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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과 다라니는 석가모니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이 수행하던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런 진언과 다라니 주문수행을 비구들과 불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주문과 다라니수행을 금하셨습니다.
진언과 다라니가 불교에 들어온 것은
부처님반열반후에 대승논사들이 비불설창작대승경전을 만들고
창작불보살을 만들고 창작불국토를 만들고
그러면서 들여오기 시작했고
밀교에서 특히 유행하였던 것입니다.
진언과 다라니의 내용은
대개 대승논사들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헛개비 창작불보살에 대한 기원이 많습니다.
진언과 다라니 헛개비창작불보살과 헛개비창작불보살에 대한 기원 이러한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정법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대승의 주력(呪力)과 남방의 빠릿따(보호주保護呪)에 대한 고찰
무념스님 글
주력은 주문을 암송하는 수행이다. 주문은 힌두교에서는 ‘만트라’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진언, 다라니’라고 부른다. ‘만트라’를 끊임없이 외우는 주력은 인도의 베다시대부터 널리 행해지는 수행이다. 아마 힌두교뿐만이 아니고 모든 종교에 주문이 있다. 기독교에도 ‘기도주문’이 있고, 우리나라 전통 종교에도 ‘시천주, 태을주'를 비롯해서 많은 주문이 있다. 아마도 무당과 같은 비종교일수록 주문이 더 많을 것이다. 주문은 이제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 문학과 영화에까지 진출했다. 헤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우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난다.
대승불교에도 많은 주문이 있다. 불자들이 주로 외우는 진언은 신묘장구 대다라니, 능엄신주, 광명진언 등이다. 숭배의 대상이 되는 수많은 보살마다 각기 진언이 있다. 관세음보살 본심미묘진언, 지장보살 츰부다라니, 문수보살 법보장 다라니, 보현보살 선다라니 등 무수히 많은 보살의 다라니가 있다. 불공의식, 제사의식 등과 모든 의식에도 무수히 많은 주문이 등장한다. 심지어 변소에 가서 큰일을 볼 때에도 주문이 있으니 모든 행위에는 거기에 맞는 주문을 외워야 할 판이다.
주문을 외우는 수행은 왜 이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일까? 아마도 신비감 때문일 것이다. 주력수행을 권하는 스승들은 과장광고를 서슴없이 해댄다. 주력을 하면 재앙이 물러가고, 재난을 예방하며, 업장이 소멸되고, 복덕을 얻고, 신통이 생기며, 깨달음까지 성취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깨달음이라는 단어까지 나왔다면 광고에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언어가 다 동원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힌두교는 만트라 천국이다. 인도인들은 신비로운 것을 좋아하고 또 허풍이 심한 민족이다. 힌두교인들이 가장 많이 외우는 주문이 가야트리 만트라(Gayatri mantra)라고 한다. 이 만트라는 ‘베다 만트라’ 중에서도 중요한 주문으로, 가야트리는 베다의 어머니, 우주의 어머니이며, 지혜의 여신으로 무지를 없애준다고 하고, 고통과 재앙을 제거되고 해탈을 얻게 하며, 혼란과 의심, 회의주의, 자신감 부족, 방향감각 상실 등을 치료하며 부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불교나 힌두교나 과대광고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요즈음은 만트라(주문)를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파동건강, 파동음악, 파동경영이라는 것으로 소리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의학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시험관에 암세포와 일반세포를 넣고 ‘훔(hum)’이라는 소리를 쏘아주었더니 암세포는 죽고 일반 세포는 더 건강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소리에서 생명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조율하는 힘이 있으며 이 힘을 이용하면 가장 훌륭한 처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문의 소리가 매우 민감한 파동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트라 음악이라는 것도 등장하였다. 만트라 음악이 하나의 장르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지만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불교문구점에 가면 쉽게 cd를 구할 수 있다. 티벳의 묵직한 저음으로 노래하는 ‘옴 마니 파드메 훔’과 대만의 ‘아미타파송’, 남방의 ‘자비송’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염불 tape도 이의 범주에 집어넣을 수 있겠다. 이런 음악이 명상음악이라는 장르로까지 발전하여, 들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게 한다.
