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하는 이 마음이 신통력의 근원이라 온갖 번뇌 씻어 내고 고통 바다 어서 건너 방편문을 깨치어서 뛰어나게 하옵소서 지금 이 몸 염불하고 부처님께 맹세하니 원하는 일 마음대로 원만성취하여지다
사마는 도량석을 끝낸 뒤에도 종성에 이어 아침 예불까지 내리 마치니, 제 마음에도 크게 홉족하여 그런 발심이 없었다. 그의 나이 스물넷 되던 해에 전북 임실의 중림사에서 머리를 깎고, 그리고 그 곳에서 세 해동안 계운스님에게서 어산(범패)을 배웠다. 초발심으로 염불 공부만큼은 신명을 다해서 배웠다고는 하나, 계운스님이 몸져 눕자 마음이 오락가락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태고사에서 처음 맞은 아침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신심으로 복받치었다. “말보다 행’이라 함은 여염에서나 산문에서나 한결같이 떠받들리는 귀한 덕목일 터였다. 그러나 53년에, 육이오 전쟁 때 인면군 토벌 작전으로 국군에 의해 전소당한 이 곳의 주지 소임을 맡은 뒤로 불사 일을 손수 해오고 있는 도천스님이야말로 정안스님의 눈에는 “진짜진짜진짜 옛날옛날옛날” 참스님으로 보였다. 계행과 삼보정재에 대한 엄정함과, 무엇보다 나태함을 가장 꺼리어 참선과 일이 둘이 아님을 몸으로 보여 주는 분이었다.
도천스님은 경허의 빼어난 세 제자-슈얼, 혜월, 월면-가운데 “북녘(도문지방)의 달’이 되었던 수월스님의 손상좌로서 평생 동안 궂은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스승의 모습을 아흔 가까운 지금까지 몸으로 지켜 오고 있는 분이다. 원효스님이 이 곳을 절터로 잡아놓고는 가사 장삼을 수한 뒤 “세세생생 도인이 날 자리”라고 춤을 추었다는 말이 전해지는 태고사는 도천스님에게는 금강산의 마하연과 비슷하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빨치산과 인민군이 갈마들기로 견디지 못하여 산을 내려간 지 사흘 만에 절이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 원효스님 창건 당시에 만들어졌다는 목불이 불타 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찬란한 옷이 싫으셨던지, 개금을 해도 번번이 떨어져나가 까만색 알몸이던 전단향목불이었다. 내 평생을 바쳐 이 곳을 허다한 도인을 낼 공부 도량으로 만들어 보리라. 도천스님은 이렇게 원력을 세우고 낮에는 불사를 밤에는 참선을 하고 계신 중이었다. 도천스님의 한결같은 행 앞에 그는 비로소 호심好心 출가가 되어 이 곳에 온 이듬해 용주사에서 전강스님을 계사로 수계하였다.
정안스님은 그로부터 삼십 년 동안 천일기도를 이홉 번 회향하고, 지금 99년 음력 2월 l8 일에 끝날 열번째 천일기도 중이다. 한 사문의 이십대에서 오십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한마디로 이르면 그렇다. 삼십 일도, 삼백 일도 아닌, 삼십 년 세월이었다. 그 동안 법회나 방생 등의 행사로 하루나 사나흘 거리로 말고는 사사로운 일로 절을 비운 적은 거의 없다고 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도 천일기도가 열 번아나 이어지게 될 줄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기도하면 안 이루어지는 소원이 없다고, 여기 이 곳에서 착실히 기도 한번 해 보라는 도천스님의 말씀에, 한 삼 년 기도하면 큰스님의 원력이자 또 자신의 원력으로 삼기로 한 태고사 중창불사가 이루어질 줄 알고 들어선 길이었다. 처음에는 조석으로 한두 사간씩만 기도하고, 낮에는 억척으로 일에 매달렸다. 공양주 보살과 처사 한사람만 있었을 뿐, 다른 대중 스님 하나 없었던 이 곳은 일손도 모자랐지만, 지독한 골산骨山이라 땅을 팔수가 없어 그저 돌을 째다가 지게로 져 날라 갖다 메우는 식으로 당우 앉힐 자리를 마련해 나가자니 일이 몇 갑절 힘들었다. 그 때만 해도 “장년”이라 일을 한번 시작하면 도무지 쉴 줄을 모르던 큰스님과 함께 하는 일이었다. 삼 년만 마음을 모으면 어떻게 될 줄 알았던 일은 될성부른 기미도 없어보였고, 두번째 천일기도를 회향하는 날에는 한사람의 참례객도 없어 “부처님도 쓸데없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세번째 기도 때부터는 행자 두사랍에게 일을 맡기고 사분정근으로 하루 여덟 시간씩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삼천대천세계를 주먹으로 확쥐면 먼지가 되어 버릴 것 같던 성질을 죽이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리는 그를 부처님이 어여삐 보셨던지, 중창불사추진위원회도 생기면서 “불티” 같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불사가 시작된 것은 73년도부터였다. 육여사가 비명에 가고, 유류파동이 겹쳤던 해였다.
