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과 그에 대한 이해는 현장에서 뛰는 선수와 일반팬을 갈라놓는 가장 높은 장벽이다. 사인이란 선수?都?'제2의 천성'이며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한 순간도 한눈 팔지 말고 지켜봐야 하는 과제다. 그러나 팬들은 아무리 되풀이해서 얘기해봐도 여전히 막막하기만 한 게 사인이다.
사인의 중요성은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다. 투·포수는 타자를 비켜세운 채 저희들끼리 말없는 쑥덕공론을 벌인다. 타자와 주자는 수비측에 들키지 않게 번트냐 히트앤드런이냐 하는 작전에 관한 약속을 맺는다.
사인은 자기편끼리는 헷갈리지 않도록 간단하면서도 상대방?都?간파당하지 않을 만큼 복잡한 구조를 갖춰야 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투-포수의 사인은 여러가지 변형이 있지만 전통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손가락 하나면 직구, 둘이면 커브, 셋이면 체인지업이 기본이다. 투수가 가진 여러가지 구질도 이런 방식에 따라 정한다.
포수는 코치박스에 나가 있는 1, 3루코치나 1루주자??들키지 않으려고 쪼그리고 앉은 채 사타구니 사이에 손을 넣고 사인을 낸다. 그러나 2루주자는 투수만큼이나 훤히 포수의 사인을 지켜볼 수 있다.
그래서 복합사인이 나오게 된다. 한 가지 예를 소개한다면 포수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가 둘, 셋을 잇달아 냈다고 하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첫번째 하나는 "다음 두 가지 사인 중에서 첫번째 것이 진짜"라는 뜻일 수 있다. 즉 두 개니까 커브를 던지라는 얘기다. 어쩌면 첫번째 또는 세번째 사인이 다음에 내는 사인의 암호를 푸는 '열쇠'일 수도 있다.
아무튼 2루주자가 그 사인과 대여섯 개의 실제 구질을 대조해 보고도 사인의 암호를 풀지 못하도록 복합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가끔은 투수가 사인교환의 기밀유지를 돕기도 한다. 어떤 사인이 나올 때 투수가 "싫다"고 고개를 가로젓기로 미리 짜놓는 것이다. 이는 사인을 훔치려는 주자보다 타자를 겨냥한 심리전으로 이용된다. 투수가 포수의 사인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어 불만을 표시하면 타자는 "무엇이길래 저럴까" 하고 궁금해한다. 그렇게 궁금해하는 자체로 벌써 약간이나마 정신집중이 흐트러진다. 그런데 사실은 투수와 포수 사이에 어떤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게 아니고 그런 척했을 뿐이다.
센터필드에서 망원경을 동원한 사인훔?穗?한 해 걸러 한번 꼴로 말썽을 빚어왔다. 방문팀은 어쩔 도리가 없는 반면 홈팀만 그 방법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행위로 간주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제장?? 없다. (현대식 전광판이 들어서기 전에 재래식 스코어보드를 조작할 당시에는 거기가 상대방의 사인을 훔쳐보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룰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다. 아무리 상대가 고급장비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사인도난을 방지하는 간단한 방법은 함정사인을 만드는 것이다. 또 타자??빈볼을 던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사인도난방지를 위해 구구한 룰이나 규제방안을 정하는 것보다는 적절히 보복하는 것이 차라리 멋진 처방이 된다.
그리고 사인훔?藪〉?나름대로 제약이 있다. 상대방이 이를 역이용하면 엄청난 불이익이 따른다. 즉 타자는 다음에 들어올 공이 직구라는 힌트를 얻었지만 실제로 들어온 게 커브라면 볼쌍사납게 헛스윙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커브가 들어온다는 힌트를 얻었지만 거꾸로 몸쪽 직구가 날아든다면 꼼짝없이 서서 당하고 말 것이다.
투수가 사인을 간파당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타자가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다음에 들어올 공을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면 그때는 공 몇 개를 사인과 다르게 역으로 던지는 것도 간단한 해결책이다. 커브 사인 때 빠른 직구를 던져버리면 상대팀의 스파이작전은 대번에 무너질 것이다.