주문은 좋은 소리를 내고, 좋은 소리는 좋은 파장을 일으키고, 좋은 파장은 세포를 활성화시킨다. 주문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영향을 미친다.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고 편안하게 해준다. 어머니가 자장가를 부르면 아기는 포근하게 잠이 든다. 어머니의 자장가는 아기를 잠재우는 신비한 주문이다. 농부들이 함께 농부가를 부르며 모내기를 하면 활기가 넘치고 피곤한 줄 모른다. 농부가는 농부들의 힘을 돋우는 신비한 주문이다.
양봉가들이 봄에 분봉(分蜂)을 할 때, 집 밖으로 나온 벌들을 다시 벌통에 쓸어 담으면서 외우는 주문이 있다고 한다.
“니캉내캉 살자. 오순도순 살자.”
그러면 벌들은 고분이 다시 새로운 벌통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 주문은 양봉가들이 필히 알아두어야 할 주문이다.
자, 그러면 과학적으로 경험적으로 밝혀진 것들, 즉 세포를 활성화시키고, 마음을 달래고, 안정을 가져다주며,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이런 효과들 말고, 종교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효력들, 업장소멸, 재난 예방, 복덕 증진, 신통 성취, 깨달음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붓다께서 정말로 이런 신비스런 주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고, 실제로 신비스런 주문을 가르치셨을까?
디가 니까야에는 께왓다 경(D11)에 주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날란다에 사는 께왓다라는 재가불자가 붓다에게 스님들이 신통을 나투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스님들이 신통을 보이면 많은 사람들이 경이로운 기적을 보고 불교로 개종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께왓다의 청을 거절하셨다. 스님들이 신통변화의 기적(神足通)을 보이면 이교도들은 ‘간다리(gandhāri)라는 주문을 외워 신통을 부린다.’라고 말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아는 기적(他心通)을 보이면, 이교도들은 ‘마니까(maṇikā)라는 주문을 외워 그렇게 신통을 보인다.’라고 말할 것이므로, 사람들이 신통을 보고 청정한 믿음을 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재미있는 서커스 구경하듯이 할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불교는 그런 세속적인 흥밋거리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며 오직 깨달음을 추구하는 출세간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경전에는 삼매를 성취하면 신통을 개발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삼매를 성취하지 않고 주문을 외워도 신통을 부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주문을 외워 신통을 부리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며 출세간적인 것이 아니다. 삼매는 마음의 집중력을 기르는 출세간의 길이지만 통찰지를 개발하여 도과를 성취하기 위한 중간 단계의 과정이며 목표가 아니다. 영화속에서 보면 현대는 변종인간(뮤턴트)들이 신통을 부리는 코미디 같은 세상이다.
이 경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주력 수행으로 신통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 셈이다. 하지만 이 경에서 붓다께서는 주문을 외우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붓다의 원음으로 알려진 초기불교 경전에는 주력으로 신통을 부리는 것 말고 재앙을 물리치고, 복덕을 얻고, 업장이 소멸되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언급은 없다.
붓다의 가르침, 즉 담마의 특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지혜로운 자들이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에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주문이라 있을 수 없다. 그럼 남방불교에서 불자들이 지송하는 빠릿따(보호주)는 무엇인가?
남방불교의 빠릿따(paritta, 護呪 또는 護經)는 사실 주문이라기보다는 마음을 닦는 가르침이다. 붓다께서 신비스런 효력을 가진 주문이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고 상윳따 니까야(상응부), 앙굿따라 니까야(증지부), 맛지마 니까야(중부), 숫따니빠따(경집) 등에서 뽑은 경전의 문구이다. 이 경전을 외우면 병이나 재난을 피하는 효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나약한 인간들은 무언가 자신을 보호하는 신비스런 주문을 좋아한다. 그래서 남방의 옛 스승들은 신도들을 위해 붓다의 가르침 중에서 늘 마음에 새기고 외우면 삶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경에서 뽑아 보호주를 만들었다.
