정창손(鄭昌孫)·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
“두 분 왕비의 차서는 조정에 있어서의 차서가 아니고 궁중의 집안 일일 뿐인데, 더구나 세조의 유의(遺意)이겠습니까? 이제 희공(僖公)의 묘(廟)를 민공(閔公)보다 승부(升祔)한 일에 견준 것은 인용(引用)한 것이 유사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223면
【분류】 *신분(身分) / *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건설-건축(建築)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역사-고사(故事) / *사상-불교(佛敎) / *금융-식리(殖利)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의생활(衣生活)
[註 5200]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 : 덕종(德宗)의 비(妃)로서 성종(成宗)의 모(母)임. ☞
[註 5201]《춘추(春秋)》에서 비평하였는데, : 《춘추(春秋)》의 문공(文公) 2년조에, “태묘에 대사를 치를 때 희공의 묘(廟)를 승부(升祔)하였다.[大事于太廟躋僖公]”라고 하였는데, 태묘는 태조(太祖) 즉 주공의 묘이고, 대사는 길제(吉祭)로서 3년상이 끝난 후 태조의 묘에 합제(合祭)하는 것임. 이때 희공이 죽은 지 22개월이기 때문에 아직 길제를 행해서는 안되었고, 또 문공(文公)은 그의 아버지 희공이 민공(閔公)의 서형이어서 묘좌(廟坐)를 민공 위에 둔 것은 역사(逆祀)이므로, 모두 예(禮)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기록해서 풍자한 것임. ☞
[註 5202]궁륭(穹隆) : 한가운데가 제일 높고 사방이 차차 낮아지는 모양. ☞
[註 5203]소하(蕭何) :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공신. ☞
[註 5204]전(傳) :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 ☞
[註 5205]텃밭의 아욱을 뽑고 길쌈하는 아내를 내친 일 : 중국 춘추 시대에 공의휴(公儀休)가 노(魯)나라 재상이 되었을 때, 관리가 집안에서 야채를 기르고 길쌈을 한다면 민생(民生)을 압박하게 된다고 해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였으니, 청렴한 관리를 비유하는 말이 되었음. ☞
[註 5206]수륙재(水陸齋) : 고려·조선조 때 불가(佛家)에서 바다와 육지에 있는 고혼(孤魂)과 아귀(餓鬼) 등 잡귀(雜鬼)를 위하여 재(齋)를 올려서 경문(經文)을 읽던 일. ☞
[註 5207]《서경(書經)》 : 주서(周書)편. ☞
[註 5208]모점(冒占) : 불법으로 차지함. ☞
[註 5209]구전(口傳) : 3품 이하의 관원을 선임할 때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낙점(落點)을 거치지 않고 뽑아서 씀. ☞
[註 5210]차첩(差牒) : 사령서(辭令書). ☞
[註 5211]전(傳) : 《춘추좌전(春秋左傳)》. ☞
[註 5212]은대(銀帶) : 정3품으로부터 종6품까지의 문무관이 띠는, 가장자리에 은으로 새겨 장식을 붙인 띠. 이를 품대(品帶)라고 하는데, 정·종1품관은 서대(犀帶), 정2품관은 금대(金帶), 종2품관은 학정금대(鶴頂金帶), 정3품부터 종6품관은 은대(銀帶), 정7품관 이하는 오각대(烏角帶)를 띠었음. ☞
60) 성종 68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6월 5일(병자) 3번째 기사
현석규가 주지를 점탈한 중 축휘 등을 법대로 환속하기를 청했으나 감해주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니,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가 형조(刑曹)의 계목(啓目)을 가지고 아뢰기를,
“중[僧] 신미(信眉)의 제자 축휘(竺徽)·학미(學眉) 등이 보은사(報恩寺)를 교종(敎宗)에 속하게 하고자 하여 스스로 주지(住持)를 점탈(占奪)하고 상언(上言)한 죄는, 축휘는 율이 수범(首犯)에 해당하여 장(杖)이 80대이고, 학미는 종범(從犯)으로서 장이 70대이며, 모두 환속(還俗)시키는 데에 해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각 2등을 감(減)하되, 환속시키지는 말라.”
하였다. 현석규가 말하기를,
“무릇 백성으로 군인이 된 자들에게 군장(軍裝)·의량(衣糧)을 준비하게 하니, 그 부담이 매우 심하여 처자(妻子)를 보육(保育)하지 못하는데, 승도(僧徒)는 따뜻한 옷과 포식(飽食)으로 처(妻)를 대하고 자식을 보육하며 자신은 한낱 역사(役事)도 없이 제뜻대로 합니다. 그래서 세금과 역사를 도피(逃避)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절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병액(兵額)이 날로 줄어들므로 주로 이 때문에 정해년6305) 에는 호패법(號牌法)을 행하여 해사(該司)로 하여금 민정(民丁)을 모으게 하였었습니다. 그때 중이 된 자들이 모두 14만 3천 명이었으며, 깊은 산에 숨어서 모이지 아니한 자 또한 그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이나 되었으니, 그 사이에 중이 된 자가 또 5, 60만 명에 밑돌지 아니하며, 이 때문에 병액(兵額)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산중(山中)의 사찰(寺刹)에 살고 있는 중이 적지 아니하여 적어도 10여만 명에 밑돌지 아니하니, 만약 병액(兵額)과 농업(農業)으로 돌려 보낸다면 이들은 모두 튼튼한 무리로서, 지금 학미 등의 불법(不法)한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범(犯)한 것으로 인하여 죄를 다스려서 환속(還俗)시키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학미 등이 스스로 주지(住持)를 점탈(占奪)하였다고 말하지만, 그 뜻은 선왕(先王)과 선왕후(先王后)를 위한 것이니, 환속(還俗)시키지 말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349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사상-불교(佛敎)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호구-호적(戶籍)
[註 6305]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61) 성종 68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6월 26일(정유) 1번 째기사
경연에서 지평 박숙달 등이 민폐를 끼치는 중들의 환속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다.
경연에 나아갔다. 지평(持平) 박숙달(朴叔達)이 아뢰기를,
“대저 중이라 하면 청정(淸淨)하면서도 욕심이 적은 것으로 도리(道理)를 삼아야 하는데, 근래에는 중의 무리들이 재물[貨利]을 늘리기 위하여 민폐(民弊)를 끼치니, 학열(學悅)·학조(學祖)·신미(信眉)·설준(雪俊) 등과 같은 자들이 이익을 늘리려는 것이 더욱 심합니다. 학열은 일찍이 강릉(江陵)의 제언(堤堰)을 허물어 밭을 만들었는데, 이 제언은 백성들에게 이익됨이 매우 큰 것이었으며, 또 근처의 민전(民田)을 빼앗아 합하니, 5, 60여 석을 수확할 수가 있습니다. 또 널리 재곡(財穀)을 늘리기 위하여 거두거나 빌려줄 때에 백성들을 침학(侵虐)하는 것이 심합니다. 청컨대 그 제언을 도로 쌓도록 하고, 제자 중들 가운데 40세 이하인 자들을 모두 환속(還俗)시킨다면 한 변진(邊鎭)의 정예한 군졸을 채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영사(領事)를 돌아보고 묻기를,
“어떠한가?”
