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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바람에 가을이 묻어 불어나오는 걸 보니 가을이 오긴 오나 봅니다. 올해는 추석이 동문답사랑 겹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이번 답사는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라 일컫는 우암 선생을 만나러 충북 괴산으로 가시게요. 작년 11월 동문답사때 선생의 생가인 옥천군 구룡촌을 다녀왔습니다. 혈과의 인연이 닿은 건 조상님들의 적덕의 결과겠지요. 우암 선생 본인은 어떤 삶을 살다가셨는지 유택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까지 연상하게 만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열 [宋時烈] - 조선의 주자가 되고 싶었던, 송자(宋子) (인물한국사) 예) 학자(學者)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 必有餘慶)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3대가 적덕해야 혈 하나 얻는다 했으니, 100여년의 세월을 선대후대의 연결고리인 내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네요. 후손을 위해 묵묵히 잘 살다가신 무명의 조상님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이번 추석을 준비할까 합니다.
1. 일시 : 2017년 9월 10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출발
3. 답사지
1) 청안향교 및 사마소(충북 괴산군 청안면 청안면 읍내리 278)
1977년 12월 6일 충북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향교재단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쳐 1979∼1981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다. 대성전인 청안문묘에는 공자를 주향(主享)하고 양옆에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배향하고 동벽에는 최치원 등 10현(賢)을, 서벽에는 설총 등 10현을 종향(從享)하였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고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1733년(영조 9)에 씌어진 편액이 걸려 있다. 고직사(庫直舍)가 있고 외삼문에는 담장을 둘렀고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다.
청안 사마소(충북기념물 제49호)
사마소는 16세기 초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인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젊은 유림(儒林)이, 그 당시 지방자치 기관으로서 수령의 자문기관 노릇을 한 훈구파(勳舊派)의 유향소(留鄕所)에 대항, 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만든 자체 협의기구이다.
대개 각 고을의 관아 근처에 자리잡고 하나의 특수기관처럼 행세하면서, 생원·진사의 친목과 학문, 정치토론 및 교육활동 등을 펼침으로써 각 고을의 교화와 지방 행정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점차 노골적인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유향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수령의 지방통치에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또 노비와 토지를 확보하여 재산을 늘이고, 향리·백성을 함부로 잡아다 형벌을 주는 등의 폐단을 가져왔는데 이런 폐단은 특히 호남·영남 지방에서 심하였다. 결국, 이러한 폐단과 유향소와의 끊임없는 마찰이 문제가 되어, 1603년(선조 36) 류성룡(柳成龍)의 건의로 폐지되었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그 그릇된 습관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2) 송시열 선생 묘(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산7-1)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1657년(효종 8) 효종에게 정유봉사(丁酉封事) 상소를 올려 그의 북벌정책을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효종의 양보를 이끌어 내었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효종의 명을 받아 북벌계획을 담당하였으나 이는 명목상 추진하였을 뿐 실질적인 북벌정책에는 반대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하자 북벌계획은 곧바로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하였다.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두산백과
3) 김항묵(김기웅) 가옥(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 907-10)
괴산 김항묵 고택은 1900년 전후에 지어졌다고(안채는 19C초) 추정되는 건물로 공간구성의 아름다움, 외벽 장식의 화려함, 건축 당시의 모든 구조물의 보존 등 전통적 상류주택의 정수를 보여준다.
바깥채의 중앙에 솟을대문을 두고 좌우로 ㄱ자 건물에 마굿간, 곡간 등 행랑채를 두어 외곽을 구성하였으며, 그 안에 외정을 두어 공간을 만들고 내장(內墻)을 쌓아 안채와 사랑채를 구조하였다. 사랑채에는 ㅗ자 모양으로 안채쪽에 부엌, 사랑방, 꺽어져서 대청, 작은사랑을 두었는데, 큰사랑 동쪽에 누마루를 덧달아서 사랑정원을 감상하도록 되어있다. 사랑마당은 바깥마당보다 한단 높으며 일각대문으로 연결하여 외부와 차단된 별당형식이다. 안채는 ㄷ자 모양이지만 구성방법은 남도식으로 부엌, 안방, 대청, 뒷방을 차례로 놓고, 꺽어져서 마루, 건넌방, 부엌을 두었다.
나머지 건물은 모두 3량 맞배집으로 각종마당을 오밀조밀하게 구성하도록 배치했다. 건물의 각종 벽에 장식된 건축문양은 장소에 따라 대단히 아름다운 무늬를 썼으며 그 질 역시 왕실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출처]괴산군청
4) 각연사(충북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9-1)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신라 법흥왕 때 유일(有一)이 창건하였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유일은 사찰을 짓기 위하여 현재의 칠성면 쌍곡리 사동 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까마귀 떼가 나타나서 대패밥과 나무 부스러기를 물고 날아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까마귀를 따라가니, 조그마한 못에 물고 온 대패밥을 떨어뜨리고는 못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유일이 물속을 들여다보니 한 석불이 있었으므로 깨달은 바 있어 못을 메워 절을 짓고 각연사라 하였다 한다. 그 뒤 이 불상에 지성으로 기도하면 영험이 크다 하여 참배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 초기에는 통일(通一)이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고려 혜종 때 새로 중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1648년(인조 26)과 1655년의 중수를 거쳐서 1899년에는 비로자나불의 개금불사(改金佛事)가 이루어졌다. 그 뒤에도 1927년과 1954년, 1965년, 1975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보물 제433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정인지 선생 묘(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산44)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정익(鄭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을귀(鄭乙貴)이고, 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 증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정흥인(鄭興仁)이다.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정도전(鄭道傳)·권우(權遇)의 문인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이 되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예빈주부(禮賓主簿) ·사헌감찰(司憲監察) ·예조좌랑을 거쳐, 1418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가 되고, 1425년(세종 7) 집현전직제학(直提學)에 승진하였다. 1427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좌필선(左弼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
1430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고, 이듬해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1432년 예문관제학 ·춘추관동지사를 거쳐 이조참판 ·충청도관찰사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439년 형조참판에 기용되어 이듬해 형조판서에 승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였다. 1443년 중추원지사 ·제조를 거쳐, 1445년 우참찬 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撰進)하였다.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田品)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하였고, 뒤에 공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1452년(문종 2)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좌의정이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영의정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58년 공신연(功臣宴)에서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하여 부여(扶餘)에 부처(付處)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고, 1465년 궤장(几杖)을 받았다. 1468년(예종 즉위년)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1470년(성종 1)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었다.
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천문 ·역법(曆法) ·아악 등에 관한 책을 많이 편찬하였다. 문집에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고, 편저로 《고려사(高麗史)》 《역대역법(歷代曆法)》 《역대병요(歷代兵要)》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김 종대 (010 - 4234 - 7074) 실장 하 태현 (010 - 9239 - 2139)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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