빠릿따는 각 나라마다 다르고 사원마다 다른데 미얀마에서는 대체로 11가지 빠릿따를 암송한다. ⓛ 행복경(Maṅgala Sutta, Sn2.4) ② 보배경(Ratana Sutta, 보배경, Sn2.1) ③ 자애경(Metta Sutta, Sn1.8) ④ 칸다 호주(Khandha paritta, A.ii.72) ⑤ 모라 빠릿따(Mora paritta, J159) ⑥ 왓따 경(Vattha Sutta) ⑦ 깃발 호주(Dhajagga paritta S11.3) ⑧ 아따나띠야 경(Aṭānāṭiya Sutta, D32) ⑨ 앙굴리말라 호주(Aṅgulimāla paritta, M86) ⑩ 칠각지 호주(Bojjaṅga paritta) ⑪ 뿟반하 경(Pubbaṇha Sutta, A.i.294)이다.
이들 빠릿따는 알 수 없고 신비스런 고대문자가 아니다. 알 수 없는 언어를 웅얼거리면 신비한 힘이 나오는 신령스런 주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외우면 아무 효력이 없다. 가장 많이 외우는 자애경을 예를 들어보겠다. 아래는 자애경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ditthā vā ye va aditthā, ye va dūre vasanti avidūre
bhūtā va sambhavesi va sabbasattā bhavantu sukhitattā.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이미 생겨났거나 생길 것이거나,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입으로 빨리어를 외운다.(사실 빨리어보다 직접 번역된 언어로 외우면 더 효력이 있다.)
“딧타 와 예 와 아딧타 예 와 두레 와산띠 아위두레
부따 와 삼바웨시 와 삽바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그러면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중생들, 멀거나 가까이 있는 모든 중생들, 태어났거나 태어날 모든 중생들’을 마음으로 심상화하고서 그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연상하며 이 게송을 외우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고 포근해지고 자비로워진다. 이 자비로운 마음의 힘(念力)이 주위로 퍼져나간다. 주위에 사는 중생들, 사람, 짐승, 사나운 맹수일지라도 자비로운 염력의 영향을 받아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지고 자비로워진다. 그러면 그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던 사람이나 짐승들이 도리어 그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비의 힘이며 자신을 보호하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보호하는 보호주문이다. 이 주문만 외우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고, 광기에 찬 저주를 하며 남의 종교를 헐뜯는 종교분쟁도 일어날 수 없다.
행복경, 보배경 등도 마찬가지이다. 모르고 외우면 효력이 없고, 내용을 알고 외우고 실천해야만 영험이 있다. 반대로 대승의 주문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해석이 가능한 주문도 있지만 일부로 해석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암송해야 영험이 있으며 내용을 알게 되면 오히려 효력을 상실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주문의 신비감이 사라질까봐 그러는 것일까? 이것이 현교와 밀교의 차이다.