사인은 아무 때나 바꿀 수 있다. 매일, 매 이닝마다, 또는 투구와 투구 사이에. 또는 상대방??사인을 바꾼다는 것을 시위해 놓고 실제로는 바꾸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포수가 사인 지정을 위해 마운드로 올라간다고 해서 반드시 사인이 바뀐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가는 경우는 단순한 기만이거나, 투포수간 사인에 생긴 오해를 조정하거나, 몇 개의 투구를 한꺼번에 미리 정해 놓을 때, 또는 타자에 대한 무엇을 상의하고 싶을 때다.
그렇다면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지를 실제로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포수인가? 투수인가? 아니면 감독인가?
여기에는 항상 일정한 답변은 있을 수 없다. 최종결정권은 보스인 감독이나 코?? 쥐고 있지만 결정을 내리는 데는 경험이 풍부하고 실전에서 직접 뛰고 있는 선수?鍍? 많은 권한을 준다.
어떤 감독은 벤치에서 투구 사인을 내고 그 사인을 본 포수가 다시 투수??사인으로 전달한다.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모든 감독이 벤치에서 직접 사인을 낸다. 가장 중시할 것은 투수와 포수의 경험, 그리고 그들의 판단력에 대한 믿음이다. 노련하고 안정된 투수가 신참 포수와 배터리를 이뤘다면 투수가 주로 리드해 갈 게 틀림없다. 그 반대라면 포수가 끌어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포수와 투수는 생각하는 방향이 같다. 상대하는 타자, 게임의 상황, 투수의 주무기와 그날 그 주무기의 위력 등을 똑같이 알고 있는 투수와 포수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투수가 최후의 열쇠를 쥐고 있다. 볼을 던지는 사람은 다름아닌 투수 자신이며, '지금 내가 던지려는 공이 최선의 선택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면 말썽이 일어날 소지가 많다.
메이저리그 포수로 활약하다 방송해설자로 변신한 후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조 개러지올라 Joe Garagiola는 얼??전문가들의 짐작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일반적으로 게임을 이기고나면 "포수가 투수리드를 잘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홈런을 맞았을 때는 "포수가 투수리드를 잘못했기 때문에 홈런 맞았다"고 해야 옳으냐는 것이다. 던지는 사람은 투수이므로 책임은 그가 져야 한다. 위대한 투수는 포수도 위대하게 만들며, 허약한 투수는 포수까지도 도매값으로 넘긴다는 결론이다.
샌디 쿠팩스 Sandy Koufax는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춰온 투-포수의 이심전심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은 예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1963년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삼진 15개를 빼앗으며 양키스를 꺾었던 그는 홈구장에서 벌어진 4차전에 다시 등판, 시리즈를 4연승으로 끝내기까지 원아웃만 남겨두고 있었다. 9회초 투아웃에 스코어는 2-1로 리드. 타자는 미키 맨틀 Mickey Mantle이었다. 양키스가 얻은 1점도 맨틀이 앞타석에서 홈런을 터뜨린 덕이었다.
볼카운트는 어느덧 2-0, 포수는 존 로즈보로 John Roseboro였다. 다음은 쿠팩스의 말.
"나는 존이 손가락 두 개를 뻗는 것을 보았다. 커브를 던지라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존의 손가락은 약간 흐느적거렸다. 그것은 슬로커브를 던지라는 뜻이었다. 이런 중대한 순간에 스피드없는 슬로커브를 던진다… 사실 내 생각도 여기서 던질 공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제대로 통하지 않았을 경우, 다시 말해서 맨틀이 또다시 홈런을 칠 경우 당장 동점이 돼버리므로 이론상 그런 볼은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튼 나도 그 공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보로는 머뭇거리면서 그 사인을 냈지만 나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우리는 일심동체가 된 것이다. 존 로즈보로가 걱정하는 것은 혹시 내가 그 구질을 선택한 것을 불안하게 느끼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는 한층더 자신을 갖는 모습이었다."
샌디 쿠팩스가 던진 슬로커브는 사실 다른 투수에 비하면 결코 느리지 않았다. 속도를 줄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리즈 내내 샌디 쿠팩스가 던져낸 폭발적인 커브에 비하면 매우 부드러운 것이었다.
맨틀은 꼼짝없이 쳐다보기만 하고 삼진을 먹었다.
투수가 볼카운트 2-0에서 안타를 내주는 것은 가장 용서받지 못할 과오로 지적돼 왔다. 타자를 요리하기까지 아직 볼 3개의 여유가 있는데도 타자가 ??쉬운 공을 던져 안타를 맞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뜻이다. 앞서 투수편에서 말한 빌 브와젤의 일화를 돌이켜보시기 바란다.