하였는데, 정창손(鄭昌孫)이 대답하기를,
“중은 굶주림을 면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널리 논밭을 점유(占有)하고 재물[貨利]을 늘리고자 하니, 이는 중의 도리가 아닙니다. 세조조(世祖朝)에 이 제언을 상원사(上元寺)에 속하게 허락하였었는데, 학열 등이 근처의 민전(民田)을 아울러 거두니, 20여 석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빼앗긴 사람의 신소(申訴)로 인하여 행문 이첩(行文移牒)을 추국(推鞫)하게 하였으나, 끝내 결정을 보지 못하였으니, 대간(臺諫)이 아뢴 대로 가납(嘉納)함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윤자운(尹子雲)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릉을 지나면서 그 제언을 몸소 보지는 못하였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땅은 척박(瘠薄)해서 모름지기 관개(灌漑)의 힘을 입어야 하니, 만약 제언을 다시 쌓는다면 반드시 백성들에게 이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참으로 옳다. 그러나 선왕조(先王朝)의 일이므로, 갑자기 고칠 수가 없다. 정승(政丞)들이 선왕조(先王朝)를 대대로 섬겨오면서 그 당시 그른 것을 알고서도 말하지 아니하였다가 이제야 말을 하니, 이 또한 좋지 못하다.”
하니, 정창손이 말하기를,
“그때에도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다. 또 부(富)라는 것은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비록 중의 무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불인(不仁)한 일이 되는데, 더욱이 이들 중의 무리이겠습니까?”
하였고, 박숙달은 말하기를,
“상교(上敎)가 윤당(允當)합니다. 그러나 옛말에 이르기를, ‘〈부모가 하던 일이〉 도리어 아닐 것 같으면, 어떻게 3년을 기다리겠는가?’ 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을 모두 선왕(先王)의 법(法)이라 하여 제거하지 아니한다면 뒷날의 미담(美談)이 되지 못할 것이 두렵습니다. 태종(太宗)께서 절[寺社]의 전민(田民)6327) 을 모두 혁파하였고, 전하께서도 이미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를 혁파하여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았는데, 이제 또한 중의 무리들이 재산을 늘리는 폐단을 금하게 하신다면, 태종(太宗)께 광영(光榮)이 있는 것이고,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355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사상-불교(佛敎) / *금융-식리(殖利)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註 6327]전민(田民) : 논밭과 노비. ☞
62) 성종 88권, 9년(1478 무술 / 명 성화(成化) 14년) 1월 4일(정묘) 1번째 기사
장령 박숙달이 중에게 내려 준 강릉에 있는 제방을 백성에게 돌려주기를 제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박숙달(朴叔達)이 아뢰기를,
“강릉(江陵)에 한 제언(堤堰)이 있어 백성이 그 이익을 받아 온 지가 오랜데, 세조(世祖)께서 중 학열(學悅)에게 내려 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익을 잃어 두 번이나 상언(上言)하여 호소하였으나, 주상께서 선왕(先王)이 주신 것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3년을 아비의 도(道)에 고침이 없어야 한다.’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가 이르기를, ‘만일 도(道)가 아니라면 어찌 3년을 기다리랴?’ 하였습니다. 청컨대 제방을 백성에게 돌려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영사(領事) 노사신(盧思愼)이 대답하기를,
“세조조(世祖朝)에 학열이 아뢰어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는데, 또 신미(信眉)를 통하여 청하므로 세조께서 부득이하여 준 것이고, 실로 세조의 본의는 아닙니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박숙달(朴叔達)이 아뢰기를,
“강릉(江陵)에 한 제언(堤堰)이 있어 백성이 그 이익을 받아 온 지가 오랜데, 세조(世祖)께서 중 학열(學悅)에게 내려 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익을 잃어 두 번이나 상언(上言)하여 호소하였으나, 주상께서 선왕(先王)이 주신 것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3년을 아비의 도(道)에 고침이 없어야 한다.’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가 이르기를, ‘만일 도(道)가 아니라면 어찌 3년을 기다리랴?’ 하였습니다. 청컨대 제방을 백성에게 돌려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영사(領事) 노사신(盧思愼)이 대답하기를,
“세조조(世祖朝)에 학열이 아뢰어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는데, 또 신미(信眉)를 통하여 청하므로 세조께서 부득이하여 준 것이고, 실로 세조의 본의는 아닙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임원준(任元濬)이 말하기를,
“학열이 백성의 밭을 침탈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 마땅히 도로 빼앗아 백성으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여야 합니다.”
하고, 박숙달이 말하기를,
“지금 만일 도로 빼앗아 백성에게 주지 않으면, 이것은 부처를 받드는 조짐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나더러 부처를 받든다고 하는가? 일이 선왕조(先王朝)에 있었으니, 그대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만일 그대의 말과 같다면 절을 다 헐고 중을 다 죽인 뒤에야 부처를 받든다는 이름을 면하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성담년(成聃年)이 아뢰기를,
“태종(太宗)께서 절의 노비(奴婢)를 다 거두어 관부(官府)에 붙이셨는데, 관부가 힘입어서 넉넉하여졌습니다. 세조께서 사급(賜給)한 것은 다만 권의(權宜)였습니다. 어찌 영구히 전하게 하고자 하셨겠습니까? 지금 조종(祖宗)의 법도를 고치고자 하면 워낙 불가하겠으나, 이와 같은 일을 비록 고치더라도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중은 다 죽일 수는 없으나, 만일 바른 도리로 지키면 비록 배척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높이고 믿지 않으면 자연히 쇠할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541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 *사상-불교(佛敎) / *신분-천인(賤人)
63) 성종 103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4월 13일(기해) 2번째 기사
중 설준의 추가 체벌을 불허하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현(成俔)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설준(雪俊)을 법률대로 논단(論斷)하도록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중[僧] 신미(信眉)·학열(學悅)·학조(學祖)·설준(雪俊)은 모두 교만하고 방자하며 위세를 부리는 자들이다. 신미는 곡식을 막대하게 늘렸으므로 해(害)가 백성에게 미치었다. 학열·학조·설준은 욕망이 내키는 대로 간음(奸淫)하여 추문(醜聞)이 중외(中外)에 퍼졌다. 그 가운데서도 학열(學悅)은 가장 간악하여 가는 곳마다 해를 끼쳤는데,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라도 기가 꺾여서 두려워하며 그대로 따랐다. 어떤 사람이 대궐(大闕)의 벽에 쓰기를, ‘학열은 권총(權聰)의 첩(妾)을 간통한 것을 비롯하여 마침내 1품(品)의 부인까지 간음하였다.’고 하였다. 학조(學祖)는 처음에는 개천(价川)과 사당(社堂)을 간통하고, 드디어 중이 되어 왕래하면서 그대로 간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후에 남산(南山) 기슭의 작은 암자에 살면서 구인문(具仁文)의 친여동생[嫡妹]이 자색(姿色)이 있음을 보고, 등회(燈會)를 인연으로 개천(价川)의 도움을 받아서 드디어 간통할 수 있었는데, 구씨(具氏)도 꾀임을 당하여 여승[尼]이 되었다. 설준(雪俊)은 일찍이 종실(宗室)의 부인을 간통하였고, 또 정인사(正因寺)에 있으면서 절의 빚이라고 빙자하여 곡식을 막대하게 불렸다. 그리고 불사(佛事)를 핑계대어 여승과 과부들을 불러다가 이틀 밤을 묵도록 요구하였는데, 절의 문을 단절시켜 안팎을 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 자취를 엿볼 수 없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0책 4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치안(治安) / *금융-식리(殖利) / *윤리-강상(綱常) / *사상-불교(佛敎) / *역사-사학(史學)
64) 성종 130권, 12년(1481 신축 / 명 성화(成化) 17년) 6월 7일(경술) 1번째 기사