붓다는 기성종교였던 바라문교의 모든 가르침을 배웠지만 그 종교의 배타성과 신비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합리적인 사유에 기초한 현실주의적인 가르침을 전했다. 바라문교에서 행해지는 제사, 주술, 점성술과 같은 세속적인 행위를 금하고 오직 계ㆍ정ㆍ혜를 닦아 깨달음을 추구하는 출세간의 성스런 길을 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대승은 중생들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원융무애’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붓다의 훈계를 무시하고, 주력이야말로 붓다의 비밀스런 가르침이며, 본마음을 나타내는 진언(本心微妙眞言)이라고 과대광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 삼매를 성취하여 마음에 자비심으로 충만해지면 맹수조차도 감화를 받아 온순해지고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이 긴장하고 경계하고 날카로운 살기를 일으키면 온순한 동물조차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긴장하며 적대감을 드러내며 해치려고 든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자비롭고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지면 상대방도 기 따스한 기운을 느끼고 자비롭고 편안하게 대한다. 내가 분노하고 껄끄럽게 여기고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상대방도 그 날카로운 기운을 느끼고 분노하고 껄끄럽게 여기고 화를 낸다. 그러므로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통해 자비 삼매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덕을 증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고, 불쌍한 사람을 돕고, 성인을 공경하고 공양올리며, 공덕을 쌓는 것이다. 업장을 소멸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고 영원히 업에서 자유로운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아라한과가 힘들다면 적어도 수다원과라도 성취하는 것이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그대를 돌보아 줄 거라고 믿지 말고,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고, 늘 마음챙기면 그것이 최상의 주문이다. 항상 마음챙기는 것이 최상의 주문이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이 그대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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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천수경에는
觀世音菩薩本心微妙六字大明王眞言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
옴 마니반메 훔(3번)
이라고 나옵니다.
이 옴마니반메훔이 관세음보살의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세제불이 모두 이 옴(Om)을 관상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므로"라고하고
옴마니반메훔은 관세음보살의 "본심"이라는데
어이없는 말입니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옴이든 옴마니반메훔이던
힌두교나 바라문교에서 사용하던 진언 다라니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원래 이 옴이라는 진언 다라니의 원래 생산자인 바라문들의 적자인 힌두교에서는 옴을
1). 우주창조신 부라마(Brahma), 2). 파괴와 생산의 신 시바(Shiva) 그리고 3). 유지신(維持神) 비시뉴(Visnu:Vishnu)를 의미한다. 이라고 해설합니다.
이런 힌두교신들의 이론이 어찌하여 "삼세제불이 모두 이 옴(Om)을 관상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둔갑을 한단 말일까요?
어찌하여 바라문 힌두교의 주문과 진언 다라니였던 것이 관세음보살의 본심이란 말일까요? 그러면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던 부처님당시의 바라문들이야 말로 관세음보살의 본심을 알았단 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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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려서부터 진언과 다라니 수행을 많이 했지요.
지금도 위빠사나나 화두수행을 하지 않으면
대개는 염불을 비롯하여.. 진언 다라니 수행을 하지요.
..
진언과 다라니 수행의 공덕은.. 알려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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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충격을 받은것은 어느날
진언과 다라니를 묶어놓은 책을 본때였어요.
전 진언과 다라니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뜨아... 각양각색의 진언들이 있더군요.
... 좋은 말로 동의보감..같이..
배아플땐 무슨 진언.. 머리 아플땐 무슨 진언..하는것처럼
~할때는 무슨 진언.. ~할땐 무슨 다라니... 이런것을 보게 되었지요.
세상에 이렇게 진언과 다라니가 많네.. 무슨 의미일까?
...
제가 이것을 궁금하게 생각하다...
한동안 밀교경전을 탐독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제가 궁금해하던 진언과 다라니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게 하는 글들이 많았어요..
그것들은 경전들이었는데...
그 경전에 우리가 아는 진언과 다라니가 설해져 있어요.
그런데... 읽어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이나.. 타방부처님이나..
보살이 다라니와 진언을 설하는데
거의 모든 다라니 진언을 담은 경들이..
이 진언과 다라니가 최고의 비밀주로
모든 업을 소멸시켜주고... 최상의 진언과 다라니라는 것이었어요.
...
갑자기 이상하더군요. (당시에는 그냥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핸드폰을 파는 전자상가에 들어온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이것이 최고.. 여기가 최고.. 여기가 최최고..
근데...
계속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경전에서... 이것이 최고의 다라니라고하고
저 경전에서... 저것이 최고의 다라니라고... 하더군요...
...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경전에서 그런 것은 대개 부처님의 대기설법이다. 방편설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도 그냥 그런 설명을 떠올리면서 지나갔지요..