이런 불문율이 생긴 이유는 볼카운트 2-0에서는 정직한 스트라이크를 던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볼카운트가 2-0이라면 타자를 곧바로 아웃시키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즉 타자를 아웃시키겠다고 던진 게 안타가 되고만 것이다. 감독들은, 특히 나이많은 감독들은 그런 상황에서 안타를 내주는 것을 아예 죄악시하고 있다. 그러나 쉽게 타자를 아웃시키면 일언반구도 없다가 안타를 맞으면 투수를 나무라는 것은 분명 일방적이고 불공평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볼카운트 2-0이라면 투수가 자신의 최고무기를 사용하거나 타자의 약점을 이용할 여유가 많은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다가 안타를 허용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투-포수간의 사인은 꼼꼼이 짜여 있다. 간혹 사인이 어긋나 폭투나 패스트볼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다. 다른 사인, 즉 타자와 주자??주는 사인은 미스가 일어나는 빈도가 높다. 고도의 집중력은 기르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데 사인미스가 빚어지는 것은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인은 몸동작으로 주고받는다. 사인이라는 것은 '하느냐 마느냐' 하는 양자택일이므로 (번트를 대느냐 마느냐, 때리느냐 기다리느냐, 뛰느냐 그냥 서 있느냐) 간단한 제스추어만으로도 지시사항을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과 살이 마주 치면 "치지 말고 기다려라"하는 사인이라고 치자. 만약 코??손으로 턱을 만지거나 두손으로 손뼉을 치면 바로 이 사인이 떨어진 것이다. 혹은 손으로 가슴의 글자를 쓰다듬으면 무슨 뜻이라고 미리 특별한 내용을 정해두는 경우도 있다.
사인이 너무 단순해서 상대방이 패턴을 다 알아버리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코치는 사인의 내용을 위장하기 위해 여러가지 동작을 취한다. 또 사인의 예령(豫令)을 만들어 두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양발을 넓게 벌리고 사인을 낼 경우에 한해서 살과 살이 마주쳤을 때 유효가 되고 양발을 모으고 했을 땐 무효라는 식으로 정하기도 한다.
앨빈 다크 Alvin Dark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감독을 맡았을 때 찰리 핀리 Charlie Finley 구단주가 감독을 불러놓고 사인을 모두 알려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다크 감독은 천천히 동작을 취해가면서 한 시간에 걸쳐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오케이, 알았소. 그럼 실전에서 하는 것처럼 해보시오."
다크 감독은 몇가지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핀리 구단주는 아무것도 모르더라는 것이다.
그건 핀리 구단주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사인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수는 사인이 나오지 않을 장면에서도 언제나 코치를 쳐다보고 사인을 받는 시늉을 한다. 그래야만 정작 사인이 나왔을 때 상대방??사인을 해독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좋은 선수는 사인을 빨리, 정확히, 눈에 띄지 않게 받는다. 선수가 코치의 사인전달을 지나??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상대방은 굳이 사인내용을 알지 못해도 "뭔가 작전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고, 그러면 그 내용은 손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작전결정은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언제' 하느냐에 중요성이 있다. 즉 어떤 투구가 들어올 때 번트를 하고, 수비형태가 어떻게 됐을 때가 히트앤드런을 하기에 최적인가를 깊이 생각하고나서 감독은 최종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일단 결정했으면 사인을 재빨리 전달한다.
작전사인을 내는 것만큼 '취소사인'도 중요하다. 갑자기 어떤 변화가 생겼다고 하자. 가령 투수가 스트레치를 시작하기 전에 수비위치 변동이 이뤄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사인을 바꾸거나 원래 사인을 취소할 필요가 있다. 취소사인을 놓치는 것은 원래 사인을 놓치는 것 못지 않은 낭패를 가져온다.
여기서 다시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된다. 말이 청산유수인 개러지올라가 털어놓는 얘기를 들어보자(이것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딕 홀 Dick Hall은 1950년대초 꼴찌팀이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외야수였다. 개러지올라는 이 팀에 몸담고 있었고 감독은 프레드 헤이니 Fred Haney, 사장은 브랜치 리키, Branch Rickey였다. 시골뜨기인 홀은 뒷날(1960년대) 볼티모어에서 구원투수로 성공했지만 이 시점에서는 개러지올라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애송이 야수에 불과했다.