영산 부원군 김수온의 졸기.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 김수온(金守溫)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예장(禮葬)하기를 예(例)대로 하였다. 김수온의 자(字)는 문량(文良)이고, 본관은 영동(永同)이며,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훈(金訓)의 아들이다. 김수온은 나면서부터 영리하고 뛰어나 정통(正統) 무오년11333) 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신유년11334)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 세종이 그 재주를 듣고 특별히 명하여 집현전(集賢殿)에 사진(仕進)하게 하고,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수찬(修撰)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때때로 글제를 내어 집현전의 여러 유신(儒臣)을 시켜 시문(詩文)을 짓게 하면, 김수온이 여러 번 으뜸을 차지하였다.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내고, 경태(景泰) 경오년11335) 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특별히 제수되고, 신미년11336) 에 수전농시 소윤(守典農寺少尹)이 되고, 임신년11337) 에 외임(外任)으로 나가 지영천 군사(知榮川郡事)가 되고, 병자년11338) 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천순(天順) 정축년11339) 에 중시(重試)11340) 에서 제2인으로 입격(入格)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발탁되었다. 그때 김수온이 어머니를 성문(省問)하러 영동현(永同縣)에 가는데, 세조가 중사(中使)를 보내어 한강(漢江)에서 술을 내리고 임영 대군(臨瀛大君)·영응 대군(永膺大君)과 여러 군(君)들에게 명하여 가서 전송하게 하였다. 무인년11341)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제배(除拜)되고, 기묘년11342) 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한성부 윤(漢城府尹)에 오르고, 경진년11343) 에 외임(外任)으로 나가 판상주목사(判尙州牧事)가 되고, 갑신년11344)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가, 이윽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제배되었다. 성화(成化) 병술년11345) 에 발영시(拔英試)11346) 에 으뜸으로 입격하여 특별히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가자(加資)받고, 또 등준시(登俊試)11347) 에 으뜸으로 입격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세조가 김수온의 집이 가난하다 하여, 사옹원(司饔院)과 여러 관사(官司)를 시켜 경연(慶宴)을 준비하게 하고,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정승들에게 명하여 궁온(宮醞)을 가져가서 압연(押宴)11348) 하게 하고, 또 중사를 보내어 서대(犀帶)·금낭(錦囊)·나(羅)·기(綺)·의복·화(靴)·모(帽) 따위의 물건 40여 건(件)과 안마(鞍馬)11349) 와 쌀 10석(碩)을 내렸다. 우리 조정에서 과거(科擧)를 설치한 이래로 급제의 영광에 이런 전례가 없었으며,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장원(壯元)에게 쌀을 내리는 것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무자년11350) 에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기축년11351) 에 금상(今上)11352) 이 즉위하여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를 가자하고, 신묘년11353) 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封)하고, 갑오년11354) 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배하고, 정유년11355) 에 다시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때에 졸(卒)하였는데 73세이다. 시호(諡號)는 문평(文平)인데, 배움이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은혜로우나 내덕(內德)11356) 이 없음이 평(平)이다. 김수온은 서사(書史)를 널리 보아 문장이 웅건(雄健)하고 소탕(疏宕)11357) 하며 왕양(汪洋)11358) 하고 대사(大肆)11359) 하여 한때의 거벽(巨擘)11360) 이었다. 전에 명(明)나라 사신 진감(陳鑑)의 희청부(喜晴賦)에 화답(和答)하여 흥을 돋우고 기운을 떨쳤는데, 뒤에 김수온이 중국에 들어가니, 중국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지칭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희청부에 화답한 사람이다.’ 하였다. 세조가 자주 문사(文士)를 책시(策試)11361) 하였는데, 김수온이 늘 으뜸을 차지하였다. 전에 원각사 (圓覺寺)비명(碑銘)을 지었는데, 주문(主文)11362) 한 자가 많이 고친 것을 김수온이 보고 말하기를, ‘대수(大手)가 지은 것을 소수(小手)가 어찌 능히 고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신미(信眉)의 아우로서 선학(禪學)에 몹시 빠져 부처를 무턱대고 신봉하는 것이 매우 심하였다. 전에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다가 그만두었는데, 그의 궤행(詭行)11363) 이 이러하였다. 또 자신을 단속하는 규율이 없어, 혹 책을 깔고 그 위에서 자기도 하고, 포의(布衣)를 입고 금대(金帶)를 띠고 나막신을 신고서 손님을 만나기도 하였다. 성품이 오졸(迂拙)11364) 하고 간국(幹局)11365) 이 없어 치산(治産)에 마음을 두었으나, 계책이 매우 엉성하였고, 관사(官事)에 처하여서는 소략하여 지키는 것이 없어 글하는 기상(氣象)과는 아주 달리 하므로, 조정(朝廷)에서 끝내 관각(館閣)11366) 의 직임을 맡기지 않았으며, 양성지(梁誠之)·오백창(吳伯昌)과 함께 상서하여 공신으로 봉해 주기를 청하여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되었다. 일찍이 괴애(乖崖)라 자호(自號)하였고, 《식우집(拭疣集)》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0책 224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註 11333]무오년 : 1438 세종 20년. ☞
[註 11334]신유년 : 1441 세종 23년. ☞
[註 11335]경오년 : 1450 세종 32년. ☞
[註 11337]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11338]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11339]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11340]중시(重試) : 이미 과거에 급제한 조정의 관리들에게 다시 보이던 시험.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정 3 품 당상관(堂上官)에 승진시켰음. ☞
[註 11341]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11342]기묘년 : 1459 세조 5년. ☞
[註 11343]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11344]갑신년 : 1464 세조 10년. ☞
[註 11345]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11346]발영시(拔英試) : 세조 때 임시로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단오절에 종친과 문무 백관을 모아 술을 내리고 친히 글을 지으며 베풀었는데, 이때 선발에 합격한 사람은 김수온 등 모두 40인이었음. ☞
[註 11347]등준시(登俊試) : 세조 때에 특별히 베푼 과거. 세조 12년 7월에 종친과 재상 이하의 문관으로서 장원하는 사람을 시험보게 하였는데, 이때 김수온 등 12인을 선발하였으며, 그 뒤 9월에 무과 등준시에서 최적(崔適) 등 모두 51인을 선발하였음. ☞
[註 11348]압연(押宴) : 잔치를 관리함. ☞
[註 11349]안마(鞍馬) : 안장 갖춘 말. ☞
[註 11350]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11351]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11352]금상(今上) : 성종을 가리킴. ☞
[註 11353]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11354]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11355]정유년 : 1477 성종 8년. ☞
[註 11356]내덕(內德) : 안으로 갖춘 덕. ☞
[註 11357]소탕(疏宕) : 도량이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음. ☞
[註 11358]왕양(汪洋) : 문장의 기세가 충만하고 큼. ☞
[註 11359]대사(大肆) : 매우 거침 없음. ☞
[註 11360]거벽(巨擘) : 대가(大家). ☞
[註 11361]책시(策試) : 책문(策問)으로 시험함. ☞
[註 11362]주문(主文) : 문사를 주관함. 시험관. ☞
[註 11363]궤행(詭行) : 상도(常道)를 벗어난 행동. ☞
[註 11364]오졸(迂拙) : 오활하고 졸렬함. ☞
[註 11365]간국(幹局) : 재간(才幹)과 국량(局量). ☞
[註 11366]관각(館閣)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 ☞
65)성종 161권, 14년(1483 계묘 / 명 성화(成化) 19년) 12월 29일(무자) 6번째 기사
중 학조가 병이 중하므로 내의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다.