...
나중에 근본불교.. 초기불교를 알게돼서..
초기경전.. 근본경전.. 초기불교수행법등을
조금씩 관심을 가지면서
이상하게... 초기경전에서는
진언과 다라니수행에 대한 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아주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들이 진언과 다라니수행을 많이 하고
부처님은 그런 진언과 다라니수행을 많이 알지만
초기승단에서는 이런 진언과 다라니수행을 가르치시지 않았다는것을 알게 됐어요.
특히... 경전 곳곳에서 주문수행에 대하여 하지 말라고 계로 설한것들을 보게 됐지요.
물론 이 주문수행이란것이 바라문들이 하던 진언과 다라니이니 지금 우리 창작불보살에게 하는 진언 다라니 수행과 다를수 있어요.
문제는 신기하게... 부처님은 왜 바라문들이 수행하던 진언과 다라니 수행을 불교수행법으로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그럼 언제 진언과 다라니수행이 불교에 들어왔나? 그리고 대승이나 밀교경전에서 진언과 다라니를 아주 지겹게 가르치시는 약장수같은 석가모니부처님은 그럼 뭘까? 라는 것들이지요...
아래에 제가 생각하는 몇가지입니다. 읽어보세요.
부처님 당시 진언과 다라니는 바라문들의 수행법으로, 부처님은 싫어하시고 위빠사나를 가르치셨다.
대승은 공과 보살행 간화선 이런 좋은 수행법들을 불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선한 의도로 창작불보살들을 만들어 내었어요.
원래 부처님은 다라니같은 것을 가르치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도 석가모니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후대에 선한의도로 창작불보살들이 가르치신 것이지요.
대승경전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이나 다른 불보살들이
엄숙하게 진언과 다라니를 가르치는 장면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이 바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창작불보살들을 내세워 가르치게 하는것입니다.
설정이고 픽션이지요.
불교 후반기에 가면 엄청 많은 진언과 다라니를 따라 배우는데요.
이런 바라문들이 외우던 진언과 다라니를 불교에서 사용하기 위해
마치 부처님이 가르치셧던것처럼 상황을 설정하여
경전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대소승이 없었고
우리들이 많이 접하는 대승의 창작불보살들이란 아예 없었답니다.
그리고 진언과 다라니는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들이 아주 애용하던 수법이었는데
부처님은 이런 진언수행과 다라니수행을 아주 싫어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진언 다라니수행에 눈길도 안주셨다고 하네요.
부처님이 원래 가르치신 것은
사성제 팔정도 계정혜 이러한 것이구요.
수행법으로는 자비관, 아나빠나사띠, 염불수행.. 이런 것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치셧다고 합니다.
특히 위빠사나는 부처님이 직접 성불하신 수행법이라
부처님이 45년동안 항상 이 위빠사나를 중심에 두고 설법하셨답니다.
그러니.. 선한 의도로 창작불보살들이 설한 수행법들을 배우고 닦는 것도 나쁠것이 없지만
실제 석가모니부처님이 진언과 다라니 수행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고
자비관.. 위빠사나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음을 알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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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불제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3가지 진실
우리시대 불제자들은 불교에 입문하기 위하여 몇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대승경전은 비불설창작대승경전이라는 것입니다.
비불설이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 아니라 후대에 대승논사들이 쓴것이란 의미입니다.
창작이란 대승논사들이 여러가지 재미있는 설정들을 하여 소설적인 픽션을 구사하여 쓴것이란 것입니다. 여기에는 창작불보살 창작불국토 성불스토리 서원같은 것뿐만 아니라, 창작불보살들이 부처님직제자들을 조롱하고 능멸하고 그러한 것들도 소설적인 픽션이고 설정이라는 것입니다.
대승이란 이러한 경전들의 핵심이론이 공과 성불 보살행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이론을 기반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4성제 8정도 12연기같은 부처님의 원음을 소승으로 규정하고 능멸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론의 밑바탕에는 역사적인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이 덜 깨달은 법으로 낮추어 보는 대승논사들의 아만심이 자리잡고 잇습니다.
