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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더 이상한 거예요. 그건 수치스런 일이므로 극구 감추어야 할 터인데, 왜 어마마마께 토로했느냐는 거예요.”
“그건 내가 잘 달래서 알아낸 거다.”
태평공주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 태후도 별안간 가슴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 자가 이런 짓까지···?’
심통이 일어난 무 태후는 이튿날 회의를 득달같이 불러 물었다.
“아사阿師(회의에 대한 무 태후의 애칭), 내게 말해 줘요. 그 날 밤, 적취지 연회 후 정말 춘락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거죠?”
회의가 무 태후를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아미타불!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기를 바라는 건가요? 어째서 소승의 직언을 믿지 못하십니까?”
회의의 눈빛에서 거짓을 읽을 수 없었던 무 태후는 그 일을 일단 가슴에 묻어두었다.
태평공주는 미시아의 사건을 반신반의하였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대단한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해야 하나? 당연히 고조영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촉새처럼 가볍게 알릴 수는 없었다. 우연을 가장해 그에게 자연스럽게 이를 불어야 한다. 고조영은 격일로 무 태후를 시위하므로 그가 무태후의 최측근 비녀 미시아를 접할 기회는 많았다.
미시아는 궁내에서 고조영을 볼 때마다 무표정하게 가벼운 목례만을 건네었다. 조영도 그녀를 무심하게 대했다. 표면상 둘의 관계는 기름과 물 같았다.
궁궐안의 소문은 바람과 함께 돈다. 한바탕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면, 궁 안의 모든 사람이 이를 알게 된다. 더구나 황궁 경내에서 발생한 불미스런 일이, 어떻게 비밀에 부쳐질 수 있겠는가? 궁내 야경꾼 둘이 어느 비녀에게 몹쓸 짓을 저질러 투옥 당했다는 소문은 조영의 귀에도 들어갔다.
한 날, 조영이 근무를 마치고 귀가할 때, 태평공주가 때맞춰 그의 길목으로 지나다가 그와 조우했다.
“어머나! 장군님, 그 동안에 잘 계셨나요?”
태평공주가 반색을 했다.
“덕분에요.”
“근데 혹시 이상한 소문 못 들으셨어요?”
“무슨···?”
“아, 있잖아요. 야경 순찰을 돌던 이들이···.”
“그 얘긴 저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근데 그 비자가 누군지 아세요?”
“글쎄요. 궁 안의 비자가 한 둘도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장군님은 참으로 군자이시군요. 저는 그녀가 누군지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조영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막 헤어지려고 했다.
“근데, 그 비자가 장군님도 잘 아시는···.”
“네?”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어 조영이 얼굴에 긴장의 빛을 띠었다.
“아, 아녜요. 장군님은 모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영이 잠시 주춤거리다가 예를 표하고 발걸음을 돌리며 작별했다.
“그럼, 이만.”
조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태평공주 이영월이 속으로 뇌까렸다.
‘흥! 목석같은 사나이. 당신이 아무리 군자연君子然해도, 난 당신의 마음을 잘 알아. 하지만 당신은 결코 내 곁을 떠날 수 없지.’
그녀가 막 몸을 돌려 현무문을 통과해 북궁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종종걸음으로 현무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미시아였다.
미시아도 태평공주의 자태를 발견하고 예를 표했다. 미시아가 다가오자 태평공주가 물었다.
“어딜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바삐 가는 건가?”
“폐하의 심부름을 가고 있습니다.”
“무슨 심부름?”
태평공주는 무심코 묻고 난 후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조영 장군에게 전해드릴 폐하의 전갈이 있어서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제는 태평공주도 진짜 궁금해졌다. 염치불고하고 재차 물었다.
“내가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인가요?”
태평공주가 조심스럽고도 예의바른 태도를 보였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뭐, 폐하의 사적인 일이라서.”
“그래요? 방금 전에 고 장군님이 현무문을 나가셨는데, 빨리 좇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미시아가 인사하고 몸을 돌려 곧장 현무문 밖을 나서려 할 때, 누군가가 문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미시아가 보니, 그는 다름 아닌 고조영이었다.
미시아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태··· 장군님,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뛰어 들어오십니까?”
“아이고, 내가 깜박했지 뭡니까?”