중[僧] 학조(學祖)가 금산군(金山郡) 직지사(直指寺)에 있으면서 병이 중하므로 특별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진찰하게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학조는 세조조(世祖朝)에 신미(信眉)·학열(學悅)과 더불어 삼화상(三和尙)이라고 일컬어 세조가 매우 존경하였는데, 신미와 학열은 모두 죽고 학조는 직지사에 물러가 살았다. 널리 산업(産業)을 경영하여 백성에게 폐단을 끼침이 작지 아니하였으며, 때때로 서울에 이르면 척리(戚里)14547) 와 호가(豪家)들이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서 문안하고 물품을 선사하는 것이 길에 연달아 이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0책 555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사상-불교(佛敎)
[註 14547]척리(戚里) : 임금의 친척. ☞
66) 성종 181권, 16년(1485 을사 / 명 성화(成化) 21년) 7월 4일(임자) 3번째 기사
홍문관 부제학 안처량이 봉선사 주지 학조에게 죄주기를 아뢰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안처량(安處良) 등이 와서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봉선사(奉先寺) 주지승(住持僧) 학조(學祖)가 승정원(承政院)에 나아가 절의 곡식을 동원하지 말기를 청하였다고 하는데, 신 등은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승정원은 재상(宰相)이 아니면 들어가서 일을 아뢸 수 없는 곳인데, 학조는 한낱 머리깎은 중으로서 어찌 감히 승정원에 들어가 일을 아뢴단 말입니까? 만약 말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해사(該司)에 고할 것이고, 그리고도 뜻을 펴지 못할 것 같으면 상언(上言)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 중은 감히 승정원에 들어갔고 또 버젓이 빈청(賓廳)에 앉아 음식을 먹었으니, 국문(鞫問)하여 죄주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 곡식은 그대로 봉(封)하여 백성을 진휼(賑恤)하도록 하소서. 또 승지(承旨)들이 중을 접대하며 영외(楹外)에 앉게 한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승지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여 접대함이 잘못되었습니다. 대죄(待罪)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중은 본래 사족(士族)의 자손으로, 고금(古今)의 사리(事理)를 대강 알고 있으니, 범상한 중이 아니므로 낮추어 대우하여서는 안된다. 세조(世祖)께서 항상 승정원으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셨고 은총이 매우 두터웠었다. 선왕(先王)이 기르던 것은 비록 견마(犬馬)라 하더라도 오히려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인데, 더구나 이 중은 선왕께서 지극히 공경한 자가 아니던가? 중도 내 백성인데 곡식을 주어 구황(救荒)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봉선사는 선왕의 진전(眞殿)이 있는 곳으로서 항상 화기(火氣)를 금하고 소제(掃除)하는 일이 긴요(緊要)하므로 거처하는 중이 적어서는 안된다. 만약 먹을 곡식이 없다면 절이 장차 비게 될 것이니, 두 분 대비(大妃)께서 어찌 진념(軫念)하지 않으시며 나 또한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더구나 이 곡식은 정희 왕후(貞熹王后)게서 내리신 것이니,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이어 승지 등에게 명하여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안처량(安處良)·김흔(金訢)·이창신(李昌臣) 등이 아뢰기를,
“비록 선왕께서 행하신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이 만일 그릇된 것이면 따를 수 없습니다. 진전(眞殿)은 비록 승도(僧徒)가 없더라도 참봉(參奉)과 수호군(守護軍)으로 지키기에 족합니다. 그리고 중과 백성은 또한 크게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백성은 공부(貢賦)16504) 를 바쳐서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고, 변경(邊境)에 일이 있으면 창을 잡고 이를 막습니다. 옛글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아니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稙)을 무엇으로 지키겠습니까? 이것이 백성을 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중은 인륜(人倫)을 멸시(蔑視)하여 버리고 공부(貢賦)를 피하여 놀고 먹으니, 천지 사이에 한낱 좀벌레와 같을 뿐입니다. 비록 죽게 하여서는 안되겠지만, 그 진제(賑濟)함에 있어서 먼저 베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도(僧徒)는 곡식을 많이 쌓아 놓고서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고 있는데, 우리 백성은 술지게미나 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여 장차 굶어죽게 될 형편이니, 신 등은 중의 곡식을 빼앗아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어찌 그렇게도 편벽된가? 임금은 백성에 대하여 죽는 자를 살리려 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려고 한다. 중도 사람인데, 장차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른다면 이들만을 구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나를 보필(輔弼)하는 말이 아니다.”
하였다. 안처량 등이 아뢰기를,
“왕자(王者)의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중도 인명(人命)이니 진실로 진휼(賑䘏)함이 마땅하지만, 나라의 정사를 가지고 말한다면 백성이 중하고 중은 경(輕)한 쪽이 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들의 말을 어찌 임금의 덕이 부족함을 돕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옛날에 왕이 못을 파다가 나온 썩은 뼈를 묻어 주었는데, 사람들이 이르기를, ‘은택이 썩은 뼈에도 미쳤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가? 만약 그대들을 진제사(賑濟使)로 삼는다면 반드시 중들의 굶어 죽는 것은 그냥 보아 넘기고 다만 기민(飢民)만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 안처량이 또 아뢰기를,
“신 등이 편벽되게 중을 미워하여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경중(輕重)과 선후(先後)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에게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행하겠다.”