경전이라는 것은 경전인체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님들이 바른 견해를 드러내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논장의 형태로 스님들의 고귀한 견해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스님들은 자신들의 깨우침을 법문이나 책으로 드러내고 있지 함부로 경이라고 이름붙여 말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대승논사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드러내기 위하여 서슴없이 거짓말하는 것을 택하여서 경전을 쓰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인듯, 그리고 창작불보살을 내세워 자신들의 말이 그러한 불보살의 말인듯이 위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중생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지요. 왜냐하면 스님들이 법문을 말씀하시면 그것에 대하여 이런 저런 견해를 말하기도 하고 논장으로 말하면 이런 저런 논의도 벌어지지만 경전으로 위장하고 포장하여 발표해버리면 불제자들이 감히 불설에 대항하고자 하는 마음을 삼가기 때문에 이러한 중생들의 신심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불설이라고 거짓말을 한것입니다.
두번째는 대승의 불보살이 창작불보살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3가지입니다.
먼저 부처님당시에 이러한 대승의 불보살들 창작불보살들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창작불보살들은 대개 대승경전에 나타나는데 대승논사들이 외도의 신들을 수입하여 재가공하여 대승의 불보살로 재창작한 경우가 하나있고, 또 하나는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창작불보살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이러한 창작불보살이 법당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불제자들은 이런 대승논사들이 만들어낸 헛개비창작불보살에게 귀의하고 기도하고 가피를 바라고 친견을 바라며 진언과 다라니를 외우고 염불하고 공양을 드립니다. 역사상 많은 불제자들이 석가모니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염불하는 것보다 이러한 창작불보살에게 기도하고 바라는 것이 많았는데 이러한 것들이 헛개비창작불보살에게 향한 것이었음을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이러한 창작불보살을 조종하여 부처님의 직제자들을 능멸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승논사들은 헛개비창작불보살을 만들어 부처님직제자들을 공격하고 비방하고 능멸하고 조롱하여 영구 칠득이 쪼다 멍청이 취급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대승경전의 수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인데 바로 대승논사들이 가진 부처님직제자들에 대한 이유없는 증오심 분노 성냄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시대 불제자들은 이러한 것을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넷째는 이러한 창작불보살이 대승논사들의 자기종파를 드날리기 위한 이론투쟁의 도구로 사용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승경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여기서 공이 최고다 저기선 유식이 최고다 또 저기선 정토가 최고다 또 저기선 밀교가 여래의 비밀법장이다. 또 저기선 열반묘심을 염화미소로 전해줬다 등등의 말들을 하여 불제자들을 당혹하게 하는데, 보통 이러한 것의 원인은 부처님의 대기설법이라고 얼버무립니다. 그러나 진실은 대승논사들이 자신들의 종파이익을 위해 석가모니부처님과 창작불보살들을 부리면서 자신들의 견해가 최고의 진리다라고 경전에 써 배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시대 불제자들은 이러한 것을 잘 꿰뚫어 알아 창작불보살 심지어는 석가모니부처님까지 자신들 종파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한 이론투쟁의 도구 아바타로 써먹은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부처님의 원음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원음은 아함경과 니까야이며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는 4성제 8정도 12연기법이며
부처님이 깨달음 해탈열반을 가져오는 유일한 수행법으로 말씀하신 것이 위빠사나임을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원음인 아함경은 한역 4아함으로 바르게 읽으시면 좋습니다.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원음인 빠알리니까야는 5니까야로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상윳따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쿳다까니까야가 있으며
이러한 빠알리니까야는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 대림스님이나
팔리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님이
대작불사로 진행하여 한글로 출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원음을 읽으시고 바르게 이해하고 수행하시면
부처님이 가르치신 참된 길을 따라 깨달음과 해탈열반의 길에 들어서게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