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공동체에 주시는 말씀
“히네니” ------------------------------------------------------ ✛ 이사야 6장 1~ 8절 ✛ |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4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5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6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부집게로 집은, 타고 있는 숯을,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7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8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신앙의 길벗
夜深星逾輝(야심성유휘)라는 신영복 선생의 서화에는 이런 주석이 달려있습니다.(처음처럼)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 이 말은 밤하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어둔 밤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위로입니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더욱 맑
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맑은 정신과 따뜻한 우정이야말로 숱한 고뇌와 끝없는 방황에도 불구하고 그 먼 길을 함께하는 따뜻한 위로이고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칠흑 같은 깊은 어둠에서 갈 바를 정할 이정표로 삼을 별을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별을 따라 걷는 사람이 혼자만이 아니라 길벗이있는 것이, 또한 얼마나 든든합니까?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을 지새우며 하늘을 읽던 동방박사들이 별을 발견한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하늘을 대하는 감수성과 하나님께서 베 푸신 은혜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구세주 예수께로 나아갔던 것처럼 바른 믿음으로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반(反) 신앙과 비그리스도인보다도 못한 교회로 가득한 이 시대에 새로운 교회를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길벗을 허락하시고 연대와 동행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이 밤이 깊을수록 밝히 빛나는
별입니다. 시대의 악함을 거슬러 가는 그 길이 넓게 뻗은 신장로가 아닌 비포장의 거친 길이더라도, 맑은 신앙으로 그 별을 향해 가다 비틀거릴지라도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 줄 믿습니다. 별을 따라 별과 동행
하는 신앙의 길벗으로, 도심 속 맑은 영성공동체로, 성심기도공동체로 빈들공동체를 지어주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선물인 줄 믿습니다.
예배자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예배 중에 나에게 주시는 또한 공동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를 통째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이렇듯 예배하러 나온 우리와 같이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으로 갔습니다. 당시의 엄혹한 상황을 걱정하며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기 위해 성전으로 갔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이미 유다를 향한 계획을 세우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천상회의의 장엄한 광경을 선지자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웃시야의 죽음
이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 모두 매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의 10번째 왕으로 52년간의 재위를 통해 유래가 없는 유다의 번영을 주도한 왕이었습니다. 앗수르와 애굽의 힘이 약해졌던 기원전 794년부터 그가
죽던 742년까지 긴 통치를 통해서 정치, 경제, 국방 면에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까지 유다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 시킨 왕이었습니다. 에시온 게밸 항구를 장악하고 국제 무역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유다의 산간을 개발해 농업을 크게 일으키고 남부 시리아 동맹을 조직해 앗수르를 위협하였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블레셋을 정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왕이 죽자, 유다의 정치 경제적 발전에 크게 고무되어 있던 백성들의 상실감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과 친척이었습니다. 또한, 궁중 서기관이었기에(역하 26:22) 왕과 수시로 소통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운의 몰락과 쇠퇴에 대한 염려가 그 누구보다 컸을 것입니다.
이것은 눈떠보니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유일한 나라였는데 다시 눈떠보니 후진국이 된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이지 않을까요?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정치, 경제, 외교, 통일, 문화, 언론 등 모든 분야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채상병 특검법 거부로 10번째 거부권을 행사하며 자신이 범죄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상황을 목도 하는 지금 우리들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요? 대통령 한 사람으로 어찌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는 반대로 웃시야 왕이 없으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이냐는 걱정은 두려움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가슴을 치는 기도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의 선정과 정치 경제적인 부유와 사회적 안정에 눈이 가려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전회의를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는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시력을 회복하고(행
9:18) 인생의 대전환을 맞으며 새로운 신앙 운동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회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눈을 가렸던 웃시야 왕이라는 비늘이 벗겨지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게 되었습니다. 왕실 서기의 눈이 아니라 예언자의 눈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비늘이 벗겨진 이사야 선지자가 발견한 것은, 먼저 자신과 공동체의 문제 였습니다. 입술이 부정하고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다는 성찰과 자기 부정이었습니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5)
이는 자신이 부정하다는 인정의 고백이며 회개의 탄식이었습니다. 세리의 기도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소원하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눅18:13) 우리가 하
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가슴을 치며 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이사야 선지자의 자기 부정과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며 드리는 가슴을 치는 기도는 어찌 된 것입니까? 천상회의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목격한 것은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조차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 없도록 두 날개로 눈을 가리고 죄와 허물로 오염된 발을 또 다른 두 날개로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삼성창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함을 노래하는 것입니
다. 그 노래로 건물의 주춧돌이 흔들리듯 장엄하고 영광의 구름으로 가득찬 모습이었습니다.(1-4) 이사야 선지자의 가슴을 치는 기도는 천상회의에서 목격한 하나님의 충만함, 그 충만한 영광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이사야 선지자는 두려움을 넘어 회걔와 자기 부정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목격하고 경험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오늘 우리 삶에 채워지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 삶의 습관과 계획 등 모든것이 하나님께 향해 있고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바램, 목적과 목표가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충만은 헬라어로 “플레로마”(pleorma)입니다. 이는 가득 차 있는 상태만이 아니라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게 하고 그 말씀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존 맥아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충만함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공동 상속자
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어로 축복은 Blessing입니다. 이 단어는 blood(피)라는 단어의 동사형인 bleed(피를 흘리다)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 가능 하다는 것이지요. 이웃을 위해, 또 다른 영혼을 위해, 세상을 위해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복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복 된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고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3:17)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를 이루게 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스랍을 통해 재단 숯불을 입에 대어 죄를 용서해 주신 후 하나님을 대신하여 보낼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러한 부르심의 구조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보통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부정하고 거절합니다. 이어 하나님의 설득에 대하여 순종과 순복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과 다릅니다. 소명의 때에 먼저 이니라고 부정하고 거절하는 다른 선지자들과 다르게 하나님을 만난 후 회개와 용서함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자원하여 제가 여기 있으니, 저를 보내달라고 먼저 요청합니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8)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히네니( הנני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떨기나무에 꺼지지 않는 불로 임하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가 답했던 말입니다.(출3:4) 아브라함에게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때 아브라함이 아무 조건과 전제 없이 대답한 말입니다.(창22:1) 어린 사무엘을 세 번 부르실 때 사무엘이 대답한 말입니다.(삼상3:10) 이 말은 단순히 자신의 소재를 상대에게 알리는 말이 아니라 기꺼이 자기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중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새로운 교회 운동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히데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라고 대답할 준비와 결심이되어 있습니까? 나를 부르시는 그 음성에 “히데니”라고 대답하는 저와 여러분이길 축원합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 충만 하심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고 부르시는 부르심에 ‘히데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대답할 결심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