하였으나, 마침내 머물러 두고 행하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승지(承旨)는 옛날의 납언(納言)16505) 이니, 부주(敷奏)16506) 하고 복역(復逆)16507) 함에 반드시 자세히 살펴 도리(道理)에 합당한 뒤에 이를 출납하여야 하는 것이다. 머리 깎은 자가 감히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무리하게 계달하였는데도 권건(權健)의 무리가 이를 맞아 자리에 앉히고 머리를 숙여 그 말에 따라 입계(入啓)하였으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다 하겠는가? 물론(物論)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학조(學祖)는 세조 때에, 신미(信眉)·학열(學悅)과 더불어 간특(奸慝)함을 일삼아 백성에게 해를 끼쳤으며, 또 그 음험(陰險)한 계교를 마음대로 하여 그 아우 영전(永銓) 등을 모두 현관(顯官)이 되게 하였고, 어미의 집이 안동(安東)에 있었는데 그 곳 양가(良家)의 딸에게 장가들어 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금산(金山) 직지사(直指寺)를 자기 개인 소유의 절로 만들어 축적(蓄積)이 거만(鉅萬)에 이르렀고, 도당을 많이 모아 스스로 봉양하기를 매우 사치스럽게 하였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1책 33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구휼(救恤)
[註 16504]공부(貢賦) : 공물과 부세. ☞
[註 16505]납언(納言) : 중국 순임금 때의 벼슬 이름. ☞
[註 16506]부주(敷奏) : 진언하는 것. ☞
[註 16507]복역(復逆) : 복은 신하의 주상(奏上)이고, 역은 임금의 명을 받는 것. ☞
67) 성종 187권, 17년(1486 병오 / 명 성화(成化) 22년) 1월 4일(신해) 3번째 기사
한후가 산산의 제언을 백성에게 주어 경작하도록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기사관(記事官) 한후(韓昫)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을 지나가는데 묵은 지 이미 오래 된 한 제방[堤堰]이 있었습니다. 신이 부로(父老)에게 물으니 산산(蒜山) 제방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중 신미(信眉)가 하사를 받아서 인하여 상원사(上院寺)에 소속시키고 제방 아래 백성의 전지를 거의 다 점령하여 빼앗았는데, 제방 안팎이 2백여 석 지기나 될 만하였습니다. 중은 본래 놀고먹는 자인데, 지금 이미 스스로 경작하지 않고 또 백성이 개간하는 것은 금하여 기름진 땅으로 하여금 못쓰게 하여 노는 전지가 되어버렸으니, 청컨대 백성에게 경작하여 먹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당연하다. 중이 스스로 경작하지 않으면 백성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선왕이 내려 주신 것을 갑자기 빼앗을 수는 없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1책 87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 *농업-개간(開墾) / *사상-불교(佛敎)
68) 성종 214권, 19년(1488 무신 / 명 홍치(弘治) 1년) 3월 2일(병인) 1번째 기사
장령 김미가 이원을 복직시키는 명을 거둘 것과 유향소 설치를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장령(掌令) 김미(金楣)가 아뢰기를,
“전일(前日)에 전교하기를, ‘이원(李源)이 6년이나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어찌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와지는 마음이 없겠느냐?’고 하시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원(源)이 귀양가서 구례(求禮)에 있을 때에 신미(信眉)와 결탁하여 1읍(邑)을 횡행(橫行)하며 장리(長利)를 수납(受納)한다 사칭(詐稱)하면서 민간(民間)의 미속(米粟)을 많이 취해서 자기의 소유로 삼았고, 전지(田地)를 가진 중[僧]이 있다고 들으면 다 탈취하고, 중의 족친(族親)의 전지까지도 또한 모두 탈취(奪取)하므로, 읍민(邑民)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읍수(邑守) 최지성(崔智成)에게 호소(呼訴)하니, 원(源)이 최지성으로 더불어 말다툼하고 공사(公事)의 문권(文券)을 취하여 갔으니, 그 부도(不道)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보건대, 비록 6년의 귀양살이를 겪었으면서도 곧 반성하는 마음이 없으니, 청컨대, 복직(復職)의 명(命)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源)은 바로 세종(世宗)의 친손(親孫)이며 영응(永膺)의 독자(獨子)이니, 봉사(奉祀)는 지중(至重)한 것이므로 지금의 복직(復職)은 영응(永膺)의 부인(夫人)의 상언(上言)에 의한 것이었다. 대저 사람이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자가 아니라면 개행(改行)하는 이치가 없지 않으니, 원(源)이 만약 개과(改過)하였으면 진실로 서용(敍用)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범한 바가 강상(綱常)에 관계되고 그대들도 말하여 마지 않는 까닭으로 우선 성명(成命)을 거두겠다.”
하였다. 김미(金楣)가 또 소매 속에서 글을 내어 올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전라(全羅) 1도(道)는 옛 백제(百濟)의 터[墟]이니, 그 유풍(遺風)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완한(頑悍)19466) 한 풍속이 다른 도(道)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그 도적(盜賊)은 혹 집에 불을 지르거나 혹 길가는 사람을 저격(狙擊)하여 대낮에 양탈(攘奪)하므로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호남(湖南)의 습속은 강도(强盜)는 있어도 절도(竊盜)는 없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또 왜복(倭服)에 왜어(倭語)를 하는 수적(水賊)이 있어, 해포(海浦)에 출몰(出沒)하면서 몰래 행선(行船)을 엿보고 있다가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다 바다에 던지고 몰래 도서(島嶼)에 숨고 하여 마치 귀신과 물여우[鬼蜮]와 같으므로, 관리(官吏)가 비록 수포(搜捕)19467) 하려고 하더라도 누구를 어찌할 수 없으니, 이것은 다른 도에 없는 일입니다. 그 죄를 범하고 도망하여 숨는 자는 세력 있는 백성[豪民]과 교활한 관리[猾吏]가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긴 울타리에 겹문을 만들고 다투어 굴혈(窟穴)을 지어 줍니다. 만일 본주(本主)가 근심(根尋)19468) 하는 자가 있으면 공금(公禁)에 참여하지 않고, 심한 자는 혹 불량한 무리를 모아 본주(本主)를 구축(敺逐)하여 상처를 입혀서 가도록 하니, 이것 또한 다른 도에 없는 일입니다. 그 귀신(鬼神)을 숭상함에 있어서는 강만(岡蠻)·임수(林藪)가 모두 귀신 이름이 붙어 있으며, 혹 목인(木人)을 설치하거나 혹 지전(紙錢)을 걸어 생황(笙簧)을 불고 북[鼓]을 치며, 주적(酒炙)이 낭자(狼藉)하고 남녀(男女)가 어울려서 무리지어 놀다가 노숙(露宿)하면서 부부(夫婦)가 서로 잃어버리기까지 하여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음일(淫佚)19469) 을 좋아함에 있어서는 여항(閭巷)의 백성이 처첩(妻妾)을 서로 도둑질하고 서로 원수가 져서 첩소(牒訴)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복잡합니다. 심지어 기공(期功)의 친(親)을 보기를 범인(凡人)과 같이 하여, 혹 아우가 형의 첩(妾)을 상피 붙고, 종[奴]이 주모(主母)를 간통하여서 인륜(人倫)을 무너뜨린 자가 간혹 있으며, 사치(奢侈)스러운 풍속을 논(論)하면 여염(閭閻)과 읍리(邑吏)의 의복(衣服)이 곱고 화려하며, 시골의 천한 백성들은 음식(飮食)을 물퍼쓰듯이 해먹으므로, 풍년(豐年)에 절재(節栽)할 줄을 모르고 한 번 흉년(凶年)을 만나면 강보(襁褓)의 어린아이까지 유리(流離)합니다. 능범(陵犯)19470) 하는 풍속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천(賤)한 이가 귀(貴)한 이에게 행패를 부리며 병졸이 장수를 모함(謀陷)하고 이민(吏民)이 수령(守令)을 꾸짖어 욕하며, 명예를 구하고 분수를 범함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근일(近日)에 광산(光山)에서 군수[倅]를 사살한 일은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대저 이 여섯 가지는 모두 다른 지방에 없는 풍속이니, 개혁(改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臣)이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6년을 재임(在任)하였으므로 외방(外方)의 치체(治體)를 갖추 알고 있습니다. 감사(監司)가 된 자는 비록 그 폐단을 통렬히 혁신(革新)하려고 하여도 1년 안에 겨우 한 두 번 순행(巡行)하니, 수령(守令)의 현부(賢否)를 알 수가 없는데, 어느 겨를에 풍속을 고쳐 박(薄)한 것을 뒤집어서 후(厚)한 데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단 1년으로 나라를 바로잡고, 3년이면 성과를 올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덕(德)으로써도 1년 동안에는 크게 다스릴 수 없고 3년이라야 성과를 올릴 수 있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자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강명 정대(剛明正大)한 자를 택(擇)하여 감사(監司)를 삼되, 그 임무를 오래 맡도록 하여 3년이 지나서야 체차(遞差)하면, 완한(頑悍)한 풍속이 점점 혁신 될 것입니다. 