목수, 목도꾼, 석공 들을 불러모아 한창일을 벌이고 있었으나 뒷감당이 안되어 공사가 중지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높 고 가파른 곳이었던 데다 길 닦기며 자재 운빈용 간어 케이블카 시설 등도 해야 했고, 벽돌이니 나무니 기와 따위의 자재도 빼어나기로 나라 안에서 호가 난 익산의 황등돌, 울산의 청기와 째로 큰스님이 직접 챙겼고, 기와 한 장도 똑똑 두들겨 보아 제대로 된 것을 일일이 가려 쓰는 정성을 들이니, 공사 한번 끝나는 것이 최소한 삼 년이고, 칠 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내지 못하는 식의 철저한 불사였다. 그리하여 양철로 된 초막 법당의 규모였던 것이 76년에 회향된 삼불전 법당을 시작으로, 극락전, 삼성각, 앞으로 선방으로 쓰이게 될 관음전, 지장전이 잇달아 지어졌다. 그러나 백팔계단 불사는 아직 진행중이고, 종각과 천왕문, 일주문 따위의 불사가 아직 남아 있다. 오십 년 불사로 손이 나무갈퀴같이되어 버린 -그러나 지금은 “각시손” 이라고 정안스님은 말했다- 도천스님은 청년보다 몸이 가벼워 오리밖 마을까지 차를 타는 법 없이 거뜬히 걸어 오르내릴 만큼 정정하시니 걱정이 안 되어 보이고, “다 되었다” 싶은 도량으로 불사가 마무리되기까지만 일을 넘기고서라도 기도를 계속할 염을 내고 있는 정안스님의 튼실한 원력이 있으니 그도 염려 놓일 바이다. 그러나 부처님 눈에 어여쁜 바 되고, 산문의 존숭을 자아내는 바 되고, 우바이 우바새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바가 되는 것은 도량의 외형적 완공이 아니라, 삼십 년을 한결같이 기도해 온 정안스님의 마음밭이라 할 것이다. 하루서너 시간에서 많게는 여덟 시간씩 천 일의 네 번을 관음기도로, 그 뒤로는 지장기도로 이어 나가는 가운데, 산도 관리, 제 맞이, 태고사의 법회뿐 아니라, 한때는 진산, 금산, 대전, 서울 등지의 원정 법회까지의 소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바깥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지기까지는 십 년 또는 이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길이 마장이 없고 순탄하기만 했겠는가. 무엇보다 어디로 훨훨 나다니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이즈막에는 신도들과 함께 방생차 찾은 곳도 꽤 되지만, 강원도 선방도 다녀 본 적이 없었기에 이곳저곳 절 구경도 해 보고 싶었고, 다른 스님들도 만나고 싶었다. 수마와 맞서는 일도 큰일이었다. 불사 일을 직접 거들면서 기도를 할 적에는 몸이 너무도 곤하여 목탁만 들면 잠이 쏟아져 정신을 차려면 법당에 고꾸라져 있곤 했다. 불사를 거들 손이 생기면서부터는 하루 여덟 시간씩, 시간을 줄이는 법도 없이 기도했으나, 혈압이 올라 한동안 기도를 쉬기도 했다. 의사의 권유대로 태고사 최고 고봉밥이던 식량도 절반 이상으로 줄였다. 뜻 맞추기 힘든 큰스님 곁을 떠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종단의 큰스님을 모조리 떠올려 보아도 “태고사 큰스님만한 분이 없어서”못 가고 말았다. 은사 스님 섬기는 마음이 어여쁘시다, 외람되어 여쭈었더니, 전생에 필시 부모 지식간이었던 듯 싶었다고, 의지로 눌러앉아 지내온 게 아니라, 떠나려 해도 떠나지지 않은 것이라 했다. 이 산중에는 오래 눌러앉아 살게 하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큰스님은 오십 년째, 정안스님은 삼십 년째, 공양주 보살이나 처사들도 십 년씩, 이십 년씩 예사로 살고 있다. “삼년수하”도 아름답지만, “삼십년수하”도 우러러볼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안스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부처님 가피가 꼭 있어요. 나는 하도 기도를 많이 해 봐서 알아요. 부처님 찾은 만큼 업정이 소멸되고 착한 마음이 싹터요. 자기도 모르게 자비심이 싹이 터요.” 그의 경우만 보더라도, 좋은 스님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 끝에 태고사 큰스님 만났으니 그것도 소원 성취요. 어려운 가운데 중창 불사도 원만히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만일 기도중에 대도를 이루게 해 달라고 빌고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임을 의심 없이 믿고 있다.
태고사는 식당으로 이를 만한 곳이 따로 없었다. 입이 많으면 겨끔내기로 부엌 바닥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꼭 높은 도마같은 앉은뱅이 나무의자에 도리반을 놓고, 깊은 계곡 찬 기운을 장작 아궁이 불로 녹여 가면서. 큰스님을 포함해서 다섯 대중이 살고 있는 태고사는 도무지 사람 기척이 없고, 입구의 처사가 묵는 요사에서는 생나무로 군불을 지피는지 항기로운 나무 냄새만 도량에 가득했다. 극략전 처마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무시무시한 고드름이 낮 동안 골짜기 사이로 숨어든 볕발에 녹다가 다시 얼기 시작하고, 고운 나무 재가 뿌려진 길 위로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문득 눈을 드니, 길다란 원통을 엎어 놓은 듯 솟구쳐 올라 가람을 굽어보고 있는 문수봉 위로, 손톱 같은 초저녁 달이 떠 있었다. 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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