개러지올라가 밝힌 사건의 진상은 이랬다.
헤이니감독은 타석에 들어가려는 홀을 불러놓고 귓속말을 했다.
"너는 살아나가면 무조건 뛰라구. 사인은 이거야. 이렇게 내가 모자챙을 만지면 뛰는 거야. 이렇게… 알았지? 날 잘 봐. 이렇게 하면 뛰는 거다?"
"예, 알았습니다."
마침 홀은 안타를 ??나갔다. 헤이니 감독은 초구에 도루 사인을 냈다.
홀은 뛰지 않았다.
헤이니 감독은 2구째에도 도루 사인을 냈다.
홀은 뛰지 않았다.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다음 타자가 땅볼을 ??말자 스타트가 늦은 홀은 2루에서 병살당하고 말았다.
그 이닝이 끝난 뒤 헤이니 감독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달래며 홀을 불러세웠다.
"너 아까 내가 모자챙 만지는 것 봤어 못봤어?"
"봤습니다."
"그게 무슨 사인인지 알아?"
"네 압니다."
"뛰라는 사인이지?"
"네 그렇습니다."
"내가 그 사인을 내는 거 봤지?"
"네 그렇습니다."
"이 호랑말코같은 새끼야, 그런데 왜 뛰지 않았어?"
"진짜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재미로 지어낸 농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사인미스 하나가 야구사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예가 있었다. 이는 거의 40년이 지난 1989년에 제작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밝혀졌다.
브루클린 다저스는 1950년에 선두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1게임차로 뒤쫓으면서 홈구장 에베츠필드에서 시즌 마지막 게임을 치르게 됐다. 다저스가 이긴다면 공동선두가 돼 3전2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리스가 이기면 그대로 우승이 확정된다. 이 게임은 다저스가 9회말 공격에 나설 때까지 1-1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선발투수 로빈 로버츠 Robin Roberts는 닷새 사이에 무려 3차례나 선발등판하고 있었다. 다저스의 칼 에이브럼스 Cal Abrams가 포볼을 고르고 피 위 리즈 Pee Wee Reese는 안타를 뽑았다. 뒤이어 듀크 스나이더 Duke Snider가 중전안타를 터뜨렸으나 홈으로 뛰어들던 에이브럼스는 홈에 훨씬 못미쳐 태그아웃당했다. 재키 로빈슨은 고의4구로 걸어나가 1사만루. 그러나 칼 푸리요 Cal Furillo는 내야 플라이로, 길 하지스 Gil Hodges는 외야플라이로 각각 물러나 황금찬스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연장 10회초 딕 시슬러 Dick Sisler의 3점홈런 한방으로 챔피언에 올랐다.
에이브럼스의 무모한 홈대시는 브루클린 야구사를 얼룩지게 한 뼈아픈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왜 그는 3루에 멈추지 않았던가? 그리고 다른 것은 몰라도 어깨가 약하기로 소문난 리치 애시번 Richie Ashburn이 어떻게 그런 호송구로 에이브럼스를 잡아낼 수 있었는가?
에이브럼스는 1989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나도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필리스는 2루주자였던 나를 잡으려고 했던지 아니면 그저 2루쪽으로 묶어놓으려고 했는지 좌우간 주자견제 사인을 냈다. 그런데 내야수들은 그 사인을 보지 못했고 중견수 애시번만 사인에 따라 2루를 백업하려고 뛰어들어왔고 투수는 그냥 홈으로 피칭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스나이더가 때린 안타를 애시번이 내야 뒤에서 곧바로 원바운드로 잡아 홈으로 송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3루를 향해 뛸 때 코치는 빨리 홈으로 들어가라고 열심히 손을 휘젓다가 갑자기 괴상한 몸짓을 했다. 그리고 돌리는 손에 힘이 쭉 빠져 보였다. 왜 그랬느냐. 애시번이 당연히 있어야 할 센터 자리에는 없고 내야 바로 뒤에 바짝 다가와 있더라는 것이고 나를 멈추게 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더라는 얘기였다."