혹은 또 말하기를, ‘예전에는 1향(鄕) 가운데에 정직(正直)한 품관(品官)1, 2원(員)을 택하여 향유사(鄕有司)를 삼아서 풍속을 바로잡게 하고 이름하기를 유향소(留鄕所)19471) 라고 하였었는데, 혁파(革罷)한 이래로 향풍(鄕風)이 날로 투박(渝薄)하여졌다.’고 합니다. 신(臣)의 생각에도 다시 유향소(留鄕所)를 세워, 강직한 품관을 택하여 향유사(鄕有司)를 삼으면, 비록 갑자기 야박한 풍속을 변모시킬 수는 없더라도 또한 향풍(鄕風)을 유지(維持)하여 완흉(頑兇)한 무리가 거의 조금은 그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감사(監司)의 임기(任期)를 3년으로 하자는 법은 만일 그가 어질면 가(可)하나 혹 용렬(庸劣)할 것 같으면 폐단을 백성에게 끼칠 것입니다. 또 풍속(風俗)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변모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미(金楣)가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1기(期) 안에 순행(巡行)함이 2, 3차(次)에 불과(不過)하니, 풍속의 박악(薄惡)함을 어느 겨를에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김미(金楣)가 말하기를,
“예전에도 유향소(留鄕所)가 있었으니, 만약에 다시 세우면, 완은(頑嚚)19472) 한 무리는 방자(放恣)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윤필상이 말하기를,
“혹은 유향소(留鄕所)가 향풍(鄕風)을 유지하는 데에 유익(有益)하다고 이르고, 혹은 유향소(留鄕所)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이 도리어 폐단을 받는다고 이릅니다. 대저 법(法)은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기다려서 행하니, 요(要)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요,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니, 관리가 봉행(奉行)하지 않으면 비록 신법(新法)을 세운다 하더라도 어찌 유익하겠는가? 풍속(風俗)이 박악(薄惡)함은 마땅히 점차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1책 313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풍속-풍속(風俗)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註 19466]완한(頑悍) : 완악하고 독살스러움. ☞
[註 19467]수포(搜捕) : 수색하여 체포함. ☞
[註 19468]근심(根尋) : 철저히 찾아냄. 뿌리를 뽑아 버리듯 남김 없이 찾아냄. ☞
[註 19469]음일(淫佚) : 남녀 사이의 음란한 교제. ☞
[註 19470]능범(陵犯) : 업신여겨 범(犯)함. ☞
[註 19471]유향소(留鄕所)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지방 수령(守令)의 정치를 돕고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설치된 지방 자치 기관. 나라의 정령(政令)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를 막고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도와주었음. ☞
[註 19472]완은(頑嚚) : 완고하고 도리에 어두움. ☞
69) 성종 257권,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9월 13일(병술) 2번째 기사
지평 홍계원 등이 제조의 구임·이창신의 승수·복천사의 소금을 백성이 옮기게 함 등이 부당함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홍계원(洪係元)이 아뢰기를,
“제사(諸司)의 제조(提調)가 구임(久任)함은 미편(未便)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모두 이르기를, ‘개월(箇月)을 정하면 재상(宰相)을 대우하는 체모가 아니다.’라고 한 까닭으로 그전대로 하게 하였다.”
하였다. 헌납(獻納) 정탁(鄭鐸)이 아뢰기를,
“오랫동안 제조(提調)를 하면, 그 사(司)의 노예(奴隷) 보기를 자기의 노복(奴僕)과 같이 하는 자가 있습니다.”
하자,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제조(提調)에게 개월(箇月)을 정함은 불가(不可)하며, 한 사람이 몇 가지의 일을 겸(兼)함도 또한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홍계원(洪係元)과 정탁(鄭鐸)이 또 아뢰기를,
“이창신(李昌臣)을 돈녕 정(敦寧正)으로 승수(陞授)함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정탁(鄭鐸)이 또 아뢰기를,
“충청도(忠淸道) 복천사(福川寺)에 공양하는 부여창(扶餘倉)의 소금 40석(碩)을 해마다 봄가을에 백성으로 하여금 전수(轉輸)하게 하니, 백성이 심히 괴로와합니다. 선왕조(先王朝)에 중 신미(信眉)가 이 절에 있었으므로 이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만, 이제 신미(信眉)가 이미 죽었는데도 그 폐단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청컨대 혁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사(寺社)를 혁파할 만한 일이 어찌 이것뿐이겠느냐? 조종조(祖宗朝)에서 설치한 것이라서 차마 갑자기 혁파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하였다. 정탁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의 법도(法度)도 손익(損益)할 수가 있거늘, 하물며 이 일이겠습니까? 만약 혁파함이 불가하다면 마땅히 승도(僧徒)로 하여금 전수(轉輸)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정탁이 또 아뢰기를,
“신(臣)이 일찍이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본도(本道)의 풍속(風俗)을 보니, 음사(淫祀)23850) 를 숭상하여, 금성산(錦城山)에 기도(祈禱)하는 자는 가까운 곳에서 사는 백성들뿐만이 아니고, 비록 먼 곳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양식을 지고 왕래하였으며, 사족(士族)의 부녀(婦女)도 또한 처녀(處女)를 데리고 밤을 지내고 돌아갑니다. 이 때문헤 혹 부부(夫婦)가 서로 잘못되어 추한 소리가 비등하여 풍속의 훼손됨이 이보다 심함이 없었습니다. 수령(守令)이 금(禁)하려고 하지만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세미(祠稅米)를 해마다 귀후서(歸厚署)23851) 에 납부하는 까닭이니, 청컨대 혁파시켜서 풍속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홍응(洪應)이 대답하기를,
“이 폐단은 신도 또한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오래 되어 일체(一切) 금지 시킬 수가 없습니다. 당초에 반드시 우리가 모여 음사(淫祀)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여겼던 까닭으로 정세(征稅)로써 억제하였는데, 근본(根本)을 제거(除去)할 수 없다면 세미(稅米)도 또한 마땅히 폐(廢)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정세(征稅)의 법(法)은 비록 갑자기 혁파함이 부당(不當)하다 하더라도 음사(淫祀)만은 통금(痛禁)함이 옳겠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심(金諶)이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를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그 염산(斂散)을 관장하게 하는데, 그 전수(典守)하는 노자(奴子)는 비록 관위(官威)에 인하지 않더라고 오히려 백성을 침학(侵虐)하거늘, 하물며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함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수령으로 하여금 염산(斂散)하게 한 것이 아니다. 전수(典守)하는 자가 작폐(作弊)할까 염려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검찰(檢察)하게 하였을 따름인데, 만약 불편(不便)하다고 생각되면 아뢴 바를 따름이 마땅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2책 94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수산업-염업(鹽業) / *신분-천인(賤人) / *금융-식리(殖利)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윤리-강상(綱常)
[註 23850]음사(淫祀) : 옳지 못한 사신(邪神)에게 지내던 제사. 나라에서 이를 금지하였음. ☞
[註 23851]귀후서(歸厚署) : 관곽(棺槨)의 제조(製造), 화매(和賣)와 예장(禮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사무를 관장(管掌)하는 종6품 아문(衙門). 조선조 태종 6년(1406)에 설치하여 정조 원년(1777)에 혁파, 그 업무(業務)는 선공감(繕工監)에 이관(移管)됨. ☞
70) 연산 25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7월 17일(병진) 1번째 기사
경연에서 강한 내용을 의논하다. 대간들이 사찰 건립의 일과 노사신의 일에 대해 논하다.