“그렇잖아도 제가 폐하의 부탁을 받고 장군님을 만나러 가던 참입니다.”
“무슨···?”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조영이 저쪽에 조용히 서 있는 태평공주를 보고 인사했다.
“방금 헤어졌는데, 또 뵙는군요.”
태평공주는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었다.
조영과 미시아는 이야기를 나누며 궐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태평공주도 엉거주춤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문 앞에는 수직하는 이들 때문에 자유롭게 이야기하기가 곤란해서요.”
조영이 그렇게 말한 후 미시아의 아름다운 얼굴을 고요히 응시했다. 무슨 용건으로 자신을 만나려 했느냐고 묻는 표정이다.
“폐하께서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미시아는 태평공주가 보는 앞에서 품속으로부터 서찰 한 장을 꺼내 조영에게 건네주었다. 서찰은 오색금화지로 만든 봉투에 담겨 있었다. 받아든 순간 봉투에서 여성 특유의 향기가 후각을 강렬히 자극했다.
조영은 서찰을 받으면서 몹시 이상하게 생각했다.
‘태후마마가 이런 걸 내게 준 적이 없었는데? 왜 말로 하시지 않고?’
“집에 가서 혼자 계실 때 펴보라고 하셨어요.”
조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 편지를 집어넣었다. 태평공주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당연하다. 태평공주는 그 곳을 떠날 수도 없고 그곳에 있자니 좌불안석이고, 그녀가 엉거주춤하고 있을 때, 고조영이 웃으며 말했다.
“공주마마, 오늘 저녁, 제가 마마께 저희 집에서 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태평공주는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해 대꾸를 하지 못했다. 고조영이 자신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이건 전에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자기 귀를 의심하던 태평공주가 되물었다.
“제게 오늘 저녁 식사를 대접하신다구요?”
“네, 부군과 함께 오십시오. 조촐하지만, 그냥 이야기나 나누고 싶어서요.”
태평공주의 남편은 설소다.
“아, 이런, 이를 어쩌죠? 지금 남편이 공무로 집을 떠나고 없어요.”
“오, 그래요? 참 아쉽지만, 그럼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하겠군요.”
“근데 그런 중요한 일을 미리 연락하시지 않고 어떻게 갑자기 준비하게 되었습니까?”
“하하하! 경황이 없어서 깜빡 잊고 있다가 오늘 퇴근하면서 생각나 부리나케 다시 달려 들어온 건데, 제가 큰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가요?”
“아닙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대접해 드렸는데, 공주마마만을 빠뜨린 것 같아 항상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부담을 드릴 것 같아,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오셔서 식사나 나누자고 한 것인데···.”
조영은 이내 작별을 고했다.
“그럼 아쉽지만, 다음에 한 번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장군님, 집에 누가 계세요?”
“집에요? 물론 저 혼잡니다. 하인들을 제외하고.”
“오늘 저녁 저와 여기 미시아 아가씨가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뭐, 안될 것은 없지만, 그건 생각지 못한 일이라···.”
“그래도 괜찮아요. 장군님이 저희 부부를 초청하고 싶어 하셨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오늘 저녁에 당장 가보고 싶어요.”
태평공주 이영월은 정말로 감동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조영이 잠시 생각하다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게 하죠. 부군께서 오시면 그 때 다시 한 번 모시기로 하고요.”
곁에서 듣고 있던 미시아가 입을 열었다.
“장군님, 저는···.”
“혹시, 오늘 저녁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나요?”
“그건 아닌데, 폐하의 허락도 받아야 하고, 또 어떻게 천한 비녀가 공주마마와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괜찮아요. 내가 물어볼 것도 있고.”
태평공주가 그녀를 안심시키며 조영에게 말했다.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
“지금 바로 오십시오. 아마도 식탁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그럼 잠시 선물이라도 준비해서 미시아와 함께 갈게요.”
조영은 현무문을 나와 급히 도정道政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손님들을 맞이하고자, 먼저 미시아가 준 편지를 신속히 펴보았다. 잠깐 훑어보리라고 가볍게 생각하며 편지를 펴 든 그는 아연실색했다.
그리움에 정신이 산란해 붉은 빛도 푸르러 보이고
임을 사모해 얼굴도 초췌하고 몸도 쇠약해졌어요.