사진을 보면 그는 홈에서 무려 3미터 이상 못미쳐 아웃당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가 당초 구상대로 픽오프 플레이를 했더라면 그런 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투수가 홈으로 투구했다 하더라도 유격수와 2루수가 사인을 제대로 읽고 최소한 2루쪽으로 움직이기만 했더라면 에이브럼스는 2루로 귀루하려고 몸을 돌렸을 테고, 스나이더가 그 안타를 쳤을 때 아예 홈은 포기하고 3루에 멈췄을 것이다. 그렇게 됐더라면 무사만루에서 로빈슨의 끝내기 한방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필라델피아는 투수와 내야수들이 사인미스를 저질렀기 때문에 오히려 우승을 차지한 셈이었다.
착각이나 정신적 혼란이 사인미스를 일으키는 주범이지만 육체적 결함도 말썽을 부를 소지가 있다. 라인 듀렌 Ryne Duren은 불같은 강속구를 앞세워 몇년간 전성기를 누린 투수였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나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반장님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혹시 총알같은 강속구가 폭투가 되어 몸으로 날아오면 어떡하나 하고 타자들이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는데 그것은 투수??여간 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 라인의 렌즈가 워낙 두껍다 보니 "마치 코카콜라 병을 썰어 코 위에 걸??다니는 것같다"는 농담과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그러니 듀렌의 타격솜씨가 오죽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투수였으므로 워낙 타력이 형편없고 연습할 기회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볼을 똑똑히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라인이 1964년에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몸담았을 때였다. 동계훈련중 그는 B팀에 끼어 메츠 신인급들과 비공식 연습경기를 치르고 있었는데 필리스의 진 모크 감독은 게임은 보는둥 마는둥하며 기자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v 어느덧 게임은 9회초가 됐고 스코어는 동점이었다. 필라델피아의 선두타자가 출루했고 듀렌은 그 이닝에서 3번째 타자로 나오게 돼 있었다. 두번째 타자도 출루하면 모크 감독은 라인??번트를 시킬 참이었다.
"이봐, 라인. 너 번트 사인 알고 있나?"
대기타석으로 들어가던 라인??모크 감독이 물었다.
"물론 알죠. 그런데 내가 사인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사인이 나가버리는 수도 있었다. 감독이나 코치는 그래서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살과 살이 마주치는 것이 어떤 중요한 내용을 가진 사인이라고 할 때 무심코 뺨을 긁었다가는 엉뚱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괴상한 일화를 들어보겠다. 1950년대초 자이언츠 리오 듀로셔 감독이 피츠버그와 경기를 치를 때였다. 리오는 어느 성깔있는 심판??퇴장당한 뒤 기자실로 들어가 나머지 게임을 지휘했다. 그는 당시 『뉴욕 저널 아메리칸』지의 바니 크레멩코 Barney Kremenko라는 기자 옆에 자리잡았다. 마침 바니 크레멩코는 자이언츠 덕아웃에 있는 선수들이 훤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었다. 리오 듀로셔 감독은 이따금 크레멩코??어떤 동작을 취해 달라고 요청했고 바니는 군말없이 그 주문에 응했다.
게임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자이언츠가 공격을 펼??있을 때 크레멩코는 무심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으악 안돼! 그건 도루 사인이란 말이야!"
다행히도 자이언츠는 그 시즌에 우승을 거두었다.
대화도 사인 못지않게 중요하다. 팀웍을 다지려면 선수와 선수, 선수와 코치 사이에 많은 대화를 갖는 게 필수적이다.
그런 대화는 상대??주의를 환기시킨다. 게임을 치르며 한눈 팔거나 다른 데에 정신이 빠져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뻔히 알고 있는 일이라도 서로 얘기를 나누며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포수는 아웃카운트가 늘어날 때마다 내야수들??몇아웃이라고 외친다. 베이스코치도 주자들??똑같은 것을 알려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익수 어깨가 보통이 아니니까 특히 조심하라"는 주의를 주기도 한다. 내야수끼리는 벌써 똑같은 플레이를 수천번 반복연습을 해놓고서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처리하자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포수는 투수??다음 타자는 어떻게 요리하자고 누누히 설명한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다.