왕이 경연에 납시어 《강목(綱目)》 광무기(光武紀)를 강하게 했는데 ‘경리(經理)를 논하고 밤이 이슥해서야 잠을 잤다.’란 대문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윤금손(尹金孫)은 아뢰기를,
“광무(光武)가 강론(講論)에 부지런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일기도 서늘하오니 청컨대 전하는 날마다 경연에 납시소서.”
하였다. 또 ‘내가 이를 스스로 즐기니 피곤하지 않도다.’라는 대문에 이르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묻기를,
“광무의 말이 또한 착하지 않느냐?”
하니, 영사(領事) 정문형(鄭文炯)은 아뢰기를,
“광무는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내지 않고 성정(性情)을 기르며 정체(政體)를 신중히 여기므로, 전열(前烈)을 회복해서 몸소 태평을 이룩한 것입니다.”
하고, 참찬 송질(宋軼)은 아뢰기를,
“임금은 부지런해야 할 것이 있으며, 부지런하지 않아도 될 것이 있습니다. 진 시황(秦始皇)의 형석 정서(衡石程書)1718) 나 수 문제(隋文帝)의 위사 전찬(衛士傳餐)1719) 은 마땅히 부지런히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였다. 또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이 서조연(西曹椽)으로 있는 오량(吳良)을 천거하니 제(帝)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천거하여 나라를 돕는 것은 재상의 직책이라’ 하는 대문에 이르자, 송일은 아뢰기를,
“광무의 이 말이 대단히 좋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천거하는 법은 있으나, 그러나 한 재상도 어진이를 천거한 자가 없으니 신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합니다. 선조(先朝) 때에 홍응(洪應)이 일찍이 한 선비를 천거하니 성종께서 즉시 수용해서 당상관(堂上官)의 품계(品階)까지 제수했습니다.”
하고, 특진관 박숭질(朴崇質)은 아뢰기를,
“임금이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추천으로 인해서 등용하는데, 요사이는 재상이 천거한 바 있으면 논박이 뒤따르니, 이 때문에 추천이 되지 못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과연 대간의 논박으로 인하여 그 소회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지평 노언방(盧彦邦)은 아뢰기를,
“대간의 직책이 비록 언사(言事)에 있다 하지만, 전조(銓曹)가 만약 어진 자를 천거한다면 어찌 논박하겠습니까. 하지만 채윤공은 문리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성(專城)의 책임을 맡기겠으며, 사신(思愼)은 대신으로서 그 이웃 사람을 비호하기 위하여 대간에게 허물을 돌리는데, 더구나 그 어진 자를 천거하기 바라겠습니까. 신은 못내 마음이 쓰라립니다.”
하고, 특진관 이육(李陸)은 아뢰기를,
“그 문자를 이해 못하는 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신이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 윤공이 문경 현감(聞慶縣監)이 되었었는데 그렇게 미욱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이는 녹록한 사람이고, 유순정(柳順汀) 같은 자는 문무(文武)가 겸전하니 참으로 등용할 만합니다.”
하고, 숭질은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은 모두가 순정이 나이가 늙으면 국가에서 앞으로 크게 쓰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고, 문형(文炯)은 아뢰기를,
“문종조(文宗朝)에 구치관(具致寬)은 나이 46세에 병조의 낭관(郞官)이 되었습니다. 한 정승이 천거하자 문종께서는 즉시 4품의 직을 제수하셨으니 이로부터 마침내 크게 쓰였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러했는데 지금에 사람을 천거하지 않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말이 두려워서입니다.”
하고, 정언 조순(趙舜)은 아뢰기를,
“윤공이 문리(文理)를 해독하지 못하는 데 대해서 사신은 시정하기를 청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따라서 변명까지 해서 임금의 과실을 그대로 굳히게 했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경연(經筵)에 입시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신은 대간으로 하여금 언사(言事)를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윤공이 비록 문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수령이 될 만하므로 나의 고문(顧問)에 답한 것이다.”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사신이 임금에게 간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대간을 저지하였으니 어찌 경연에 입시할 수 있습니까.”
하고, 전경(典經) 성중엄(成重淹)은 아뢰기를,
“전일에 대간이 사신을 논박하니, 사신이 유자광과 아뢰기를 ‘이 풍습은 빨리 고쳐져야 합니다.’ 했습니다. 자광이야 족히 헤아릴 것도 없지만 사신은 대신으로서 그 말이 이같으니 어떻게 좌우에 두고, 나의 고문에 답한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전일 전교에 이르시기를 ‘선릉(宣陵)에 절을 짓는 것은 새로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전대로 수리하는 것이다.’ 하셨는데, 지금 새 절을 짓는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문형(文炯)은 아뢰기를,
“비록 옛 절을 그대로 둔다 해도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건원릉(健元陵)의 개경사(開慶寺)도 매우 협소합니다.”
하고, 이육은 아뢰기를,
“헌릉(憲陵)에 절을 세우지 않은 것은 태종(太宗)께서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절이 있어도 참으로 유익할 것은 없다. 그러나 대비(大妃)께서 사사로이 창설하시는 것이고, 국가에서 세우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윤금손은 아뢰기를,
“만약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면 비록 성종의 유교(遺敎)라 할지라도 따라서는 안 되옵니다. 더구나 성종께서 본시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 절을 세우시면 성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어찌 언짢게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비록 대비께서 하시는 것일 지라도 전하께서 만약 불가한 점을 말씀드린다면 대비께서 어찌 응종하지 않겠습니까. 또 사신의 아뢴 바에, ‘이 풍습은 빨리 고쳐져야 한다.’는 말은 과연 조정을 경멸해서 기탄한 바가 없는 말입니다. 또 근일에 복선(復膳)1720) 에 대한 전례를 상고하라 명하셨는데, 무릇 천변(天變)에 응하는 것은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이 만약 성실하지 못하오면 비록 정전(正殿)을 길이 피한다 해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전례를 상고하고 날 수를 계산해서 구차스럽게 행할 일은 아닙니다.”
하고, 조순은 아뢰기를,
“보통 사람이 재궁(齋宮)을 세우는 것은 수호하기 위함입니다만 능침(陵寢)은 이미 수호군(守護軍)이 있는데 무엇하러 절을 세웁니까. 예로써 죽은 이를 섬기는 것이 임금의 효도이고, 예로서 아니하면 효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옛 절이 퇴락할 지경은 아닌데 무엇하러 새로 창설을 하십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 절은 능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새로 지어서 거리를 멀게 하자는 것이다.”