임 생각에 여태껏 눈물만 흘리고 있음을 못 믿으시오면
상자를 열어 피눈물 젖은 석류 치마 꺼내 보세요.
봄볕에도 언 가슴 녹지 않은 외로운 날에, 천첩 극시아 배상
편지를 즉시 갈무리한 조영은, 어떻게 해서 극시아의 편지가 무태후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무 태후는 왜 이를 자신에게 전달했는지 추정할 길이 없었다. 속이 떨렸다.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태후가 젊은 시절 지었다는 “여의랑如意娘”이란 시인데··· 이것이 극시아가 내게 쓴 편지임이 분명하다면···?’
필체는 극시아의 것임이 확연했다. 오밀조밀하면서도 아담하고 깔끔하지만, 뭔가 깊은 슬픔이 배어있는 듯한 그녀 특유의 글꼴이었다. 아, 생각조차하기 싫었다. 얼마 후 태평공주와 미시아가 집에 왔으나 조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혹감을 감추려 애썼으나, 어딘지 모르게 그의 언행이 부자연스러웠다.
“장군님, 저희를 불러놓고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군요.”
입바른 태평공주가 조영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 죄송, 죄송합니다. 실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조영은 이내 심기일전해서 웃고 떠들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죽기 밖에 더하겠나?’
여러 가지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갈 무렵 불현 듯 태평공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이건 좀 실례되는 건데요, 물어봐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하도 궁금해서요.”
“뭐든 물어보십시오.”
조영이 흔쾌히 대답했다.
“저, 좀 전에 현무문 안에서 미시아 아가씨가 전달해준 폐하의 편지는 무슨 편지예요? 정사政事에 관한 중요한 얘긴가요?”
조영은 속으로 뜨끔했다. 태평공주가 차마 그런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이걸 어떡하나?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일이다.
잠깐 앞뒤 정황을 예측해본 조영은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체념으로, 서랍 속에 넣어놓았던 편지를 꺼내왔다.
‘이판사판이다!’
“공주마마께서 친히 펴서 읽어보십시오.”
편지를 건네받은 태평공주 이영월은 편지를 읽고서 별 반응이 없었다.
“이건 폐하의 시인데, 극시아가 아주 미쳤군요.”
태평공주는 미시아를 바라보고 물었다.
“극시아가 친자매 아닌가요? 이것 참 재밌네요.”
태평공주 이영월이 조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눈빛으로 동의를 구했다. 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월이 미시아에게 조영의 편지를 건네었다.
서찰을 읽은 미시아는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미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조영에게 전달한다. 조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편지를 봉투에 넣은 후 제자리에 간수했다.
식사가 끝나고 과일과 음료를 먹고 마실 때, 조영이 태평공주에게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서재에서 편지 한 통을 급히 작성해야 하는데, 그 동안 두 분이 즐겁게 노실 수 있죠?”
태평공주는 조영의 눈웃음에 가슴이 포근해졌다.
“괜찮으니 어서 볼일을 보세요.”
조영이 서재로 간 사이, 태평공주가 미시아에게 속삭이듯 살짝 물었다.
“이건 정말 미안한 건데요, 아가씨가 일전에 겪었던 가슴 아픈 일을, 고조영 장군도 알고 계신가요?”
“아녜요. 모르고 있어요.”
“그 일을 고 장군에게 밝혀야 하지 않을까요?”
“네?”
놀란 얼굴의 미시아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고조영 장군이 헛된 망상을 품어서는 안 되니까.”
“헛된 망상이라뇨?”
“아가씨는 이미 남과 혼인할 수 없는 몸이잖아요?”
그 말을 들은 미시아는 속으로 치를 떨었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공주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고조영 장군은 하찮은 이 여종에게 그런 망상을 품고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제 수치를 감추고 싶습니다.”
“나도 같은 여자로서, 아가씨의 심정을 십이분 이해해요. 어찌 은닉하고 싶지 않겠어요? 하지만 비밀이란 건 없잖아요? 어차피 알게 될 바에야, 아가씨의 입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오히려 그 분의 맘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게 아닐까요?”
미시아는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 같았다. 태평공주가 속삭였다.
‘이 요녀야! 숫제 난 그런 일을 겪은 적도 없으니, 나중 태자전하도 내 얘길 들으면 진상을 다 아시게 될 거다.’
