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견디고 부러진 것이다. 긴급 투입된 대체 열차로 새벽에야 청량리역에 도착한 피서객들은 야간 통금이 풀릴
때까지 집단 노숙을 해야 했다. 철도청이 1954년부터 1970년대까지 여름휴가철마다 운행했던 '피서열차'에는
그토록 어마어마한 승객이 몰렸다. '마이카 시대'가 열리기 전이라 기차는 해수욕장으로 데려다주는 가장 편리
한 수단이었지만, 잊지 못할 괴로운 기억을 안기기도 했다. 1969년 8월 초만원 객차들을 매달고 달리던 경춘선
피서열차는 대성리~마석 사이 고빗길을 오르지 못하고 멈췄다. 신기록을 위해 재시도하는 멀리뛰기 선수처럼,
열차는 후진 전진을 세 차례나 반복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다른 열차의 힘을 빌려 움직이느라 3시간 늦게 귀경
한 승객들은 흥분한 끝에 새벽 철도청장 집에 전화를 걸어 거칠게 항의했다(동아일보 1969년 8월 18일자)
땐 정원의 5~6배씩까지도 태우다 보니 땀 냄새 범벅 된 3등 객실은 러시아워의 초만원 시내버스 저리가라였다
참지 못한 일부 승객은 화물칸으로 몰려가 '숨 쉬는 화물'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객실엔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조차 없는 경우도 많았다. 폭염을 피하려고 집을 나선 시민들은 삼복더위보다 훨씬 뜨거운 찜통 열차
맛부터 봐야 했다. 1975년 여름, 한증막 같던 순천발 부산행 피서열차 칸에 있던 50대 여성은 "웃옷이라도
벗을 수 있게 남녀를 구분하는 객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리쳐 승객들을 웃겼다. 이 열차가 가는 동안 객
실에서 유일하게 터진 폭소였다(경향신문 1975년 8월 2일자).
일부 승객은 땀이 줄줄 흐르는 몸을 식혀보려고 위험도 불사했다. 열차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거나 승강구에
매달려 가는 건 약과였다. 간이 좀 큰 사람들은 달리는 열차 지붕에 앉아 가는 모험도 서슴지 않았다. 1950년
대는 물론이고 1970년대 초까지도 피서열차 지붕에 사람들이 올라갔다. "이게 피란열차냐, 피서열차냐"는
한탄이 나왔다. 서늘한 스릴을 맛보며 피서를 했는지 모르지만, 목숨 건 사람들에게 사고가 안 날 리 없었다.
1958년 8월 3일 저녁엔 해운대~송정역 사이를 달리던 피서열차 지붕에 타고 있던 청년 6명이 전선에 걸려
한꺼번에 추락했다. 2명이 중태에 빠지는 큰 사고였다. 승강구에 매달려 가던 사람들이 철로변 시설물과 부딪
쳐 사망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신문 사회면에 났다. 그래도 찜통열차에 실려서라도
바닷물 구경을 한 사람들은 부러움을 샀던 시대였다.
초만원 피서열차 승객들은 눈앞에 곧 펼쳐질 푸른 바다를 그리며 흐르는 비지땀을 꾹 참았다지만, 오늘날 이런
열차를 타야 한다면 아무도 피서를 안 갈 것 같다. 옛 3등 칸엔 좌석의 6배까지 태웠는데, 요즘엔 열차의 입석권
을 좌석의 80%쯤 발매해도 승객들 불만이 높아 철도공사가 입석 비율 한도를 50%로 줄였다고 한다. 지금도
피서철에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생각들을 한다. 하지만 반세기 전 끔찍했던 피서열차와 견주면 차량 정체에
갇히는 일 같은 건 고생 축에도 못 낄 것 같다.
첫댓글 격세지감(隔世之感)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