하매, 중엄(仲淹)은 아뢰기를,
“만약 능(陵)에 가까운 것이 싫다면 철거해야 합니다. 어찌 꼭 고쳐 지으려 하십니까. 요사이 전하께서 전일의 실수를 고치셨는데, 다시 과실을 지으시니 그 과하신 처사가 어느 때에 그치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비록 과한 처사라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금손(金孫)은 아뢰기를,
“헌릉(獻陵)에 절을 세우지 않은 것은, 태종께서 불교를 숭상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압니다. 지금 선릉(宣陵)에 절을 세우면 사람들이 장차 성종께서 불교를 필시 좋아하신 모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고, 언방(彦邦)은 아뢰기를,
“전일에 왕께서 하교하시기를 ‘대간이 장시간 대궐 뜰에 있는 것은 불가하다.’ 하셨습니다. 요사이 박형무(朴衡武)·양희지(楊熙止)·신자건(愼自建)의 일을 논하여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장시간 대궐 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기사관 신세련(辛世璉)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되 ‘부인은 전제(專制)하는 의(義)는 없고 삼종(三從)의 도(道)가 있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자주 청하시고 세 번 간하되 듣지 않으시면 부르짖으며 따라다니는 것이 옳습니다. 성종께서 불교를 좋아하지 않은 까닭으로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능에도 사찰을 짓지 않았는데, 지금 성종을 위하여 능 곁에 절을 지어 아침저녁 종을 울리고 북을 치는 것이 이 어찌 성종을 섬기는 효도이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규문(閨門) 안에서 만약 부덕한 일이 있으면 부르짖어 울며 따라다니는 것이 가하다 하지만, 절을 짓는 것이야 무슨 누(累)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이 일은 비단 대비만이 누가 되는 것이 아니오라, 장차 성종의 성덕에도 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성종께서 평소에 불교를 숭상하지 않았던 교서가 역사책에 소상히 나타나 있는데 후인이 누가 불교를 숭상하셨다 하겠느냐?”
하였다. 이육은 아뢰기를,
“만약 불교를 좋아하는 세대라면 저 조그만한 절 하나쯤 짓는 것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지만, 오늘날 이 거조가 있기 때문에 대간이 실덕(失德)으로 여겨서 아뢴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그 공력과 비용이 모두 내수사(內需司)에서 나오므로 국가와는 관계가 없다.’ 여기시지만 내수사의 물건도 우리 백성의 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수사는 사사의 비축으로서 전내(殿內)의 비용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만약 사섬시(司贍寺)에서 제용(濟用)할 물건을 쓴다면 불가하다.”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공력과 비용은 우선 그만 두더라도 그 의(義)는 어찌합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다시 대비께 청하겠노라.”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사사전(寺社田)은 청컨대 감사(監司)의 아뢴 바에 의하여 학전(學田)으로 충당해 주옵소서.”
하니, 왕은 이르기를,
“학조(學祖)의 밭은 성종조부터 이미 그렇게 된 것이다. 성종께서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이같이 하셨는데, 지금 만약 빼앗는다면 앞으로 중들의 토지는 다 빼앗을 작정이냐?”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학조의 밭은 지금 이미 현저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청한 것입니다. 어찌 중들의 밭이라 해서 다 공전에 속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은 이르기를,
“만약 민전(民田)이나 학전(學田)을 빼앗아 중들에게 준다면 참으로 불가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본래가 승전(僧田)인데 주어도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하매, 조순은 아뢰기를,
“이것은 본시 신미(信眉)의 밭인데 학조에 전해졌으니, 학조가 죽더라도 뒤에는 반드시 중에게 전할 것입니다. 또 사신(思愼)이 전일 대간(臺諫)이 구금당함을 보고 기뻐서 치하했는데 지금 또 이와 같으니 이는 나라를 그르치는 사람입니다. 청컨대 법사(法司)에 회부하여 국문한 다음 죄를 주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해서 추론(推論)하느냐?”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용심(用心)이 그릇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릇 사람의 말이란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으니, 당연히 그 옳은 것을 취하고 그 그른 것은 버려야 한다.”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 그러나 주심(誅心)의 법으로써 따지자면 대신이 국가를 보좌함에 있어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사신이 이미 전하를 그릇되게 인도하였는데, 어찌 대신이라 해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사신의 의도는 전하로 하여금 대간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니, 이는 간신(奸臣)입니다.”
하니, 왕은 이르기를,
“나로 하여금 간하는 말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서(景敍)가 사신에게 이웃 사람을 비호했다 하니까, 마침내 자기 뜻을 말한 것인데 어찌 간신이라 이르겠느냐.”
하였다. 조순은 다시 사전(私田)과 윤공(允恭) 등 여러 가지 일로서 굳이 청하기를 마지 않으니, 왕은 ‘앞에 내린 교서에 다 말하지 않았으냐.’ 했다. 조순은 강경히 논하고 땅에 엎드려 오래 나가지 않았으나, 왕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3 책 257 면
【분류】 *농업-전제(田制) / *사법-탄핵(彈劾)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재정-상공(上供)
[註 1718]형석 정서(衡石程書) :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형석(衡石)을 고른다.’ 하였음. 형(衡)은 저울대요, 석(石)은 1백 20근의 무게를 말함인데, 진시황기(秦始皇紀)에 ‘천하의 일이 대소를 막론하고 다 상(上)에게서 결제되므로 상(上)은 심지어 형석(衡石)으로 서류를 담아서 결제한 서류가 그 근수에 해당되지 아니하면 휴식하지 못했다.’ 하였음. ☞
[註 1719]위사 전찬(衛士傳餐) : 찬(餐)은 소식(小食)인데, 위병(衛兵)이 전달했다는 뜻임. ☞
[註 1720]복선(復膳) : 평상시에 진상하는 수라와 같이 한다는 뜻임. 대개 임금이 천변 지이(天變地異)를 만나면 공구 수성하기 위하여 감선(減膳)하는 전례가 있음. ☞
4. 반에사에서 머리 깎은 보우스님(선재)
반야사에 버려진 아이를 키워 신미가 머리를 깎아 불문에 들었고 신미가 두 번째 반야사에 왔다 한양으로 갈 때 신미를 따라 갔기에 신미가 희암사에 두었는데 성장하여 주석할 때
(中宗) 허우당 보우스님(선재)이 관리 실수로 화재를 당하여 없어졌고 흥천사도 그 무렵 화재로 사라졌다. 문정왕후를 도와 왕실의 평안을 누리어오다 왕후가 죽자 보우스님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제주목사의 칼에 죽음을 당했다. 그가 바로 신미를 절대적인 우상이요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큰 스님으로 모시던 선재이다.
*보우스님(선재)은 유배를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번에 가면 살아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나 모년 모월 모일에 말이 되어 돌아 올 것이니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말에게 죽을 쑤어 먹여 달라 했단다. 그 후 그가 말한 날에 제자들이 기다리니 마지막에 들어오는 말이 있어 그 말에게 죽을 쑤어 먹였다 한다. 그 자리가 지금의 〖말죽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