미시아가 속으로 태평공주를 욕하고 있을 때 고조영이 서재로부터 나왔다.
“아이고, 두 분께 너무나 죄송합니다.”
세 사람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쾌하게 먹고 마셨다. 태평공주는 조영 몰래 미시아에게 계속 눈짓으로 말했다.
미시아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저, 장군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이건 공주마마께서도 잘 아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디 염려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미시아는 말을 꺼내자마자 얼굴에 수심을 가득 담고 일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으나, 고조영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미시아는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맺혔다. 미시아가 울면서 일의 전말을 밝히자, 고조영은 무표정하게 듣고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위로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너무나 죄송합니다. 제가 아가씨를 지켜드렸어야 하는데··· 아, 그 날 밤,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잠만 자고···.”
“아닙니다. 장군님. 그렇게 저를 위로해주시니 뭐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조영은 극시아의 편지를 읽고 울렁거리던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는데, 다시 미시아의 토로를 듣고 보니, 정신이 현황眩慌했다. 손님들을 앞에 두고 조영은 연신 장탄식을 터뜨렸다. 밖에는 어스름이 덮이고 실내는 잠깐 깊은 침묵이 깔렸다.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서 태평공주와 미시아가 작별을 고한다. 떠나기 전 조영은 두 사람에게 간단한 선물을 주었다. 두 여인이 조영의 집을 나서려고 할 때, 조영이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미시아에게 건네었다.
“이걸 어처 극시아 마마께 전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뜻밖의 부탁에 미시아도 놀라고 태평공주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전해 주세요.”
태평공주가 앞장서서 나가고 미시아가 뒤를 따랐다.
조영은 그들을 대문 밖의 길까지 멀리 전송했다. 태평공주가 시녀들과 대화하는 틈을 타서 조영은 미시아에게 속삭였다.
“그 편지를 태후마마께 전해 주세요. 하지만 편지 수신인은 극시아마마입니다.”
이야기한 후 조영을 눈을 깜빡거렸다.
총명한 미시아는 즉시 조영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태평공주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으므로 미시아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오늘의 후한 대접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선물도 너무 감사합니다.”
“아이고, 뭘 그런 걸 가지고.”
두 사람이 떠나고 어스름 밤길을 밟으며 집안으로 들어온 조영은 당혹감에 휩싸여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태평공주와 미시아가 자신의 만찬초대에 응하며 가져온 선물들이 생각 나 이를 직접 풀어보았다.
먼저 미시아의 것을 보니 비단에 곱게 포장되어 있었는데, 작은 상자였다. 상자의 뚜껑을 열고 조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하나의 옥비녀였던 것이다.
그 때 조영의 뇌리에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년 이른 봄에 이루하와 그의 시녀 여미아가 자기 집을 방문하고 한 밤중 한바탕 경을 치른 후 돌아갈 때, 조영은 그들을 계성의 집까지 전송한 적이 있었다. 조영이 맨 뒤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 가던 여미아가 자신에게 날려 보냈던 것, 바로 푸른빛이 감도는 옥비녀였다.
여인이 어느 남자에게 자기 비녀를 준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뜻은 이것일 수도 있었다.
‘난 당신의 여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조영은 미시아의 옥비녀를 들고 망연자실했다. 미시아가 들려준 가슴 아픈 고백이 다시금 조영의 심장을 후볐다.
‘언제 이 여인이 내 가슴 속에 이렇게 깊이 들어왔는가?’
조영은 속으로 크게 놀라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롱 속에 은밀히 간직해 두었던 여미아의 옥비녀를 꺼내왔다. 옥비녀는, 그가 몇 권의 책, 고양원 대덕이 하사한 시문, 또 여미아가 작년 그 때에 옥비녀와 함께 날려 보낸 시문 등과 더불어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해오던 것이다.
조영은 미시아의 옥비녀와 여미아의 옥비녀를 나란히 들고 비교해보았다.
재질도 동일하고 두 비녀의 모양과 크기가 똑같았다. 미시아의 옥비녀를 주의깊게 살펴보니 그것도 역시 여미아의 것처럼 세밀한 글자들이 명각되어 있었다.
(다음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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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9. 21.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