같은 팀 선수끼리 게임중에 대화를 나누는 것은 서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인에 관련된 또하나는 콜플레이다. 내야 높이 플라이가 떠오르면 내야수 중 누군??교통정리를 해야 한다. 번트수비때는 포수가 투수??어느 베이스로 던지라고 지시한다. 포수는 내야 전체의 움직임을 정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중이 빽빽히 들어차 주위가 시끄러울 때는 "내가 잡겠다 I got it."고 외쳐봤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때로는 이 말이 "네가 잡아라"고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충돌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외야수비에는 특수한 요령이 있다. 타구를 잡을 사람만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잡지 않을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자기가 잡겠다고 외친 사람은 아무리 거리가 멀더라도 ?沮?따라가 처리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옆의 동료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내용을 알아들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좌우간 아무 소리나 들렸다 하면 비켜줘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계속 볼을 따라간다.
필자는 1962년 메츠에서 있었던 사건을 즐겨 예로 든다. 거의 은퇴시기에 다다랐던 중견수 리치 애시번은 유격수 엘리오 차콘 Elio Chacon이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기 때문에 혹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애시번은 "내가 잡겠다"는 말을 스페인어로 배워뒀다. 영어로는 "I got it"이지만 스페인어로는 "Yo tengo"인가 뭔가 그랬다. 타구가 좌중간으로 떠올랐을 때 애시번은 앞으로 달려들며 "Yo tengo"라고 외쳤다. 이 말을 알아들은 차콘은 재치있게 옆으로 비켜섰지만 애시번은 좌익수 프랭크 토마스 Frank Thomas와 부딪히고 말았다. 토마스는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구시렁거림도 곧잘 활용된다. 특히 포수가 타자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려 할 때다. 아무것도 아닌 것같은 이런 구시렁거림이 의외로 큰 효과를 보는 수가 있다. 개러지올라는 이런 구시렁거림의 명수였으며 요기 베라 역시 누구?鍍?뒤지지 않는 입심을 자랑했다. 베라는 운동장 안에서는 어디에 있건 잠시도 입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선수생활 말년에 포수에서 좌익수로 포지션을 바꾸자 그는 스탠드의 관중이나 ?楮?불펜에 나가 있는 선수들과도 잡담을 나눌 정도였다.
그런데 요기 베라의 수다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다음에 드는 예를 보면 아무리 사소한 버릇이라도 상대??캐치당하면 큰 낭패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스텡걸 감독이 양키스를 지휘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그동안이 팀은 5차례의 우승을 독차지했다). 스텡걸 감독은 전혀 엉뚱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히트앤드런을 펼쳐 톡톡히 재미를 보곤 했다. 특히 포수이면서도 유난히 발이 빨랐던 요기 베라가 1루에 나갔을 때 히트앤드런을 애용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이 작전이 번번히 노출되면서 역습을 당하곤 했다. 베라가 히트앤드런에 맞춰 뛰기만 하면 상대가 어김없이 알아내서 피치아웃으로 잡아내는 것이었다. 사인을 바꿔보기도 하고 보안?綱?해봤지만 상대방은 귀신이 곡할 정도로 이 작전을 알아차렸다. 스텡걸 감독은 도대체 왜 작전이 노출되는지 곰곰 따져본 끝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베라가 1루에 있을 때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마침내 스텡걸은 그 원인을 알아냈다. 요기는 평소 1루에 나?綬?하면 1루수와 별의별 수다를 다 떨었다. 아내는 잘 있느냐는 둥, 올해 노트르담 미식축구팀 성적은 어떨 것이라는 둥 화제는 끝이 없었다. 그런데 히트앤드런 작전이 떨어지기만 하면 그는 리드에 신경쓰느라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상대방은 베라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히트앤드런 사인이 나왔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베라가 1루에 나가면 언제나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베라가 조잘대는 버릇을 도저히 고치지 못하자 거꾸로 항상 지껄이도록 지시했다.
그러므로 야구장에서는 침묵도 유창한 말 못지않게 기밀을 누설하는 행위가 된다. 야구를 '느려터진' 게임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都?이것이 아주 좋은 반박거리가 될 수 있다. 미식축구나 농구, 아이스하키 등에 비하면 야구는 움직임이 느린 운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체적 활동이 멈춰져 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투구와 투구 사이에 맹목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것도 실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홈팀의 경기를 매일 보면서 선수 개개인의 습성까지 파악해 놓은 팬이라면 대단한 행운아라 할 수 있다. 그는 한 장면도 버리지 않고 여러가지 움직임을 복합적으로 파악해서 야구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