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퍼스(Karl Jaspers)의 '죄의 문제(Schuldfrage)'가 마침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죄의 문제 - 시민의 정치적 책임>(앨피, 2014). 존경하는 동학이자, 이 시대 탁월한 법철학자이고, 또 과거청산의 법철학에 관한 최고 권위자인 이재승 교수(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가 훌륭하게 번역하고 해제를 붙여주었습니다.
야스퍼스 하면 20세기 최고의 실존철학자로 모르는 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법철학적 근본 문제인 '죄', 즉 도덕적, 법률적 유책성에 대하여 중요한 저서를 내었다는 것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야스퍼스의 실존주의가 기본적으로 개인의 궁극적 자유를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결국은 정치적 자유로 귀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분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욱이 야스퍼스가 나치의 경험을 통하여 그와 같은 각성에 이르렀다는 점, 그리하여 후에 그로 인해 결국 독일을 떠나고 국적마저 포기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는 점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또 한 명의 실존철학의 거인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나치의 민족혁명에 기대를 걸고 초기에 나치에 적극 협력하였던 철학자였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실존철학의 정치성'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 무지한 것입니다.
야스퍼스의 '죄의 문제'가 바로 야스퍼스 자신이 나치 시대 무기력한 지식인으로 일관한 것에 대한 뼈를 깎는 반성, 그리고 나치의 부끄러운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독일 민족 갱생을 위한 철학적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역자 이재승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야스퍼스는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다가올 나치즘 시대에 대한 끔찍한 전만을 내놓고 있을 때에도 야스퍼스는 나치즘 문제는 언급조차 않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는 맹탕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야스퍼스가 나치의 야만을 실감하게 된 것은 그의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나치는 집권하자마자, 정치적 민족적 청소를 개시하였습니다. 1933년 '직업공무원제복구법(Gesetz zur Wiederherstellung des Be- rufsbeamtentums)' 및 일련의 '획일화법(Gleichschaltungsgesetz)'를 선포하여 정치적으로 거슬리는 인사들과 유대인들을 공직에서 대량으로 쫓아냅니다. 주지하듯이 법철학자 한스 켈젠, 구스타브 라드브루흐도 이때에 대학에서 추방됩니다. 한스 켈젠은 유대인이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 헌법의 기초자였고, 구스타브 라드브루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법무부장관으로 사회민주적 법질서의 건설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경우는 1937년 그것도 어떤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부인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해직되었을 따름입니다.
야스퍼스 스스로 나치에 대하여 방관자였음을 고백하고 자책합니다. 더욱이 그의 절친이었던 구스타브 라드브루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이른바 '베버 서클'에서 함께 대학의 정신과 철학의 비전을 함께 나눈 구스타브 라드브루흐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제일 먼저 해직되었다는 사실도 감안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치의 공포, 나치라는 독일 정치의 참극에 대하여는 야스퍼스도 누구 뭇지 않게 절감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인에 대한 야스퍼스의 사랑은 지극한 것이었고, '소울 메이트'로서의 그는 부인의 고통을 같이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야스퍼스 부부는 1945년 나치가 패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강제수용소로 이송될 예정이었습니다. 야스퍼스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에 대한 귀뜸을 받고는 죽음을 예비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직전에 연합군이 하이델베르크로 진주하여 야스퍼스 부부는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 점령당국은 이후 유서깊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재건(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대학이었지만, 동시에 나치의 시대 이데올로기 전파의 근거지가 됩니다)을 위한 위원회에 구스타브 라드브루흐와 야스퍼스를 임명하게 됩니다.
아내의 유대는 야스퍼스가 독일을 떠나는 극적인 결단과 연결됩니다. 야스퍼스는 전후 독일의 정신적 대표자로서 추앙을 받던 중, 1948년 돌연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바젤 대학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은 해방 후 독일의 과거 나치 청산 작업이 만족스럽게 진행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이주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과거청산은 막 시작단계였고 아직 결정적으로 실망할 단계는 아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스퍼스의 결단의 주요한 계기는 바로 아내의 문제였습니다. 전후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이 개시되고, 또 마침내 각지의 참혹은 유대인 학살 만행의 생생한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독일인들은 다시 한 번 충격과 경악에 빠지게 되었고, 특히 유대인들은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내의 정신적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야스퍼스는 더 이상 독일에서 살 수 없다는 아내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독일인으로서 유대인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 한 과정일 수도 있고, 또 아내에 대한 남편으로서의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야스퍼스의 아내는 야스퍼스에게 또 하나의 생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야스퍼스는 평생 병고에 시달렸고, 고독과 우울이 바로 삶 자체였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삶에 빛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내와의 만남이었습니다.그의 아내 게르투르드 마이어는 야스퍼스의 철학 친구 마이어의 누이 동생이었고, 당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야스퍼스는 아내와의 첫 만남 그 광명의 순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1907년 24살의 나이로 게르투르트 마이어와 만났을 때 고독, 우울, 자의식 이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그녀의 오빠와 함께 처음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갔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곧장 삶의 중대한 근본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첫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이해하기 어려운 일치가 있었다"(야스퍼스, 자전적 기록, 쿠르트 잘라문, 카를 야스퍼스, 정영도 역, 지만지, 2011, 30쪽 재인용)
이렇게 부인과의 만남으로 야스퍼스는 인간 실존의 비약을 경험하였고, 그로부터의 야스퍼스의 철학에서 '소통(교제)'는 핵심적 개념이 되었던 것입니다. 야스퍼스는 '독일의 대표자' 대신에 한 개인, 한 실존적 인간으로서의 철학함을 실행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